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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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함께 묘사된 모자이크화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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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빈센트 作. 1776 왼쪽 갑주를 입은 노인.
그의 훤칠한 키와 당당한 용모는 가히 영웅의 풍모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관대하고 정의로운 성품으로 그는 백성들의 애정도 잃지 않으면서 병사들의 사랑도 받았다. 병들고 다친 병사는 약과 돈으로 구할 수도 있지만, 사령관의 병문안과 미소로써 더 효율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 ······ 군대에서 그가 술에 취한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고트족이나 반달족의 포로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자를 그에게 바쳤으나 그는 그들의 매력을 멀리 했고, 안토니나의 남편으로서 부부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 그의 무훈을 목격한 사람과 기록한 역사가는 전쟁의 위험 속에서 그가 용감하되 경솔하지 않고, 신중하되 겁먹지 않으며, 상황의 급함에 따라 완급을 조절하는 것을 익히 보았다. 그는 곤란한 역경 속에서도 희망과 활력을 잃지 않고, 순조로운 흐름 속에서도 겸손하고 신중을 기하는 사람이었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제41장

1 개요

505(?)년 ~ 565년. 풀네임은 Flavius Belisarius

동로마의 이순신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장대한 이상을 현실로 그려내보인 명장.

1.1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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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무렵에 일개 사병으로 입대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0년 정도만에 부대장의 지위에 오를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게다가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는데, 니케의 반란 당시 장군들과는 앙숙이라고 할 수 있던 환관들도 그를 지지했고, 527년 장군의 직위에 오르고 3년만에 동고트 전선 총사령관에 오를 정도로 황제 역시 그의 능력은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런 출중한 능력에 어울리게 수많은 전선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가 해내지 못한 유일한 임무는 당시 동로마 근해에서 날뛰는 고래를 잡는 일 정도였고, 이것도 휘하의 실수 때문으로 그의 실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업적 중 손꼽을 만한 일은 역시 대제의 명을 받들어 로마 제국의 고토를 회복한 일이다. 그는 턱 없이 높은 이상에 비해 부실한 지원만을 해주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령을 받들어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에 1만 5천명만 데리고 상륙, 십만 대군을 이끌고 마중나온 반달족의 왕을 단숨에 격파하고 아프리카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였다.

  • 참고로 이탈리아 공략전 당시 벨리사리우스만큼이나 뛰어난 명장 나르세스도 함께 했지만 어째선지 그는 인지도가 한참 모자라다. 이 문서에 단 한차례도 언급되지 않았고 나무 위키에 항목도 없다. 하지만 나르세스가 타기나에 전투나 카실리움 전투에서 보여준 전술적 안목은 벨리사리우스 못지 않았다. 하지만 나르세스는 황제가 확실하게 뒤를 밀어주었다 일단 이런 저평가를 받는 이유는 나르세스가 환관, 그것도 무늬만 환관이 아니라 권력가에서 한 힘 쓰는 대단한 환관이었던 탓도 크고, 나르세스가 투입된 시점이 이미 벨리사리우스가 적은 병력만 가지고 로마까지 수복한 후라 남의 공적에 숟가락 디밀기 식으로 투입된 문제점도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벨리사리우스보다 훨씬 풍부한 지원을 받고 싸운데다가 양자간에 협력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저평가 받는 이유 중 하나. 정말 안습인 건 벨리사리우스에 대해서는 거의 마지막 로마인 수준으로 띄워주던 시오노 나나미희대의 마초빠답게 나르세스가 대활약한 두 전투에 대해서는 연설 따위에 시간 낭비하지 않고 보물을 잔뜩 보여주어 사기를 높였다지나친 의도?된 축약으로 설명하고 끝내버린다(…).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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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재차 이탈리아에 상륙하였는데 당시 지원받은 병력은 7천명으로 아프리카 상륙 당시보다도 적었다. 당시 이탈리아 지방에는 동고트 왕국의 15만 병력에 육박하는 세력이 버티고 있었음을 감안해본다면 그야말로 죽여줍쇼하고 간 정도였으나 전형적인 군인타입이었는지 군말 없이 명을 받들고 이탈리아에 상륙, 그야말로 한줌의 병력으로 연전연승하며 이탈리아의 로마까지 수복하는 성과를 거둔다.까라면 까야지 이후 열린 휴전협상에서 로마 황제를 믿지 못한 동고트족은 벨리사리우스를 믿고 협상에 임해, 왕국 절반과 왕위를 주기로 제안했다. 물론 벨리사리우스는 왕위를 받는 하고 주동자들을 모조리 처형했지만...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질 못했다.[1] 이미 젊어서 황제와 고토수복의 현실성을 두고 입씨름을 벌였고, 로마 정복 이후에도 통치방식을 두고 대판 싸웠다. 덕분에 의심병이 도진 황제는 단 한번도 그에게 제대로 된 병력지원을 해준 일이 없었다. 게다가 동고트 왕국과의 휴전협상에서 그가 왕위를 제안받은 사실은 결정타였다.

