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한 말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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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 | ||
순욱 | 순유 | 가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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荀彧
(163년 ~ 212년)
후한 말의 인물. 조조 휘하의 모사. 자는 문약(文若). 예주 영천군 영음현 사람.
후한서 순숙전에 따르면 조부는 순자의 11대손인 순숙, 아버지는 순곤, 형제는 순심, 연상의 7촌 조카는 순유.
1.1 정사
1.1.1 초기 생애
전략에 따르면 중상시 당형(唐衡)이 자신의 딸을 여남 사람 부공명(傅公明)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지만 공명이 승낙을 하지 않자 순욱에게 보내려고 했다. 순욱의 아버지 순곤은 당형의 권세를 생각하여 순욱에게 당형의 딸을 맞이하게 하였다.[1] 사람들은 순욱이 그 사실을 속였다고 한다.[2]
순욱이 어릴 때 남양의 하옹이 순욱을 기이하게 여기며 이렇게 말했다.[3]
왕을 보좌할 재능(왕좌지재)를 가지고 있구나!
어림에 따르면 공숭은 젊어서 스무 살이 안 되었을 때, 순욱과 함께 태학에서 유학했다.
1.1.2 조조에게 임관
종요전 주석 후한서에 따르면 음수는 영천태수로 있을 때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했다. 그 가운데 오관연 장중, 찰공조 종요, 주부 순욱, 주기연 장례, 적조연 두우, 효렴 순유, 계리 곽도 등은 모두 국가의 동량이 되었다.
189년, 효렴으로 천거되어 수궁령에 배수되었다. 동탁의 난 때, 외직으로 나가 보필하는 관리가 되길 구하였다.[5] 항보 현령에 제수되었으나, 마침내 관직으로 버리고 돌아와서, 고향의 부로들에게 말했다.
영천은 4면에서 전쟁에 벌어질 수 있는 땅인데, 천하에 변란이 있어 항상 군대의 충돌이 생길 것이니, 마땅히 이곳을 떠나 오래 머무르지 마십시오.
고향 사람들이 많이 땅을 생각해 주저하며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기주목으로 같은 군 사람인 한복이 기병을 보내 맞이하려 하게 되자, 따르는 자가 없으니, 순욱만 그의 종족들을 데리고 기주에 이르렀다. 원소가 이미 한복의 지위를 박탈하였으나, 순욱은 중요하고 지위가 높은 손님의 예로 대우했다. 순욱의 형제 순심 및 같은 군 사람인 신평, 곽도는 원소에게 임명되었다. 순욱은 원소가 끝내 대사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때 조조가 분무장군이 되어 동군에 있었는데, 191년, 순욱은 원소를 버리고 조조를 따랐다.[6] 조조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나의 자방(장량)이로다.
그리고는 사마로 삼으니, 이 때 나이가 29세였다.
이 때에, 동탁의 위세가 천하를 능멸하고 있었는데, 조조가 순욱에게 묻자 순욱이 말했다.
동탁의 포학이 이미 극심하여 필히 변란으로 끝날 것이니 할만 한 것이 없습니다.
동탁이 이각 등을 보내니 관동으로 나가 가는 곳마다 노략질하고 영천, 진류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고향 사람들 중 머물러 있던 자들은 많이 살해되고 노략질 당했다.
다음 해, 조조가 연주목을 맡고, 후에 진동장군이 되었는데, 순욱을 항상 사마로써 종군케 했다.[7]
1.1.3 서주 대학살
194년, 조조가 도겸을 정벌하면서 순욱을 머물러 남은 일을 맡겼다.
조만전에 따르면 수도에서 동탁의 난을 만난 이래로, 백성들이 동쪽으로 흘러 이주해 가 팽성 사이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조조가 오는 것을 만나자, 사수에서 남녀 수만 명을 구덩이 파 묻어 죽이니, 강물이 흐르지 않을 지경이었다. 도겸이 군사를 거느리고 무원에 주둔하니 조조가 진격할 수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사수 남쪽에서부터 취려, 저릉, 하구의 여러 현을 공격하고 모두 도륙했다. 닭과 개도 모두 없어지고, 텅빈 읍에는 다시 지나가는 행인도 없었다.
1.1.4 복양 전투
장막과 진궁이 연주로써 배반하여 몰래 여포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포가 이르자, 장막이 이에 유익(劉翊)을 시켜 순욱에게 알렸다.
여장군은 조사군(조조)이 도겸을 치는 것을 도우러 왔으니, 마땅히 빨리 군사와 식량을 주시오.
사람들이 다 의심스러워 했다.
순욱은 장막이 반란을 일으켰음을 알고, 곧 병사를 이끌고 대비를 했으며, 동군태수 하후돈을 빨리 불러 들였지만, 연주의 여러 성이 모두 여포에게 호응했다. 이때 조조의 모든 군대는 도겸을 공격하고, 남겨서 수비하던 병사는 적었고, 감독하던 장수와 큰 관리들이 장막, 진궁과 많이 남몰래 서로 통하여 공모하였다. 하후돈이 도착하자, 그날 밤에 모반하였던 자 수십인을 주살하니, 군대가 이내 평정되었다.
예주자사 곽공이 군사 수만을 이끌고 성 아래에 이르르니, 혹자들은 곽공이 여포와 같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말하니, 군사들이 심히 두려워 했다. 곽공이 순욱을 보려 하니 순욱이 가려고 했다. 하후돈 등이 말했다.
그대는 한 주의 중요한 인물로, 가면 반드시 위험하게 될 것이니 가면 안됩니다.
순욱이 말했다.
곽공이 장막 등과 본래부터 결탁한 것은 아니며, 지금 빨리 온 것은 그 계책이 반드시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요.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 그를 설득하면, 중립을 하게 할 수 있으니, 만약 먼저 의심한다면, 저들은 장차 노하여 계책을 완성할 것이오.
곽공이 순욱을 만나보내는데 두려운 뜻이 없고, 견성은 쉽게 공격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에,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가버렸다.
정욱전에 따르면 장막 등이 모반하여 여포를 맞이하자, 군현들이 이에 호응했으나, 오직 견성현, 범현, 동아현 만은 동요되지 않았다. 여포군에 항복한 자들이 진군이 직접 병사를 이끌고 동아현을 취하려 한다고 말하자, 다시 범의를 시켜 범현을 공취하게 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순욱이 정욱에게 말했다.
지금 연주가 반란을 일으켜서, 우린 오직 이 3성만 가지고 있소. 진궁 등이 막강한 군대로 임한다면, 깊이 그들의 마음을 붙들어 두지 못해 세 성은 반드시 동요할 것이오. 당신은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자이니, 돌아가 저들을 설득한다면, 거의 괜찮아 질 것이오.
또 정욱 등과 계획을 세워, 범현, 동아현을 설득해, 마침내 3성을 보전하고 조조를 기다렸다.
정욱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정욱이 어렸을 때 일찍이 꿈에 태산(泰山)에 올라 두 손으로 해(日)를 받드는 꿈을 꾸었다. 정욱이 혼자서 이를 기이하게 여기다가 순욱에게 말해주었다. 연주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자 정욱의 공에 힘입어 세 성을 보전하게 되었다. 이에 순욱이 정욱의 꿈을 조조에게 말해주니 조조가 경이 끝내는 내 심복이 되리란 꿈이오라 했다. 정욱의 본래 이름은 립(立)이었는데, 조조가 이에 립(立) 위에 일(日)을 더하게 하여 이름을 욱(昱)이라 고쳤다.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와 복양에서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는 동쪽으로 달아났다.
195년, 조조가 승씨에 주둔했는데, 큰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을 지경이었다. 도겸이 죽으니, 조조가 마침내 서주를 취하고, 돌아와 이내 여포를 평정하고자 했다. 순욱이 말했다.
장군께서는 본래 연주에서 일을 시작하였으니, 먼저 평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약 서주가 평정되지 않는다면, 장군께서 어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이전에 서주를 토벌함에 위엄과 형벌로 실행해서 사람마다 반드시 스스로 지키며 항복할 마음이 없으니, 가서 격파할 수 있다 해도 아직 우리 소유로 할 수 없습니다.
