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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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1대2대3대4대5대6대7대8대9대
이승만윤보선박정희
10대11대12대13대14대15대16대17대18대
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 대법원의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된 인물
* 헌법재판소의 2016헌나1 판결로 탄핵된 인물
대통령 기록관 존영[1]
이름김영삼(金泳三 / Kim Young-sam)
출생지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01 서울대학교병원
매장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학력서울대학교 철학 학사
본관김녕 김씨
출신정당자유당민주당신민당민정당민중당
신민당신한민주당통일민주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
종교개신교(장로회)[2]
부모아버지 김홍조, 어머니 박부련
형제자매1남 5녀 중 장남
영부인손명순
자녀슬하 2남 3녀
생몰년도1927년 12월 20일 ~ 2015년 11월 22일 (향년 87세)
재임기간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이니셜YS
서명

1 개요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대한민국의 정치가. 호는 거산(巨山)이며, 대중들에게는 이름의 영문자 이니셜을 딴 'YS'으로도 유명하다.김03 3김시대의 3김 중 하나이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 인생을 바친 투사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유년시절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거제시(당시는 거제군 복군 전인 통영군)에서 부친 김홍조(2008년 별세)[3]씨와 모친 박부연(1960년 별세)[4]씨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덕분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5][6] 어린 시절에 그는 개구쟁이로 알려져있는데, 한 번은 목이 마르다고 논에 있는 물을 마셨다가 어머니께 회초리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또 90년대 대통령 당선 후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김영삼이 살던 마을의 주민들이 했던 인터뷰를 보면 7~8살 시기에도 김영삼의 부모가 대량의 멸치를 말려 놓고 잠시 어린 영삼에게 지키고 있으라고 하고 집에 다녀오면 그 사이 부랑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와 멸치를 훔쳐가곤 했는데, 보호자도 없는 상황의 어린 영삼은 뒷짐을 지고 거침없이 그 아저씨들에게 다가가 "다 큰 어른이 남의 물건을 훔쳐가면 도둑놈이지요!"라고 훈계했다고 한다.[7] 물론 배고팠던 부랑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멸치를 훔쳐 영삼의 부모가 돌아오기 전에 도망갔다고 한다(...). 어? 여튼 이때 형성된 낙천적인 성격이 훗날 정계에 입문한 후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통영중학교 재학 시절 조선인을 멸시했다고 전해지는 일본인 교장이 전근을 가게 됐는데, 학생들을 동원해 이삿짐을 나르게 했다고 한다. 이때 김영삼은 설탕 부대에 구멍을 뚫어 줄줄 새게 만들었다. 당연히 나중에야 설탕이 줄었다는것을 알게 된 교장[8]은 교감에게 전화를 걸어 범인을 찾으라고 했고, 김영삼은 주저하지 않고 자백했다가 결국 무기정학을 당했다고 한다.[9] 다만 와타나베라는 이름을 가진 이 일본인 교감은 조선인들을 연민했는지 김영삼을 비롯한 조선인 학생들을 많이 감싸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김영삼은 50여년이 지난 후 대통령에 당선되자 직접 이 교감의 가족을 청와대로 초청한 적도 있다. 다만 교감 본인은 일제강점기 때 교사를 했으니 김영삼이 92년에 당선되었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이미 사망한 지 오래였다.

해방이 된 후 경남중학교[10]에 편입되었는데, 이때부터 꿈이 대통령이었는지, 하숙방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종이에 써서 붙여놓았다고 한다(...).[11]

2.2 정계 입문

1947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고[12][13][14],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 2등을 차지하기도 했는데, 그의 웅변실력에 감탄한 장택상과 가까워지게 된다. 후에 장택상의 선거운동에 도움을 주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6.25 전쟁이 터지자 학도의용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웅변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정훈병으로 배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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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9월 29일, 훗날 영부인이 되는 손명순 여사와 함께 찍은 서울대 졸업 기념사진.

전쟁이 끝난 후, 김영삼은 그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장택상의 비서가 된다. 그 후 장택상은 국무총리가 되고, 김영삼은 인사담당 비서관이 된다. 53년 9월 장택상이 총리직을 사퇴하고 김영삼은 자신의 고향인 거제에서 3대 총선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나라를 흔드는 사람들을 무슨 재주로 당하겠느냐”는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마결심을 굳힌 김영삼은 당시 자유당 총무부장이던 이기붕씨의 입당교섭에 따라 자유당 공천을 받아 만 25세의 최연소기록으로 거제군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이때 그가 세운 최연소 당선기록은 21세기인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2위가 만 26세 6개월인 전휴상.

2.3 정치 초년병 시기

풋풋하던 시절의 김영삼(우측)약간 이경영(내부자들의 장필우)을 닮은 것 같기도, 좌측은 그의 일생의 동지이자 라이벌 김대중.

자유당 소속이었지만 이승만의 3선 제한철폐에 반대해,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김영삼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민관식 등 동지 10명과 자유당을 탈당한다.[15] 그리고 자유당을 탈당한후 민주당에 입당한다. 초선 의원 임기가 끝나자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서구 갑에 출마하지만, 자유당 이상룡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민주당 구파인 조병옥을 지원하였다. 4.19 혁명 이후 다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과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재기한다.

1960년 8월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당선됨으로써 다시 여당생활을 하게 되지만, 민주당 구파 일부가 탈당해 신민당을 만들 때 김영삼도 신민당에 입당한다. 하지만 얼마안가 1960년 9월 25일 무장공비(이정섭(당시 25세)과 윤병윤(당시 47세) 등)의 총격에 어머니를 잃는 개인적 아픔을 겪기도 했다.[16] 당시 기사

2.4 40대 기수

1961년 5.16 후 군정의 실무를 맡은 JP의 증언에 따르면, 김종필 본인이 직접 김영삼을 만나 새로 창당될 공화당에 합류할 것을 권했지만, YS는 “전부 다 군사정권 세력에 휩쓸리면 발전이 없습니다. 거기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지금 걷는 길을 가겠습니다”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군정 연장이 발표되자 김영삼은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17] 출소 후 1963년 민주당 구파 출신들이 민정당을 창당할 때 참여하였다. 이후 민정당, 민중당, 신민당에 속하였다.

신민당의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맡아 활동하던 도중, 자신이 탄 승용차가 원인 모를 괴한들이 던진 초산에 습격당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이 사건을 박 정권의 테러라고 주장했다.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참조.

1971년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 든다. 유진산 당수의 지원을 등에 업고 1차 경선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지만, 과반 득표에 실패하면서 2차 경선이 이어졌다. 그런데 1차 투표에서 탈락한 이철승 쪽 표가 김대중에게 옮겨가면서 김대중에 패배한다. 하지만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적극적으로 김대중을 지원하면서 본인의 75년 대선도 함께 준비하려 했으나 유신을 맞게 된다.

2.5 유신독재 시기의 민주화 운동

민주 투사로서의 김영삼을 볼 수 있는 동영상.

"깡패놈들에게 맞아 죽어? 내 기어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철승 국회의원을 매장하고야 말겠다."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에서 김태촌과 맞서며 남긴 말.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무참히 쓰러질 것이다 하는 것을 예언해 주는 것입니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YH 사건 당시 연설[18]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19]

ㅡ 1979년 10월 국회의원에서 제명된 후[20]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할 것이다.

ㅡ 제명된 후 기자 인터뷰에서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함께 해외에 있다가 망명을 선택한 김대중[21]과 달리 김영삼은 귀국하였고, 정치활동에 큰 제한을 받게 되었다. 그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그 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국에는 통치가 있을 뿐이고 정치가 없다. 정치가 없는 곳에 민주주의는 없다고 말하며 강력히 규탄했다.

억압적인 유신체제는 지속되었고, 신민당은 당 노선을 두고 김영삼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이철승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로 갈라졌다. 1974년 신민당 총재 유진산이 사망하자 곧 임시 전당대회가 열렸고,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당선된 김영삼은 선명야당론을 내세워 박정희 정권을 강력히 규탄하고 비판하며 강경 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대내외적인 정세상의 문제로 대여 강경 투쟁에 차질이 생겼고, 1975년 박정희와의 여야 영수회담 이후에 강경 드라이브를 늦추면서 정권과 야합했댜는 비판를 받기에 이른다.

당 주류와 비주류 간의 대립이 격화된 가운데 정식으로 총재를 뽑는 전당대회가 다가오자 김영삼은 자신의 재신임을 통해 단일지도체제를 확고히 하려 했고, 비주류를 등에 업은 이철승은 총재 당선을 대가로 당헌을 개정하여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한다. 결국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이 터지고 만다. 항목에 자세히 나와있지만, 이철승이 동원한 조폭이 바로 김태촌. 이 사건으로 조폭이 코앞까지 닥치는 상황에서도 위 말을 남기는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조폭이 문을 뚫고 총재실로 쳐들어오자 피신으로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다리를 다치는 불상사를 당하기도 했다.

사건 당시의 기개와는 별개로 김영삼은 전당대회장에서 피신해야 했고, 전당대회장은 비주류파가 점거하여 이철승이 총재에 당선되었다. 이에 주류파는 신민당사에서 따로 전당대회를 치러 김영삼을 총재로 당선시킨다. 첨예한 갈등에 분당될 가능성이 생기자, 중재에 따라 다시 총재 선거를 치렀고 결국 최고위원 선출 전당대회에서 이철승에게 결국 패배했다.

이후 얼마간 전면에 나서지 않았으나 이철승 총재가 중도통합론을 내세우거나,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신민당은 유신 체제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는 등, 지속적으로 온건 타협 노선을 걸으며 당내 내홍이 발생하고 만다. 그러자 김영삼은 다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주류와 비주류 내 대여 강경파를 규합하여 강경 노선을 천명, 선명 야당, 유신 정권 타도, 민주 회복 등을 내세웠다. 또한 1979년 3월 백두진 국회의장 선출 저지 투쟁을 주도하였다. 1979년 5월에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철승을 누르고 다시 신민당 총재에 복귀한다.

