저우언라이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초대 저우언라이2대 화궈펑3대 자오쯔양
1919년 22살의 청년기. 잘생겼다1920년 23살의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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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27살. 황푸군관학교에서.1930년대 옌안 게릴라 시절. 풍성한 수염을 자랑한다. 미염공 관우?
1946년 49살의 중년기.1954년 57살의 장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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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78살의 노년기. 사망하기 1년 전.

周恩来·周恩來(주은래) / Zhōu Ēnlái (1898년 3월 5일 ~ 1976년 1월 8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중국 인명(人名)이 다 그렇듯 '주은래'와 '저우언라이' 두 호칭 모두가 흔히 쓰인다.

“60여 년의 공직 생활에서 저우언라이보다도 더 강렬한 인상을 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 헨리 키신저

1 개요

청렴과 겸손, 능력을 두루 갖춘 현대판 소하

문화대혁명반달리즘으로부터 (자기권한으로 할 수 있는) 중국을 최대한으로 지켜낸 중국의 은인[1]

20세기 중국의 정치가, 군인, 외교관. 40여년 동안 마오쩌둥을 보좌하고 마오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중국의 혼란을 뒷수습하며 중국공산당의 2인자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북벌, 국공내전, 중일전쟁,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중국 근현대사의 모든 장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그러면서도 한 번도 본격적으로 실각하거나 숙청당한 일이 없는 실로 경이로운 경력의 인물이다. 심지어 마오쩌둥조차도 대약진운동의 실패의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난 일이 있는데 말이다.[2]

2 생애

2.1 초기이력

1898년 3월 5일 중국 장쑤 성 화이안에서 청나라의 가난한 하급 관료 출신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가 과거에 계속 낙방하여 집안은 가난했고, 이후 후사가 없던 친척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이후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를 잃고 가장 가까운 친척이 있는 만주선양에 가서 자라났다.

어릴 때는 고전교육을 받았으나, 12세부터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17세에 고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에서는 고학을 했으며 메이지 대학에 입학했으나, 1919년 일본 제국주의에 실망하여 중국에 돌아와 톈진의 난카이 대학에 입학했다.

난카이 대학 시절 거의 출석하지 않았으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5.4 운동을 주도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고,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난다. 이때 6살 연하인 덩잉차오 여사를 만나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그를 주목하고 그를 영입하려고 했지만, 저우언라이는 당시에는 별로 공산주의에 관심이 없었고, 소련 대신 프랑스 유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프랑스 유학 당시 같은 유학생 신분인 덩샤오핑을 알게 되었다.

2.2 혁명가

당시 마오쩌둥은 외국 경험을 스스로 거부하고 철저한 국내파로 머물렀다. 경제 사정도 있었지만 이 나라도 다 알지 못하는데 무슨 외국이냐는 식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건 김정일이 유학을 가지 않고 김일성대에서 공부한 이유이기도 하다.

마오쩌둥과 달리 프랑스 유학생 출신으로 영어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국제파 인텔리였으며, 대부분의 학업을 장학금을 받아서 해결했던 우등생 타입의 지식인이었다. 공산당이 국민당과 합작을 유지하던 시기, 소련의 지원으로 설립된 황포군관학교의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참고로 당시 교장장제스였으며, 장제스는 저우언라이에 대해 호감을 갖고 그를 국민당 편으로 영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3][4] 개교 당시에는 부주임이었지만 주임을 맡았던 다이지타오(戴季陶. 국민당 우파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가 2달 만에 그만두는 덕에 주임으로 승진했다. 정치부 주임으로 저우는 교내에 공산주의를 널리 퍼뜨린다. 전교생의 30%가 공산당 입당을 자원할 정도였다. 저우언라이는 '중국공산당 황포특별지부'를 설립하고 이들을 조직한다. 이 조직은 후에 '청년군인엽합회'로 확대되는데 저우이췬(周逸群), 쉬지신(許繼愼) 등 훗날 홍군의 지휘관이 되는 인물들도 참여한다. 공산주의의 급속한 확산에 위협을 느낀 국민당도 '쑨원주의학회'를 조직, 반공, 우익 학생들을 결집하는데 이로 인해 교내 좌우의 대립은 극심해졌다.

