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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족의 문서 반달 약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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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의 기원
유럽 중심주의의 피해자
반댓말은 보름달족
1 개요
게르만족의 일파로 일찍이 로마 제국과 접촉하여 2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는 도나우 강 국경에서 로마와 충돌한 적이 있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반달족은 실링기 반달족과 하스딩기 반달족으로 나뉘며 연구에 따르면 하스딩기 반달족은 콘스탄티누스 1세 때 고트족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그가 죽자 판노니아로 밀려와서 도나우 강 안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고트족처럼 스칸디나비아에서 남하한 것으로 추정된다.[1]
5세기 초에 훈족의 침입에 밀려 대이동에 나서 서쪽으로 진군하여 로마의 국경으로 밀려들어 왔으며 반달족의 대부분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2]
406년에는 도나우 강을 건너 판노니아로 밀려들어가 갈리아 북부에서 로마에게 동화되고 있던 프랑크족의 저항을 받아 2만명이 사망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으나 그 해 겨울에 라인강이 얼자 라인강을 넘어 갈리아를 남하하면서 황폐화시키고 아키텐까지 몰려갔다고 한다.
5세기 초에 계속 남하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지금의 스페인인 히스파니아로 들어갔다.[3] 이때 단독으로 로마에 대항할 만한 세력은 못됐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훈족을 피해 달아난 수에비족, 알란족 등과 연합한 상태였다. 초기엔 알란족이 연합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듯하다. 이들은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서로마 제국을 터는 동안 스페인을 접수했지만 알라리크가 죽고 아타울프의 협력을 얻는 데 성공한 서로마가 고트족과 함께 반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결국 이 공격으로 인해 실링 반달족이 몰락, 하스딩기의 일원으로 흡수되고 알란족도 명맥을 잇기 힘들 정도로 타격을 입고 반달족에 흡수되었으며, 주도권은 반달족으로 넘어오게 된다.
반달족의 족장인 군데리크는 알란족의 왕위를 얻은 후 북아프리카를 진출하기로 하였고,[4] 이후 군데리크의 동생이자 왕위를 이은 가이세리크는 북아프리카의 로마 영토인 카르타고를 점령하는 동시에 지중해 연안의 영토를 침공하여 점령한다.
서로마는 훈족의 침입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아틸라가 사망하자 반달족에 대한 대책으로 정략결혼을 추진했지만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발렌티니아누스를 죽이고 황제가 되자 교섭은 결렬되고 455년에 로마에 침공하기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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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년 6월 가이세리크 휘하 북아프리카 반달왕국 군대에 의한 로마 약탈. 약탈은 2주에 걸쳐 자행됐으며, 서로마 제국은 410년 서고트족의 침탈에 이어서 두 번이나 로마가 이민족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2 북아프리카의 반달족
462년까지 북아프리카 전역과 지중해 연안의 섬들을 장악하여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였지만 정치, 종교, 인종적으로 피지배인들을 너무나 억압하였기 때문에 점차 쇠퇴하였으며 결국엔 동로마 제국의 장군인 벨리사리우스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 로마에 침입하여 수많은 약탈과 문명 파괴행위를 저질렀다고 하여 이들에 유래한 반달리즘, 반달 이라는 말이 생겼지만, 사실은 이민족이 로마를 침공했다는 자체에서 로마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기 때문에 생긴 말로 반달족은 문화 파괴행위보다는 조직적으로 로마의 재물을 배로 실어 북아프리카로 옮겼다고 한다.
3 반달리즘?
북아프리카의 반달족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 반달족은 반달리즘을 저지르지 않았다 !
반달리즘이란 단어는, 프랑스혁명 때 자코뱅파의 파괴행위를 반달족에 빗대면서 처음 등장한 단어인데, 학계의 중론은 반달족은 파괴행위를 일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들은 로마의 문화재를 약탈하는데 주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문화재가 훼손되었을 뿐 의도적으로 문화재를 박살내지는 않았다.
5세기의 반달족은 그 스스로도 이미 로마 문화를 받아들여 로마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던 상태였으며, 455년 반달족이 테베레 강을 건너 로마를 점령하자 당시 로마교황이었던 레오1세는 가이세리크를 만나 도시 파괴를 자제할 것을 당부하였고, 반달족은 순응하며 오히려 북아프리카에서는 자기 언어를 포기하고 라틴어를 채택했는가 하면 문학·신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533년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휘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북아프리카에 상륙해 두 주일 만에 수도 카르타고를 함락했고, 1년이 못 되어 반달족의 흔적을 깡그리 없애버렸다. 오히려 이들이 반달리즘을 당해 모든 발자취를 남기지 못한 것이다.반달족이 반달당했다 따라서 문화재산의 파괴행위에 반달리즘이란 이름이 붙은 건 반달족들에게 참 억울할 듯(...)
4 후예?
동로마제국의 카르타고 재정복이후 이들의 민족 정체성은 빠르게 상실되었다. 많은 수가 추방당해, 뿔뿔히 흩어져 다른민족과 동화되고, 일부는 동로마 제국 군대에 편입되기도 하였기 때문. 물론 현재도 튀니지나 알제리에서 적발이 보이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유전적 영향이 있었을 개연성은 있다.사실 나무위키에 있다 카더라
5 관련 항목
- ↑ Ruth H. Sanders, 2010《German : Biography of a Language: Biography of a Language》
- ↑ 다만 북아프리카 등지로 향한 일부는 기독교도에게 혀를 채찍질당하는 굴욕을 겪어 보복으로 기독교도 2천여명의 혀를 잘라버렸다. 흠좀무.
- ↑ 이 사건은 훗날 알안달루스와 안달루시아의 어원이 된다.
- ↑ 스페인은 의외로 로마의 공격에 취약했다. 일단 육로로 이어져있다는 점과 로마의 최전방인 라인강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건 아니라는 점이 크다. 당장 얼마 전에 알란족과 실링기 반달족이 로마군과 서고트족 동맹군에게 얻어맞아 몰락했으니 군데리크는 그걸 아주 잘 알았을 것이다. 반면 북아프리카는 서로마에서 제일 세금이 많이 걷히는 꿀땅이었던데다가, 주변에 위협적인 부족이 없어서(사막 유목민들과 로마인은 의외로 큰 다툼 없이 잘 지냈다.) 전통적으로 로마의 후방지역으로 간주되고 주둔병력도 적었다. 로마 본토와 가깝기는 하지만 당시 로마는 북방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느라 바다건너 북아프리카까지 대군을 투입할만한 여유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충분히 해볼만한 도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