총재가 된 후 6월 11일에 통일을 위해선 김일성을 만날 용의가 있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 인터뷰는 처음에 별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으나, 6월 18일 북한의 부수상 김일의 명의로 환영 담화가 발표되는가 하면, 북한 노동당에서 노동당과 신민당 간 접촉을 위한 에비회담을 제의하면서 정치적 논란이 벌어졌다. 정부 여당에서는 국론 분열울 조장한다며 비난했으며, 반공우익 인사들이 신민당사와 김영삼 자택에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는 소동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계기로 김영삼을 정계에서 축출하려는 기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1979년 8월 9일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목표로 시위 중이던 YH무역의 노동자 172명은 신민당에 호소하기로 결정하고, 신민당은 이를 받아들여 신민당사를 농성 장소로 빌려주었고, 이들을 돕던 노동 운동가들 역시 신민당사로 보여들기 시작했다. 김영삼은 3일간의 철야농성을 지휘하는 한편, 당직자들을 동원해 신민당사 주변의 경찰들이 당사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하지만 8월 11일 2000여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이를 막던 신민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을 폭행하고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했으며 김영삼은 자택까지 끌려나간다. 이 와중에 노동자 1명(김경숙)이 사망한다. 자세한 사항은 YH 사건 참조. 이 사건을 통해 김영삼 축출 기도가 가시화되었는데, 9월 8일 법원에서 신민당 총재직 가처분 결정을 내린다. 9월 12일 뉴욕타임즈 도쿄 지국장 헨리 스톡스와의 인터뷰에서 카터 행정부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민주화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촉구했으며, 이것이 9월 16일에 보도되자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에서 그에 대한 제명 조치에 착수했다.[22] 10월 4일 그의 제명안이 변칙 통과되면서 그는 헌정 사상 최초로 제명된 의원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참조.

이에 대한 반발로 10월 13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과 민주통일당 국회의원 3명은 항의의 표시로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대해 공화당과 유정회에서는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며[23] 그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민심이 들끓기 시작했고 곧 이어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다. 뒤이어 10.26 사건이 일어나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한다. 10.26 사건 후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용서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들어 박정희의 빈소를 찾았다.

2.6 연이은 정치 규제와 투쟁

날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이런 식으로 힘으로 막을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은, 마음은 전두환이가 빼앗지는 못해!
- 전두환 집권당시 가택연금을 선고 받고 나서

[24]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해 군부가 또다시 정권 장악의 야욕을 드러냈다. 일단은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시기로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야당인 신민당이 직선제 개헌에 합의하고 정치적 활동이 보장되는 시기였다.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해 군부가 또 다시 정권 장악의 야욕을 드러냈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재야 인사들은 새로운 군부 집권을 막으려 김영삼과 김대중 사이를 오가며 양자가 손을 잡도록 중재했으나, 일이 쉽게 되지 않는 가운데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25] 김영삼 본인도 일단은 최규하 정부가 내세운 정치일정론에 반대하며 신속한 개헌을 주장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그러다 1980년 5월 17일 5.17 내란로 인해 정치활동이 일체 금지되었고 곧 김영삼에게 가택 연금 조치가 취해졌다. 또한 김대중에게는 사형 선고, 김종필에게는 보안사령부 감금 조치가 취해지는 등 명백한 정치탄압이 이어졌다. 원래 신군부 세력은 김영삼과 김대중 모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려고 했지만, 그랬다가는 호남과 PK가 결집할 우려가 있다는 내부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양김을 차별적으로 대우하여 두 지역 민심이 분열되도록 하는 전략을 취했다. 결국 지역적으로 보다 껄그러웠던 호남 기반의 김대중에게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PK의 김영삼은 상대적으로 훨씬 온건한 가택연금으로 대폭 완화되었다.

80년 가을 신군부의 강요에 의하여 정계은퇴를 선언하였고 5공 시기, 정치활동을 사실상 전면 금지당했다. 1981년 연금이 해제되자 가신 그룹인 상도동계를 주축으로 하여 정치규제에 묶인 인사들을 규합할 단체를 만들었다. 이것이 민주산악회. 그러나 1982년 4월 뉴욕타임즈 도쿄지국장 헨리 스톡스와 북한산 산행을 하며 인터뷰를 한 것이 정치규제 위반이라는 이유로 두 번째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이 시기에 장남인 김은철의 결혼식이 있어, 신군부 측에서 결혼식에 가도 된다고 회유했으나, 전두환에게 도움이 되는 짓은 안 한다고 하여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5.18 민주화운동 3주년이던 1983년 5월 18일부터 민주화 요구 5개항[26]을 주장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하였는데 이것을 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이라고 한다.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전두환 정권의 어떠한 회유도 뿌리치며 23일간 단식 농성을 벌였고, 결국 본인의 가택연금 해제를 포함, 일부 억압적 조치의 완화를 받아내며 6월 9일에 단식 농성을 중단한다.

2.7 무너진 야당을 재건하다

단식 1년 후인 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켰다. 이는 자신의 계파인 상도동계 외에도 김대중계인 동교동계, 양자에 속하지 않는 범야권 세력을 모두 포함시키는 조직이었다. 이런 야권 결집에 힘입어 연말에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이듬해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야당으로 도약하게 된다. 1986년 11월 김대중이 직선제 개헌을 전제로 한 불출마 선언을 하자, 자신은 김대중의 사면 복권과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다면 김대중에게 출마 권유를 할 것이며, 그를 지지할 수도 있다며 화답하기도 했다.

그해 연말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가 내각제 개헌도 가능하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내놓자 이에 반발하여 내각제 반대파를 이끌고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4.13 호헌 조치를 내놓자, 이를 강력히 규탄하고 5월부터 호헌 조치 철폐 및 직선제 개헌 쟁취를 위한 전면 투쟁에 나섰다. 한 달 반 가량의 거국적인 투쟁 끝에 5공화국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 명의로 6.29 선언을 발표하며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고, 김영삼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승리자로 우뚝 선다. 그러나...

2.8 야당에서 여당으로

제13대 대통령 선거의 참패에 이어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 선전해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는데 큰 기여를 했지만[27], 2년 후에는 3당 합당의 주역이 되었다.

89년만 해도, 정권 중간평가[28]에 나서며 여권을 견제해온 YS였지만[29][30], 당시 최측근이었던 故 김동영 의원은 YS, DJ 두 사람이 87년 단일화 실패 후의 여권 우위 현상을 "꽃놀이패 상황"이라 진단, 여권의 박철언 의원[31]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추진 중인 3당 합당에 동참할 것을 건의했으며, 이에 YS가 최종적으로 합당 동참 결정을 내렸던 것[32]

단순히 여소야대 국면이 바뀌는 것 이상으로 향후 대권 향방까지 좌우할 수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여론으로 전해지는 파장은 매우 컸다. 당장 YS가 직접 발탁하고 개인적으로도 아꼈던 노무현 의원이나 80년대 중반 YS와 국내 민주화 투쟁을 함께한 김상현 의원이 합당에 반발해 당을 이탈했으며, 노태우 정부에서 공을 들인 북방정책이 1990년부터 본격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사실상 2년 뒤에 치러질 대선과 관련된 여권의 행보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

(민주화 동지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선거전략가 김동영 의원과 허주가 냉철하게 판을 짠 민주자유당의 대선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13대 대선 때만 해도, 영남의 표심은 경남(YS 지지)과 경북(노태우 지지)으로 나뉘었지만, 3당 합당 후에는 1200만의 거대 인구 권역이 새로운 여당의 든든한 지지기반이 되고, JP가 중심이 된 충청권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는 호재(好材) 하에, 87년 대선, 88년 총선에 이어 다시 DJ와의 리턴매치가 성사되었으며 정주영이라는 다크호스도 참전함에 따라 3강 구도 하에 대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선거 과정에서 국민당 정주영 후보 측이 초원복집 사건을 폭로하는 대형 악재가 터졌지만, 충청권과, 영남권에서는 YS를 흔들림없이 지지해주었으며, 지지기반이 겹쳤던 김대중 후보(804만 표)와 정주영 후보(388만 표)의 표가 나뉨에 따라 DJ의 호남 및 수도권에서의 선전[33]에도 불구하고, 득표율 42%(997만표), 8.7%라는 여유로운 표차로(김대중 33.8%) 김영삼 후보가 당선, 군사정권 이후 첫 민주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2.9 대통령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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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초기, 문민(文民)정부라 명명하며 행보를 시작하려는 YS에게, 군내(軍內) 파벌 하나회는 군(軍) 인사를 제멋대로 결정해 내미는 배짱을 부리며 기싸움을 벌이려 들었다. 초장부터 기를 눌러놓겠다는 심산이었지만, 상대를 잘못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린 격으로, 오히려 권영해 국방부장관에게 군내 파벌 문제의 심각성을 보고받은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1주일 사이에 40개의 별이 떨어졌을 만큼 기습적으로 전격(電擊) 인사조치 당한 것을 시작으로, 하나회 소속 인사들이 하나 둘씩 정리되면서, 新정부의 강력한 개혁 의지를 표명하는 본보기가 되고 말았다. 하나회 소속 군 장성의 입에서 "군을 너무 홀대한다. 무신의 난이 왜 일어났는줄 아는가?"라는 발언까지 나올만큼 반발이 심했지만, YS는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하나회 정리 작업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후임인 김대중 정부 출범 무렵에는 영관급 장교 몇 사람만 남아 대부분 장성 진급 없이 전역했을 만큼 하나회 파벌의 세는 급격히 줄어들고 말았다.[34] 동년(1993년) 8월에는 사전 예고 없이[35]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했는데, 비록 발표 다음날에는 주가가 폭락하기도 했지만, 불법 자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발표 취지에 국민들이 공감하면서 주가는 사흘만에 다시 안정 수준을 회복했으며, 이듬해까지 실시된 여론조사 공식 지지율이 90%를 넘나들만큼 문민정부는 全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개혁 추진의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취임 한 달 후,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를 필두로 3자리수 전후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대형사고가 1993년 ~ 1995년 사이에 6건이 발생했으며, 부모를 살해한 사건, 부유층 대상 잔혹 범죄사건(하단 주석의 박한상, 지존파 참조)들이 연달아 발생하며 사고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사고의 면면을 보면, 1993년 7월 26일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10월 10일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1995년 4월 28일 대구 가스폭발 사고 처럼 안전문제에 소홀한 무리한 일 추진에서 비롯된 사고가 있고,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제3공화국 ~ 제5공화국 시절 부실하게 건축된 구조물들이 무너지게 된 인재(人災)도 있었다. 즉, 급속한 경제성장의 누적된 모순이 그 시점에서 터지기 시작한 측면이 있었지만, 이런 각종 사고들 + 여러 엽기적인 살인사건[36]들이 언론에 보도되는 그 시점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YS였던 것.[37]

그렇지만, 일부 공기업을 민영화 하고,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으며, 호남인들의 숙원 중 하나였던 5.18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에 착수하는 등 개혁 추진의지는 변치 않았으며[38], 경제 분야에서도 1996년 말까지 기업고정자본형성(고정투자)이 전년대비 30%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일만큼 기업 투자가 활발했기 때문에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5.9%[39] ~ 9.6%라는 호조를 보였으며, 1995년에는 국민총소득(GNI)이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섰고, 1996년 10월 11일에는 경제선진국가단체라 불리는 OECD에 가입할만큼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질 수 있었다. 김영삼 정부 당시 경제지표