조조가 이내 그쳤다. 보리를 크게 거두고, 다시 여포와 싸우며, 병사를 나눠 여러 현을 평정하게 했다. 여포는 패주하고, 연주는 마침내 평정되었다.
1.1.5 삼보의 난
196년, 조조가 황건을 격파했다. 한 헌제가 하동에서 낙양으로 돌아왔다. 조조가 황제를 받들어 맞아 허(허도)에 도읍을 정하는 것을 의논했는데, 혹자가 산동은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한섬과 양봉이 새로 천자를 데리고 낙양에 도착하고 북으로 장양과 연계되어 있어서, 끝내 제압할 수 없다고 했다. 순욱이 조조에게 권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가 장차 천자를 영접하려 하자 제장들 중에 간혹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순욱, 정욱이 권하자 조홍을 보내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천자를 영접하도록 했다. 위장군 동승이 원술의 장수 장노와 함께 험준한 곳을 막고 있었으므로 조홍은 진군할 수 없었다.
조조가 마침내 낙양에 이르러 천자를 받들고 허에 도읍했다. 천자가 조조를 대장군에 배수하고 순욱을 시중으로 승진시켜서 상서령을 관장했다.[8] 항상 중용을 지키며 엄중함을 가졌다.
1.1.6 조조 휘하
전략에 따르면 순욱은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자신을 낮추었으며,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다. 정치를 행하는 관청에서 정치에 관한 논의를 할 때에는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순욱에게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조카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순욱에게 이렇게 물었다.
일을 처리할 때 조카와 상의하지 않고 왜 반드시 의랑과 함께 논의합니까?
순욱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관직이란 재능이 드러나야 출세를 하는 법이오. 만약 그대의 말처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순욱의 공평하고 공정한 마음은 이와 같았다.
조조가 정벌 때문에 밖에 있으면서, 군무와 국정의 일을 모두 순욱과 계획했다.
전략에 따르면 순욱의 사람됨이 아주 훌륭하고 아름다웠다고 했다.
예형전에 따르면 예형은 조조에게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고는, 또 순욱은 큰 몸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조융은 올챙이배를 가진 것을 본 적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문약(순욱)은 상가에 조문이나 가는데 쓰면 좋을 것이고, 치장(조융)은 주방장이나 하면서 손님 접대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9]
순욱은 용모가 뛰어났고 조융은 배가 커서 아무 것이나 잘 먹는 대식가였다.
예형전 주석 순욱의 비문에 따르면 순욱을 아름다운 자태와 기이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했다.
유소전에 따르면 태사(太史)가 글을 올려 말했다.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을 것입니다.
유소는 당시 상서령 순욱의 관부에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의 수가 몇 십 명이었는데, 어떤 이는 새해에 지내는 조묘의 제사를 폐지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조회를 뒤로 물려야 된다고 했다. 유소가 말했다.
성인이 제도를 정할 때, 변이 때문에 먼저 조례를 폐지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때는 재난과 변괴가 점점 사라져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미리 알아보는 기술에 잘못이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순욱은 그의 말에 매우 찬성하였다. 명령을 내려 조회를 옛날처럼 하도록 하자, 일식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만총전에 따르면 이전에 태위를 역임했던 양표가 체포되어 현의 옥으로 보내졌다. 상서령 순욱, 소부 공융 등은 모두 만총에게 부탁했다.
단지 죄상에 대해 설명을 듣는 것에 그치고 형벌을 가하지는 마시오.
만총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법에 따라서 심문했다. 며칠이 지나, 만총은 조조에게 만나기를 요청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표를 심문했지만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사형에 처해야만 되는 자는 먼저 그의 죄를 명백히 밝혀야만 하는데, 이 사람은 명성이 있으므로 만일 죄가 명확하지 않으면 명공(明公)은 반드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잃게 될 것입니다.
조조는 그 날 중에 양표를 사면하여 석방시켰다. 처음에 순욱과 공융은 만총이 양표를 엄하게 심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매우 화를 냈었지만, 이러한 결과를 얻게 되자 오히려 만총에게 감사했다.
조조가 순욱에게 물었다.
누가 능히 경을 대신해 나를 위해 계모를 짤 수 있겠소?
순욱이 말했다.
순유와 종요입니다.
이에 앞서 순욱이 책략을 짜는 선비를 말하면서 희지재를 천거했다. 희지재가 죽자 곽가를 천거했다. 조조는 순욱이 사람을 알아본다고 여겨서, 여러 순욱이 천거해 이른 사람들은 모두 합당한 직위를 가졌지만, 오직 양주자사가 된 엄상과 양주자사가 된 위강만이 후에 잘못되어 패망했다.
두기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두기는 형주에서 귀향한 후, 허에 가서 시중 경기를 만나, 밤을 세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상서령 순욱과 경기는 저택이 인접하였으므로 순욱은 한밤에 두기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훌륭한 인재로 여겨 사람을 보내 경기에게 물었다.
나라의 훌륭한 선비가 있음에도 추천치 않다니, 귀공은 자신이 왜 관직에 있는지도 모르는건가?
두기와 만난 후 순욱은 그를 이해하기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처럼 하였다. 결국 두기를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
유방전 주석 손자별전에 따르면 상서령 순욱이 손자를 만나 감탄하며 말했다.
북방의 주는 전쟁의 상황이 오래되어 그곳의 현명하고 지혜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손계군(손자)을 만났으니!
그리고는 상주하여 상서랑으로 삼아 머물게 하려고 했으나 집안의 난리를 핑계 삼아 하동으로 돌아왔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순욱은 전후로 뛰어난 인재를 여러 사람 추천했다. 그 가운데 고향 사람으로는 순유, 종요, 진군이 있었으며, 해내에서는 사마의가 있었다. 또 당대에 이름난 사람으로는 치려, 화흠, 왕낭, 순열, 두습, 신비, 조엄과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공경의 반열에 오른 사람만 10명이 넘었다. 인재 가운데에는 일반적인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희지재, 곽가 등은 세속의 법도를 어기기도 했으며, 두기는 오만하고 학문이 얕았지만 모두 뛰어난 지혜와 책략으로 천거되어 각자 이름을 날렸다. 순유도 나중에 위의 상서령이 되어 역시 많은 인재를 추천했다. 조조는 이 두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순(二荀)[10]이 논한 사람은 더욱 믿을 만하다. 나는 영원히 그것을 잊지 못할 것이다.
1.1.7 완 전투
조조가 천자를 영접한 이후로 원소는 내심 불복할 마음을 품었다. 원소가 이미 황하 이북 지역을 병합하자, 천하가 그 강성함을 두려워했다. 조조는 때마침 동으로 여포를 걱정하고 남으로 장수를 막고 있었는데, 장수가 완성에서 조조군을 패배시켰다.
원소가 더욱 교만하져 조조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말이 패악하고 오만하였다. 조조가 크게 노하여 평소와는 달라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장수 일로 이로움을 잃은 것 때문이라 생각했다. 종요가 이를 순욱에게 묻자 말했다.
공께선 총명하므로 반드시 지난 날의 허물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아마도 다른 생각이 있을 것이오.
이에 조조를 뵙고 물어보니 조조가 이내 원소의 편지를 순욱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이제 장차 저 불의한 자를 토벌하고 하는데, 힘이 상대가 되지 않으니, 어찌해야 겠소?
순욱이 말했다.
지금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오직 원소 뿐입니다. 무릇 네가지 이기는 것으로 천자를 보필하고, 의를 가지고 정벌하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원소의 강성함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 도량 : 원소는 겉으로는 관대하나 남에게 일을 맡겨도 그의 마음을 의심하지만, 조조는 재능으로서만 그 마땅한 바를 맡긴다.
- 모책 : 원소는 지지부단하여 결단이 적어 후에 기회를 잃는데, 조조는 대사를 결단하며 임기응변으로 정해진 방법이 없다.
- 무력 : 원소가 비록 사졸들이 많다고 해도 군대를 거느림에 관대하고 느슨하여 법령이 제대로 서지 않으니 그 실상은 쓰기 어렵지만, 조조는 비록 사졸이 적지만 법령이 분명하고 상벌을 반드시 행하여 모두 죽을 때까지 싸운다.