저우언라이의 아침 식사 메뉴는 평생을 두고 거의 일정(달걀을 풀어 넣은 콩국과, 압맥 빵에 잼과 버터)해서 노년기에 영양부실을 걱정한 담당 의사가 저우언라이에게 아침 식단을 바꿀 것을 건의하자 그는 황포군관학교에 있을 때, 매일 장개석 교장과 아침 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때 먹은 음식이 바로 달걀을 풀어 넣은 콩국과 압맥이었소."라면서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쑨원 사후, 장제스는 반공노선을 걸었다. 다수 역사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장제스는 1926년 "중산함 사건"을 조작하여[5] 황포군관학교에 있던 공산당원을 반란혐의로 모두 추방하거나 체포했다. 저우언라이는 당시 국민당군을 지휘하여 산터우의 군벌을 토벌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포되지는 않았다. 원정에서 돌아와서 이런 사건을 알게된 저우언라이는 이런 장제스의 공산당원 추방에 대해 매우 항의했으나, 장제스는 이를 씹었고 저우언라이는 황포군관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그 이후 당시 외국의 조차지였던 상하이로 와서 지하 혁명운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제1차 국공합작에 뒤이은 북벌 과정에서는, 상하이 일대 노동조합을 지도하여 두 차례에 걸쳐 총파업을 조직, 2차 총파업을 성공시키고 노동자들을 무장하면서 북벌군의 상하이 무혈입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친국민당적인 태도에서 이러한 파업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북벌군이 상하이에 들어오자 규찰대와 노동조합은 장제스를 규탄하는 시위와 유인물을 돌렸고 아예 독립적인 소비에트 정권을 설립하려고 시도했다. 마침 반대파들의 공세에 시달리던 장제스는 공산당의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빌미로 바이충시 휘하의 부대와 청방 깡패들을 동원하여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습격했다. 이때 상하이 내부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공산당원 체포 처형이 벌어져서 90%의 공산당원이 여기서 목숨을 잃었다. 여기서 전 버전도 그렇고 장제스만을 일방적으로 비방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표적인 반장 인사인 왕징웨이가 상하이의 혼란상 때문에 일시적으로 장제스를 지지하고 이후 우한 정부도 국공합작 파기에 동참했을 정도로 공산당이 좀 막나가긴 했다. 이후의 광저우 기의는 공산당의 입지에 결정적 타격을 입히는 계기가 되었다.

앙드레 말로의 실존주의 소설 "인간의 조건"의 주인공은 바로 상하이 쿠데타 당시의 저우언라이를 모델로 한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첸타얼와는 달리 저우언라이는 장제스 암살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우언라이가 모델이 되었다는 주인공은 첸이 아니라 상해혁명의 브레인으로 묘사되는 지조르 기요시. 이건 꽤 큰 떡밥이었는지 생전에 본인에게 직접 질문한 사람도 있다고.

저우언라이는 당시 상하이의 공산당 지하조직 총책이었기 때문에 국민당측의 일급 수배자가 되었다.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면서 간신히 목숨만을 건져 탈출한 뒤 마오쩌둥이 구축하고 있던 장시성의 해방구에 가담하였다.

저우언라이는 매우 피보는 것을 싫어하고, 동지뿐만 아니라 적에게도 매우 온화한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국민당측이 공산당원들을 무차별 체포 처형하고, 전향자들을 이용하여 저인망식으로 나머지 조직원들을 일망타진하자, 지하조직의 총책이었던 저우언라이는 전향자들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전향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도 보복하고 처단하라는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져 있다. 저우언라이가 한평생 거의 유일하게 잔혹했던 장면이지만, 당시 공산당원의 80~90%가 체포-처형되던 상황이었으므로 어쩔수 없었던 측면이 크다.

뒤이은 대장정에도 참가하였으며, 일시적으로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에 오르기도 했으나 자신보다는 마오쩌둥의 카리스마가 당에 보탬이 된다고 여겨 마오쩌둥을 지원, 그가 공산당 내에서의 최고권력을 확립하는 것을 돕는 등 대인배적인 면모를 보였고 그 역시 처절한 권력투쟁 속에서도 공산당의 중심인사 중 한 명이 된다.