그러나, 1996년 12월 26일 새벽, 정리해고안이 포함된 노동법 개정안이 신한국당[40] 소속 국회의원 155명의 표결만으로 7분 만에 날치기 통과된 후부터 여론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리해고와 관련하여 대다수가 노동자였던 국민들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고, 97년초 부도가 난 한보 그룹의 후속 조치과정에서 한보사태가 터지면서 관련 법정 증인인 박석태 전 제일은행 상무가 97년 4월 목을 매 자살하고, 동년 5월에는 차남 김현철이 뇌물 의혹[41]으로 구속되는 악재까지 겹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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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 신한국당, 이회창 신임 총재로 선출 당시

악재가 겹치는 와중에도 YS는 연두기자회견에서 "차기 신한국당 후보는 언제 어떻게 선출하나?"는 기자의 질문에 "적절한 때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당 총재의 입장에서 분명한 내 생각을 당원과 국민에게 전달하겠다."[42]고 답하고, 당시 호평을 받고 있는 이수성 국무총리[43]를 당으로 보내지 않고 행정부 안에 불들어 둠으로써, 여권의 잠재적인 대권주자들을 견제할 수 있는 대항마로 삼는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했지만[44], 무리한 확장 후유증을 앓던 대기업들이 매월 잇달아 도산하고, 원화 가치가 달러당 1900원으로 폭락하는 가운데 Dollar 부족으로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임기 말 지지율이 10퍼센트대까지 추락하게 된다.[45]

  • 1997년 IMF 사태를 한달여 앞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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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8일, 당시 임기말의 대통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치권의 허위사실 유포에 엄히 대처하겠다며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다. 김영삼 대통령,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 엄단. 하지만 직후 IMF 사태가 터지면서 정부의 혼란수습 노력은 빛이 바래게 되었다.

2.10 대통령 임기 이후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ㅡ 퇴임사 中

개혁은 혁명보다 더 어려웠다.

ㅡ 조선일보에서 출간한 회고록에서

임기 막판의 대실책으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지지율 퇴임을 기록했고, 그 후에도 각종 측근들의 비리 등으로 초반의 영예가 무색해질 정도로 여러 모로 불명예스러운 퇴임의 쓴맛을 봐야 했다. 퇴임 2년 뒤에는 한 시민[46]으로부터 빨강 페인트가 주입된 계란을 맞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원로 정치인으로서 의견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였는데,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47]을 지지하기도 했다. 이후 2009년 노무현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 당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2012년 대선에선 박근혜를 지지했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좀 애매한 부분이 있다. 자세한건 후술된 박근혜와의 관계 항목 참조. 다만 이회창에 대해서는 안 좋게 봤던 듯. 이회창은 국무총리 시절에도 김영삼 자신과 맞서다가 사임한 경력이 있고, 15대 대선 당시 문민정부의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지자 신한국당의 당권과 대권을 모두 잡은 상태에서 김영삼 인형 화형식을 벌였으며, 문민 정부의 슬로건이 반영된 '신한국당'이라는 당명도 한나라당으로 바꾸면서까지 YS와 거리를 두려고 했기 때문에 좋은 감정이 있기가 힘든 사이. YS는 15대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캠프 측에서 터트린 '김대중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한 수사를 대선 이후로 미루도록 지시하여 사실상의 선거 중립을 천명했는데, 이회창에 대한 악감정의 반영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검찰은 정권의 칼이기 때문. 그래도 세월이 흘러 훗날 이회창은 김영삼의 장례식에 참석해 업적을 칭송하며 그를 기린다. 가고 나면 허무한 것을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악평하며 곱게 보지 않았다. 감옥에 다녀 온 진보인사들 중에서도 일부는 조건부로 인정하는 경제적 성과에 대해서도 "윤보선장면 총리가 충분히 실현시킬 수 있었다"라는 야박한 평을 내렸다. 다만 YS 본인이 젊었을 적 사사오입 개헌 시도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던 이승만에 대해서는 '나이가 들어 판단력이 엉망이 되었다.'는 비판과 '건국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동시에 내린 것과 김구 선생에 대해 '현실적이지 못한 정치인'(이상주의자적인 면모가 있다는 말)이라는 평을 한 것은 특기할만한 부분. 이에 대해 같은 기독교인이라 이승만을 후하게 평한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파란만장했던 그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는지, 말년에는 90을 바라보는 고령으로서 몸이 성하지만은 않았다. 2009년부터 뇌졸중 판정[48]을 받아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고 하며, 2013년 봄에는 그 증상이 많이 심해져서 중증 뇌졸중과 폐렴 증상으로 쓰러져 2014년 가을에 퇴원할 때까지 1년 반 정도 장기 입원을 했으며[49], 그 후에도 사망 전까지 약 1년간 수차례 단기간의 입원 및 퇴원을 반복해 왔다고 한다. 거기다가 심장병으로 인해 스텐트 시술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각종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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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2일, 아들 김현철이 SNS에 올린 김영삼의 모습[50]

2015년 11월 19일 정오경 갑작스런 고열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였다가, 21일 오후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2015년 11월 22일[51] 오전 0시 22분 32초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을 원인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향년 88세.

세상을 떠나기 전에 차남 김현철 씨에게 통합과 화합이라는 말을 필담으로 써 냈고, 이것이 그의 유언이 되었다.# 참고로 이 필담을 받아든 김현철이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김 대통령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2015년 11월 22일 장지가 대전현충원이 아닌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52]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서 4번째로 안장하게 되는 것으로, 생전 여러가지로 얽힌 이들과 함께 이 곳에서 안식을 취하게 되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살아왔던 동작구 상도동 근처에 영원히 안식을 취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특히 현충원 근처에 있는 고구동산은 생전에 고인이 운동을 나갔을 때 상도동 및 흑석동 주민들과 함께 하였던 흔적이 있기도 한 곳이다. 고인은 회고록 말미에도 고구동산에 올라 주민들과 함께 하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현충원 안장은 11월 26일 국가장이 거행된 이후 시행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국가장은 국장과 국민장이 국가장으로 통합된 후 처음 치루어지는 국가장이다. 묘소의 정확한 위치는 제3장군묘역 우측 능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단독 묘역이다.

김영삼의 빈소에 장남 김은철은 빈소를 지킬 수 없었는데,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상태라서 빈소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차남 김현철이 상주 노릇을 했다. 국회에서 엄수된 장례식에는 장남 김은철 씨도 아픈 몸을 이끌고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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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미국의 대통령 이름과 비슷한 자동차 브랜드에서 나온 장의차[53]에 운구되어 국회, 상도동 사저를 돈 후 안장됐다.젊은 시절에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한 청년은 마지막까지 대통령 이름과 비슷한 차와 함께하며 영면에 들어갔다

3 평가

민주화를 위해 일생을 바쳐 헌신한 한국 민주화의 거목, 그러나 3당합당을 주도하였다.'[54]. 청렴한 정치의 선구자이자 수많은 개혁을 단행한 개혁가. 그러나 국가 및 집안 경영에 실패해 1997년 외환 위기를 막지 못한 국가지도자. 요약하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한국 현대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어찌보면 '민주투사로서의 공헌도'와 '국가지도자로서의 역량'[55]은 별개라는 것을 보여준 인물.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의 지도자였던 레흐 바웬사, 체코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였던 바츨라프 하벨, 루마니아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였던 이온 일리에스쿠와 유사한 케이스.

김영삼이라는 개인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과는 별개로, 군부 독재의 입김이 확 빠진 본격적인 문민 대통령의 시대가 이 사람을 스타트 라인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56] 한국 현대사에 적지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이 외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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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법에 따르지 않고 나름대로 독창적인 글씨체를 구사했다고 한다. ‘大道無門’(대도무문)은 그의 필체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붓만 왔다 갔다 한 듯 필획이 약하다는 평.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굵은 체로 종이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에서 ‘통 큰’ 사람임을 드러낸다고 한다. 또한 글씨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라 실제로도 일을 빠르게 결정하고 좌고우면하지 않았을 성격으로 보인다고. 글씨의 기교가 거의 없고 정확한 정사각형 형태로 쓰고 있는 것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고 올곧은 사람임을 드러낸다는 분석이다. 나름 마니아층이 있어서 그의 글씨는 한 점당 300~ 400만원까지 꾸준히 경매에 낙찰된다고 한다. 최고 기록은 560만 원.
  • 보름달 사건보단 유명하진 않지만 또 도시전설이 있는데 노태우 대통령 시절 김영삼이 노태우의 집무실에 쳐들어와서 막말을 퍼부었다는 소문이 정가에 암암리에 퍼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한 바가 있다.
  • 선친 김홍조 옹(향년 98세)과 아들 YS(향년 89세) 모두 팔순이 넘게 장수하였다. 매일 아침 조깅과 배드민턴을 하면서 젊은이 같은 건강함, 활력을 유지하였으며,[57] 민주화 투쟁을 하던 80년대에는 가택 연금 해제 후 민주 산악회를 조직해, 민주화 동지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뜻을 모으는데도 도움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런 철저한 관리 덕분에 단식투쟁 후에도 회복이 빠른 편이었으며 만 88세까지 장수하였다.[58] 김영삼은 생전에 질산 테러 및 조폭, 경찰들과 부딪히며 위험한 고비를 수차례 넘겼으나, 심적으로 움츠러들지 않고 다음날 김대중과 함께 국회에 등원해 여권의 잘못을 지적하는 배짱을 발하였는데, 이러한 기백 저변에는 타고난 건강체질 + 철저한 관리 + 용기가 있었던 것.
  • 선친 故 김홍조 옹이 멸치 양식업을 하시며, YS의 주변인들 및 주요 정치인들에게 꾸준히 멸치 박스를 선물로 보내줬기 때문에 주요 정치인들치고 YS 멸치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김종필이 김영삼을 조문하면서 이 멸치박스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김영삼은 여야나 정치적 대립을 신경쓰지 않고 설 선물로 멸치를 보냈다고 한다.[59]
  • 이 방언 관련으로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김영삼이 빌 클린턴을 두번째로 만났을 때 대뜸 "Who are you!" 라고 인사를 건넸다. 화들짝 놀란 통역이 대통령이 "How are you?"를 잘못 말한 줄 알고 정정했는데 나중에 왜 그러셨냐고 물어보니 우리 갱상도에선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이게 누꼬?" 라고 인사한다며 그래서 후 아 유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60] 심지어 통역이 동남 방언을 모르자 "배아라(배워라)" 라고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
  • YS 시리즈 내용 中에 김영삼 대통령이 재임 시절 빌 클린턴과 만나서 빌이 "I'm Hillary's husband." 라고 하자, 김영삼이 그걸 'nice to meet you' 비스무리한 인사말로 알아듣고 "Me too."라고 답변했다는 유머가 있다. 한때 이 일화가 사실인 것처럼 항간에 퍼졌지만, 사실 이건 일본의 전 총리 모리 요시로의 일화를 차용한 것이다. 나중에 일본 모리 요시로 총리의 일화가 구설수에 오르자, 일본 측 관계자들은 "한국의 어느 대통령의 일화가 와전된 것."이라 해명하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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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국수를 정말 좋아해서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칼국수집의 단골 손님이었고,[61] 대통령 재직 당시에도 칼국수가 청와대 주력메뉴로 완전히 자리잡은 바 있었다. 청와대에 초청받은 손님부터 귀빈까지 칼국수를 대접받았으며, 이에 대해 면을 싫어하는 사람은 초청받기를 질색했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 김영삼 관련 유머에도 칼국수가 단골로 등장한다. 그 일환으로 임기 말기 외환위기로 김영삼이 인기를 잃자 "먹으면 먹을수록 머리가 나빠지는 음식"[62]이라는 말도 돈적이 있었다(...) 당시 청와대의 칼국수 대접에 대해 정치적인 전략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는데, 시사평론가 이동형은 팟캐스트 이이제이 김영삼 특집에서 "김영삼은 거제의 아버지 선단에서 잡은 멸치(YS멸치 또는 민주멸치라고 불렸다) 를 자주 선물로 보냈다. 멸치라는 게 금방 먹는것도 아니고 두고두고 먹는 식재료이기 때문에 선물받은 사람은 먹을 때마다 YS를 생각하게 된다. 칼국수 육수 또한 멸치로 우려내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이유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다만 김영삼이 생전에 가장 즐겼던 칼국수는 멸치 육수로 끓인 칼국수가 아니라 쇠고기와 사골 육수로 끓인 형태의 칼국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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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서민 음식을 많이 좋아했다고 하며 설렁탕을 먹는 사진이 사후 포털에 올라온 적도 있었다.