- 덕 : 원소는 선대의 자금에 힘입어 꾸미고 명예를 거두어 들이기에 선비들 중 능력은 작지만 묻기 좋아하는 자들이 많이 그에게 귀부하는데, 조조는 천하의 충정과 실효가 있는 선비들은 모두 기용되길 원한다.
조조가 기뻐했다. 순욱이 말했다.
여포를 먼저 취하지 않으면, 하북 또한 쉽게 도모하지 못합니다.
조조가 말했다.
그러나 내가 걱정되는 것은 또 원소가 관중을 침범해 소란스럽게 하고, 강족, 호족에게 난을 일으키게 하며, 남으로 촉한을 유인할까 두려우니, 이것은 나 혼자 연주와 예주로써 천하의 5/6를 대항하는 것이오. 장차 어찌하면 좋소?
순욱이 말했다.
관중의 장수는 십수명이지만, 능히 서로 하나로 하지 못하고, 오직 한수와 마초만이 가장 강성합니다. 저들이 산동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 필히 자기 군대를 껴앉고 스스로를 보호할 것입니다. 종요는 가히 서쪽 일(외교)을 맡길 수 있으니, 공께서는 걱정할 바가 없습니다.
1.1.8 양 전투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가 군을 이끌고 퇴각하려 하는데 장수의 군사들이 추격해 와 조조의 군이 전진할 수 없자 둔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했다. 조조가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적이 와서 우리 군을 추격해 와 비록 하루에 몇 리 밖에 행군하지 못하지만 내가 헤아려 보건대 남양군 안중현에 도착하면 반드시 장수를 격파할 수 있소.
안중에 도착하자 장수가 유표의 군사와 합쳐 험지를 지키니 조조의 군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조조는 밤중에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기병을 두었다. 날이 밝자 적은 조조가 달아났다고 여겨 전군이 추격해왔다. 이에 기병을 풀고 보병과 기병으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했다.
가을 7월, 조조가 허도로 돌아왔다. 순욱이 조조에게 물었다.
이전에 적을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조조가 말했다.
적이 퇴각하는 군사인 우리 군을 막아서서 사지(死地)에서 맞붙어 싸우니, 이로써 나는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줄 알았소.
1.1.9 관도대전
헌제춘추에 따르면 동승이 죽고 나자 복황후는 아버지 복완에게 편지를 보내 사공(조조)이 동승을 죽였으니 황제께서 원한을 갚아달라고 한다고 했다. 복완은 그 편지를 순욱에게 보여주었더니 순욱이 그 편지를 보고 증오하면서 오랫동안 감추고 말을 하지 않았다.
198년, 조조가 이미 장수를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여포를 사로잡아 서주를 평정하여, 마침내 원소와 서로 항거하게 되었다. 공융이 순욱에게 일러 말했다.
원소는 땅이 넓고 병사가 강합니다. 전풍, 허유는 지모의 선비로 그를 위해 계책을 짜고, 심배, 봉기는 충성을 다하는 신하로 자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며, 안량과 문추는 용맹함이 전체의 군대 중에 으뜸이라 그 병사를 통솔하고 있으니, 아마 이기기 어려울 것이오!
순욱이 말했다.
원소의 병력은 많으나 법령이 정비되어 있지 않소. 전풍은 강하나 윗사람을 거스르고, 허유는 탐욕스러워 다스리지 못하오. 심배는 제멋대로 하여 지모가 없고, 봉기는 과감하나 스스로를 판단하니, 이 두 사람을 남아 뒷일을 처리케 한다면, 허유의 가족들이 법을 범하여 풀려나지 못하면 허유는 변란을 일으킬 것이오. 안량과 문추는 한갓 필부의 용맹일 뿐이어서, 한번 싸워 사로잡을 수 있소.
그리고 이 평가들은 신기할 정도로 맞아떨어져서, 그 장수들은 순욱이 평가한 단점이 원인이 되어 최후를 맞이하였다.
- 전풍 :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나, 윗사람을 거스른다.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간언하다 원소에게 미움을 사 옥에 갇힘"
- 허유 : 탐욕이 심하여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 반드시 배반할 것이다. > "부정부패가 들통나, 심배가 원소에게 비방할 명분을 주었고 결국 배반하여 조조군에 항복한다, 거기다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말대로 조조군에 항복한 이후 조조에게 심하게 허세와 거만을 떨다가 조조에게 미움을 받아 죽는다"[11]
- 심배 : 독단적이며 계획성이 없다.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봉기와 함께 원상을 제멋대로 옹립해 원가의 분열을 조장"
- 봉기 : 과단성이 있지만, 스스로의 판단에 따른다. >"봉기 또한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심배와 함께 원상을 제멋대로 옹립해 원가의 분열을 조장. 그나마 과단성 있다는 평답게 용기 내어 원담과 원상의 중재자 역할을 맡았으나 결국 화가 난 원담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 안량, 문추 : 필부의 용맹을 가졌으니(= 용맹은 하나 지혜가 없다), 한 번의 싸움만으로도 사로잡을 수 있다.>"안량은 관우의 무예에 패배하여 사망, 문추는 순유의 계략에 의해 사망"
당시 원소군은 대륙 최강이었는데 그에 비해 순욱의 평가는 너무나도 박하다. 아마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세력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단점만을 과장해서 비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순욱의 비평이 그들의 최후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순욱이 원소군을 잘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년, 원소의 연이어 싸웠다. 조조가 관도를 보전하고 있자, 원소가 이를 포위하였다.
무제기에 따르면 이때 조조의 군량이 적어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는 일을 의논했다. 순욱이 말했다.
원소는 모든 군을 관도에 집결시켜 공과 더불어 승패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공은 지극히 약한 것으로 지극히 약한 것을 감당해야 하는데, 만약 이를 능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필시 저들이 이를 틈탈 것이니 이는 천하를 가름하는 관건입니다. 게다가 원소는 평범한 사내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일에는 능하나 그들을 제대로 쓰지는 못합니다.
조조가 이 말에 따랐다.
조조군의 군량이 막 다해가려 하니, 순욱에게 글월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 원소를 유인하고자 하는 방법을 의논했다. 순욱이 말했다.
공께서는 1/10의 군사로서 땅을 지키고 있으며, 나아가지 못하게 한 지 이미 반년이나 되었습니다. 정황을 보아하니 세력이 고갈되어 필히 장차 변란이 생길 것이니, 이는 빼어난 계책을 쓸 때이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
조조가 이내 머물렀다.
안량과 문추는 진영에 임해 머리를 준 꼴이 되었으며, 심배는 허유의 가족이 법을 어겼다 하여 그 처자를 잡아들이자, 허유는 노하여 원소를 배반했다. 마침내 날랜 병사로 원소가 따론 주둔한 곳을 습격하여, 그 장수 순우경 등을 베어버리니, 원소가 패퇴하여 달아났다. 전풍은 간언하다 주살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순욱이 계책을 세운 바와 같았다.
201년, 조조가 동평군 안민현에 가 곡식을 받았는데, 군량이 적어 하북과 서로 상대하기에 부족하여, 원소가 최근 격파된 틈을 타서 그 사이 유표를 쳐서 토벌하고자 했다. 순욱이 말했다.
지금 원소는 패배하여 그 군사들의 마음이 떠났으니, 마땅이 그의 곤란함을 타서 마침내 평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연주와 예주를 등지고 멀리 장강과 한수에 까지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원소가 그 나머지 무리를 거둬 들여 빈틈을 타 후방에서 나온다면, 공의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입니다.
조조가 다시금 하수(황하)가에 주둔했다.
1.1.10 하북 평정
원소가 병으로 죽었다. 조조가 하수를 건너 원소의 아들 원담, 원상을 공격하였으나, 고간과 곽원이 하동 지역을 침략하자, 관서 지역이 진동했는데 종요가 마등 등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했다.
203년, 조조가 순욱의 전후의 공을 기록해, 표를 올리니 순욱을 봉하여 만세정후로 삼았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그러나 순욱이 야전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사양하자 조조의 표는 시행되지 못했다. 조조는 순욱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와 더불어 함께 일을 해오면서 조정을 바로 세울 때, 그대는 함께 페하를 크게 보필했으며, 그대와 함께 수많은 인재들을 추천했고, 그대와 함께 여러 가지의 계책을 세웠으며, 그대와 함께 비밀리에 모략을 꾸민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야전에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말로 사양을 하지 마시오.
