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번

1 옛 지명

한국의 역사
청동기
시대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
구한말일제
강점기
미소
군정
분단
고조선고구려
부여
고구려발해고려조선대한
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소련
군정
북한
한사군
옥저
동예
신라태봉,후고구려
마한백제후백제미군정대한민국
진한신라신라
변한가야
우산국대한민국 임시정부
탐라국


眞番, 조선시대때부터 진번의 위치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는데 요동에 위치했다는 설에서 한반도 남반부에 위치한 진국을 진번이라고 칭했다는 설, 함경도 지역에 위치해있다는 설 등 많은 설들이 난립했었으나 현재는 대체로 황해도 중남부 지역으로 비정된다. 원래는 고조선과는 별도의 국가였던것으로 여겨지며 기록의 미비로인해 자세한건 알기가 힘들지만 적어도 기원전 3세기 경에는 고조선의 영향권 밖에 확실히 있었던걸로 보이며 위만조선대 들어 고조선이 강성해면서 고조선에 복속됐다. 한무제위만조선을 합병하고 구 조선령에 한사군을 설치할 때, 이 진번에서 따와서 진번군을 세웠다.

2012년 미국 의회 보고서에 한국이 요청을 받아 동북아역사재단에 맡겨 제출한 지도에도 진번이 나오는데, 기원전 3세기에 나오니 당연히 옛 나라 진번. 그런데 이걸 한무제가 설치한 진번군으로 착각하고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한사군이 기원전 3세기에 있었다고 주장했다고 왜곡하는 기사가 버젓이 보도됐다(...) 한국의 역사왜곡 사례에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2015년 들어서 동북아역사재단 때리기가 이덕일의 영향으로 들불처럼 번지는 모양

2 후한 말의 인물

陳蕃
(? ~ 168)

후한 말의 인물. 자는 중거(仲舉).

여남 평여 사람으로 본래는 소릉 사람이지만 아버지는 양보현령을 지내고 진번은 따로 평여에서 벼슬살이를 했으며, 할아버지는 하동태수로 할아버지의 무덤은 소릉에 있어서 해마다 소릉에 제사지내러 갔다.

두무, 유숙 등과 함께 삼군(三君)으로 불린 인물이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15세 때 어느날 부친의 친구인 설근이 그를 보러 오면서 선배가 자신을 보러 오는 줄도 알면서 왜 청소해놓고 맞이하지 않냐고 묻자 진번은 "대장부는 천하를 청소해야지, 어찌 방 하나만을 청소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진번의 품행이 널리 알려져 천거를 받아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이 되었다가 모친상으로 그만뒀으며, 상을 마친 후에는 예주자사 주경이 별가종사로 초빙했지만 의견이 맞지 않아 거부했으며, 진번이 정직하고 청렴해 여러 차례 조정에 천거했지만 출사하지 않다가 태위 이고가 상주해 천거하면서 의랑으로 출사했다.

의랑에서 낙안태수가 되었다가 낙안군에서 고결하다고 알려진 주구를 천거했지만 응하지 않아 직접 청해 주구와 벗이 되었으며, 나무 침대를 준비해 주구가 오면 앉거나 쉬게 하면서 주구가 관아를 떠나면 들보에 걸어놨다고 한다. 부모가 사망한 후에 부모를 위해 동굴이 달린 큰 묘를 짓고 그 동굴을 봉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부모를 20여년간 지켰다고 하는 조선이라는 사람을 여러 관원들이 천거했는데, 진번이 조선을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상중에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거상 기간은 6년으로 그 기간에는 처자와 동거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조선은 20여년간 거상해서 기한을 초과한 자체가 예에 걸맞지 않는데다가 그 사이에 동거한 허위 행위로 조선을 유죄로 판결했다.

대장군 양기가 진번의 평판을 듣고 사람을 보냈지만 만나주지 않았으며, 양기가 보낸 사람이 진번을 속여 양기와 만나게 하려고 하자 그를 때려죽여 수무의 현령으로 좌천되었다가 상서가 되었다. 환제가 영릉과 계양의 산적을 토벌하려고 하자 반대하면서 지방관의 문제로 산적이 나온 것에 대해 조사하면서 삼공부에게 태수, 현령, 현장을 심사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의 충정스러움이 외척에게 거슬렸기 때문에 조정에 있지 못하고 147년에는 예장 태수로 좌천되었다.

예장태수가 되었을 때 세설신어에 따르면 서치를 만나고자 할 때 관원들이 모두들 부군께서 먼저 관청으로 납시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했지만 진번은 주무왕이 상용이 사는 마을을 향해 수레에서 허리를 굽히느라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다면서 내가 현자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 안될 것이 무엇이냐고 했다.

상서령이 되어 다시 중앙으로 복귀했다가 대홍려가 되었으며, 백마 현령 이운이 환제에게 환관을 함부로 후작으로 봉해서는 안된다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투옥되고 이에 이운과 같이 죽기를 원한다는 글을 올리면서 두중도 투옥되었다. 진번은 양병, 목무, 상관자 등과 함께 이운과 두중에 대한 용서를 바라는 연명장을 써서 올렸다가 면직되자 향리로 돌아갔는데, 다시 초청되어 의랑을 거쳤다가 광록훈이 되었다.

159년에 환관들이 외척인 양기 일파를 제거하면서 환관들을 후대하자 이를 반대했지만 환제는 듣지 않았으며, 서치, 강굉, 원굉, 위저, 이담 등을 추천하거나 오관중랑장 황완과 함께 정치의 쇄신을 노렸지만 실패했다. 165년에는 양병의 후임으로 태위가 되는 것을 사양하면서 호광, 왕창, 이응 등을 추천했지만 환제가 허락하지 않아 태위가 되었으며, 166년에 대사농 유우, 정위 풍곤, 하남윤 이응 등이 중상시 소강, 관패 등의 환관들과 대립해 탄압받자 진번은 이들을 변호했다.

167년에 환제가 붕어하고 여러 관리들이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오지 않자 문서를 보내 그들을 질책했으며, 이에 두태후(두묘)가 매우 감격해 고양향후로 봉하려고 했지만 이를 거부하면서 대신 태부, 녹상서사에 임명되었다. 명망이 높아 태학생들에게는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람이라고 평가받았으며, 영제가 즉위하고 사예교위 이응이 죄를 범한 환관 장양의 동생을 주살해 옥에 갇혀 고문을 받고 처형당하게 되자 이응 같은 충신을 처형하면 안된다면서 무죄로 사면해야 한다고 상주해 사면받을 수 있게 했다.

168년에 두무와 모의해서 조절, 왕보 등의 환관을 죽일 계획을 세웠지만 발각되어 직접 80여 명을 거느리고 병사들과 싸우다가 포위되었으며, 결국 체포되면서 투옥되었다가 처형되었다. 그의 아들 진일은 진류 사람인 주진의 보호 덕분에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