  • 그의 딸 김혜영(김현철의 누나)이 배우 이덕화와 국민학교 6학년때 같은 반이었다. 이덕화에게 김영삼은 친구의 아버지인 셈. 그 인연으로 이덕화는 1992년 대선 때 김영삼을 공개 지지하기도 했고 유세에도 참여했으며, 1996년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낙선하였다. 이때 선거자금으로 돈 엄청 까먹었다고.(...)
  • 김영삼이 평소 가장 아꼈던 차남 김현철은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한다는 설이 돌다 본인이 2014년 하반기 재보궐 출마를 시사한 적도 있으나 성사되진 못했다. 원래 무소속이나 한나라당 소속으로 거제 지역구에 여러차례 출마하려 했으나, 과거 구속전례 등 공천받기엔 워낙 여건이 좋지 않아(...) 공천을 못 받았고 2012년에도 새누리당 소속으로 공천받지 못하자 탈당했다. 당초 2016년 총선에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할 가능성이 점쳐졌고, 이에 대해 구체적인 기사도 나왔으나, 부친의 사망 후 충격 때문에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부친의 기념사업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 상도동에 장기간 거주했다. 1960년대 상도동이 영등포구에 속해 있어서 영등포구로 주민등록이 되어있다가 1973년 관악구가 영등포구에서 분구되고 상도동이 관악구에 편입되면서 관악구로 주민등록이 이전되었다가 1980년 동작구가 관악구에서 분구되고 상도동이 동작구로 편입되면서 현재는 주민등록상 동작구에 등록되어 있다.
  • 1994년 6월 북핵 위기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영변 원자로 등 북한의 핵시설을 폭격하려는 계획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63] 북폭은 실행 일보 직전에 취소되었는데, 클린턴 회고록이나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으로는 이는 예상 사상자 규모(100만)에 놀란 클린턴이 취소결정을 내렸던 것으로, 결국 서구권 외교는 철저한 실리, 실용에 바탕을 둔 논리개발이 중요하다는 것을 재확인한[64] 사례이기도 하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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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김두한, 두 번째가 김영삼.
김두한 의원과 같은 시기에 정치인 생활을 했고 그와 같은 당이었던 적도(자유당, 신민당..) 있다. 야인시대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등장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김두한이 3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66] 위의 사진은 국회의원 야구대회 사진이고, 김영삼이 나중에 퇴임 후 2010년대에 김두한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야인시대에서 나왔던 것처럼 부하들 끼니를 챙겨주고자 자신을 포함한 동료 의원들에게 돈을 빌리곤 했고, '머리랑 언변은 좋은데 글은 못 읽는 사람' 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김두한 의원은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읽을 줄을 몰라 김영삼을 찾아와서 좀 읽어달라고 한 적도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평소 김두한에게 "이렇게 작고 예쁜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느냐?"며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김영삼에게 호감을 느낀 김두한이 YS를 만나고자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4.1 대중매체에서

영상물에서는 길용우가 독보적.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삼김시대 등에서 능란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제4공화국에서는 임동진이,[67] 제5공화국에서는 김용건이 맡았다. 드라마 코리아게이트 에서는 이영하가 맡았다. 야인시대에 나온 젊은 김영삼은 정명준[68]이 맡았다.

4.2 김대중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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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씨는 대단히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

ㅡ 김대중[69]

김대중과는 자타가 공인하는 동지이자 라이벌. 어려울 때는 서로 힘을 합쳐 도우며,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의 탄압과 압박 속에서도 야권을 이끌어가며 서로를 지지하고 의지하던 관계였다. 민주화 운동가들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였던 두 사람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를 논할 때 한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양대 거목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정당 계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민주당의 계파에서 김대중은 장면의 신파의 적자로, 김영삼은 윤보선의 구파의 적자로 자리잡아 정치 세력을 이끌었다. 또한 이들은 지주, 자본가 계급의 일부를 대변하던 한민당-민주당 계열을 개조하기도 했다.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새로운 인적 자원을 수혈하고, 정치 세력을 재편하며 민주화 운동 세력으로 쇄신시킨 장본인이 김영삼과 김대중이었다. 정당 족보를 따지면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격이다.

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 대항할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1차 투표에서는 김영삼이 이겼으나,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이 승리하며 김대중이 대선 후보가 되었는데, 김영삼은 결과에 승복하며 '김대중 후보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이기 때문에 김대중 후보의 선거를 적극 돕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의 신민당 내 입지상 서로 맞서는 위치에 서서 대결하기도 했으나,[70] 궁극적으로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는 동일했다. 5공 역시 온갖 정치 탄압과 규제를 받으면서도 협력하여 민추협을 만들고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는 등 민주화 운동의 정계 구심점으로 맹활약했다.

이들의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로 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김영삼이 제안한 범국민 천만 서명 운동이 있다. 이때 김대중은 '군부정권의 감시가 서슬퍼런데 현실적으로 천만이 가능하겠냐며 백만도 어려운데 그냥 백만 서명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김영삼은 '어차피 둘 다 안 될 거면 통크게 천만 지르자'고 설득해 결국 천만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와 묘하게 얽혀지는 얘기가 김대중의 '김영삼은 대단히 어려운 일도 아주 쉽게 생각한다'는 평과 반대로 김영삼의 '김대중은 쉬운 일도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는 평이다. 두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나 성격차가 드러나는 부분으로 흥미로운 얘깃거리다. 어린 시절 가난했기 때문인지 현실적이고 꼼꼼한 자세를 가진 김대중과는 달리 김영삼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부유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저런 추진력 있고 통 큰 자세가 나온 거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어쨌든 이들과 민주화 인사들의 노력으로 한국은 민주주의의 희망을 가지며 전진할 수 있었다. 허나 그 노력의 결실인 87년 대선에서 둘의 단일화가 실패하면서 사이가 멀어졌고, 군부 출신인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고 만다. 그리고 민주화 세력에 욕을 바가지로 먹은 둘은 그 때부터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으로 각자 노선을 걷게 된다. 특히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90년 3당합당을 하자 그 차이는 더 벌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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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92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권을 차지한 김영삼은 아이러니하게도 97년 대선에서 다음 정권을 김대중에게 넘겨주게 된다. 이때 차남 김현철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사면복권[71]이 거론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 했으나, 여론을 거스르지 못한 DJ는 자신의 임기동안 김현철 씨의 사면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김현철 씨의 사면이 이루어진 것은 참여정부 말인 2007년. 둘의 관계는 YS가 김대중에 대해 '착한 척 하면서 내 뒷조사를 엄청 한다'거나,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당시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라 비난했을 만큼 아직 거리가 있는 상태였다.

다만 오랫동안 친구였으면서 서로 투닥투닥하다보니 주고받는 말의 강도에 비해 사이가 그리 험악하지는 않았다. YS는 'DJ와 노무현은 공산주의에 가까운 정권, 나쁜 정권으로, 나중에 심판받을 것이다', 'DJ는 내가 광주로 유세를 가면 깡패를 동원한 나쁜 사람이다', '거짓말만 한다', 'DJ는 독재자다' 등 2000년대 들어서도 막말 수준의 발언을 종종 했지만 사람들은 'YS가 또...'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는 서로 간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수준이었다. 츤데레냐? 여담으로, 이 시기 김영삼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수한 다까기 악평을 가하긴 했지만 그들과도 정작 만나선 별 충돌 없이 잘 지냈고, 특유의 친화력 덕에 험악한 관계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전두환은 예외인 듯.

그렇게 2000년대에도 티격태격하던 둘의 사이는 결국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사망 직전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병문안을 가면서 화해의 움직임으로 나아가게 된다. 당시 병문안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 전 대통령이 "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젊을 때부터 동지 관계였다. 협력도 오랫동안 했고 경쟁도 오랫동안 했다. 둘이 합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쏟았다. ... (기자들이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냐고 묻자) 그렇게 봐도 좋죠. 그럴 때가 온 것도 아닙니까?"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혼수상태였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를 위로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망 후 측근인 동교동계 정치인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며 서로 간 화해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이후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조문을 오고 상도동계 정치인들을 위로하면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유언대로 통합과 화합이 이뤄진 셈이다.

4.3 전두환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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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jpg[72]

80년대 민주투사 시절엔 당연히 사이가 안 좋았다. 이 영상에서 보듯 그 서슬퍼런(...) 전두환 정권 시절부터 자길 가택연금시킨 전두환을 가열차게 디스했다. 이 기간 동안 벌어진 목숨을 내건 23일 단식투쟁은 유명하다. 게다가 김동영, 최형우 등 양김 측근인 야당(신민당) 인사들이 전두환 정권에게 숱하게 고문당하기도 했다.