순욱도 더 이상 사양을 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204년, 조조가 업성을 함락시키고, 기주목을 맡았다. 어떤 자가 조조를 설득하길 마땅히 말했다.
옛 제도를 부활해 구주(九州)를 두면, 기주가 담당하는 곳이 광대하여 천하가 복종할 것입니다.
조조가 이 의견을 따르려 하자, 순욱이 말했다.
사람마다 절로 자신의 토지를 보전하지 못하고 그 병사를 지킬 수 없을까 두려워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땅을 나눠 기주에 속하게 하면, 장차 모두 마음이 동요하게 될 것입니다. 또 사람들이 관서 지방의 여러 장수들에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실을 듣는다면, 반드시 차례대로 빼앗기게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조조가 마침내 구주의 의논을 그치게 하였다.
이 때 순유가 항상 일을 주장하여 꾀하는 사람이 되었다. 순욱의 형인 순연은 감군교위로서 업성을 지키며, 하북의 일을 모두 감독하였다. 조조가 원상을 정벌할 때, 고간이 은밀히 병사를 보내 업성을 습격할 것을 모의했는데, 순연이 반역을 알아차리고 모두 다 주살하니, 그 공으로 열후에 봉해졌다.
조조가 그 딸을 순욱의 장자 순운에게 시집보냈는데, 후에 안양공주라 칭해졌다. 순욱과 순유는 같이 귀중해졌지만, 모두 겸손하고 검소해, 녹봉은 종족이나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두기전에 따르면 조조가 하북을 평정한 뒤, 고간이 병주를 이끌고 반역했다.
원소군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고간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는 매우 큰 위협으로 닥쳐왔는데, 조조는 초기 진압에 실패하였고, 이에 순욱은 두기를 고간이 장악한 하동군에 보내었다. 예상대로 두기는 내부에서 反고간 세력을 규합해 고간 진영을 혼란시켰다. 이에 고간이 직접 이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으나 실패하였고 마등 또한 조조측에 가세해 상황이 역전되었다.
두기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순욱은 두기의 용기는 큰 곤란에 맞서기에 충분하고, 지혜는 변화에 응하는 것이 가능하니, 그를 시험삼아 써봐야 한다고 칭찬했다.
207년, 다시 순욱의 식읍을 1천호 늘려 이전과 합쳐 2천호가 되게 하였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조조가 올린 표에서 말했다.
그의 뛰어난 모략과 남다른 공로는 신으로서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상과 녹봉을 받은 것은 순욱의 빼어난 공로를 생각하면 너무도 미약하오니 거듭 그의 공을 가늠하시어 적절하게 식읍을 하사하시기 바랍니다.
순욱이 다시 정중하게 사양하자 조조는 그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책모에 대한 보답은 두 번 표를 올리는 것으로도 모자란다. 두 번 다 다시 사양을 한다면 이는 겸양도 너무 지나친 일이다.
조조는 다시 표를 올려 순욱을 삼공(三公)으로 삼으려 했지만 순욱은 순유를 보내 한사코 사양했다. 몇 차례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자 조조는 더 이상 표를 올리지 않았다.
1.1.11 조조 휘하
순씨가전에 따르면 진군과 공융이 여남과 영천의 인물에 대해 토론을 할 때 진군은 이렇게 말했다.
순문약(순욱), 공달(순유), 휴약(순연), 우약(순심), 중예(순열)는 당대에 상대를 할 사람이 없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당시는 정벌을 통해 창업을 하느라고 여러 가지 제도를 다시 수립해야 했다. 순욱은 조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한 적이 있다.
마땅히 유학에 통달한 인재를 천하에서 널리 모집하고, 그들로 하여금 육경을 연구하고 강론하게 하며, 전기를 간행하고 고금의 학문을 보존하되, 번잡한 것을 없애어 참다운 성인의 학문을 하나로 정립해야 하며, 아울러 예학을 일으켜 점차 교화를 두텁게 하는 일이 왕도와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순욱이 조조와 함께 정치의 도에 대해 토론한 것이 이와 같았으며, 조조도 항상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병원전 주석 병원별전에 따르면 병원이 조조를 만나고 난 후에 돌아갈 때 군중의 사대부들 가운데 병원을 따라나서는 사람이 수 백 명이나 되었다. 조조가 그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여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자, 마침 순욱이 조조의 곁에 앉아 있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병원에게 물어보아야만 알 것입니다.
조조가 말했다.
저 사람은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사대부의 마음까지 기울게 하는가?
순욱이 말했다.
저 사람은 당대의 이인이자 사대부들의 자존심입니다. 공께서는 예를 다하여 대접해야 합니다.
조조가 말했다.
정말 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다.
이후로 조조는 병원을 더욱 정중하게 대했다.
화타전에 따르면 화타는 허현의 감옥으로 넘겨졌으며, 심문을 받고 죄를 시인했다. 순욱이 조조에게 간청하여 말했다.
화타의 의술은 확실히 매우 정통합니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있는 바이니 그를 당연히 용서해야 합니다.
조조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천하에는 이런 쥐새끼 같은 자가 없어야만 하오.
그리고 화타를 가혹하게 고문했다.
1.1.12 형주 정벌
조조가 장차 유표를 토벌하려고 순욱에게 어디로 출정해야 하는지 계책을 물으니 순욱이 말했다.
지금 중원은 이제 평정되었으니 남쪽에서는 곤란함을 알 것입니다. 완성과 엽 사이로 나와 샛길로 가벼이 진군한다면, 불의의 곳에서 엄습하게 될 것입니다.
조조가 마침내 출정했는데, 유표가 병들어 죽었다. 조조가 순욱의 계책처럼 완성과 섭현 사이를 곧장 내달려 가자, 유표의 아들 유종를 형주를 들어 항복했다.
1.1.13 조조 휘하
전주전에 따르면 법을 집행하는 곳의 관리는 전주를 탄핵하여, 그는 본성이 교활하고 도를 어기며 작은 절개를 내세우고 있으니, 응당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형벌로 처벌해야 된다고 했다. 조조는 이 건의를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며, 오랜 시간을 끌었다.
전주전에 따르면 상서령 순욱과 사예교위 종요 또한 전주 본인의 뜻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주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순욱은 이렇게 말했다.
군자의 도는 혹은 세상으로 진출하고 혹은 머물러 쉬는 데 있으나, 그것을 적당한 때에 맞출 뿐입니다. 그러므로 필부는 뜻을 고집스럽게 지키기만 하고, 성인은 각자의 할 일을 이루고자 노력합니다.
어림에 따르면 순욱은 나중에 형주자사가 되었으나, 공숭은 집안이 가난하여 신야리의 머슴과 함께 하인이 되었다. 순욱이 어느 날 출타했다가 공숭을 만나 마차에서 내려 손을 붙잡고 말했다.
옛날엔 자네와 함께 부채를 흔들며 함께 태학에서 유학했는데, 지금 자네는 하인이 되었으니 나 역시 애통하네!
순욱이 공숭을 대속해 주라고 명했으나, 공숭은 머슴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곧은 절조가 이와 같았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순욱은 덕행을 두루 갖추었으며, 정도가 아니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외의 영걸과 준재들이 모두 자신의 군주의 조상으로 여겼다. 사마의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책에서 전하는 오랜 일들을 나는 목전에서 나의 눈과 귀로 보고 들었다. 백 수 십년 동안 순령군(순욱)에 미치는 남보다 뛰어난 재주는 없었다.
순욱별전에 따르면 종요는 안자(顔子)가 없는 상황에서 구덕(九德)을 갖추고 있으면서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었지만, 순욱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종요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순욱의 우아하고 중후함을 안자와 비유하면서 자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는데, 무슨 근거로 그러한 말을 하십니까?
종요는 이렇게 말했다.
조조는 총명하기가 짝이 없을 정도이지만, 큰 일이 있을 때에는 항상 순군(순욱)에게 먼저 자문을 구합니다. 우리들은 명을 받아 행동을 하지만, 순욱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하더라도 주군의 뜻과 그리 멀지 않습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유계화가 일찍이 말했다.
순영군(순욱)이 남의 집에 가면 그가 앉았던 곳에서 늘 사흘 동안 향기가 난다.