장학량이 국공합작과 항일연대를 요구하며 시안의 자신의 기지를 방문한 장제스를 감금하는 서안 사건이 일어나자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저우언라이는 시안으로 달려가 장제스를 구했다. 장학량은 원래 항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장제스를 처형할 것까지 검토했다고 하는데, 저우언라이는 옛 상관이었던 장제스를 잘 구슬려 항일연대를 받아들이게 했다.

저우언라이는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 국민당이 도피한 충칭에 공산당의 연락담당으로 머물렀다. 이는 거의 인질이나 다름 없었지만, 저우언라이는 의연하게 처신했고 심지어는 미국측 인사들에게도 매우 호평을 받았다.

이후 국공내전 과정에서는 야전지휘관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으나 총참모장을 맡았고, 인민해방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공산당이 이전의 행정조직을 인수하여 무리없이 행정이 이루어지도록 힘썼다.

2.3 중국을 떠받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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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 중국 공산당 열병식에 참석한 저우언라이 오른쪽에는 김일성과 마오쩌둥

내전 종료 후에는 총리와 외교부장을 역임하여 사실상 중국 정부의 수반으로 활약, 외교관으로서도 수완을 인정받았다. 그가 1955년 반둥회의에서 제시한 "구동존이(求同存異: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통점을 구함. 중국인들의 영어번역 -To put aside minor differences so as to seek common ground;To seek common ground while reserving differences- 를 참고)"라는 명제는 지금까지도 명언 대접을 받고 있다.

닉슨이 방중했을때는 논어의 첫구절을 인용하여(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뜻을 같이하는 자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이 구절은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도 나왔다) 환영사를 시작한 일화도 있다. 외에도 중국을 방문한 각국 국가원수나 외교 사절들을 위해 만찬을 열 때도 "먹는 데 정신이 팔리면 중요한 주제들을 토의할 수 없다."면서 미리 요리사에게 국수 한 그릇을 청해 배를 채워두고 만찬장으로 향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렇게 외교 일선에 나서 진두지휘를 나서기도 했는데, 유학 중 익힌 그의 어학실력이 여기서 빛을 발휘한다. 영어와 프랑스어, 일본어는 굉장히 유창했고, 독일어, 러시아어까지 말할 정도였다니...이점만 봐도 먼치킨급.

업무량도 엄청나서 그를 걱정하는 측근들에게 "나처럼 역사의 무대에 내던져진 인간의 몸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란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1964년 12월 21일에 개막된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 개막식에서는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 등 4개 분야의 현대화를 국정 목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2년 후 본격화된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고, 그의 사후 집권한 덩샤오핑에 의해 1978년부터 비로소 정책화될 수 있었다.[6]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홍위병들의 병크가 극에 달하자 파괴위험에 몰린 각종 문화유산 보호 및 반동으로 몰릴뻔한 인물들을 비호했다. 마지막 황제 푸이도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문혁의 화를 피했고 막고굴의 고문서 역시 화를 피했다. 그 외 자금성 건축물, 사찰, 문화유적, 고서 등 그의 지시로 간신히 화를 피한게 한두개가 아니다. 중국 사학계와 미술계의 은인인셈. 또 중요한 산업 시설들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사태가 그럭저럭 진정될 즈음에는 경제 재건을 위해 서구 국가들에 원조를 요청하거나 대규모 개발 계획 등의 수주를 의뢰하기도 했다.

사실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과 같은 마오의 여러 병크들은 대부분 초기에 저우언라이가 제동을 걸려고 했다. 그러나 마오는 카리스마로 당을 휘어잡아 저우언라이의 반대를 무력화시켰고, 수에서 밀린 저우언라이는 그때마다 당전체회의에서 자아비판을 여러차례하는 수모를 받았다. 물론 뒤의 막장스러운 결과를 보면 저우언라이가 옳았다.