다만 90년 3당 합당이 이뤄지면서 군사정권 관련자 인사들이 내건 조건이 살려달라 처벌의 감형이었다. 이는 집권하자마자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현직(?) 하나회 척결 외엔 집권 3년째인 1995년 전반기(12.12 사태와 5.18의 이론상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되던 시기)까지만 해도 여론의 질타를 받은 그 유명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못한다'라는 검찰의 괴상한 논리에서 볼 수 있듯 전직에 대한 처벌이 자제되면서 어느 정도 지켜지는 듯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에서 '성공한 쿠데타 역시 처벌할 수 있다'라는 판결이 나오고 1995년 10월 통합민주당 국회의원이었던 박계동이 노태우의 비자금 존재를 폭로하면서[73] 노태우에 대한 구속 수사가 이뤄지고, 국민들의 5-6공 비판 여론이 최고조에 이르자, 이를 계기로 김영삼은 뚝심있게 <5.18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한 신군부 재판 회부를 이끌어낸다. 복수는 처절하게 물론 군사 독재를 펼치고 국민들을 억압하던 자들의 뒤통수를 친 셈이었으니, 국민들에게는 폭풍 같은 인기와 지지를 얻었다.

이후에도 김영삼은 그 특유의 직설적 화법으로 전두환을 디스했다. 2010년 광복절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을 때 전두환도 같이 참석하자 전두환이 듣는 와중에 "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 몬 간다."라고 폭풍 디스를 했으며 와인을 찾는 전두환에게 "니는 청와대에 술 처무러 왔나?"라고 대놓고 면박을 주어 전두환이 화를 참지 못하고 황급히 돌아간 적이 있다.[74] 이 때 전두환이 속으로 얼마나 사무쳤으면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 사망 당시에도 조문은 했지만 화해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끝까지 대답을 안 했다(...).

사실 김영삼은 인터뷰를 할 때도 전두환이 뻔뻔하고 치졸하다고 엄청 까댔다. 정권을 잡았을 때는 독재자로서 폭압적인 모습을 보였으면서, 문민정부 출범 후 잡혀들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이를 김대중과 김영삼이 감형시켜주니 후에는 낯짝 두껍게 굽실거리는 게('아이고, 김대중 김영삼씨, 날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한다. 김영삼은 차라리 본인이 전두환과 함께 나란히 법정에 세웠지만 노태우가 인간성이라든가 성격 면에서 더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언급했다.

4.4 노무현과의 관계

인권변호사로서의 행보를 눈여겨본 김영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통일민주당으로 입당시키며 노무현을 정계에 입문시킨 장본인이다. 이후 노무현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청문회 스타'로 이름을 날리는 등 주가를 높이기 시작했고, 김영삼도 사적으로 노무현을 무척 아꼈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좋은 관계는 노무현이 3당 합당에 반대하며 민주자유당 합류를 거부하자 크게 틀어지고 만다.

노무현은 특유의 강직한 성격 때문에 김영삼의 야합 행태에 실망하여 민자당에 합류하기를 거부하였고, 이후 92년 대선에서 통일민주당의 잔류파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합당해 민주당이 탄생하면서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75] 이에 대해 김영삼도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노무현 대통령 출마에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기도 했고,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와 같은 악평을 상당수 남기기도 했다. 노무현 역시 김영삼에 대해 "87년 때까지는 DJ와 함께 훌륭한 분이었으나 3당 합당으로 모든 걸 망친 장본인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 후 노무현은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는데, 김대중이 내세운 지역등권론 때문에 성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결국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원기, 유인태, 원혜영 등과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당하여 DJ 지지로 다시 돌아가긴 하지만, '김대중 역시 김영삼 못지않게 지역감정을 이용하고 휘두른다' 고 평가, 양김이 모두 지역감정에 책임이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김영삼을 예방하고 서로 덕담을 나누는 등 사이가 다시 복원되는 듯했으나, 이때 예전에 김영삼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내보이며 '이 시계만 보면 지금도 총재님 생각이 난다'는 등 옛 정을 언급했다가 호남 지지층으로부터 역풍이 불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것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해 이를 듣고 화가 난 김영삼과 사이가 다시 틀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09년 노무현이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자 표면적으로는 장례에 참여하였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에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김영삼은 일본잡지 <애플타운> 9월호 인터뷰에서 잡지의 발행인 모토야 도시오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 취임 후 한일관계가 다소 안정됐지만,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양국 관계가 크게 흔들렸다"고 말하자 이명박도 훗날 다시 흔들리게 할 줄은 알았을까? 그런데 김영삼부터 조선총독부 폭파한 장본인 "노무현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른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실수한 것이었다.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잡지에 따르면, 김영삼은 이어 "내가 발탁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그는 내게 빚이 있는데, 이렇게 돼 버려서 조금 실망했다"며 "나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헌화할 꽃만 그냥 던져버리고 왔다"고 한다. 여담으로 MB도 김영삼이 정계에 입문시켰다. 그리고 김영삼은 박근혜나 정주영을 골탕먹이는 카드로서 같은 기독교인이기도 했던 이명박을 자주 밀어주었다. 훗날 공천에서 상도동계가 무수히 떨어지자 거리감이 생긴 감은 있지만.

그리고 이 인터뷰가 논란이 되자 김영삼 측은 사석에서 한 발언이 일본 잡지에 보도된 것에 대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영삼의 김기수 비서실장은 28일 오전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도시오 회장이 일본 사람 여럿과 함께 각하를 만나고 갔지만, 그분이 기자도 아니고 정식으로 인터뷰한 것도 아니었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김영삼의 '가족장' 발언에 대해 "한국과 일본 모두 자살률이 높다는 기사가 나온 시점에서 각하는 '국가 지도자가 자살하면 후세를 위한 교육에 안 좋다'는 취지의 얘기를 먼저 했는데, 문맥이 거두절미되고 엉뚱한 얘기가 기사로 나간 것 같다"고 전했다.#

4.5 박근혜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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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표정이 떨떠름해 보인다. 웃을 일도, 웃는 사진이 없었다.[76]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영삼은 중앙정보부에게 목숨을 위협받았으며 반독재와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으니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와는 대체로 껄끄러운 관계를 형성해왔다.

김대중 정권 당시 김영삼은 1999년 5월 서울 수유동 4·19 국립묘지를 참배한 자리에서 퇴임 후 처음으로 시국 성명을 발표하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남았으며 결코 미화될 때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에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부총재를 맡았던 박근혜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하면 옳다고 주장하고 남이 하는 것은 부정하는 반사회적 성격의 인물이 다시는 정치 지도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김영삼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더 큰 위험을 겪은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공을 인정하는 등 김영삼의 과거 심판과 달리 과거와의 화해를 위한 행보에 대한 반대 의견으로서 한 발언이다. YS “박정희 정권 결코 미화하면 안 된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에는, 자신은 박정희 정권과 싸운 사람이고 그 정권이 자신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아버지와 딸은 다른 법이라며 다소 호의적인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2006년 박근혜가 면도날 테러를 당했을 때는 직접 병문안을 가서 질산 테러를 당한 자신의 과거를 언급하기도 했다.# 위로or디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김영삼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와 치열하게 경쟁했던 이명박 후보의 손을 들어주면서 멀어졌다.

박근혜의 박정희 미화 발언에 격노하기도 했는데, 2011년엔 "18년 장기 독재를 한 박정희가 이 나라 군사독재 정권의 원흉"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영삼은 2012년 7월 대선을 앞두고도 박근혜를 “유신시대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사실상 유신의 2인자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대통령이 되기에는 결격사유가 있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기사.

이러한 두 사람의 악화된 관계는 2012년 절정에 달했다. 그해 총선 공천이 유력했던 차남 김현철 여의도 연구소 부소장이[77] 모종의 이유로 공천에서 탈락하자 새누리당 수뇌부를 비난했으며, 7월에는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박근혜 후보를 겨냥해 지금도 회자되는(...) 칠푼이라는 독설을 날린다. 다만 몇달 뒤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박근혜 후보가 방문하자 위의 사진처럼 악수를 하며 노련한 정치적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다만 그 해 대선 직전에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을 했다는 얘기는 좀 미묘한 부분이 있다. 당시 박근혜 후보 지지 의사를 밝혔다는 주장은 김무성 의원 선거 유세에서 나왔고, 뒤이어 김영삼의 조직이었던 민주동지회가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지지 선언이 사실인 것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얼마 뒤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을 한 상도동계 김덕룡 전 의원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역시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을 했던 차남 김현철에 따르면, 박근혜측에 악감정은 그대로 남아있으나 보수 세력의 승리를 위해 박근혜 후보 지지를 할까 말까 사적으로 이야기한 바가 있을 뿐 공개적으로 밝힌 적은 없으며, 현재는 엄정중립 상태로 문재인 후보가 상도동에 방문해서 성의 있는 모습을 보일 경우 김영삼 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지지 표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78] YS의 퇴임 후 대변인 역할을 맡은 박종웅 전 의원 역시 김 전 대통령이 공식적인 입장을 내보인 일이 없고 입장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도 중립으로 행동을 같이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후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고 대통령 취임식날이 되자, 측근들이 다 말렸는데도 불구하고[79] 그대로 취임식장에 갔지만[80], 박 대통령의 취임 연설에서 대놓고 조는 모습이 카메라에 비춰지기도 했다(...).

결국 김영삼은 박근혜 임기 중 사망하고 말았는데, 사망할 당시 박근혜는 해외순방 중이었고, 귀국 후 바로 빈소를 찾아가 헌화를 하긴 했다. 그러나 이후 일정을 소화하면서 피로누적으로 인한 고열증세 때문에 주치의가 쉬라고 권유했고 영결식 당일 눈이 내리는 등 기후상태마저 좋지 않아, 본인이 의도했든아니든 장시간 진행되는 영결식에는 참석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운구차가 떠나는 7 ~ 8분간 예를 표한 것이 전부. 이로서 박근혜는 '최초로 국가장에 참석하지 않은 현직 대통령'이라는 기록 아닌 기록을 쓰게 되었다. 결국 둘의 묘한 인연은 끝까지 이어진 셈이다. 고인의 마지막 길을 좋게 보낼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대통령의 불참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YS 가 평생 민주화를 위해 누구와 싸웠는지 잠깐 생각 한다면....

4.6 한자 선호파

한글로만 된 신문은 읽지도 않아요. - 월간조선 2001년 2월호 내용 중 조갑제 편집장과의 상도동 사저 인터뷰에서

사적으로 한자 선호자로 알려져 있어서 항상 친필 사인에도 한글 대신 한자로 사인을 하는 편이다. 또 신문을 읽을 때도 한글로 된 신문은 보지도 읽지도 않는다고도 조갑제 인터뷰에서 밝혔다. 같은 한자덕후로서 죽이 맞았을 듯[81]

또한 퇴임 후에도 한자교육은 국민들의 인식능력이 향상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면서, 한자 선호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였고, 한자교육 강연회에도 곧잘 참석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4.7 인기

집권 초중반에는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도입,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82] 등으로 초반 지지율이 80퍼센트를 상회했었다. 지지율이 최고야? IMF 박으면 꼼짝못해

덕분에 그를 소재로 한 유머집도 발간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83] 그와 관련된 여러 유머 시리즈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84]

그 외에도 심지어 PC용 퍼즐게임(보스전은 대전 액션 게임형식...)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니... 플레이 영상

물론 단순히 인기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언론등을 압박하던 이전 정부들과는 다르다면서 김영삼 본인이 자신을 소재로 한 풍자작품등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담이 아니라 이전 정권까지만해도 풍자 한 번 잘못하면 코렁탕을 먹을수있던 시대였기도 했고. 전임인 노태우 역시 자신의 풍자를 허용해서 여기저기서 노태우를 풍자하거나 하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물태우라는 별명이 대놓고 쓰이는 등..) 그러나 노태우 역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당시는 민주주의 공화정 체제가 시작되긴 했지만 하나회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등.. 전두환과 달리 자신을 비판했다고 잡아가서 고문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노태우 정권 때도 심한 풍자를 할 경우 데려가서 심문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다고 한다.

