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 ||||
▲ 116~139위 | ||||
순위 | 이름 | 국적 | 격추 수 | 비고 |
142위 | 하인리히 프린츠 추 자인 비트겐슈타인 | 독일 | 83대 | |
오토 베슬링 | 독일 | |||
144위 | 한스 그륀베르크 | 독일 | 82대 | |
에밀 다르예스 | 독일 | |||
한스 괴츠 | 독일 | |||
헬무트 미스너 | 독일 | |||
148위 | 프란츠 바이어 | 독일 | 81대 | |
후고 브로흐 | 독일 | |||
빌리 네미츠 | 독일 | |||
빌헬름 필리프 | 독일 | |||
152위 | 이와모토 테츠조 | 일본 | 80대 | 비독일계 2위, 일본 1위 중일전쟁에서 14대 격추 200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함 |
헤르베르트 바흐니크 | 독일 | |||
154위 | 오토 뷔르펠 | 독일 | 79대 | |
155위 | 게오르크-페터 에더 | 독일 | 78대 | |
볼프강 에발트 | 독일 | |||
하인리히 크라프트 | 독일 | |||
막스-헤르만 뤼케 | 독일 | |||
요한-헤르만 마이어 | 독일 | |||
카를-고트프리트 노르트만 | 독일 | |||
알렉산더 프라인팔크 | 독일 | |||
162위 | 후베르투스 폰 보닌 | 독일 | 77대 | 스페인 내전에서 4대 격추 |
요제프 하이뵈크 | 독일 | |||
발터 올로게 | 독일 | |||
165위 | 한스-요아힘 크로신스키 | 독일 | 76대 | |
막시밀리안 마이얼 | 독일 | |||
알프레트 토이머 | 독일 | |||
에트빈 틸 | 독일 | |||
169위 | 한스 빈트 | 핀란드 | 75대 | 핀란드 2위 |
요하네스 분체크 | 독일 | |||
구스타프 프릴링하우스 | 독일 | |||
헬무트 그롤무스 | 독일 | |||
요한 피힐러 | 독일 | |||
한스 뢰링 | 독일 | |||
발데마르 제멜카 | 독일 | |||
요아힘 반델 | 독일 | |||
177위 | 오토 가이저 | 독일 | 74대 | |
프리드리히 하스 | 독일 | |||
카를 하인츠 멜처 | 독일 | |||
▼ 180~228위 |
한스 헨릭 "하세" 빈트
Hans Henrik "Hasse" Wind
1919.7.30 – 1995.7.24
1 개요
1919년 7월 30일 출생. 최종 격추수 75대로 핀란드군 2위의 에이스.
처음엔 브류스터 버팔로 전투기를 타다 나중엔 독일이 제공한 Bf 109 G-6를 탑승했다.
200기 이상의 격추기록을 가진 슈퍼 에이스들이 즐비한 독일 공군이나 같은 나라의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에게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사람도 버팔로를 타던시절 이미 30기를 넘겨 40기에 육박하는 격추기록을 쌓아올린 굇수.
2 겨울 전쟁 시기
한스 빈트의 출생 당시의 유럽은 공중전 시대의 서막을 연 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시기로, 인류의 개척 영역이 드디어 하늘로 까지 확대되며 세계 각국에 항공 열풍이 불어닥치던 시기였다.
한스 빈트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늘'과 '비행'에 관심이 많은 청년으로 성장했고 어려서부터 간직한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군문에 투신하여 드디어 1939년 핀란드 예비군의 파일럿이 되었다.
드디어 꿈을 이룬 한스 빈트였지만 곧 그의 조국에 전쟁의 불길이 닥쳐왔다.
1939년 11월 소련의 핀란드 침공으로 겨울전쟁이 발발한 것. 이 전쟁에서 소련은 우습게 보던 전투종족 핀란드에게 호되게 데이면서 망신살이 뻗쳤고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과 시모 해위해 등이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두 국가의 압도적인 병력차는 극복 불가능 것이였고 결국 핀란드는 소련과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어야 했다.
한스 빈트는 이미 이 시기에 군적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지만 당시 핀란드 공군의 사정은 너무나도 열악했고, 보유 기체 수도 부족해 한스 빈트와 같은 예비 파일럿들도 전투기에 오를수는 없었다.
