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顒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자는 백구(伯求).
남양군 양향현 사람으로 어려서 낙양에 유학을 갔으며, 곽태, 가표 등에게서 나이가 어렸음에도 나란히 여길 정도로 존중받아 태학 안에서 크게 명성을 얻자 진번, 이응 등이 그를 중히 여겼다.
친구 우위고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전에 중병으로 죽게 되자 그의 부탁을 받자 의기에 감동해 원수를 죽여 우위고의 무덤에 바쳤으며, 168년에 제2차 당고의 금이 일어나자 이응 등과 친해 환관들의 모함을 받았다. 이 때 당고의 금으로 다수가 그 재앙을 만났지만 하옹이 널리 대책을 세워 온전히 면한 이가 매우 많았다고 하며, 성, 이름을 바꾸고 여남으로 도망갔다.
향하는 곳마다 호걸들과 교류하면서 친하게 지내 형주, 예주 일대에 명성이 퍼졌으며, 하옹은 재주가 있는 사람에 대해 감별하는 것을 잘해[1] 교현과 함께 조조를 기이하게 여겨 한나라가 장차 망하면 천하를 안정시킬 자는 이 사람이라 했다. 또한 순욱을 보고 왕좌지재라 평가했으며, 장중경에 대해서는 장차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라 했다.
원소와 함께 호걸로 명성을 날린 원술에 대해서는 꾸밈이 많은 사람이 여겼는데, 원술이 하옹을 원망해 하옹의 세 가지 죄라면서 하옹에 대한 비난을 했지만 도구홍이 그에 대해 변호했으며, 하옹이 흉악한 인간이라 죽일 것이라 하자 종승이 그를 잘 대해줘야 명성을 얻을 것이라 만류했다.
원소가 그를 흠모해 왕래해 사귀었고 당인에 대한 탄압이 다시 일어나 모두 난을 피해 떠났지만 하옹은 몰래 낙양으로 들어가 원소와 함께 계책을 의논했다. 당인에 대한 금고형이 풀려나자 사공부에 벽소되었으며, 매번 삼부의 회의가 열릴 때마다 하옹의 뛰어남을 인정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동탁이 정권을 잡자 장사가 되었지만 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으며, 순상, 왕윤 등과 함께 동탁을 도모하려 했지만 순상이 죽었다. 또다른 계획을 세워 순유, 정태 등과 함께 동탁을 도모하려다가 동탁에게 붙잡히자 이를 원통하게 생각해 근심하다가 사망했다.
훗날 순욱이 상서령을 지내자 하옹의 시신을 순상의 시신 옆에 묻어주었다.- ↑ 소설등의 창작물에서는 관상을 보고 인물을 평가한 것으로 묘사하나, 실제로는 그 인물의 언행을 보고서 평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