4.8 어록

YS는 특유의 직설적 화법으로 유명했다.지금 대통령도 특유의 화법으로 유명하지만거물 정치인 치고 YS에게 안까인 사람이 드물다. 언론 등에서 언급된 주요 어록을 정리. 위의 일생 파트에서 언급이 된 어록들도 존재한다.

어제 한잠도 자지 못하고 여러가지 정신적으로 피로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김영삼이가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한[85] 바른 길, 정의에 입각한 일, 진리를 위한 길, 자유를 위하는 일이면 싸우렵니다. 싸우다가 쓰러질지언정 싸우렵니다.

ㅡ 1969년 초산테러 당시 국회연설 中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필연코 머지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

ㅡ 1979년 YH 여공사태 당시 연설 中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ㅡ 1979년 초 신민당 총재로 당선된 후

"아주 악재만 아니면, 정치인이 언론에 다양하게 노출되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ㅡ 야당 총재시절, 여권에서 일부 언론을 통해 공격을 시도하자 했던 말.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자들과 자주 모임을 갖으면서 이야기를 화통하게 경청, 이들 대부분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한다.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

ㅡ 1983년 5월29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 단식농성 후

날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이런 식으로 힘으로 막을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은 마음은 전두환이가 뺏지를 못해!

ㅡ 1985년 2월 8일 상도동 자택 앞에서

선거혁명을 통한 민주화가 내 지론이었으나, 이 정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오늘 내내 생각한 끝에 이 정권을 완전히 타도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

ㅡ 1987년 대통령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3당 합당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ㅡ 취임사 中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나는 대통령인 나 자신이 솔선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하는 바이다.

ㅡ 93년 첫 국무회의 中, 이후 공직자 재산공개 시행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

하나회 척결시 반발에 일침을 놓으며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금융실명제 관련 담화문 中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ㅡ 1995년 한 중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 일본 정치인의 거듭된 망언을 언급하며

이에 일본 측에서는 '버르장머리'라는 단어를 번역할 말이 없어서 고민했다는 일화가 있다. 「ポルジャンモリ」って何? 일견 시원해보이는 발언이지만, 훗날 일본은 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하고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한국 내 외화를 적극적으로 회수함으로써 문민정부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것으로 복수했다.(...)

'실정법에 엄연히 접촉되는 허위 사실 공포, 후보자에 대한 비방 등이 정치활동의 전부인 것처럼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인신비방 등이 자행되는 풍토를 정화하기 위해 정부의 권한을 총동원할 것입니다. 모든 선거관련 범법자는 소속 정단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리할 것입니다.'

1997.11.3 mbc 뉴스데스크/ 김영삼대통령,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 엄단

나도 전에(제3공화국) 초산테러 등 테러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 이번 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

ㅡ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테러를 당하자 문병을 간 자리에서

만약 내가 하나회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86]

ㅡ 2008년 우석대 초청 강연 中

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젊을 때부터 동지 관계였다. 협력도 오랫동안 했고 경쟁도 오랫동안 했다. 둘이 합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이룩하는데 큰 힘을 쏟았다. ... (기자들이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냐고 묻자) 그렇게 봐도 좋죠. 그럴 때가 온 것도 아닙니까?

ㅡ 2009년 8월 10일, 병상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문병하며[87]

5 상도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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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동계는 김영삼의 자택이 상도동에 있다해서 김영삼 계파의 일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한창 잘나갈 시절엔 김대중동교동계와 쌍벽을 이루던 계파였다. 역시 라이벌 김영삼 본인이 하나회 인물들을 쓸어버린 후, 현재 새누리당의 뿌리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2010년대인 현재도 새누리당의 원로급을 맡고 있으며, 대표적인 현역 정치인으로 김무성[88], 서청원, 김덕룡, 김현철[89], 정병국[90] 등이 있다. 은퇴한 이로는 김수한, 최형우, 김동영[91], 서석재, 박종웅, 강삼재, 신상우, 박관용 등이 있다.

이외에도 김영삼의 천거로 정치를 시작한 정치인으로 한나라당계에는 이회창[92], 이인제, 이명박[93], 김문수, 이재오, 홍준표, 안상수, 정의화, 이완구 등이 있고, 민주당계는 노무현, 손학규[94] 등이 있다. 다만, 이들은 상도동계로 분류되진 않는다. 김영삼과 함께 정치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아 김영삼 직속(또는 비서)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 다만 'YS키즈'라는 표현은 언론에서도 종종 사용된다.

1984년 말 김영삼과 김대중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기반으로 신한민주당을 창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민추협 세력과 기타 세력 간 인적 지분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 김영삼 계열과 김대중 계열의 의견이 나뉘면서 김영삼 계열 정치인들을 분류하기 위해 상도동계로 불렀던 것이 시초다. 이후 대체로 연합하며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으나 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며 뜻을 달리하게 됐으며, 3당 합당을 계기로 동교동계와는 완전히 갈라졌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계파였지만 김영삼 퇴임 후, 이회창이 당권을 차지하여 한나라당이 보수정당으로서 색을 더 갖추기 시작하였고, 이해타산에 따른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상도동계라는 정치 계파가 무색해졌고,[95] 멤버들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갈 순 없는지 연로해감에 따라 대부분이 정계에서 자취를 감춘데다 남아있는 정치인도 친이친박[96] 같은 새로운 구심축의 등장에 따라 여기에 속하면서 현재 상도동계를 자처하는 인물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상태다.[97] 그리고 구심축이던 김영삼까지 사망함에 따라 상도동계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세대가 되었다.

6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54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23선거구)[98]
자유당20,770 (44.8%)당선 (1위)역대 최연소 국회의원
(만 26세 5개월)
1955년 민주당으로 당적변경
(3선개헌 반대)
1958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2선거구)[99]
민주당18,862 (43.1%)낙선 (2위)
1960제5대 국회의원 선거
(민의원, 경남 2선거구)
민주당29,754 (66.9%)당선 (1위)1961.5.16 자격정지
(5.16 군사정변)
1963제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3선거구)[100]
민정당39,946 (39.4%)당선 (1위)
1967제7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3선거구)
신민당61,957 (56.8%)당선 (1위)
1971제8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3선거구)
신민당74,589 (62.5%)당선 (1위)1972.10.17 자격박탈
(10월 유신)
1973제9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2선거구)[101]
신민당83,661 (39.6%)당선 (1위)
1978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2선거구)
신민당137,826 (53.1%)당선 (1위)1979.10.4 제명
(김영삼 제명 파동)
1987제13대 대통령 선거통일민주당6,337,581 (28.0%)낙선 (2위)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서구)
통일민주당72,599 (66.5%)당선 (1위)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
(3당합당)
1992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번)
민주자유당-당선최다 국회의원 당선 (9선)
1992.12 의원직 사퇴
(대통령 당선)
1992제14대 대통령 선거민주자유당9,977,332(42.0%)당선 (1위)

긴 정치경력 덕에 길고 아름다운 선거이력을 볼 수 있다
선거이력이 긴 것은 라이벌 DJ도 마찬가지지만, 김대중과 달리 낙선전력이 딱 2번 뿐이다. 선거이력의 절반이 낙선인 김대중과의 엄청난 차이. 9선 의원이란 어마어마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7 관련 문서