그런데 저우언라이는 끝까지 반대하다가 날아가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자기 자리가 위험하다 싶으면 마오에게 더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것은 매우 비굴하고 줏대없이도 보이지만, 끝까지 마오에 맞섰다가 숙청이라도 되었다면 마오의 폭주를 말릴 만한 사람이 이젠 없어지는 셈이어서 더 나쁜 결과를 빚을 수 있으니 오히려 그 정도에서 발빼고 뒤로 수습하는게 더 현명한 일일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제 몸보신과 미래 기약을 둘다 한 셈이다.

실권을 쥐고 있던 4인방들에게는 '양놈들의 노예'라는 둥 까였으나 인민들에겐 오히려 더 지지를 받았다. 사인방은 저우언라이를 비판하고 싶었지만 저우언라이를 직접 비판했다가는 역풍이 불까 우려해서 이름이 비슷하게 연상되는 주공단(周公旦)을 대신 깠다고 한다.

3 사망

하지만 도와주는 이도 별로 없이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려다 보니 건강도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고, 방광암 선고를 받은 뒤에는 덩샤오핑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업무 인계에 들어갔다. 문화대혁명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1975년 2월, 사인방은 마지막 승부수로 저우언라이 공격에 나섰다. 물론 실제 표적은 저우언라이 대신 사실상의 총리였던 덩샤오핑이었다.

원래 방광암은 상당히 경과한 후에야 증세가 나타나는 다른 암과는 달리 혈뇨라는 증상이 조기에 나타나기 때문에 치료가 쉬운 암에 속하고, 빨리 치료했다면 아마도 나을 수 있었겠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치료가 늦어졌다. 문제는 여기서 마오가 자신보다 저우언라이가 장수할 것을 우려해 병치료를 방해했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이거야말로 토사구팽의 극치. 실제로 마오의 주치의가 쓴 '모택동의 사생활'이란 책에 보면[7] 마오가 저우의 방광암 치료를 허락해주지 않아 오랜 기간 저우언라이가 고생했고, 아내인 덩잉차오가 사정사정해 겨우 허락을 얻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마오가 건강에 도움이 안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여담으로 저우가 마오에게 침상보고를 할때 무릎을 꿇고 보고를 한점 등 좋게보면 충성심이 높은거요 나쁘게 보면 굴욕적인 얘기도 나온다. 하긴 그정도 처신했으니 마오의 숙청을 피해 장수했던걸지도...다르게 보면 그 정도 굴욕도 감내하면서 마오가 싸지른 병크를 뒷수습한걸지도 모른다.

결국 문화대혁명의 피해가 컸기 때문에 그것을 수습하러 격무를 하느라고 몸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위에 사망 1년전에 찍은 사진도 공식회의에서 찍은 사진인데, 그때 이미 여러번 수술로 말이 아니었지만 저렇게 일반인과 똑같이 업무를 수행하다보니 치료를 받을 시간조차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혈뇨가 나올 때까지 정상업무를 수행했는데, 수차례 수술을 받았음에도 병실에서 계속 집무를 수행할 정도였다. 당연히 건강이 점점 나빠질 수밖에...1976년 1월에 죽은 뒤에는(정확히 8개월 뒤 마오쩌둥도 죽음) 집권층으로부터 생전보다 더 격렬한 비판을 받았지만, 오히려 일반 대중들은 자발적으로 천안문 광장에 모여서 몇 개월 동안이나 계속 추모 집회를 개최했다.

이 때 등장한 구호 중 하나가 "주총리를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지 타도하라!" 또 이때 대놓고 등장한 다른 구호가 "마오는 물러가시오!"였다. 당시 중국 민중들이 문화대혁명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다. 이 후폭풍은 덩샤오핑이 집권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4인방과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를 물론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집회에서도 집권층에 대한 불만이 공개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며 점차 반정부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정부는 4월 5일에 군대를 동원해 집회를 무력으로 진압해 버렸고, 동시에 그 책임을 덩샤오핑에게 떠넘겨 실각시켜 버렸다.(4.5 운동(1차 천안문 사태) 참조.)허나 1년도 안돼 모든 것은 수포로..

