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仲景
1 소개
본명은 기(機 혹은 玑)라고 하며, 남양군 열양읍 출신이라 한다. 출생 연도는 150~154년 사이, 사망은 215~219년으로 추정[1]되며, 호는 중경으로 상한론의 교신저자(?)다. 동 시대의 인물인 화타, 동봉과 함께 건안삼신의라 불린다.
벼슬은 효렴을 거쳐 장사태수에 이르렀다고 하나 (나름) 정사인 후한서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그가 장사태수를 해먹었다고 해 장장사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일부 학설에 따르면 손견 사망 이후, 장사태수를 하다 유표에게 반란을 일으킨 張羨(장선)을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으나 장선이라는 사람이 의술에 능했다는 기록이 없어 학계에서는 논란이 분분. 게다가 생몰년도 맞지 않는데, 장선은 서력 200년에 병으로 사망했지만 장중경은 그 이후까지 생존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라는 의견이 대세이며, 이 경우 장중경은 장선이 죽고 그 아들이 유표에게 항복한 뒤에 장사 태수가 되었다가 조조에 의해 한현이 장사 태수로 임명될 때 갈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한현의 전임 태수라고 보면 될 듯. 음…
다만 그의 관직 수행 여부에 상관없이, 바로 다음 세대의 의학가인 황보밀이 침구갑을경의 서문에 장중경의 일화에 대해 언급하는 것[2]을 볼 때 존재 자체는 확실했던 것 같고, 아마도 벼슬을 한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젊은 시절부터 유명했던 의술은 마을의 의사였던 장백조라는 사람으로부터 배웠다고 하며, 그 계기는 편작의 이야기를 알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그의 업적이라면 역시 상한론의 원전인 상한잡병론의 저술일 터이다. 당시 의술은 침구가 주류이고 탕약은 부차적인 것으로서 탕약의 복용에 대해 정리된 학설이 없어 약초의 효능 정도만이 이리저리 흘러다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민간요법은 있는데 의료로서 통합이 되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탕약을 침구와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린 것이 바로 장중경이다. 따지고 보면 시대도 황제내경에서 얼마 되지도 않고, 황제내경은 워낙 학설의 짜집기가 심하고 후대에 개찬된 것도 많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동급의 원전을 써낸 셈.
그의 저서로는 상한잡병론 이외에도 요부인방, 오장론, 구치론, 황소약방, 변상한, 요상한신험방, 평병요방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아무튼 화타와 동시대의 또 다른 의학의 별이지만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데, 이게 다 삼국지연의에 안 나왔기 때문으로 같은 이유로 황보밀과 맥결의 저자인 그의 제자 왕숙화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2 관련 사료
- ↑ 중국에서는 대개 150~219로 추정
- ↑ 같이 근무하던 20대의 시중 왕찬의 죽음을 예언한 이야기. 근데 복용하라고 준 것이 오석탕이다? 어째 오석산과 이름이 같지만 한의학에서 산제와 탕제는 이름이 비슷하더라도 전혀 다른 처방인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상한잡병론에 나오는 사역산과 사역탕. 하나는 시호, 작약, 지실, 감초로 구성된 처방이고, 다른 하나는 건강, 부자, 감초로 구성되어 효능이 전혀 다르다. 참고로 오석탕은 상한잡병론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오석산의 구성 약재도 나오지 않는다. (적석지가 나오지만 인체에 무해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