1.1.14 죽음
헌제춘추에 따르면 복완이 처의 동생인 번진에게 편지를 보여주자 번진은 그 사실을 조조에게 알려주었다. 조조는 몰래 대비를 했다. 순욱은 그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서 스스로 내막을 밝히려고 사람을 업으로 파견하여 조조의 딸을 황제의 배필로 삼으라고 권고했다.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조정에는 복황후가 있는데, 내 딸을 어떻게 주상의 배필로 삼겠는가? 나는 미미한 공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지만, 어찌 또 딸의 힘을 빌려서 권세를 누리겠는가?
순욱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복황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성정이 흉악하여 항상 그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흉악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황후를 폐해야 합니다.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경은 전에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순욱이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에 이미 공에게 그렇게 말 한 적이 있습니다.
조조는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지만 내가 잊을 리가 있겠는가?
순욱은 다시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공에게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전에 공께서 관도에서 원소와 대치하고 있을 때 집안 일로 격정을 많이 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조가 다시 꾸짖듯이 말했다.
관도에서 일이 끝난 후에는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순욱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사죄를 할 뿐이었다. 조조는 이 일로 순욱에게 한을 품게 되었지만 겉으로 용서하는 척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12]
212년, 동소 등은 조조의 작위로 국공(國公)으로 올리고 구석을 갖추어 남다른 공훈을 표창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은밀히 순욱에게 자문하였다. 순욱은 조조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조정을 바로잡고 나라를 편안히 하기 위함이어서, 충정의 진심함을 잡아 물러나 겸양하는 내실을 지켜야 하므로, 군자는 덕을 남을 사랑해야지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13] 조조가 이로 인해서 마음속으로 평안할 수 없었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동소가 귀공을 세우자고 건의를 했을 때 순욱은 동의를 하지 않고 조조를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고 했다. 군사들에게 음식을 보내 위로를 하도록 하라는 조칙이 내려지자 잔치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순욱은 뒤에 남아서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조조는 순욱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관한 일을 말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읍을 하고 물러나도록 했다. 순욱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권을 정벌할 때, 표를 올려 순욱이 초에서 군사를 위로하길 청하여, 이로 인해 문득 순욱을 남겨두고 시중 광록대부 지절로서 승상의 군사에 참여케 했다.
문제기 주석 전론제자서에 따르면 후에 군이 남정하며 곡려에서 머무르는데, 상서령 순욱이 사신으로 군을 위로하다, 나(조비)의 담론이 끝나감을 보더니, 순욱이 말했다.
듣기론 군께서 좌우로 활을 쏘는 것이 훌륭하시다던데, 이는 실로 능히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내(조비)가 말했다.
집사께선 아직 제가 목덜미에서 쏘거나 입에서 쏘면, 말굽이 구부러지고 월지(月支)가 젖혀짐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순욱이 즐거워 웃으며 뜻밖이라고 말했다.
조조의 군대가 유수에 이르렀을 때 순욱은 병이 걸려 수춘에 남았는데, 걱정하다 죽으니, 이 때 나이가 50이었다. 다음 해 조조는 마침내 위공이 되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조조가 순욱에게 음식을 내렸는데, 열어 보니 빈 공기여서, 이에 약을 먹고 죽었다. 265년, 순욱에게 태위를 추증했다. 시호를 경후(敬侯)라 했다.[14]
순욱별전에 따르면 순욱은 상서령이 된 이후에 자신이 한 일을 항상 글로 써서 남겨두었다가 죽을 때가 되자 모두 불로 태워 없앴다. 그러므로 그의 기책과 밀모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순욱이 수춘에서 죽자 수춘을 도망친 어떤 사람이 손권을 찾아가 조조가 순욱에게 복황후를 죽이라고 했지만 순욱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자살했다고 말했다. 손권은 그 사실을 촉에 알렸다. 유비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늙은 도적이 죽지 않았으니 환란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1.2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연주의 황건적 잔당을 평정하고 인재를 모집하자 조조의 부하가 되었다. 조조는 순욱을 장량과 같은 인물로 평가했다. 조조군 최고의 군사로 나오는 것은 정사와 비슷하다.
순욱이 이호경식지계를 쓰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조조는 서주를 다스리고 있던 유비가 여포와 함께 힘을 합치는 것을 불안해하고 있었다. 조조가 유비를 직접 공격하는 것을 반대하던 순욱이 이호경식지계를 조조에게 권했다. 이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다른 한 마리를 잡아먹게 한다는 의미로서 적의 동맹을 깨기 위한 계략이다. 조조가 동의하여 황제의 이름으로 유비를 서주목으로 임명하고 여포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유비가 여포를 죽이면 성공하는 것이지만 만약 실패하면 여포는 유비의 배신에 분노하여 유비를 공격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의 계략을 간파하여 시간을 두고 생각하겠다는 정도의 대답을 조조에게 보냈다.
이어서 구호탄랑지계를 쓰는 장면이 추가된다. 계략대로 유비와 여포가 싸우지 않자 순욱은 다른 계략을 제시한다. 원술을 개입시켜 유비를 끌어내고 이 싸움에서 유비가 타격을 받을 때 여포로 하여금 서주를 차지하도록 한다. 둘이 서로 미워하여 싸움이 일어날 환경을 만든 후 싸움을 벌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범을 몰아 이리를 삼키게 한다는 구호탄랑지계다. 이호경식지계를 사용했다 실패했지만 구호탄랑지계는 성공했다.
순욱 같은 큰 인물이 병사하면 당연히 재미가 없다보니 연의에서도 조조가 구석을 받는 것을 반대한 순욱이 조조에게 빈 찬합을 받자 독을 마시고 자결한다. 어이없게도 나관중은 순유도 순욱과 비슷한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서 순유의 죽음을 순욱과 비슷하게 각색한다.
1.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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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의 순욱 동상 |
현대에 들어서는 전체적으로 평이 좋은 편이다. 광팬들을 기준으로 봤을 때 위빠야 말할 것도 없고, 촉빠들도 순욱이 한나라의 충신이었다는 점 + 조조 업적의 최대 공신이었을 정도로 유능한 인재였다는 점 때문에 인상이 좋은 편.
1.3.1 역사가들의 평가
중국 역사가들은 조조군 최고 모사는 순욱이라 평가한다. 조조군 내에서 순욱이 가졌던 위상과 중요성은 부동의 1위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으며 곽가나 사마의는 실리만 채웠을 뿐 명분을 살리지 못한 비판이 있지만 오히려 순욱은 명분, 실리 둘 다 취하였기 때문이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그와 연장자인 조카 순유, 그리고 모사 가후, 이 세 사람을 조조의 모사 중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 같은 권에 넣었다. 진수는 순욱이 청아한 풍모와 왕좌의 풍격, 선견지명을 갖추었지만 뜻을 달성하는 것에는 뛰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배송지는 조씨가 한나라를 무너트린게 순욱의 책임이라는 세상의 비난을 변호하려고 했다. 배송지는 당시와 같은 난세를 평화로 이끌기 위해, 순욱은 조조에게 협력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일로 인해 한은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백성들은 구해졌다고 평가했다. 또한 배송지는 가후가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데 진수가 순욱, 순유랑 동렬로 평가했던 것이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범엽은 순욱을 한실의 충신으로 평하여 후한서에 순욱의 열전을 따로 실었다. 범엽은 순욱이 난세에 괴로워하는 사람을 위해 힘썼지만 조조와 양립할 수 없어서 자신을 희생했다고 극찬한다. 청나라 시대의 조익도 저서 이십이사차기에서 범엽이 순욱을 한나라의 신하로 열전을 실은 것을 공감했다.
당나라 시대의 시인 두목은 저서 한기에서 순욱이 조조를 전한의 건국자 한고조, 후한의 건국자 광무제에 비유하며 조조를 응원한 기록이 있으면서 조씨를 도와 한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비판했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두목의 비판에 대해 순욱이 조조를 광무제, 한고조에 비유한 것은 단지 사가의 창작이라고 두목의 의견에 반박했다. 또한 순욱이 조조를 황제에 올려 부와 영예를 쫓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죽은 충신이라고 찬양했다.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그다지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절의를 잃은 선비의 예를 들 때 쓰인다. 한나라에 충성을 바쳤든 말든, 조조 밑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로 보기 영 좋지 않았던 듯하다.