장례식에서 추도사는 덩샤오핑이 읽었으며,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덩샤오핑이 비행기 타고 유언대로 중국 각지에 뿌렸다. 참고로 그의 아내 덩잉차오도 죽은 후 유해를 의학해부용으로 사용하고 용도가 다되면 화장하라고 했는데, 이 유언이 생전에 남편과 함께한 약속이라고 누차 측근에게 상기시켰으나 결국 그녀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녀의 유골은 팔보산혁명묘지에 봉안되어 있다.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UN은 이례적으로 조기를 내걸었다. 당시 냉전의 험악한 분위기를 고려할 때 파격적인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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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4 대인배

현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하나로 저우언라이가 꼽힌다. 오래전에 죽었음에도 흔히들 "주총리"라 부를 정도. 그는 청렴하여 평생 개인통장 하나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성격도 원만하고 관계를 조정하는데 뛰어나서 동료들이 저지른 실책들을 훈훈하게 마무리하는 미담들이 많이 들려온다. 심지어는 상대방 측인 장제스의 여자문제를 훈훈하게 마무리해주거나 전 왕조의 유산인 자금성을 지켜주기도 했다.

정치가로서는 평생 마오쩌둥과 함께한 일생일대의 동지였다. 위에도 나왔지만 저우언라이는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을 초기에 모두 반대했고, 이후에도 계속 이런 병크들을 자신의 권한 내에서 또는 마오쩌둥이 노여워 하지 않는 안에서 최대한 완화시키려고 했다.

마오쩌둥의 카리스마가 화려한 언변과 날카로운 필력에 원천을 둔 것이었다면, 저우언라이는 조용하면서도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성품으로 좀처럼 적을 만들지 않는 카리스마를 가졌다. 내전 당시에도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으로부터 폭넓은 존경을 받았으며, 아직까지도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현대 중국 지도자 가운데 한 명. 심지어는 명재상의 대명사인 소하제갈량[8] 비교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이런저런 병크를 들어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지만, 저우언라이를 비판하는 사람은 없다. 비판할 것도 없을텐데 중국 농촌에서는 사당에 신의 한명으로 모실 정도라고 하니 그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마오의 급진적인 잘못을 마오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권한으로 최대한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다만 그 당시 문혁의 피해가 너무 크다보니 생사를 함께한 혁명동지들이 숙청당하는데도 총리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지켜만봤던 그를 일부에선 방관자였다고 까기도 하며 이것이 저우언라이 생애 몇 안되는 비판점이다.

게다가 마오는 꼭 동지를 출당하거나 혹은 벌을 내릴때 저우언라이를 통해 발표하도록 하여 책임을 떠밀었고, 저우언라이는 본의아니게 이런 숙청 명령서에 가장 많이 사인을 하게 되었다. 류사오치의 경우도 출당발표를 저우언라이가 했을 정도. 허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그 역시 숙청의 굴레에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가 없었으면 홍위병은 중국의 모든 문화재를 박살내고 자금성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포용력 있는 2인자 속성의 인물들이 으레 그렇듯 무색무취한 인물이었고, 그 덕에 정치가/관료로서 장수했다는 평도 존재한다. 애초에 마오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들은 가차없이 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런 성격이 아니었으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후술되는 내용들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가 단순한 예스맨 인 것은 또 아니었다. 신생 중국의 권력자 중 한명으로서 다양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합리적인 해결을 보기도 했다. 무색무취의 처신가이면서도 유능한 수완가이기도 했던 것.

대외적으론 대인배적인 면모를 많이 보였다. 중국 공산당이 보통 구 청나라 황족들에게 매우 비판적이고 적대적이었던데 반해 저우언라이는 그들에게 호의적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동정적이었다. 특히 청 황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동생인 애신각라 부걸과 그의 일본인 아내 사가 히로가 같이 중국에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들의 장녀 혜생의 편지를 받고 사가 히로를 중국으로 초청한 사람 또한 저우언라이 총리였다. 중국과 일본은 적대국이었기 때문에 편지를 읽고도 그냥 무시하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인 일이었지만, 그는 관대하게도 한 소녀의 편지를 읽고 청을 들어준 것이다.

