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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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전쟁

영어: Continuation War
핀란드어: Jatkosota

제2차 세계대전 중반인 1941년 6월 25일부터 1944년 9월 19일까지 계속된 핀란드소련의 전쟁. 구 소련 및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대조국전쟁의 일부로 본다.

핀란드는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선전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고, 소련에게 영토의 10% 정도를 빼앗겼다. 그러나 소련은 전쟁 후에도 계속 핀란드를 압박했고, 이에 핀란드는 소련이 언제 침공을 재개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 등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고 있었고, 따라서 심정적으로는 핀란드를 응원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얽히는 것은 피하려 했다. 따라서 핀란드가 의지할 수 있는 상대는 나치 독일 밖에 없었다.

독일은 독일대로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군의 저력을 지켜본 후 급속도로 핀란드와 친밀한 관계를 갖기 시작했고, 소련에게 핀란드를 건드리면 독일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함으로써 핀란드가 고대하던 안전 보장을 해주었다. 이 과정에서 핀란드독일이 차후 소련을 공격할 것임을 알게 되었고, 양국은 계속되는 협상 끝에 동맹에 합의, 전쟁 개시를 앞두고 핀란드군은 급격하게 재무장하였다. 노르웨이에 있던 독일 산악군단 소속의 2개 산악사단도 핀란드 페차모로 들어왔다.[1]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3일 뒤인 6월 25일 아침, 소련을 폭격한 독일군 비행기에게 연료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소련 공군기들이 핀란드 내 18개 도시를 폭격하면서 핀란드군도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다른 주장으론 핀란드 주둔 독일 산악사단이 바르바로사 작전과 동시에 소련을 침공하면서 시작됐다는 의견도 있다. 이렇듯 겨울전쟁의 후속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계속전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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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의 전황.

핀란드는 전력의 열세로 전쟁기간 동안 목표였던 무르만스크 함락에는 실패했다. 무장친위대 산악사단이 1941년 11월 말 무르만스크 교외 30km까지 진격했지만, 아직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던 미국이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말라고 핀란드에게 요청하여 친위대의 진격을 보조해줄 핀란드군이 멈춤으로써[2] 이 부대의 진격도 멈췄다.[3] 사실 이 지역은 12월이 되면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지라 전쟁 중에도 동계기간 동안에는 대대급 이상 대규모 부대기동이 힘들었다. 동계기간 동안 활동하는 육군 부대는 극소수의 정찰병들 뿐. 그리고 무르만스크는 미국의 랜드리스 전쟁물자가 소련으로 들어오는 항구였다. 만일 독일군(혹은 핀란드군)이 무르만스크를 점령하면 군수물자 수송이 대단히 힘들어지기 때문에 미국이 핀란드에게 진격 중지 요청을 한 것이다. 어차피 핀란드는 빼앗긴 자국 영토의 회복이 목적이지 굳이 미국과 적대할 이유가 없으니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

공식적으론 핀란드가 독일군과 동맹을 맺고 전쟁을 시작한 것이므로 미국, 영국 등의 연합군도 핀란드와 교전할 의무가 있었고 실제로 영국은 핀란드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론 핀란드와 미영 연합군의 교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위와 같이 외교적인 압박만 가했다. 영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핀란드군 장병들이 "이제 영국 신사 양반들과 싸워야 하니 군복도 제일 깨끗한 것으로 입어야 하나?"라고 이죽거렸다는 야사가 있다. 유일한 교전사례로 1941년 7월 30일 영국 전투기들이 키르케네스페차모에 공습을 가한 적이 있는데 이 공습은 16기의 전투기를 잃고 성과없이 끝났다.망했어요

핀란드는 계속전쟁 기간동안 이전에 빼앗긴 동 카렐리야 지역을 되찾고 1944년까지 유지했다. 하지만 소련이 미국의 쇼미더머니에 힘입은 지원과 자체적인 역량을 발휘해 전세를 뒤집고, 1944년 6월 바그라티온 작전과 병행해 진행된 소련군의 일제공세에 그 동안 유지되던 방어선이 뚫리면서 핀란드는 동 카렐리야를 다시 내주게 된다. 현 핀란드 동쪽의 국경선이 인위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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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의 전황.

이미 독일도 싹 밀려버린데다 자신들도 체급 차이로 인해 더 이상 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진 핀란드는 필사적으로 만본좌의 외교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결국 소련과 평화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다만 이 때문에 핀란드 영토에 남은 독일 파견군이 노르웨이로 후퇴하며 분탕질을 치는 통에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라플란드 전쟁을 치뤄야 했고, 전후 소련에 6억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4]을 지불했으며, 포르칼라 임차, 동 카렐리야페차모 일대의 완전 할양 등 추가적인 영토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사실 소련은 평화 협정 이전까지 핀란드에게 무조건 항복을 조건으로 내세웠으나 핀란드군의 결사적인 저항에 상당한 피해를 입자 핀란드와의 평화 협정에 응한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독일을 완전히 밀어붙이는데 주력군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핀란드에 지나치게 발이 묶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실 소련과 핀란드의 체급 차이를 고려할 때 이만큼의 부담을 준 것만 해도 핀란드가 소련을 이긴 거나 마찬가지다

어쨌든 전쟁의 결과는 이렇게 좋지 않게 끝났지만, 핀란드 사람들이 전투종족이라는 사실은 여기서도 증명되었다. 본가에서는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았던 F2A 버팔로가 이곳에서는 하늘의 진주라는 별명을 얻은 채 펄펄 날아다녔으며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 한스 빈트의 격추수 쌓기와 닐스 에드바드 카타야이넨격추(추락)수(?) 쌓기도 여기서 계속되었다.

  1. 이와 연관되어서 무장SS 부대인 11 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에 핀란드계 장병들이 입대하기도 했다. 이 핀란드계 장병들은 이후 핀란드 전선이 불리해지자 본국으로 복귀해서 핀란드군에 계속 복무했다.
  2.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근거가 필요. 무르만스크 공략은 노르웨이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 2개 산악사단이 주축인 동시에 무장친위대 노르트와 핀란드군 2개 사단이 조공이었으며, 공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소련군이 적극적인 방어로 독일군에게 15%에 달하는 병력 손실을 안긴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모스크바 공방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미흡한 혹한기 대비에 따른 기동력 저하와 영국 및 소련 함대의 해상 봉쇄로 인한 보급난 등이 무르만스크 함락 실패의 근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3. 앞에 이유도 있지만 사실 핀란드에서 무르만스크까지 가는 길은 거의 성경의 창세기 시절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라, 지도에는 길이 표시되어 있지만 그게 동물들이 서로 쫓고 쫓이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길이라 진격하기에도 매우 부담되었기 때문이다.
  4. 여담으로 소련에 대한 배상 중에는 전쟁 중 파괴된 핀란드 주재 소련 대사관저의 복구도 있었다. 그런데 이건 소련군이 부순 것이다(...). 소련 공군이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폭격할 때 오폭을 맞고 파괴된 것. 하지만 이걸 핀란드가 복구해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