이탈리아 원정 종결 뒤, 벨리사리우스는 사산조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되어 활약하고, 두번째 이탈리아 원정도 맡게 되었으나 그의 모반을 두려워한 황제는 거의 병력을 보내주지 않는 지경이었고, 겨우겨우 전선을 유지하던 벨리사리우스는 본인이 지친 탓도 있거니와 지원도 안해준 주제에 오랜 기간 실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비판에 지쳐서 총사령관직을 반납하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에도 불가르족과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562년 횡령혐의를 받아 재산이 몰수되고 면직되었다. 물론 곧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지만...[2]

여인에게 적선 받는 벨리사리우스, 자크 루이 다비드作, 1780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루머가 많은데, 횡령혐의를 받았을 때 황제가 올타꾸나 그의 양눈을 뽑아버려 장님이 되어 구걸로 연명하는 거지로 살다가 죽었다는 얘기도 널리 퍼졌다. 위의 그림은 이 설에 근거한 것. 하지만 실제로는 위의 일로 인해 한차례 면직되었다가 복권한 후 유스티니아누스와 같은 해 병으로 사망했다.

1.2 평가

그가 이룬 정복적 업적만으로 봤을 때 고대 로마와 동로마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한 명이라고 볼수 있다. 이는 정복된 지역을 지키기 위해 떼어놓은 수비병을 제외하면 초기에는 단 1만명의 병력, 후기에는 몇천명의 병력만으로, 그것도 더 이상 아무런 지원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탈리아 반도와 크로아티아 지역,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 지역을 재탈환했기 때문일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게르마니쿠스 장군, 트라야누스, 후의 바실리우스 2세조차 이렇게 적고 부실한 병력 + 후방에서 의심과 질책으로 이중고를 받으면서, 그 정도의 영토와 적군들을 정복하진 못했다.

동로마 제국이 2류 제국으로 폄하당하던 시절에도 벨리사리우스만큼은 로마 제국 역사상 최강이자 고결하고 명예로운 장군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불행한 삶을 산 듯하지만 그나마 다행히도 당대에도 벨리사리우스는 고결한 명장으로 제국군만이 아니라 적군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당대 최고의 미인이자 황후 테오도라의 베프인 안토니나이다. 사실 벨리사리우스가 질투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거의 조선선조만큼 질투가 심했다.)에게 살해당하지 않은 것은 안토니나 덕택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토니나가 바람을 피우고 테오도라가 안토니나의 뒤를 봐주면서 심적으로 심하게 시달리기도 했다.[3]

프로코피우스의 소위 "숨겨진 역사"를 읽어보면 현대의 타블로이드 신문이 생각날 정도로 황당무계한 스캔들이 넘쳐나고 악의에 가득찬 개인적인 공격이 많은데, 당대의 다른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책을 읽다보면 떠오르는 프로코피우스의 이미지는 악의와 성적 열등감에 가득찬 쪼잔한 인간이다[4]
  1. 정확히는 테오도라와.
  2. 이 당시 몰수 당한 재산 때문에 이탈리아 원정에서 병사들에 밀린 급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 고생하게 된다.
  3. 애초에 안토니나는 항상 정숙하지 못하였고 그녀를 믿지 못해 전쟁터에 안토니나를 데리고 다녔었으며 황제보다는 테오도라와의 사이가 더 좋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테오도라가 죽고 난 뒤에 황제와 화해를 하게 된다.
  4. 글재주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