옛 순친왕부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최고의 대우를 해준 것도, 문화대혁명 때 부걸의 집이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 고초를 겪자 경비병을 파견하여 그들을 지켜준 것도 모두 저우언라이 총리였다. 정말 대인배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심지어는 일제 전범들에게도 인도주의적 관용을 베풀었다.#

1957년 전국인민대표회의 민족위원회가 주최한 민족공작좌담회에선 "우리는 대민족주의-특히 대한족주의-와 지방민족주의에 모두 반대한다. 반드시 민족 구역의 자치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 민족의 역사발전과 경제발전, 혁명발전에 가장 부합하는 정책이다. 각 민족들은 완벽한 평등을 누리고 그 어떤 차별을 받아서도 안된다."라고 말하며 배타적 민족주의와 편협한 대국 쇼비니즘을 질타하기도 했다. 지금 중국이 하는 짓거리를 본다면 저우언라이가 저승에서 땅을 칠 것이다.(...)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 때는 내몽골 자치구 정부주석을 맡고 있던 우란후를 지켜주기도 하였다.

닉슨 방중을 성사시킨 헨리 키신저는 2012년 출간된 책에서 자신이 살아오며 저우언라이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인물은 없었다고 그를 극찬했다. 닉슨 역시 자신이 방중했을 때 저우가 암에 걸려 언제 죽을지 알수없으니 자신이 살아있을 때 빨리 미중 수교를 성사했으면 한다는 말을 건내는걸 보며 감동받았다고 한다.

하루는 황하가 범람해 현장에 긴급방문했는데 일하던 인부들이 총리의 지시가 어떻게 떨어질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때 저우가 한 말은 "여러분 아무쪼록 의견을 내주세요." 인부들이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주 총리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고 판에 박힌 인사를 하자 총리는 "우리는 모두 일가친척입니다. 환영할 필요는 없습니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문제는 다리를 어떻게 하는가 입니다. 모두 다리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므로 경험도 풍부합니다. 나는 모두의 의견에 따라하고 싶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의 평상시 인품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대목.

북한에서도 인기가 많다. 황장엽의 회상에 따르면 구소련과 중공이 북한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똑같이 원조를 해줘도 소련측은 '이만큼 해줬으니 니들도 알아서 기어라'라는 태도였고, 주은래는 '더 필요한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라고 했다고 한다.

종합해보면 웃음거리가 아닌, 말 그대로의 '대륙인'의 기상이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비판도 존재한다. 이례적으로, 달라이 라마는 차라리 마오는 투박한 시골사람 같은 면투박하신 손가락으로 저 새는 해로운 새다를...이 있는데, 저우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모든 사람들과 적을 안 만드는 것뿐이며 실상은 부드러운 위선자라고 비판한 바 있다. 영미권에서 야유조로 부르는 Chew and Lie라는 별명도 이와 같은 뜻이라 보면 될 것이다. 뭔가 유비에 대한 평을 보는 듯하다.

5 한국과의 관계

저우언라이의 대인배적 풍모는 우리 역사에 대한 언급에서도 잘 드러난다. 발해-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던 중국사회과학원에 그러지 말라고 경고를 했으며, 그것에 대해 북한 파견단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요즘 중국인들의 병적인 국수주의를 보면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이 문제를 다룬 신문기사# 또한 1962년 북한측이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만주 지역에서 발굴조사를 한다고 했을 때 이를 허락하기도 했다.

발해 - 고구려사 이외에도, 6.25 초반 김일성이 승승장구하며 우쭐해있을 때 미국이 개입할 것을 예상하고 김일성에게 이를 경고하나, 근자감에 쩔어있던 김일성은 이를 듣지 않는다. 저우언라이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미리 중공군 26만을 국경에 배치시키고, 한반도 정찰을 명령해 베이징에서 있었던 전략회의에서 맥아더가 상륙한다면 군산이나 원산이 아닌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고 정확히 예측한다. 군사전략적 안목까지 갖췄었다는 소리. (물론 한국 입장에선 통일을 방해한 것이지만...)