3 드디어 찾아온 기회
겨울전쟁으로 국토의 10%에 해당하는 영토를 소련에 할양해야 했던 핀란드는 언제 다시 소련이 재침공 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실제로 소련은 주기적으로 핀란드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이 소련을 침공해 독소전이 개전되며 핀란드와 소련의 신경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기어이 소련이 소련 영내를 폭격하고 돌아간 독일 폭격기 들에게 연료를 제공했다는 것을 빌미로 핀란드에 폭격을 가함으로서 계속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계속전쟁이 발발하자 한스 빈트는 제 24 전투비행대[1]에 배속되어 드디어 전투기에 오를수 있었다.
4 구식기체의 활약
그의 첫 격추는 전쟁 발발 3개월만인 9월 22일의 초계임무에서 소련의 복엽기인 I-15기를 격추한 것으로, 이후 일년간 그는 차근차근 격추 스코어를 추가해 가며 총 8기 격추[2]로 에이스로 인정 받았고, 우수한 비행실력과 전과를 인정 받아 4기 편대의 편대장이 되었다.
한스 빈트의 스코어가 급격히 늘어나게 된 계기는 그가 편대장이 됨과 거의 동시에 그의 비행단이 소련과의 접경 지역으로 이동 배치되면서 불가피하게 여러차례의 대규모 공중전에 뛰어들게 되어버린것으로, 그 시작은 1942년 8월 18일 16대의 버팔로 전투기로 60여기의 소련 공군기와 대규모 공중전을 벌여 단 한대의 손실도 없이 16기의 소련 공군기를 격추[3]한 것이다.
두달 뒤인 10월엔 I-16 전투기 8대로 이뤄진 편대에 혼자 뛰어들어 공중전을 벌인끝에 1기 격추를 기록하기도 했고 43년 5월엔 하룻동안 3기의 IL-2 공격기를 격추하는 등 활약하며 꾸준히 스코어를 늘려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향상된 성능의 적기들을 버팔로에 타고 상대하며 힘겨운 전투를 치르면서도 격추 기록은 계속 이어졌고 43년 7월엔 33기 격추를 기록. 만네르하임 십자장을 서훈하며 대위로 진급한다.
5 새로운 날개
구식 기체로 분전하며 뛰어난 기량을 과시하던 핀란드 공군의 에이스들도 날이 갈수록 뛰어난 성능의 적기를 상대하기 버거워 지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고성능의 신형 전투기를 필요로 하던 핀란드 공군 전투조종사들의 염원은 1943년 8월, 독일이 핀란드에 신형 메셔슈미트 Bf 109 G-6 를 제공하면서 비로소 해소되었다.
그러나 한스 빈트는 신규 전투 조종사 교육에 쓰일 공중전 전술기동 교재를 집필해줄 것을 부탁받아 전장을 떠나 있었던 탓에 1944년 5월이 되어서야 신형 전투기를 타고 첫 격추를 기록했는데, 그 뒤 6월에는 13일부터 25일까지 12일간 무려 30기의 적기를 격추하며 신들린 격추 행진을 이어가며 공백기가 무색한 최고조의 기량을 과시했다, 이때의 기록을 보면 폭격기는 물론 중장갑과 방어기총으로 으로 격추하기 까다로운 기체로 알려진 IL-2 공격기를 비롯해 비교적 고성능의 La-5, Yak-9, Yak-7을 비롯해 미국제 P-39 에어라코브라, 영국제 스핏파이어 전투기등. 상대의 종류를 불문하고 격추해낸 것을 알수있다.
버팔로로 1년여가 넘는기간도안 차근차근 쌓아오린 기록과 맞먹는 기록을 보름도 안되는 기간동안 해치워 버린걸 보면 고성능 전투기에 대한 갈증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 하다.
6 마지막 비행
1944년 6월 28일, 24전투비행단에 소련군의 공격루트와 공세 규모를 파악하기 위한 정찰 비행이 명령이 하달되었는데, 귀중한 전력 손실을 우려한 탓인지 단 2대의 전투기만을 투입하라는 명령이였고 이는 거의 확실한 저승행 티켓이나 다름이 없었다.
