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마니쿠스

Germanicus Julius Caes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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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왕위 계승자였던 인물.

아버지는 후에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의 동복(同腹)동생[1]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이자 안토니우스의 딸인 소 안토니아. 또한 아내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로 게르마니쿠스에게는 6촌 누이인 아그리피나(1번). 동생은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s-1이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는 게르만 족과의 싸움에서 큰 공적을 세워서 "게르마니쿠스"(게르만을 정복한 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가지게 되었으며 게르마니쿠스도 이 이름을 물려받았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본명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였다고 추측한다. 게르마니쿠스의 백부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의 우애가 좋아서 서로의 아들에게 형제의 이름을 붙여줬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과 혈통이 이어지는 게르마니쿠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대신 후계자로 지목한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만들어서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만들고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단지 게르마니쿠스로 이어지는 아우구스투스 혈통의 '중간 징검다리' 정도로 선택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본디부터 미남이었던 데다 말타기를 열심히 해서 약점인 하체를 단련해서 균형잡힌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성품도 겸허하고 남을 배려하는 습성이 몸에 배어있어 뭇사람에게 호감을 주었기에 일찍부터 기대와 신망을 한몸에 모았다. 단순히 정해진 후계자였기에 생긴 현상은 아니었으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일부는 티베리우스 대신 그를 황제로 세우고 싶어했고 게르마니아에 주둔하던 로마의 군단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그들이 대안으로 생각했던 건 당대엔 아직 뚜렷한 전공도 없었던 게르마니쿠스였다.

이후 젊은 게르마니쿠스는 원로원의 결의에 따라 게르마니아로 가서 이들을 진정시키고 사령관이 되었다. 병사들에게 충성과 인기를 얻은 게르마니쿠스는 군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게르마니아를 공격하여 큰 공적을 세웠으며, 게르만 인에게 빼앗긴 3개의 군기 가운데 2개를 되찾았다. 이후 수도 로마에서 개선식을 올렸다.

게르마니쿠스는 소아시아로 임지를 옮겨서 카파도키아 등을 병합했으나, 안티오키아에서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어떤 소설가는 단순한 치기 어린 열정맨으로 치부하지만, 그에게는 분명히 뛰어난 군사적인 능력이 있었으며 또한 협상 능력도 탁월했다. 혈통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매사 공평무사에 적재적소가 신조였던 티베리우스가 그저 게르마니쿠스에게서 군공 세울 기회를 앗아가서 엿먹이려고[2] 그를 대파르티아 전선에 외교 임무를 맡도록 보내고, 또 군통수권까지 모두 부여한 게 절대 아니다.

게르마니쿠스는 소아시아에서도 경우 바른 행동과 겸손한 처신으로 뭇사람의 인기를 끌어모았으며, 이 점이 파르티아 왕실에도 깊은 인상을 주어 게르마니쿠스가 죽었을 때 파르티아 왕이 한동안 사냥을 삼가하면서 조의를 표했을 정도였다.

인기가 많았던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놓고 독살설까지 나돌았으나, 현대에는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는 설이 대세이다. 독살설 배후에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가 있는데, 티베리우스는 조카이자 양자인 게르마니쿠스를 아꼈고 리비아 입장에서도 게르마니쿠스는 친손자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가 죽었을 당시 민중은 그런건 생각도 못할 정도로 크게 흥분해 있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분노한 군중이 쓰레기를 신들의 제단에 쳐박거나 혹은 아예 쳐부수어 그를 죽인 운명에 대한 분노를 애꿎게 표출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그 아들이 칼리굴라지만, 칼리굴라가 폭군으로 단죄된 후에도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경모의 염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최소한 기원후 3세기까지는, 게르마니쿠스가 지휘하던 군단들이 계속 그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가 알렉산드로스보다도 뛰어나다는 타키투스의 평은 과장이 심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소설가에게 저평가 받을 정도는 절대 아니다. 적어도 인성 면에서 알렉산드로스보다 나았던 건[3]사실이다.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도 등장한다.
  1. 모친 리비아가 옥타비우스와 재혼할 당시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티베리우스와는 달리 옥타비우스의 핏줄일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2. 타키투스, 그리고 당대의 일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3. 건전한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에 보다 가까웠다는 게 진실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