이와 관련하여 당시 저우언라이는 9.18 수복 이후 유엔군과 한국군이 계속 북진하자 미국에 여러번 경고했다. "이 전쟁은 내전이므로 남조선군이 홀로 북진하는 것은 무방하나(즉 중국이 개입하지 않겠다),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도발로 간주하겠고, 이 후 모든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여러번 경고했다. 결국 당시 중국의 참전 의사를 경시한 UN군이 그대로 북진하자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란 미명하에 참전을 개시하게 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출병에 앞서 저우언라이는 마오와는 달리 한반도 출병에 반대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국가를 재건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출병하면 많은 자원이 그쪽으로 전용되어 재건이 늦어지고,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북한이 망하더라도 외교를 통해 미국의 중국진공은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요지. 그러나 마오쩌둥과 펑더화이의 강경론이 득세했고, 결국 중공군 참전으로 이어진다. 결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속과 김씨왕조의 성립이지만 중국입장에서야 베이징 코 앞에다 완충지대를 마련했다.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휴전협정을 먼저 제기하였다.

또한 정주영현대자동차의 은인(?)이기도 하다. 1974년 최종 타결된 중국-일본 간 무역협정에서 "남조선이나 타이완과 거래하는 일본기업의 중국 진출을 불허한다"는 내용이 들어간 4가지 원칙(저우 4원칙)을 강력하게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이 때문에 도요타와 합작관계가 끊긴 신진자동차가 도산하면서 현대자동차가 그 반사이익을 누린 것. 현대자동차는 미쓰비시와 합작하려 했으나, 미쓰비시가 이 원칙 때문에 현대와 합작을 포기했다. 지금 와서는 합작을 애걸하던 현대자동차가 미쓰비시보다 커졌으니, 격세지감.

잘 알려지지 않지만,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확장하는 조중변계조약에서 많은 양보(?)를 하여 백두산 전체가 아닌 반만 가져갔다. 함경도까지 자기네땅이라 우기는 중국의 관점에선 넘겨주었다고 해도 어색한 표현은 아니다. 자세한 건 백두산 항목 참조. 그래서 중국에서 한동안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홍위병도 이를 들어 저우언라이를 깠다.

6 개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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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덩잉차오.

여성편력이 복잡한 마오쩌둥에 비하면, 저우언라이는 훈훈한 인물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부터 동지이자 아내인 덩잉차오(邓颖超, 등영초. 1904년.02.04~1992년.11.07)와 백년해로하여 가정적으로도 모범적인 면모를 보여줬다. 나이차는 6살차. 여자 문제로 시끄러운 중국 지도층들 중에서 드문 순정파였다.[9]

물론 이것에는 아내 덩잉차오의 능력도 한몫했다. 한 번은 저우언라이가 다른 귀부인들과 함께 있을 때가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쳐 저우언라이를 작살냈다고 한다.(...) 이후 비슷한 상황에서 이런 구타 행위가 두어 차례 있으니 다음부터는 여자들이 저우언라이 근처에 갈 생각도 안 했다고.(...)

덩잉차오 역시 공산당 창당시기부터 활동한 주요 인사로서 여성운동을 지도하며 주요 요직을 역임했다. 내전 이후 여권 신장과 특히 전족 폐지에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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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8월 8일 함께

이들은 대장정을 함께 완주해낸 부부이기도 하다.

덩잉차오 여사는 투쟁 기간 동안 건강을 해쳐 불임이 되었다. 출산 중 충격으로 인해 사산하고 자신은 불임이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자식을 얻지 못했으나, 조카나 다른 아이들을 대단히 사랑했다고 한다. 특히 내전 과정에서 희생된 혁명열사의 유자녀를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키웠다고 한다. 오랜 국공내전 기간 동안 공산당은 희생된 간부들의 유자녀를 최대한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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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함께

상하이에서 공산당원 부모가 체포, 처형된 후 거지생활을 하던 아이들을 구출 수천리 바깥 공산당 점령지구로 탈출시킨 사례도 있다. 덩잉차오를 중심으로 여성간부들이 이런 고아들을 돌보았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과 그 후손들은 당연히 공산당 체제에 버팀목이 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3세대 지도부의 핵심이던 국무원 총리 리펑(이붕)이다.