  1. 공식 초상화
  2. 예장합동 교단 소속인 충현교회의 원로 장로.
  3. 99세로 별세. 부자의 나이 차이는 17살이라고 알려져 있다.
  4. (북한에서 침투한 간첩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에게 총격으로 피습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나이는 모친 박부연씨가 부친 김홍조씨보다 10살 가량 많았다고 한다.
  5. 그냥 사업을 한 정도가 아니라 업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였고 말년까지 꾸준히 사업을 이어나가 김영삼 대통령 당선 이후 명절이 되면 측근들에게 곧잘 멸치 선물을 보내곤 했다.
  6. 반면 김대중은 어려운 형편에서 살다가 해운사업 등을 통해 해운회사를 꾸리며 떼돈을 벌게 되었고, 그 기반을 이용해 YS와 비슷한 시기 정계에 뛰어들었다.
  7. 물론 당시 그의 가족들이 마을에서 부유한 편으로 유명해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8. 당시 설탕은 비싼 물건이었다.
  9.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한 썰에 의하면, 이 교장은 조선인을 멸시하여 점심시간에 종종 학교를 돌다가 조선인 학생들이 도시락에 싸온 깍두기를 "마늘냄새나 풍기는 조센징들의 음식 따위 재수없다"며 빼앗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짓을 자주 했고, 어느날 김영삼의 어머니가 싸준 깍두기도 교장이 버려버리자 김영삼이 크게 분노하여 "이게 무슨 짓이오? 우리 어머니가 손수 싸준 깍두기란 말이오!"라며 강하게 대들었다가 거꾸로 교장에게 혼이 나고 모욕을 당해 그 분을 참지 못하고 원한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후에 기회가 와서 저 설탕포대를 망가뜨리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는 썰이다. 이 일이 사실인지아닌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90년대 김영삼 대통령 재직 당시 YS에 대한 책이나 만화위인전?가 많이 나왔고, 그 중 많은 책에 이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전쟁 분위기 속의 일제 말기이던 당시 사회분위기상 칼까지 차고 다니던 교장들도 꽤 있던 현실 속에서 그에게 대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지만, 이 일화는 후에 정치를 하면서도 물러나지 않는 드센 기세를 보이며 살았던 정치인 김영삼의 인생과 닮아 있는 일화라 실존했던 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김영삼이 생전에 직접 증언한 것인지는 추가바람.
  10. 이 때는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가 하나의 학교였기 때문에 경고 출신으로 본다. 보결로 들어갔다.
  11. 사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초등학교, 당시로 치자면 국민학교 시절부터라고 알려져 있어서 이야기가 많았다. 농담이 아니고, 1992년 대선에서 정주영 후보측은 김영삼 후보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일제시대라서 대통령이 없었다고 하면서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고 언급을 하고 다녔다.
  12. 1948년 입학이라고 김영삼 생가에 전시된 성적증명서에 기재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청강생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청강생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김영삼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만들어낸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일단, 과거 대통령 선거 당시 서울대에서 정식 입학 및 졸업생으로 발표하였으며 또한, 서울대 동창회 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3. 청강생이라는 설에 대해서는, 이때는 미군정기라 체계적인 교육부처가 아직 설립되지 않은 시기였고 당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었다. 청강생 신분으로 수업을 듣고 성적을 좋게 받으면 졸업장을 주는 시스템이 있었는데, 김영삼은 이 케이스였다는 것이다.
  14. 그런데 2001년에 공개한 김영삼 본인의 성적표는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꼴찌수준. 그러고도 어떻게 졸업을 따냈는지는 진실은 저너머에... 김영삼의 대학교 성적표
  15. 이는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재현되기도 했다.
  16. 본인으로선 정말 슬픈 사건이겠지만, 북한과의 연관성은 완전히 끊어지며 여타 야당 인사들과는 달리 빨갱이라고 매도당하는 일은 없어졌다. 당대 야권의 또다른 양대 산맥인 DJ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던 셈.
  17. 김대중과 달리 수감이력이 없다는 식의 비교를 많이 하고는 하지만 이때 수감경험이 있다.
  18. 10.26 사태가 일어나기 약 두 달 전이다.
  19. 타계 당시 각 방송사들의 추모 특집기사에서, 실제 육성을 앞다투어 삽입하여 방송했는데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
  20. 이렇게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나, 그의 연보를 전산화해서 공개하고 있는 김영삼 민주 센터의 연보에서는 1987년 8월 10일에 열린 '양심수 전원석방 및 민주화 쟁취를 위한 범국민실천대회'에서 해당 발언을 한 것 검색된다. 실제 제명 당시에 해당 발언을 한 것인지 확인 바람. 다만 1979년 6월 신민당에 입당하기로 한 무소속 의원들을 공화당에서 빼가자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목을 비트는 행위'라며 비판한 바 있다.
  21. 이미 대선 당시 자택 앞에서 사제폭발물이 폭발하는가 하면, 총선 유세 과정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22. 이때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와전된 일이라고 해명하고 한발 물러서도록 종용했으나, 김영삼은 이를 거부한다.
  23. 본래 이렇게 집단으로 사퇴서를 제출하는 것은 일종의 항의 표현이기 때문에 실제 수리해서 사퇴시키지는 않는 것이 통례다. 그런데 이때는 김영삼계 의원들의 사퇴서만 골라 수리해 이들을 같이 쳐내자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24. 1980년 5월 20일에 방송된 Tagesschau에서 보도된 김영삼 소식, 8분 18초부터 시작
  25. 김영삼은 계속 김대중이 신민당에 입당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김대중은 이를 거부한다. 지금 와서 보면 87년 분열의 단초가 여기에 이미 있었던 셈.
  26. 언론 통제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 복직, 정치활동 규제 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
  27. 득표율은 민정당에 이어 2위였으나, 지역구 의석수에서 평민당에 밀려 제2야당이 되었다.
  28. 노태우 후보의 선거공약이기도 하였다.
  29. 이때는 DJ가 "이미 대선과 총선이라는 평가장치가 있는 상황에서 다시 "중간"평가를 하는 건 무리."라는 명분으로 제동을 걸었다. 88년 총선에서 제1야당 당수가 된 DJ는, 야권에 온건협력 방침을 정한 노태우 대통령과 여야영수회담으로 야당의 의견을 개진하는 국정 동반자 역할을 하면서, 여소야대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30. DJ는 대안으로 중간 평가를 대통령 신임과 연계하지 않는 단순한 정책평가로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평화민주당 김원기 원내총무가 나중에 "신임을 걸고 국민투표를 할 경우 우리가 이길 확률이 0.1%도 되지 않았다."고 말했을 만큼, 양보하고 대화하는 모습을 보이는 신임 정부의 "온건행보"가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여소야대 정국 주도권을 둘러싸고 신정부와 야권 간의 물밑싸움이 치열하였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당시 모습을 다룬 이희호 여사 증언(89/03/10, 03/20일 대목)
  31. 사법고시를 통과한 법조인 출신으로, 노태우 대통령의 영부인 김옥숙 여사의 친척이자 6공화국 황태자라 불렸던 실세 정치인이었다.
  32. 이후 불곰(김동영 의원의 별명)은 암으로 죽어가는 몸으로 합당의 실무자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YS가 차기 대선 주자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새로 창당될 민주자유당의 당권을 김영삼에게 안기는데 성공한다.
  33. 5년 전, DJ가 4자필승론으로 주장한 바로 그 구도였다.
  34. 김현집 한미연합부사령관, 최익봉 前 특수전사령관 2사람이 살아남았다. 김현집(충남 보령 출신)은 작전전문가로 실력이 확실한 사람이었으며, 최익봉(경북 의성) 역시 영관급 장교로서는 드물게 전시가 아닌 평시에 외국군에 수여할 수 있는 최고 훈장인 미국 공로훈장(LOM)을 받아 실적을 입증받았던 것에서 기인.
  35. 검은 돈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겠다는 의도.
  36. 박한상 , 지존파 , 온보현, 김형진 이사장 피살사건
  37. 무리한 일 추진은 재발방지 차원에서 강조하면 어느정도 실효를 거둘 수 있지만, 기존 부실시공된 교량(다리), 백화점 같은 건축물 붕괴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로, 사전에 예상하고 방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단,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발생한 후 YS가 "부실기업을 물려받은 기분"이라고 심경을 토로한 것은 실언이라 할 수 있다. 문민정부 출범 후 일시 세가 위축된 보수층 일각에서는 산업화, 경제개발 시기의 업적을 폄하한 것이라 반발하며 반격을 꾀하는 빌미를 주었고, 야권에서는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 탓할 것인가?"라는(책임 회피라는 말) 비판을 불러왔기 때문.
  38. 개혁과는 별개로 구(舊)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해 자원 낭비를 줄이고자 했던 것도 문민 정부 시절에 시작된 일.
  39. 97년 수치이다.
  40. 민주자유당의 후신 정당
  41. 다만 김현철 본인은 여론에 떠밀려 강제구속되었다고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실제 그의 죄목은 뇌물이 아니라 대선자금 조세포탈죄였다. 즉, 아버지 대선 돕고자 대선자금 지원해준 쪽을 이후에 소통령 행세하며 도와주려다 스탭이 꼬인 것.
  42. 당내 대선구도에 직접 영향을 미치겠다는 말.
  43. 학식과(서울 법대 교수 출신이다) 정치적 안목을 모두 갖췄다는 평을 받았던 정치인. 1996년 10월, DJP연합의 물밑작업이 한창이던 시기에, 언론에 “책임정치 실현과 지역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내각제가 좋은 탈출구가 될 수 있다”며 내각제 개헌 가능성을 시사했으며, 당사자인 JP와의 골프 회동을 주관해, 막판까지 DJ와 국민회의 관계자들을 긴장시키기도 하였다. 15대 대선에서 당선된 김대중 후보와 2위 이회장 후보 간 표차가 시군(市郡) 1곳 차이인 39만표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수성 총리의 제안이 채택됐다면, 대권 향방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44. 레임덕 현상을 최소화 하고 대선 전까지 흔들림없는 정책 추진을 기대할 수 있다.
  45. 이 드라마틱한 지지율 변화 때문에 김영삼 지지율은 해외에서 연구대상이다. 민주국가에서 도무지 불가능해보이는 8~90%에 가까운 지지율을 달성한 대통령이 어떻게 저렇게 몰락할 수 있냐는 것(...).
  46. 보통 시민은 아니다. 고대 출신에 한때 김대중 선거운동까지 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끌려갈 때 손에 페인트 묻은 경호원이 입을 막아버린 턱에 읍읍 나중에 입가가 빨갛게 변한 걸 볼 수 있다.(...)
  47. 훗날 총선에서 자신의 계파인 상도동계가 공천에서 무수히 떨어지자 거리감이 생긴 감이 있다.
  48. 그러나 판정을 받았던 당시에는 심각한 뇌졸중(중풍) 수준은 아니었다고 한다. 심각해진 건 2013년부터였다고.
  49. 기자회견에서 서울대병원장의 공식 증언에 따르면 그 기간 중 반신불수 상태였던 적도 있다고 한다.
  50. 사망 1년 전의 모습으로, 당시는 1년 반의 입원 생활 후 증상이 나아져 퇴원을 바로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실제로 10월 중에 퇴원을 했다.
  51. 공교롭게도 18년 전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그에 대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던 날이다.
  52. 공간 부족에 따라 국가원수 묘역은 대전광역시에 위치해 있으나, 상징성 등을 고려해 서울특별시에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사저가 있는 동작구 소재이기도 하다만.... 이미, 2009년 김대중 대통령 역시 같은 사례로 공간 부족에도 불구하고 서울현충원에 자리잡게 되었다.
