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태

1 후한 말의 은사

郭泰
(128 ~ 169)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임종(林宗).

팔고(八顧) 중 한 사람으로 범엽의 후한서에는 범엽의 아버지 이름이 태(泰)였기에 태(太)로 기록되어 있다.

태원 개휴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했고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으며, 어머니는 현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곽태는 그런 낮고 천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면서 거절했으며, 20세에 성고의 굴백언의 학당에 나아가 3년 동안 공부했다. 담론을 잘하고 음율을 좋아했으며, 양식이 부족하면서 옷은 몸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곤궁했지만 학문의 도를 즐겼다.

당시에 낙양으로 유람으로 가 하남윤인 이응이 한 번 보고서 그를 크게 기이하게 여겨 선비를 많이 봤지만 임종과 같은 사람은 없었다라고 칭찬했으며, 이응이 그를 좋은 친구로 사귀자 명망이 경사를 진동했다고 한다. 곽태가 이응과 더불어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넜고 무리들은 이를 바라보고 신선으로 여겼다.

환제 때 도덕을 갖추고 있다고 해 조정에서 불렀지만 내가 천문과 인간 세상을 관찰하기에는 하늘이 버린 바는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라면서 끝내 병을 이유로 사양했으며, 성질이 밝은 것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학문를 연구해 덕을 닦는 선비의 무리들을 권장하면서 가르치기를 좋아했다.

신장은 8척으로 용모는 키가 크고 잘나서 큰 옷에 넓은 띠를 둘렀으며, 두루 군국을 돌아다녔다. 진(陳)국과 양(梁)국 사이에서 길을 가다가 비를 만나자 두건의 한 모퉁이가 기울어졌는데, 이에 당시 사람들이 일부러 두건의 한 쪽을 부러 뜨려서 쓰니 이것을 임종건이라 하면서 그 사모함을 보였다.

어떤 사람이 범방에게 곽태에 대해 물을 때 범방이 곽태는 숨어 살면서도 친척을 버리지 않고 성품은 곧아도 풍속을 끊지 않으며, 천자는 신하, 제후는 벗으로 삼지 못했다고 얘기했다. 곽태는 말을 매우 신중하게 해 사람들을 구별해 감식했지만 위태로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관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했어도 상하지 않았으며, 당고의 금이 일어날 때 많은 명사들이 해를 입었지만 곽태는 원굉과 함께 화를 면했다.

문을 닫고 글을 가르치니 제자들이 천 명에 이르렀으며, 그가 죽자 사방의 선비 천여 명이 모여서 장례를 치뤘다. 뜻을 같이 한 자들이 함께 돌을 깎아서 비석을 세웠는데, 채옹이 곽태를 위해서 비석을 만들면서 "내가 남을 위해 묘지명을 지을 적에는 일찍이 내심 부끄러운 얼굴을 짓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곽태의 비송을 지을 적에는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곽태가 칭찬하고 천거한 사람들은 모두 거울에 비춘 것처럼 효험이 나타났으며, 훗날 호사가들은 덧붙이기도 하면서 늘리기도 해 많은 언사가 화려하고 황당해 관상술에 관한 책과 유사했다고 한다.

세설신어에는 원굉, 황헌을 방문한 일화와 여관을 머문 것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

  • 원굉과 황헌을 방문한 일화

원굉을 방문할 때는 잠깐 들렀지만 황헌의 집을 방문할 때 다음날까지 머무른 얘기가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묻자 곽태는 황헌의 넓고 넓음은 마치 만 이랑이나 되는 못과 같아 이를 맑게 하려 해도 깨끗해지지 않고 흔들어도 흐려지지 않아 그의 기량은 깊고도 넓어서 측량하기 어렵다고 했다.

  • 여관을 머문 것에 관한 일화

곽태는 여행하면서 여관을 머물 때마다 자신이 직접 청소를 했는데, 다음날 그가 떠나면 뒷사람이 와서 여기는 어제 곽유도(有道)[1]가 어제 묵었던 곳이 틀림없다고 얘기했다.

2 후한 말의 황건적

郭太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후한서에는 곽태(郭太), 자치통감에는 곽대(郭大)로 기록되어 있다.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지만 1년도 안돼서 진압되었는데, 황건적 당시의 활동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황건적의 난 이후에는 그 잔당으로 남아 188년에 서하군의 백파곡에서 일어나 태원과 하동을 약탈했다.

189년에는 영제가 붕어한 것으로 인해 천하가 어지러운 것을 이용한 어부라가 합세해서 힘을 합쳐 인근 군현을 침입했다고 하며, 곽태가 백파곡에서 봉기한 것으로 인해 백파적이라 불렸으며, 태원과 하동이 약탈된 것으로 인해 백성들이 삼보 지방으로 흘러들어갔고 동탁우보를 보내서 백파적을 공격했지만 물리치지 못했다.

자치통감의 곽대라는 이름이 원소에게 격파당한 흑산적 두령 중 하나인 곽대현과 비슷하기 때문에 동일인물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지만, 백파적과 흑산적은 활동영역이 별로 안 겹친다.
  1. 도덕을 갖춘 사람으로 천거되어 불렸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