근데 리펑은 마찬가지로 콩라인이긴 한데, 존경받는 양아버지와는 달리 중국에서 욕을 바가지로 먹는 인물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사람이 천안문 사태 당시 계엄령을 선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책 결정은 덩샤오핑이나 장쩌민, 양상쿤과 같은 원로들이 했지만 실제 수행은 이 사람이 했다. 당연히 '인민에게 총부리를 든 자' 등과 같은 욕을 들으며 신나게 까였고 지지율도 바닥쳤지만 장쩌민의 비호로 총리직에는 남아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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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8월 함께

사진에서 보면 항상 붙어다니고 있고, 60살 먹은 노부부끼리 서로 연애편지 쓴 거 보면 낮 간지러울 정도로 닭살귀척이 난무한다.(...)

"오 당신의 입술이 그립소. 그대에게 뜨거운 키스를!" 실제 편지 내용이다. 이런 거는 본받자
  1. 문혁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최고권력자 마오쩌둥을 호가호위하는 홍위병의 행패를 저지하는데, 총리로서는 이의 행패를 완전히 막아내기 힘들었다. 문화대혁명은 정부기관이 나선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마오를 따르는 홍위병의 난동이기 때문에, 정부기관이 나서서 행정적으로 통제할수가 없었기 떄문이다. 그래도 문화대혁명떄 파괴를 모면한 많은 것들은 저우언라이가 특별히 지시한 것들이 많았다.
  2. 다만 이건 진짜 쫓겨났다기보다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에 가깝다. 그리고 그 2보 전진은...
  3. 중화민국 측에서도 저우언라이에 대한 평가는 높았다. 대만으로 도망 간 국민당의 한 고위관리는 "그 당시 저우언라이가 우리 측에 있었다면 지금쯤 마오쩌둥이 여기 와 있었을 것이고, 우리가 베이징에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리처드 닉슨의 자서전에 적혀있다.
  4. 사실 이것도 모르는게 장제스는 흔히 항우와 비유된다. 그만큼 장제스는 주변인들을 믿지 않았으며 비록 군벌연합체 수준 이었던 초기의 중화민국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장제스 밑에는 이종인백숭희를 비롯한 유능한 참모들이 꽤 있었고 심지어 독일로 부터 받은 지원의 일환으로 저명한 군인출신인 한스 폰 젝트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이 군사고문으로 있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듣는다 하더라도 어느정도 견제를 피며 최종결정은 자기 뜻 대로 하는 등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대륙에서도 물론이고 국부천대 이후 장제스가 자기 수하의 참모들을 어찌 대했는지 보면 국민당에 선 저우언라이 에 대한 예상이 딱히 긍정적으로 나오진 않는다. 마오쩌둥이 승리한 이유 중 하나는 마오는 사람을 쓰는 데 있어 장제스 보다 유연한 점을 보였다는 것 이다. 통일 이후 흑화 또는 멍청이가 되서 각종 병크를 일으켜서 그렇지..
  5. 장제스 조작설도 있고, 공산당 주도설도 있다. 어쨌든 정치적 위기에 처해있던 장제스가 중산함 사건을 계기로 자신을 견제하던 왕징웨이 같은 국민당내 반장세력과 공산당원을 한번에 날려버린 것은 맞다.
  6. 이 '4대 현대화'는 1980년대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에서 단연 핵심과제로서 오늘날 중국을 세계적 강대국으로 도약시키는 기틀을 마련했고, 지금까지 덩샤오핑의 주요 치적으로 남아있지만, 본래는 저우언라이의 아이디어였다.
  7. 문제점이 여럿 제기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마오쩌둥과 그 당시의 중국에 대한 A급 원사료다.
  8.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제갈량을 전략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의 가장 큰 재능은 내정을 총괄하는 정치력이다. 만년 떠돌이 세력이었던 유비군이 형주와 촉에 정착하고 한중을 손에 넣어 중원을 노릴수있었던 배경에는 제갈량의 정치력이 있었다. 실제로 유비가 죽기 전까지 제갈량은 전선에 나간적이 없고 유비군의 내정을 담당했었다. 조조군의 순욱같은 포지션이었던 것.
  9. 마오쩌둥은 말할 것도 없고, 장쩌민 같은 경우는 자기가 눈에 둔 유부녀 가수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첩으로 삼았다고 한다. 보시라이는 관계 맺은 여자만 백여명에 달한다는 루머성 기사까지 보도됐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