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의 역대 선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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呼韓邪
(? ~ B.C. 31)
재위 기간은 BC 58 ~ BC 31.
허려권거 선우의 아들로 원래 이름은 계후산(稽侯狦)이다.
기원전 60년에 악연구제가 선우로 즉위하자 장인인 오선막에게 도망쳐서 의지했으며, 기원전 58년에 오환이 흉노의 동부 변경 지역의 고석왕을 공격해 백성들을 잡아간 일로 문책이 두려웠던 고석왕에게 옹립되어 호한야 선우라 칭했다. 악연구제를 공격하기 위해 4, 5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고차수의 북쪽에 이르렀는데, 그 와중에 악연구제가 자살하자 그의 백성들의 항복을 받았고 정으로 돌아왔다가 몇 달 뒤에 군사를 해산해 각기 원래 있던 땅으로 돌아가게 했다.
민간에 있는 형인 호도오사를 좌곡려왕으로 삼았으며, 사람을 시켜 우현왕의 귀인에게 얘기해 악연구제 선우의 동생인 우현왕을 죽이도록 했다. 이후 도륭기가 악연구제의 사촌형인 일축왕 박서당이 도기 선우로 세워 군사 수만 명을 일으켰는데, 그들이 동쪽으로 가면서 호한야는 습격당해 패주했다.
그런데 서방의 호게왕이 유리당호와 모의해 우현왕 부자를 참소해 도기 선우가 우현왕 부자를 죽였다가 그가 억울한 죄를 받았음을 알고 유리당호를 죽인 일이 일어났으며, 이 일로 호게왕이 두려워 달아났다가 호게 선우로 자칭했다. 또한 우욱건왕이 이 사실을 알고 자립해 차리 선우를 자칭하고 오자도위도 자립해서 오자 선우가 되면서 흉노는 다섯 명의 선우가 있게 되었으며, 기원전 56년에 호한야는 동생인 우곡려왕을 파견해 서쪽으로 가서 도기 선우를 공격하도록 지시해 만여 명을 죽였다.
또한 도기 선우가 6만명의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자 이를 패퇴시켜 도기 선우가 자살하게 되었으며, 이 때 동쪽으로 온 거리 선우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이릉의 아들이 오자도위를 옹립하면서 오자 선우가 되자, 이들을 붙잡아 참수하고 선우정을 도읍으로 삼았다. 형인 좌현왕 호도오사가 자립해 질지골도후 선우가 되고, 도기 선우의 사촌 동생인 휴순왕이 윤진 선우가 되어 각기 자립했다가, 기원전 54년에 윤진 선우가 질지골도후 선우를 공격했다가 무너지면서 질지골도후 선우의 공격을 받아 달아났다.
기원전 53년에 좌이질자왕의 조언에 따라 아들인 우현왕 수루거당을 파견해 한나라에게 신하를 칭하여 복종했으며, 기원전 52년에 오원새에서 한나라에게 진귀한 물품을 바치면서 입조하기를 원했고 거기도위 한창의 영접을 받았다.
기원전 51년에는 직접 한나라로 와 감천궁에서 선제에게서 그 지위를 제후왕의 위에 두면서 알현할 때 칭신하면서도 이름을 부르지 않도록 하는 대우를 받았고 많은 물품을 받았으며, 선제가 사자를 시켜 인도하면서 장평에 가서 한 달간 제후가 묵는 관사에 머물렀다가 귀국하기를 요청했다. 또한 호한야가 광록새에 머물면서 한나라의 수항성을 지킬 것을 자청해 한나라의 군사의 호송을 받아서 흉노로 돌아갔으며, 기원전 50년에 호한야는 사자를 보내 조헌했고 질지골도후 선우도 한나라에 사자를 보냈지만 호한야가 보낸 사자가 더 우대받았다.
기원전 49년에 한나라에 다시 입조해 각종 예물을 받았고 주둔병을 이끌고 왔기에 한나라 군사의 전송을 받지 않고 흉노로 돌아갔으며, 원제가 즉위하자 글을 올려 민중들이 궁핍하다고 해 한나라로부터 운중, 오원군을 통해 곡식 2만 곡을 대여받았다. 질지골도후 선우가 길이 먼 데다가 한나라가 호한야를 옹호하는 것을 원망해 사자를 보내 글 올려 볼모로 보낸 아들을 돌려줄 것을 청하면서, 기원전 44년에 한나라에서 사신으로 곡길을 보내 호송했다가 질지골도후 선우가 곡길을 죽였는데, 한나라에서 곡길의 소식을 알지 못해 항복한 흉노인이 구탈에서 듣기로는 피살되었다고 해 호한야 선우는 사자를 보내는 대로 번번이 문책받았다.
기원전 43년에 한나라에서 거기도위 한창, 광록대부 장맹 등을 보내 볼모로 온 호한야 선우의 아들을 호송해 곡길 등의 소식을 물으면서 그 죄를 사면받아 스스로 의심을 품지 않도록 했으며, 호한야는 세력이 강성해 질지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흉노에 많은 대신들이 북쪽으로 되돌아가자고 호한야에게 권했다. 한나라 사신들이 북쪽으로 떠나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두려워했는데, 호한야는 한창, 장맹 등과 함께 서로 속이거나 공격하지 않도록 맹약을 맺고 북쪽에 있는 정으로 돌아갔다.
질지가 한나라의 사자를 죽인 것은 한나라를 저버리고 호한야가 강성해 습격할까봐 두려워 해 서쪽의 강거로 갔다가 기원전 36년에 주살되면서 흉노를 통일하게 되었으며, 기원전 33년에 한나라에 입조해 의복금백서 등을 받으면서 한나라의 사위가 되어 친근해지길 원해 왕소군을 하사받았다. 또한 호한야는 상곡에서 서쪽으로 돈황에 이르기까지 새를 보전하길 원하면서 변경의 새를 수비하는 병사들을 파견해 한나라의 백성들을 쉬게 하라고 요청했는데, 낭중 후응의 반대로 정중히 거절되었다.
당초에 한나라로 귀부하라고 한 좌이질자를 어떤 이가 참소하자 호한야가 그를 의심하게 되면서 좌이질자가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한나라에 귀부했는데, 기원전 33년에 호한야가 한나라에 알현했다가 좌이질자를 만나 서로 사죄하면서 정으로 돌아오길 청했지만 좌이질자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흉노로 돌아갔다.
호한야는 좌이질자의 형인 호연왕의 두 딸을 총애했으며, 기원전 31년에 병이 들어 죽으려고 할 때 저막차를 선우로 세우려고 했지만 그의 어머니인 전거연지가 조도막고를 선우로 세우길 권했으며, 대연지는 저막차를 선우로 세워 여러 대신들과 함께 국사를 맡을 것을 얘기했지만, 전거연지의 계책에 따라 조도막고를 선우로 세우도록 하면서 뒷날에 동생에게 나라를 전해주도록 명하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