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레코드

1 개요

형레코드는 1980년대말~1990년대 중엽에 걸쳐 서울 명동에서 영업하고 있었던 레코드 가게의 이름이다.

당시 수도 없이 많이 있던 레코드(그리고 CD)가게의 하나일 뿐으로 보이겠지만 한국의 오덕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기념비적인 곳이다.

2 상세

형레코드에서는 아래의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일본의 서브컬쳐를 한국의 소년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담당했다.

1. 일본의 음악 CD를 직접 사와서 판매했다.
2.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LD로 사온 다음에, 고객의 주문에 맞춰 그것을 VHS비디오테이프에 더빙하여 판매했다.

구매대행의 선구자라는 시각도 있으나 단순한 구매대행이라고만 볼 수 없다. 일반적인 구매대행은 단순히 돈받고 물건 사오는 심부름꾼에 불과한데 반하여, 당시에는 일본에서 도대체 어떤 문화가 창궐하고 있는지를 한국의 소년들이 전혀 알지 못했다. 즉, 형레코드가 사가지고 온 물품의 리스트를 통하여 한국에 일본 서브컬쳐가 전파되었던 것이다.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형레코드의 사장님은 문화의 전파자, 그리고 한국 오덕의 창시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의 오덕 1세대중에서 이 가게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1]

명동 회현상가의 상아 레코드도 비슷한 영업을 했고,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는 외국 서적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있고, 전진상 기념관에서는 애니메이션 동호회 애니메이트가 비정기적으로 상영회를 여는 등, 명동은 한류가 판치는 지금과는 정반대로 일류의 최첨단 같은 곳이었다. 심지어 인천이나 천안등 좀 심하게 먼 곳에서도 CD와 비디오를 사러 여기까지 천리길을 마다않고 찾아와서 기쁜 마음으로 지갑을 열었다. 정확히는 천리길을 마다않고 두번을 찾아와야 했다. 주문하러 한번, 몇 주 후에 도착한 물건 찾으러 또 한번(...) 그런 수고를 들여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전영소녀>같은 비디오 몇 편에 불과했다.

형레코드의 사장님은 딱히 '문화의 전파자'라는 선구자 의식은 없었고, 가격은 대체로 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덕들이 오덕오덕거리면서 찾아와 기꺼이 지갑을 여니 땅짚고 헤엄치는 장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비디오 더빙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편당 가격을 받았다는 점이다. 즉, 30분짜리 애니도, 120분짜리 애니도 단돈 만원(1990년대 초반의 만원이다!)[2] 만 내면 더빙을 해줬다는 것이고, 비디오 테이프의 가격은 별도였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악덕 장사가 따로 없다(...) 그래서 돈이 튀지 않는 소년들은 길이가 가장 긴 극장판 애니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몇십편이나 되는 TV애니등은 그림의 떡이었다. 리스트를 보며 그저 군침만 흘릴 뿐.

3 의의

세월이 흘러서, 형레코드가 문을 닫았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3] 이제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 오덕들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감상에 빠지곤 했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한 시대의 종언」이었다. 끔찍하게 많은 시간과 돈과 정열을 쏟아야만 일본 음악과 애니를(그것도 극소량만) 감상할 수 있었던 어떤 바보같은 시절이 있었고, 형레코드는 그 시절의 총아였다.

그리고 이 모든 우행의 근본에는 '왜색이 짙다'는 이유(?)를 들어 일본 영화, 애니, 음악, 서적의 수입을 멋대로 금지시켜버렸던 한국 정부가 있었던 것이다.[4]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형레코드같은 보따리 장사들에게 기대어 몰래 애니를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 진지하게 화를 내야 했다. 헌법에도 적혀있는 개인의 행복추구를 무슨 권한으로 방해하느냐고 길거리에서 시위라도 벌여야 했던 문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얘기이고, 그 때 오덕 1세대들은 조직적으로 항의할 방법도 몰랐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5] 게다가 사회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일반 대중의 반일감정은 두텁기만 했다.

90년대 후반 출생자나 00년대 출생자가 보면 그딴 어이 없는 고생을 하면서 왜 바보 같이 당하고 있었냐 라는 식으로 답답할 텐데, 이 시기는 일본 문물을 접하고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을 천하의 인간 쓰레기이자 호로자식을 만들 수 있는 시절이었다. SBS에서 1994년에 특집 미니 시리즈로 방영한 드라마를 보면 그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취급이었는지 알 수 있다. 특집 드라마 제목은 "도깨비가 간다". 반일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로 일본의 극우조직이 나오는데 한국에 왜색문화를 퍼트린답시고 지하시설에서 수많은 비디오 테이프 복사장치를 놓고 애니메이션을 복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극우 일본인이 웃통 벗고 땀투성이로 고생하면서 복사하는 애니메이션이 19금 애니도 아니고 공작왕 OVA.(...) 한 공중파 방송국의 16부작 특집드라마에서 이렇게 다룰 정도니 항의는 커녕 찍소리도 못낼 암흑기였던 것이다. 이 시기 가끔 학원이나 비디오 대여점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틀어주기도 했는데 이걸 알고 학부모가 발끈해서 찾아가 항의하는 짓을 언론에서 미담 사례로 취급하기도 했다. 가끔 형레코드 같은 복사전문점을 경찰이 단속하면 " 불법 왜색 폭력 애니메이션을 유포하던 일당 적발 " 이라는 식으로 언론을 탔다. 이런 시기에 오타쿠들이 목소리를 낸다는 건 사회적으로 매장해달라고 부탁하는 자살행위였던 것이다.

4 결론

조선시대에도 소설은 탄압받았다.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북측에서 "우리는 어떻게 숨어서 한국드라마를 봤는가"라는 증언이 또 나올 것이다. 한반도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서브컬쳐를 억압하는 경향이 있고, 장래에도 - 꼭 애니, 음악이 아니더라도 - 그러한 일이 재발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1. 이 항목에서 설명의 편의상 오덕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실은 오덕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2. 참고로 당시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를 한편 빌리는 데에 300~500원 정도였다. 즉 같은 러닝 타임의 애니를 보기 위해서는 약 20~30배의 돈을 지불해야 했던 것임.
  3. 대략 1997년경의 일이었다. 그 즈음에서 시중에 한글 자막을 입힌 VCD의 형태로 일본 애니가 유통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형레코드는 그 존재 의의가 사라지고 영업이 불가능해진 것으로 짐작된다.
  4. 일본 영화, 애니의 극장 상영 금지령이 해금된 것은 김대중정부의 일이다. 높으신 분의 한 마디로 일본 애니 잡지 뉴타입이 1년 넘게 시중에 자취를 감추거나 하는 일들이 그 이전엔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던 일들이었다. 만화의 번역출간조차도 김영삼정권 이전까지는 금기사항이었다.
  5. 1990년대에도 시위하면 경찰에게 곤봉과 군홧발 세례를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