  53. 정확하겐 한국에 정식 수입되지 않은 링컨의 SUV인 MKT 타운카(앞문 좌측 하단에 "TOWN CAR" 표식이 있다) 모델을 장의차로 개조한 차량이다. 당시 한국에서 단일 길이 비율로는 정말 긴 축에 속해 언론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54. 여담으로 1991년에 고인이 된 측근 김동영이 합당 이전의 상황을 꽃놀이패라 진단, 여권 관계자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앞장섰다. 이 3당 합당의 절반은 김동영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55. 다만 IMF라는 과가 너무 커보여서 그렇지, 1996년 말 노동법 개정안 전까지만 해도 여론은 YS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큰 공인 금융실명제 같은 개혁을 단행한 장본인이기도 하고 노태우 정권 시기 살짝 떨어졌던 경제성장률도 YS 시기 다시 올라가 최대 9%대도 기록하며 순항해 OECD에 가입하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OECD가입으로 각종 규제가 늘어나 오히려 패착 아니냐는 진단도 있긴 하지만. IMF도 김영삼 정부의 잘못이라는 비판과 경제성장의 부작용으로 언젠간 닥쳤을 위긴데 하필 김영삼 때 터진 시대의 희생양이었다(막말로 1년만 더 버텼어도 IMF라는 과는 다음번 대통령이 모조리 뒤집어썼을지도 모른다)라는 2가지 평이 공존하지만, 이 부분은 개인이 각자 평가할 부분.
  56. 김영삼 이전의 문민정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들 알다시피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하고 쿠데타를 맞았다.
  57. 대통령 시절 국빈이 방문해서 청와대에 머물면 같이 조깅을 하기도 했다. 지미 카터빌 클린턴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조국 전, 현직 대통령도 강제로 기상시켜 운동시키는 위엄
  58. 교통사고로 무릎이 불편하게 된 DJ의 경우는 몸 운신이 비교적 편한 수영을 택했다. 또한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헌신적으로 음식 내조를 해주었다는 후문.
  59. 황교익에 따르면 서울-경기 일대에서 멸치로 육수를 내는 요리법은 70년대 이후에 퍼졌으며, 서울내기 중에는 멸치육수가 비리다고 못 먹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영향을 받아 남쪽 해안지역에서부터 멸치를 이용한 식문화가 퍼진 것이라고. 지금이야 서울에서도 깨끗한 멸치는 귀한 선물이지만 당시엔 꽤나 이색적인 선물이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김영삼이 충현교회를 다니던 당시 위키러할머니부모님 역시 같은 교회를 다니셨는데 멸치육수로 맛을 낸 국수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일이 있은 후 김영삼이 충현교회를 떠나면서 국수도 맛이 없어졌다며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하신다.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이 얘기를 하셨다(...).
  60. 비슷한 표현이 있긴 한데, "Who is it!" 하고 나서 반가움을 나타내는 표현을 한다.
  61. 단골 국숫집으로 알려진 모 점포에 매년 연하장을 보내는 등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2013년 뇌졸중 증세가 악화되기 직전에는 고생 많이 했다고 따로 돈을 주고 갔는데, 이게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62. 원래 김영삼이 서울대 출신이지만, 머리 나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더더욱.
  63. 그러나 이를 항의한 김영삼 본인은 후에 이를 크게 후회 했다고 한다. 만일 이때에 폭격을 했더라면 지금쯤 한반도는 비핵화됐을 거라고 회고 했다고 한다.#
  64. 과거 무기수입 실무를 담당했던 관료들은 뼈저리게 겪어보았던 터라 이를 익히 알고 있었다.
  65. 98년, IMF 및 미국 재무부 관리들과 한창 줄다리기를 할 때에는, 우리 언론인들이 자사 신문의 외교-경제란에 이런 대응논리들이 포함된 기사를 내보냈는데, 그 내용들 중에는 "~~~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발언해야 한다)."는 문구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66. 야인시대에서는 자유당 정부 시절 젊은 YS가 유진산, 조병옥, 김두한 및 야당 의원들과 함께 원탁에 앉아 시국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67. 참고로 이분 제5공화국에서는 김대중 역을 맡았다(...) 김대중 역할이 임팩트가 셌는지, 묻혀버린 듯.
  68. CJ E&M 4기 성우 맞다. 성우 외에도 각종 촬영물 단역으로 활동했으며, 정치 초년병 시절의 젊은 김영삼 역할을 맡아 특유의 말투까지 훌륭하게 재현해냈다.
  69. 재미있는것은 김영삼은 김대중을 쉬운 일도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며 정반대로 평가했다는 점이다. # 두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나 성격차가 드러나는 부분. 썰전에서 이 일화에 대해 분석하기를, 김대중과는 달리 부잣집 도련님으로 부유하고 널널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추진력 있고 통큰(?)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70. 김영삼은 70년대에만 신민당 당수를 두 번이나 지내는 등, 당내 주류의 위치를 놓친 적이 없으나, 김대중은 신민당 당수를 지내 본 일이 없음은 물론이고, 87년에 평민당 당수를 지낸 것이 첫 당수직일 정도로 야권 내 비주류였다.
  71. 보석 석방으로 징역에서는 석방된 상태였다.
  72.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당시의 모습. 사진에서 어색함이 제대로 풍기긴 하지만, 김영삼이 덮은 붉은 담요는 전두환으로부터 건네 받은 것이라고 한다. 전두환과 뒷자석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한장씩 붉은 담요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한장씩 배부되는 담요를 전두환으로 부터 넘겨받은 듯. 그리고 잠시 뒤 김영삼은 저걸 덮고 자면서 자신의 렘수면(...)을 대국민 생중계했다.
  73. 사실 서석재 당시 총무처 장관이 먼저 의혹 제기를 한 바 있으나, 민정계의 반발로 되레 서석재가 경질되면서 무마된 상태였다.
  74. 김영삼은 1927년생, 전두환은 1931년생이다.
  75. 이전 문서에서는 노무현이 김대중(민주당)에 합류했다고 했지만, 97년 대선에서 국민회의에 합류한 것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76. 2012년 박근혜 후보에게 독설을 날린 이후 시점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 무렵의 YS는 할 말 다 할만큼 정신은 또렷하였지만, 고령(86세)으로 웃는 표정을 담당하는 근육이 약해져 맘 편히 참가하는 행사에서도 잘 웃지는 못한 상태였다. 참고로 중풍 증세가 본격적으로 심해진건 2013년부터.
  77. 사면복권 이듬해인 2008년, 본인이 설립을 주도한 친정 여의도 연구소로 복귀한 상태로, 세간에서는 김현철 씨의 국회 등원 여부가 관심사였다.
  78. 이에 대해서는 문재인 캠프 측에서도 움직임이 있었고 성사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실제 두 사람은 경남중고교 선후배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술한 노 전 대통령의 과거 시계 발언처럼 전통 지지층에서 역풍이 불까봐 실행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대선 후인 2014년 문재인 대표가 입원한 김 전 대통령을 병문안 한 적은 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말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옆에 있던 현철 씨가 "덕담 한마디 해주시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문 대표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고 한다.
  79. 건강상의 이유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뇌졸중(중풍) 증상이 나타나는 고령자에게 찬 바깥 바람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
  80. 하필 옆자리가 전두환이었다(...). 역대 대통령 순서대로 배치된 듯하다. 이런 원칙이라면 전두환 옆은 노태우가 와야 하지만 건강 문제로 불참한 상태였다.
  81.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조갑제는 김영삼 생전에는 '좌파숙주'라면서 김영삼을 비난했던 인물이었다. # 그러나 사망 후 조문왔을 때에는 김영삼은 독재와 싸운 챔피언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
  82. 이때는 95년인데 집권 3년차로 집권 초반의 인기가 시들해질 무렵이었기 때문에 이 지지율이 안나왔다. 93년 무렵의 다른 개혁 조치가 들어가야 할 부분이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1달 반 전인 6월말에 실시된 지방자치에 선거에서는 서울시장을 놓치는 등 참패했다는 평가가 다수이다. 무엇보다 3달 반 전에는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가 일어났고, 1달 반 전에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났다.
  83. 저자의 말로는 노태우 정권 당시 노태우를 주인공으로 한 풍자 유머집을 냈다가 안기부에 끌려가서 심문을 당했다고 한다. 고문이나 밤샘 조사 같은건 없었지만, 출판사까지 압력이 들어가서 광고도 못하고 증쇄도 못했다고 한다. 원래 이 'YS는 못말려' 시리즈는 유머 일번지 작가 출신인 장덕균이 세간에 떠돌던 유머를 모으고 그 자신도 여러 개를 창작하여 1993년 대전 엑스포에 맞추어 펴낸 것이다. 상단 사진의 2권은 장덕균이 아닌 다른 편집자가 PC통신 유머를 끌어모아 엮어낸 것.
  84. 앞서 말했다시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이전까지의 대통령들에 대해 풍자하거나 하는 행위가 금기시되었던 반면에 김영삼을 필두로 대통령 관련 풍자 유머들이 자유롭게 나왔던 덕으로 보인다.
  85. 연설을 들어보면 끊어지는한 으로 들린다.
  86. 김대중이 대선에 나올 때마다 돌았던 것이 '군 김대중 비토설'이었다. 하나회가 무너진 후 치러진 97년 대선을 제외하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실제로 YS 정권 초기인 1993년에도 군 인사를 마음대로 하면서 YS 길들이기를 시도했던게 하나회였다. 그리고 결론은 하나회 별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87. 하지만 아쉽게도 이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의식이 없었다.
  88. 상도동계 막내라고 불렸다고 한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뒤 내무부 차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후에 김영삼이 사망한 뒤 김무성은 언론인터뷰에서 "그 분은 내 정치인생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고 나는 그분의 정치적 아들이다"라면서 상주를 자처하여 다른 상도동계 정치인들과 장시간 빈소를 지키기도 하였다.
  89. 김영삼의 아들이다. 정치적 관계로서의 아들 말고 진짜 친아들이다.
  90. 정병국은 넣기도 하고 안 넣기도 하는데, 넣으면 막내 타이틀은 정병국으로 넘어간다.
  91. 최형우와 김동영 둘은 김영삼의 최측근으로서 민주화 운동 시절부터 평생을 보좌해와 '좌동영 - 우형우'라는 별칭이 생겨날 정도였다. 최형우는 김영삼 집권 뒤로도 큰 권한을 누리면서 승승장구한 반면, 김동영은 김영삼의 대통령 취임도 보지 못한 채 암으로 별세한 상태.
  92. 훗날 김영삼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한나라당의 핵심 인물로서 부상하여 당권을 장악하나, 김대중-노무현에게 대선 연패를 겪는다.
  93. 김영삼이 "우리는 도덕적 선구자가 아닌 능력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라며 현대건설 사장으로 있던 이명박을 정치판에 데뷔시켰다. 혹은 대권 출마를 하려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한 방 먹이기 위한 카드였을 수도 있다. 이명박 영입 외에도 김영삼은 이래저래 정주영을 골탕먹인 경력이 있다.
  94. 이재오, 김문수처럼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인사. 민주자유-신한국-한나라로 바뀌는 과정에도 당에 계속해서 남았지만, 결국 민주당으로 이적했고 당대표까지 지내는 등 나름 족적을 남겼고 대선 주자까진 나갔으나 문재인의 압도적 인기에 밀려 대선에는 못나갔다.
  95. 특히나 상도동계 및 김영삼이 발탁한 인사들이 주로 남은 한나라당은 삼김청산론을 기치로 만들어진 정당이라 상도동계라는 이름은 더더욱 무색해졌다.
  96. 측근이던 서청원과 김무성이 대표적인 예. 하지만 김무성은 현재 박근혜와 사이가 멀어져 대표적인 비박계다.
  97. 이는 동교동계도 마찬가지다. 새누리당은 YS 이후 이회창/이명박/박근혜가 권력을 얻고 친박, 친이 체제가 생겼으며, 상도동계가 흩어졌듯이, 민주당 쪽은 DJ 이후 노무현/문재인/정동영 등이 권력을 얻고 친노, 비노 체제가 세워지며 동교동계가 약화되었다. 2010년대 들어 정치 기사에서 동교동계 운운하는 것은 실제 동교동계가 지금까지도 유의미한 간판이라 언급된다기보다는, 동교동계였던 정치인, 혹은 동교동계가 의탁하고 있는 정치인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정도로 보면 된다.
  98. 거제 및 통영 일대
  99. 현재의 부산 서구
  100. 역시 부산 서구 일대
  101. 부산 서구 및 동구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