망설이던 한스 빈트는 또다른 에이스인 동료 닐스 에드바드 카타야이넨에게 어렵게 "자네가 내 뒤를 맡아 줄 수 있겠나?"라고 말을 꺼냈고, 닐스는 흔쾌히 "좋습니다. 마침 밥도 배부르게 먹었겠다... 만약 일이 잘못 되더라도 소련놈들한테 밥 달라고 징징거릴 일은 없겠네요." 라고 승낙하여 오전 10시경 두대의 메셔슈미트가 정찰비행을 위해 이륙했다.
정찰 비행 도중 한스 빈트는 낮은 고도에서 비행중이던 7기의 Yak-9 편대를 발견하고는 급강하 하며 공격을 시도했는데, 적기를 피해 정찰을 계속할것이라고 생각하던 닐스 카타야이넨은 크게 당황했고, 어쩔수 없이 한스 빈트의 뒤를 따라 급강하 했지만 이것은 소련 공군의 함정이였다.
한스와 닐스가 야크기와 공중전에 돌입하자마자 고공에서 무려 20여기에 달하는 소련기들이 단 두대의 핀란드군 메셔슈미트 전투기를 향해 급강하 하며 덮쳐들어온 것이다! 이어진 혼전속에서 한스 빈트는 3기의 소련기를 격추했지만 P-39 에어라 코브라의 37mm 기관포에 동체를 강타당했고 조종석 후방의 방탄판과 캐노피가 박살나며 튄 파편이 팔에 박히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고 급강하로 도망쳐야 했다. 파편과 연기를 내뿜으며 급강하 하는 한스의 기체를 격추로 판단한 소련 공군은 추격하지 않았고 가까스로 기지까지 귀환한 한스 빈트는 활주로에 접근하던 도중 의식을 잃어 무려 500Km/h에 달하는 속도로 활주로에 돌진했으나 의식을 잃기 직전 내려둔 랜딩 기어가 지면에 닿아 여러번 크게 튀어오르며 속도가 줄어 기적적으로 착륙에 성공한다.
곧이어 지상요원들과 동료들이 엉망이 되어버린 메셔슈미트로 달려와 한스 빈트를 끌어내렸고 병원으로 옮겨진 한스 빈트는 그곳에서 종전을 맞았다.
7 기타
버팔로를 타던 시절 소련군에게 제공된 영국제 스핏파이어에게 격추당할 뻔한 적이 있는데, 이때 손상된 기체를 끌고 구름속으로 도망쳐 겨우 벗어난 적이 있다. 문제는 구름속을 빠져나와 보니 소련의 Yak-1전투기가 바로 옆 5M 정도의 거리에서 나란히 날고 있었고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발견한 두 조종사는 이 잠시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이 요상한 편대 비행을 계속하다가, 소련의 조종사가 먼저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곤 기수를 돌려 가버린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수 있었다고...
마지막 임무가 되어버린 정찰 임무에서 겨우 살아 돌아왔을때, 의식을 잃기 직전 비통한 목소리로 "닐스가 전사했다..."라는 말을 남기고 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닐스 카타야이넨은 그가 병원에 실려간 뒤 무사히 돌아와 동료들에게 울먹거리며 "한스가 전사했다..."라고 말했다고. 닐스 카타야이넨도 얼마뒤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는데 한스 빈트의 바로 옆 침상에 배정되었다고 한다. 서로 사이좋게 고인드립
- ↑ 제 24전투비행대가 장비한 전투기는 미국제 F2A 버팔로 전투기로, 이미 본가인 미국에서 조차 구닥다리로 낙인찍힌 퇴물이였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였던 핀란드에서는 소중한 공군전력으로서 여러 에이스 파일럿들의 애기로 활약하며 구국의 전투기로 사랑받았다.
- ↑ 격추수가 적어 보일지는 몰라도 전쟁 초기 핀란드 공군의 공중전은 기본 수배에서 수십배에 달하는 적기 편대에 호위 전투기들을 뿌리치고 폭격기들 사이로 파고 들어 폭격을 방해하고 격추 당하기 전에 냅다 도망치는 식이였다. 말 그대로 안죽는게 용한 싸움. 이런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공중전 임무를 수행하며 적기 격추까지 기록하고 살아 돌아왔다는 것만 해도 굇수 인증이다.
- ↑ 한스 빈트의 전과는 3기 격추
- ↑ 스오무스 위치들을 중심으로 다룬 오로라의 마녀에서 윗 에피소드를 다루었다. 훗훗하게 백합 분위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