1.3.2 왕좌지재
그는 조조의 장량이자 소하였다. 조조는 처음에 순욱을 일컫어 자신의 장자방(장량)이라고 칭찬하였는데, 장량이 한고제 유방의 패업에 끼친 영향과 그의 역할을 조조의 세력에 비유하면 이러한 조조의 칭찬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조조의 세력 안에서 그가 위치했던 자리와 그가 조조를 도와 이루었던 업적을 평가하면 그는 장량과 비교될만하고, 그가 본진을 관리를 하며 뒤를 봐주는 역할을 맡은 점을 생각하면 그는 소하의 역할도 겸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정말로 병사가 아닌 토사구팽이 맞다면 최후는 한신과 비슷하다.
연주의 위기 상황에서 조조의 근거지를 간신히 살려내어 그것을 기반으로 천하를 평정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닫게 한 것으로 보아, 순욱이 아니었다면 조조는 원술처럼 잠시 반짝하고 끝난 군웅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더욱이 당시의 조조의 세력은 원소의 영향력이 강하였기에 근거지가 없었다면 원소 아래의 객장으로 흡수되었을테지만,이 경우 원소가 잠재적 위협인 조조를 그냥 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원소가 스스로 조조를 내보내지 않는 한 조조의 독립은 힘들었을 것이며 형주를 얻기 전의 유비와 비슷한 신세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 직후 조조 세력은 원소의 도움으로 연명하기도 했고, 원소는 흔들렸던 상하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던지 조조의 처자식을 자신에게 보내는 인질을 요구하는 등 조조는 한동안 온갖 수난을 겪었다.
또 순욱의 조언으로 헌제를 맞이한 것으로 조조는 도의적으로 크나큰 방패를 얻어, 이후 정치와 전략 양쪽에서 유리한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실질적으로는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천자 옹립은 위나라를 세워낸 조조의 패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도 그럴 것이 헌제를 끼고 있으면 자신의 행동이 모두 조정의 행동이 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힘이 없는 헌제의 생각이 어땠다 한들 황제의 명령을 받고 왔다고 외치면 장땡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들이 쳐들어올 경우 '너 역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었다. 다른 군주들에게도 그렇겠지만, 특히 서주 대학살로 악명을 얻은 조조에게 있어 매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자체로는 허울 없는 것이더라도 벼슬 자리를 쥐고 있는 셈이기도 했다. 원소 역시 주위의 책사들로부터 헌제를 받아들일 것을 권유받았으나 본인이 헌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어 이를 실천하지 않았다.
헌제를 옹립한 조조는 당시 자신의 우군격인 원소에게 태위를 제수했지만, 원소는 이 자리를 반기지 않았다. 이 시기의 태위는 실권이 없던 명예직으로, 은퇴를 앞둔 명망 있는 노신들이 받던 자리였다. 결국 조조는 원소를 높이는 척 했지만, 실권이 있는 대장군 자리는 자신이 갖고 원소는 뒷방 늙은이처럼 취급한 것이다.[15] 이러한 조조의 생각을 모를 리 없던 원소는 삐쳐서 장문의 장계를 조정에 올려 태위 자리를 거부했고, 조조는 결국 원소에게 대장군 자리를 양보했다. 대신, 자신은 사공 행 거기장군이 되었다.[16] 이후로도 조조는 끝까지 실리를 챙기고 실직을 차지함으로써 원소를 견제했다. 뭔가 졸렬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리를 챙긴 건 맞다.
조조군 세력이 약한 초기에는 항상 조조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여 전략 전술을 내주었지만 나중에 조조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2인자로서 본진을 맡게 되었다. 조조가 전장에서 싸우는 동안 내정을 완벽하게 해내며, 조조가 중원을 통일하는데 있어 실질적으로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본진을 관리하느라 전장에 나설 수 없는 순욱을 대신하여 조조는 순욱이 추천한 다른 인재들과 상담하였지만 전투에서 세세한 사항을 상담할 수는 없었으나, 전쟁 전체를 통괄하는 방침은 언제나 순욱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언을 구했다.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틀은 순욱이 이끌었다는 것.
조조군이 막 업성을 접수했을 즈음, 원담이 항복하고 원상이 조조에게 패퇴하자 고간 또한 조조에게 항복해왔는데, 아직 하북의 입지가 안정적이지 않은 조조는 고간의 지위를 인정해주었다. 이후 조조가 오환으로 달아난 원상을 처리하기 위해 북방 원정을 계획하자 고간은 조조의 부재를 틈타 업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순연의 활약으로 계획이 발각되어 내응자들이 처형. 이에 고간은 상당태수를 인질로 잡고 호관을 봉쇄해 기주 방면에서의 군세를 차단한 뒤 사예주를 공격하여 조조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업성 장악은 실패하였으나 사예주에서 홍농, 하동, 하내의 3군이 호응해 조조에게 매우 큰 위기로 다가왔다. 당시 고간은 원소군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후계자 중 하나였기 때문에, 만일 3군을 거점으로 싸움을 장기화해 밖으로는 유표의 협공을 약속받고 조조에게 넘어간 하북의 세력을 조금씩 흔든다면 조조의 하북 평정이 말짱 도루묵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조조는 이전과 악진으로 하여금 호관을 공격하게 하고 사예주에서는 종요가 고간을 공격하였으나, 이전과 악진은 호관 공략에 실패하고 사예주 3군은 고간 세력이 결국 군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조조 본인이 직접 나서 호관을 공략했고, 허도에서는 순욱이 하후돈과 중앙군을 이끌고 종요와 합류하였다. 사예주 3군의 반란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한 순욱을 두기를 하동으로 파견했는데, 순욱의 예상대로 두기는 하동군 내부에서 반고간 세력을 규합해 고간 진영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이에 고간이 직접 이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으나 실패하였고 마등 또한 조조측에 가세해 상황이 역전되었다. 사예주의 군세가 약화되었고 서쪽에서는 마등, 동쪽에서는 조조, 남쪽에서는 순욱의 협공을 받는 상황이 되자 결국 고간은 유표 세력에 망명한다.
순욱은 조조에게 수많은 답장으로 국가를 다스리고 전쟁을 도모하는 법에 대한 헌책을 하였으나, 이 헌책을 담은 편지들은 아쉽게도 순욱이 죽기 전 모두 불태워, 관도대전 때와 같이 다른 기록물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알 수 없게되었다.
순욱 사후에 조조는 실책을 거듭하며 힘을 제대로 못 쓴다. 물론 순욱이 살아있었을 때도 조조는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실책을 이겨내어 더 큰 성장을 해낸 반면, 순욱 사후에는 역경을 이겨내더라도 현상유지 정도에 불과하였다. 순욱이 좀 더 살았다면 순욱이 더 살아 조조 세력의 안정성이 더 확보된다면 사마가의 제위 찬탈이 힘들어져서 사마씨의 세상이 아닌 조씨의 세상이었을 거라는 평도 존재한다.[17]
1.3.3 토사구팽
왕좌지재라는 칭호에 걸맞게 자신이 모시던 군주를 왕의 위치로 올려 놓았으나, 정작 주군 조조와의 이념적 갈등으로 자신의 재능과 이상 간의 딜레마 속에서 씁쓸한 최후를 맞았다.
진수의 삼국지 본전에서 읽기에 따라서는 좌천(토사구팽)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남아 있다. 평생 본거지를 지키던 순욱이 조조와 사이가 틀어진 직후에 전장으로 발령 받은 후, 출정 시기에 맞춰서 사망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공교롭다. 뜻이 달라 지방으로 발령냈으면 그게 전형적인 좌천 패턴 아닌가? 아무튼 순욱이 세상을 떠날 무렵에 조조와 순욱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며, 순욱이 전장으로 발령난 것은 그의 생애를 통틀어 이 때가 거의 유일하다. 간단하게 말해 적벽대전이나 관도대전에서조차 순욱은 본거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투에 단 한번 종군 처분을 받은 것이다. 어거지로 해석한다면야 좌천이 아니라 할 수 있겠으나 이것을 좌천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롭다. 애초에 병사하였다고 기록이 되어있지 않을 뿐더러, 순욱은 병으로 수춘에 머물렀다가 근심 속에 죽었다고 되어있는 걸 병사하였다고 해석하기는 무리가 있기도 하다.
