邢顒
(?~223)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로 자는 자앙(子昂). 아들로는 형우가 있고 증손으로는 형교가 있다.
하간군 막현 사람으로 옛날부터 효렴 천거를 받고 사도의 소명을 받았지만 형옹은 이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성과 자를 바꾸면서 우북평으로 가 전주의 식객이 된다. 그 후 5년이 지나 조조가 기주를 모두 평정하자 형옹은 전주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조조를 따를 것을 권한다.
황건이 일어난 지 20여 년이 되었는데, 사해 안은 정 속처럼 끓어 혼란스럽고, 백성은 떠돌고 있습니다. 지금 조공의 법령이 엄하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전란을 싫어합니다. 혼란이 극에 이르면 가라앉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제가 솔선하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는 행장을 하고 고향으로 가니 전주는 그를 백성의 선각자라고 칭찬하며, 자신도 조조를 도와 유성 평정을 지원하니 형옹은 기주자사로 임명된다. 이런 그의 행동에 사람들이 그를 보고 '덕행이 당당한 형자앙'이라고 불렀다.
후에 광종현의 장으로 임명되자 형옹은 전임 장군의 죽음을 이유로 해 관직을 버린다. 소관 관리가 그의 무책임한 행동에 형옹을 탄핵하자 조조가 말하길
형옹은 옛 군주에 대해 매우 두터운 감정을 갖고 있고, 시종 한결같은 충절을 갖고 있소.
라며 이것을 문제삼지 않고 오히려 오래지 않아 다시 그를 사공의 연으로 임명하고, 또 행당현의 현령으로 임명했다. 그는 현에서 백성들에게 농경과 양잠을 장려하고 교화를 크게 실시해 실적을 올리고 중앙으로 들어가 승상 문하독이 되었으며, 또 좌풍익으로 승진했으나 병으로 관직을 떠난다.
그후 조조의 자식들이 성장해 관속을 뽑아야 했는데, 조조는 이 관속들이 법률 제도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형옹이 이에 맞는 자라 그를 불러 조식의 가승으로 삼는다. 하지만 형옹은 예법을 가지고 농담하거나 비방하는 것을 금지하고 조금도 남에게 굽히는 법이 없는 등 딱딱한 자세를 유지하니 조식과는 친하게 지내지 못했으며, 이런 형옹의 대우를 유정이 보고 조식에게 편지를 써서 간언한다.
가승 형옹은 북방의 빼어난 영웅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높은 절개를 갖고 있었고, 조용하고 담백하며, 하는 말은 적지만 담고 있는 이치는 매우 많으니 진정 아정한 선비입니다. 저 유정은 진실로 이 사람과 나란히 높힐 수도 없고, 당신의 측근에 함께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 유정은 각별한 예우를 받고 있고, 형옹은 오히려 소원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방관자들이 군후인 당신께 미련한 무리들만 좋아하고 현명한 자는 존경하지 않고, 서자 유정의 봄꽃을 따 꽂으면서 가승의 가을 결실을 잊고 있다고 말할까 두렵습니다. 당신에 대한 비방을 초래하게 되면 저의 죄는 작지 않을 것이고, 이 때문에 뒤척거리며 잠 못 이루게 될 것입니다.
후에 형옹은 승상의 군사에 참여했고 동조의 연으로 전임되었는데, 이 때는 조조가 아직 조식과 조비 사이에서 누굴 후계자로 삼을지 흔들리던 무렵인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조식에게 더 기울어져 있던 상황이었다. 조조는 형옹을 불러 누굴 후사로 삼을지를 물었고 정의 같이 다른 조식 밑에 있던 자들은 조식의 장점만을 칭찬했기에 형옹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게 웬 걸 조조의 예상과는 다르게 형옹은 이렇게 답한다.
서자로서 적자를 대신하는 것은 이전 조대에서도 경계했던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 일을 신중하게 살피십시오.
형옹의 말한 의미를 모를 조조가 아니었기에 형옹을 태자부로 임명했다가 태부로 승진시켰으며, 후에 조비가 즉위하자 형옹은 시중, 상서복야, 관내후가 되었다. 또 사예교위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태상으로 승진했으며, 223년에 사망해 아들 형우가 후사를 잇는다.
진수가 기록하길 엄격함을 존중해 그 시대의 명사가 되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