위씨춘추에서 조조가 순욱에게 빈 그릇을 보낸 기록이 사실이라고 여기는 현대인들은 빈 그릇 '더 이상 줄 수 있는 게 없다.' 혹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다.' 등의 의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8] 순욱의 죽음도, 순욱 본인이 죽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혹은 버림받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굽힐 수 없음을 자각하여 자결을 택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되었든 조조군의 핵심 중에서도 최고 핵심인 순욱과 정치적으로 완전히 틀어진 만큼, 그대로 두기에는 조조 입장에서 신경 쓰였을 것임이 분명하다.[19] 어떻게 죽었던지 그의 퇴장은 조조의 이런 움직임과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역사적으로 명확히 진수가 서술한 순욱의 죽음이 사실에 가깝다는 근거가 부족하고 또한 배송지나 후한서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증빙하는 근거도 전무하기에, 순욱의 죽음에 조조가 개입했다는 것은 사실상 오리무중이다. 단 중국 사서에는 조조가 순욱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것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는 편이다. 순욱을 높게 평가한 사마광도 자치통감에서 후한서와 배송지의 기록을 따랐으나 빈그릇 얘기는 하지 않고 그냥 약을 먹고 죽었다고 적었다.
그리고 순욱이 죽은 다음 해, 조조는 끝내 구석을 받고 위공이 되었으며 후일 위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후 불과 8년 후, 한나라는 망하고 조위가 건국되었다. 그로부터 29년 후, 고평릉 사변이 일어나 사마씨 일족이 권력을 잡으며, 다시 그로부터 14년 후 사마소가 진공에 오르고 다음 해에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한 해 후, 위나라는 망하고 서진이 건국되었으며 순씨 일족은 조씨의 위나라를 버리고 사마씨의 서진을 선택하였다.
1.3.4 인재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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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욱의 인재 추천 피라미드 |
조조가 순욱에게 "그대를 대신하여 전장에서 책략을 상담할 이가 누가 있는가?"라는 조조의 질문에 그가 추천한 이는 희지재였고, 희지재가 일찍 죽은 후 순욱이 다음으로 조조에게 추천한 사람이 바로 곽가였다. 본진을 관리하느라 전장에 나설 수 없는 순욱을 대신하여 조조가 옆에 두고 책략을 논하던 인재들은 순욱이 추천한 순유, 종요, 희지재, 그리고 곽가였다.
그의 능력은 관료의 추천에서도 빛을 내었는데, 수많은 조조군의 중역들이 발굴되었다. 순욱은 수많은 인재들을 추천하였고, 추천받은 많은 인물들은 조조를 위하여 엄청난 활약을 하였다. 게다가 순욱을 필두로 수많은 인재가 줄줄이 이어져 들어온다. 이를 두고 우스갯소리로 순욱의 인재 천거를 삼국지판 다단계 마케팅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많은 인재들을 추천한 걸로 유명한 걸 떠나서 구체적인 일화들을 보면, 조조군 위기의 순간에 적재적소의 인재를 파견해 그들 하나로 적을 곤란하게 하고 아군을 이롭게 한 일이 여러번 있다.
- 여포에 의한 연주 세력의 반란 당시, 정욱을 보내 일부 세력을 설득하여 조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 원소와의 대결 당시 종요를 보내 관중 지역의 외교를 안정화시킬 수 있어 원소와의 대결 동안 많은 협력을 얻어냈다.
- 고간의 반란 당시 두기를 보내 反고간 세력을 규합시켜 고간 세력을 약화시켰다.
1.4 가족 관계
삼국지 시대에는 인물평이 상당히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보통 뛰어난 형제들이나 단체에는 명칭을 붙여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당대 청류파의 명문인 순욱 집안도 순숙의 아들들이 뛰어나 8형제들을 묶어 순씨팔룡이라고 칭했다.
- 순숙(荀淑) : 순욱의 조부. 자(字)는 계화(季和). 낭릉(郞陵) 현령.
- 순검(荀儉) : 순숙의 장남. 랑릉장(朗陵長).
- 순열 : 순검의 막내 아들, 순욱의 종부형. 자(字)는 중예(仲豫). 비서감(秘書監), 시중. 한기의 저자.
- 순곤(荀緄) : 순숙의 차남, 순욱의 아버지. 제남상(濟南相).
- 순연 : 순욱의 형제.
- 순소(荀紹) : 순연의 아들. 태복.
- 순융(荀融) : 순소의 아들. 자(字)는 백아(伯雅). 낙양령.
- 순소(荀紹) : 순연의 아들. 태복.
- 순심 : 순욱의 형제. 자(字)는 우약(友若).
- 순굉(荀閎) : 순심의 아들. 자(字)는 중무(仲茂). 태자문학연(太子文學掾).
- 순휘(荀煇) : 순굉의 종손. 자(字)는 경문(景文).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역집해(易集解)의 저자.
- 순굉(荀閎) : 순심의 아들. 자(字)는 중무(仲茂). 태자문학연(太子文學掾).
- 순욱
- 순연 : 순욱의 형제.
- 순정(荀靖) : 순숙의 삼남. 자(字)는 숙자(叔慈).
- 순도(荀燾) : 순숙의 사남.
- 순선(荀詵) : 순숙의 오남.
- 순상 : 순숙의 육남. 자(字)는 자명(慈明). 사공(司空).
- 순채 : 순상의 딸.
- 순숙(荀淑) : 순숙의 칠남.
- 순부(荀敷) : 순숙의 팔남.
- 순검(荀儉) : 순숙의 장남. 랑릉장(朗陵長).
순욱은 자식으로 5남(순운, 순우, 순선, 순의, 순찬) 1녀(순씨)가 있었다.
- 순운 : 순욱의 장남. 자(字)는 장천(長倩).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요절.
- 순감 : 순운의 장남으로 광양향후(廣陽鄕侯), 산기상시(散騎常侍). 30세로 사망.
- 순군 : 순감의 아들. 자(字)는 온박(溫泊). 우림우감(羽林右監). 요절.
- 순숭 : 순군의 아들. 자(字)는 경유(景猷). 광록대부(光祿大夫).
- 순유(荀蕤) : 순숭의 아들. 동진(東晉)의 건위장군(建威將軍), 오국내사(吳國內史).
- 순선 : 순유의 형제. 자(字)는 영칙(令則). 동진의 북중랑장(北中郞將将), 서주·연주의 자사·가절(假節).
- 순의(荀猗) : 순선의 아들. 비서랑(秘書郞).
- 순백자 : 순의의 아들, 순선의 손자. 송의 어사중승(御史中丞). 순씨가전의 저자.
- 순적송(荀赤松) : 순백자의 아들. 송의 상서좌승(尙書左丞).
- 순창(荀昶) : 순백자의 족제(族弟). 송의 중서랑(中書郞).
- 순만추(荀萬秋) : 순창의 아들. 송의 어사중승(禦史中丞).
- 순백자 : 순의의 아들, 순선의 손자. 송의 어사중승(御史中丞). 순씨가전의 저자.
- 순의(荀猗) : 순선의 아들. 비서랑(秘書郞).
- 순관(荀灌) : 순숭(荀崧)의 막내딸.
- 순숭 : 순군의 아들. 자(字)는 경유(景猷). 광록대부(光祿大夫).
- 순군 : 순감의 아들. 자(字)는 온박(溫泊). 우림우감(羽林右監). 요절.
- 순익 : 순운의 차남. 중령군(中領軍). 부인은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 형제의 동생.
- 순담 : 순익의 장남. 서진(西晉)의 소부(少府).
- 순개 : 순익의 차남. 서진의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 순리 : 순익의 삼남. 서진의 호군장군(護軍將軍).
- 순감 : 순운의 장남으로 광양향후(廣陽鄕侯), 산기상시(散騎常侍). 30세로 사망.
- 순우(荀俁) : 순욱의 차남. 어사중승. 요절.
- 순우(荀寓) : 순우(荀俁)의 아들. 자(字)는 경백(景伯). 서진의 상서.
- 순우(荀羽) : 순우(荀寓)의 아들. 서진의 상서.
- 순선 : 순욱의 삼남. 자(字)는 만천(曼倩). 대장군종사중랑(大將軍從事中郞). 요절.
- 순씨(荀氏) : 순욱의 딸, 진군의 부인, 진태(陳泰)의 어머니.
- 진태 : 진군의 아들, 순욱의 외손자.
- 순의 : 순욱의 사남. 자(字)는 경천(景倩). 사공(司空). 후에 서진의 태위(太尉). 참고로 위에 표기된, 진태의 외숙부.
- 순찬 : 순욱의 오남. 자(字)는 봉천(奉倩). 29세로 사망. 부인은 조홍(曹洪)의 딸.
1.5 미디어 믹스
순욱/기타 창작물 문서 참조.
2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인물
『진서』 「왕침등전(王沈等傳)」 | |||
왕침 | 순의 | 순욱 | 풍담 |
荀勗
(? ~ 289년)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의 정치가. 진서에 따르면 자는 공증(公曾), 순씨가전에 따르면 자는 공로(公魯).
증조부는 순상, 즉 조조의 참모 순욱, 순유와 같은 순씨 일족이다.[20] 또한 어머니는 종요의 딸, 즉 종회의 누나다.
위의 신하였지만 사마소의 측근으로 활약하며 서진 건국에 일조했으며, 사마소가 촉 정벌을 결심하고 적임자를 묻자 등애와 종회를 추천했다. 양호가 오를 정벌할 것을 주장하자 가충과 함께 이에 반대했다.
또한 진의 제도인 태시율령(泰始律令)의 제정에 관여하는 등 무제의 정치에 공헌했으며, 동료 장화가 진수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승진시킬 것을 사마염에게 상주했을 때 진수가 저술한 위지(魏志)의 내용에 불만을 품고 무제(사마염)에게 참언해 진수를 한직으로 내쫓았다.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던 순욱은 음률에 대해 완함과 논쟁을 벌였는데, 완함의 상대가 되지 못하자 이에 불만을 품어 완함도 한직으로 내쫓았다.
이후에도 사마염의 최측근으로 중용되었지만 거만한 태도 등으로 인해 결국 무제의 총애를 잃어 상서(尙書)로 승진하고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으며, 마지막에는 삼공 다음가는 벼슬인 의동삼사(儀同三司)의 대우를 받았으나 정치 일선에서 소외되어 실의에 빠져 쓰러졌다.
289년에 죽었고 작위는 제북후였다가 죽은 뒤의 시호는 성후(成候).
재주와 생각이 있어서 임금의 속마음을 잘 살폈고 이리하여서 총애를 굳게 받을 수 있었다고 하며, 오랫동안 중서성에 일하면서 기밀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관리했다. 상서로 승진하게 되자 실망했지만 어떤 사람이 축하하자 "나의 봉황이 노니는 연못을 빼앗겼는데, 여러분들은 어찌하여 경하한다고 하시오?"라고 대답했는데, 상서성은 전국 민정을 총괄하는 정책의 실행기관, 중서성은 황제 가까이에 있으면서 정책을 결정하는 기관이라 이런 대답을 한 것이다.
가남풍이 질투가 심해 손수 몇 사람을 죽이는 일이 일어난 적이 있어 풍담, 양요, 충화, 조찬 등과 함께 가남풍을 구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의 아들은 회남왕 사마윤의 문학과 조왕 사마륜의 참군을 지낸 순조(荀組), 상서복야를 지낸 순번(荀藩)이 있다.
1번 항목의 순욱과 마찬가지로 세설신어에 에피소드가 전한다. 순욱이 사마염의 잔칫상에서 죽순 반찬을 맛보더니 "이 죽순은 고생한 나무를 써서 요리한 것이로군요." 라고 했다는 일화다. 실제로 조용히 사람을 보내 알아봤더니 과연 오래된 수레바퀴를 쪼개 땔감으로 쓴 것이었다고.
문헌정보학에 관련된 역사에서는 중요한 인물로 목록을 4가지로 나누는 분류법인 4부 분류법의 과도기적인 단계에 해당하는 중경신부(中經新簿)를 수록한 사람이다.
2.1 미디어 믹스
삼국지 8~11 |
삼국지 13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도 8탄부터 등장하지만, 연의에서 등애와 종회를 추천하는 부분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게임 상의 취급은 좋지 않다. 또 동족이자 동명의 순문약에 묻히기도 했다. 거기다가 사마염의 총애를 잃었다는 일화를 반영하였는지 문관 치고는 매력이 낮은 편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15/19/78/74. 덫을 가지고 있다. 혼란이 없는 게 아쉬운 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10/16/77/76/41에 상업, 반목, 명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 통솔이 10이라 반목 특기는 활용할 일이 없을 것이고, 후방에서 내정 셔틀로나 쓰면 된다.
삼국지 11에서는 정치가 내려간 대신 매력이 올라 8/19/77/72/53의 능력치.
삼국전투기에서는 작가가 찌질한 놈이라고 까면서 도박묵시록 카이지의 무라오카 다카시로 등장시켰다.- ↑ 당형은 164년에 죽었으니 당시 순욱이 결혼할 때 나이는 유아기였다.
- ↑ 청류파 명사였던 순씨의 자제가 환관 일족과 맺어지는 것에 대하여 주변으로부터 비판을 받은 것이다.
- ↑ 하옹은 젊을적 조조의 재능을 간파했고, 후에 순유와 함께 동탁 암살을 계획한 인물이다.
- ↑ 창작물에서는 조조를 관상으로 인물평하는 연의의 영향을 받아, 관상을 통해 그 인물의 운명 능력을 파악한 것 처럼 묘사하나 실제로 당시에 유행하던 인물평은 그런 신비적 요소가 아닌 해당 인물의 언행을 기초로 평가하는 것이다.
- ↑ 당시는 동탁이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제위에 올리던 시기이다.
- ↑ 삼방순욱라는 고사성어가 있지만 삼고초려와 다르게 정사에는 없는 이야기이다. 순욱의 위상이 제갈량에 대치되어 후대에서 이러한 말을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 ↑ 순욱이 조조를 종군한 것은 이 때처럼 초기 뿐이고 이후 순욱은 조조를 대신해 본거지 수비와 내정을 주로 맡게 된다.
- ↑ 조조 세력에서 문관직 중 조조 다음으로 가장 높은 벼슬을 받은 사람이 순욱이었다.
- ↑ 예형의 이 비방에 대해 배송지는 참신한 해석을 하였는데, 다른 사람의 험담만을 말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예형도 순욱의 외모가 좋은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는 실례로써 들고 있다.
- ↑ =순욱과 순유
- ↑ 연의에선 화가 난 허저에게 죽임을 당한다.
- ↑ 배송지는 순욱처럼 현명한 사람이 왜 이리 멍청하게 나오냐며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했다.
- ↑ 순욱은 한나라를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 ↑ 시법에서 공경 경(敬)은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공경하게 하고 훌륭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 ↑ 대장군은 군부를 대표하는 자리임과 동시에 실질적인 최고 명령권자로 중요한 자리였다. 태위보다 실질적인 권한은 강했다.
- ↑ 행(行)은 낮은 직급에 있는 사람이 높은 직급을 겸임할 때 붙이는 관사이다. 반대로 높은 직급의 사람이 낮은 실직을 겸임할때는 영(領)를 붙인다.
- ↑ 다만 말년에 순욱이 죽은 것도 자연사가 아닌 조조와의 대립에 의한 자살이므로 반드시 그렇다고 장담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목숨을 빼앗지는 않아도 조조가 예전처럼 순욱에게 권력을 맡길지도 의문이다.
- ↑ 별 생각없이 그냥 그릇을 보낸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사소한 부분에서도 행간을 매우 중시하던 고대 중국에서 그러한 행동은 여러모로 오해를 사기 쉽다.
- ↑ 만약 순욱이 조조에게서 도망쳐서 성공해 유비나 손권에게 망명한다면 조조에게는 날벼락이다.
- ↑ 1번 순욱과는 오촌으로 손자뻘이다. 계보를 보면 순숙-순곤-순욱, 순숙-순상-순비-순힐로 순숙까지는 조상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