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터키 민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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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隋)
5호(胡)
흉노(匈奴)선비(鮮卑)갈(羯)저(氐)강(羌)



기원전 250년경의 영향권.

匈奴

북방민족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유목민족 중 한 갈래로 천고마비라는 고사성어주인공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남북조 시대의 중국을 침략한 세력도 흉노다. 훈족과 뿌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설이 있으나 증거는 없으며 확실치 않다.

1 개요

상고시대부터 오호십육국시대까지 활동한 유목국가. 끊임없이 중국과 치고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첫 등장은 기원전 4세기 말 전국시대 때부터이고 이후 (漢)대에 이르러서는 북아시아 최강의 유목국가로 성장한다.

사마천 사서 사기에는 하나라의 후손으로 서주를 털어버린 험윤과 훈육이 이들의 조상이라 하고 있지만, 사실 전국시대 이전의 북방 이민족들은 유목민이 아니라고 한다. 고고학적으로 제대로 된 유목문화는 기원전 10세기에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8~7세기가 되어야 비로소 중국 북방에 유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 초 사이에 등장하는 '호(胡)'라는 이름의 족속이 중국이 최초로 조우한 유목민이라고 보는 학설이 힘을 얻은 상태이다.

건조한 초원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기원전 3세기 무렵 현재의 중국 북부에서부터 서쪽으로 코카서스 일대에까지 달하는 방대한 제국을 건설했고,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서부 만주, 그리고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내몽골(네이멍구 자치구), 간쑤 성, 동투르키스탄(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 달했다.

초기에는 한을 군사적으로 압도하면서 수도 장안까지 위협하였으나 점차 화친으로 돌아섰고 한무제의 강공으로 막북으로 밀려나 국력이 약화되었고 이후 5명의 선우가 난립하는 혼란기를 걸쳐 두 차례 국가가 분열되는 등 패권직을 완전히 상실했다.

오호십육국시대서진(西晉)을 멸망시키고 화북지방에 유목왕조를 세우지만 문화적으로는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다가 선비족에게 된통 얻어맞고 점점 세력이 약화되더니 끝내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2 인종

인종적으로 어떤 존재를 흉노라고 불렀는지 지금은 분명하지 않다. 그 근원을 먼 옛날 주나라 이전에 북방에 살았던 험윤(獫狁)이나 훈죽(熏粥)에서 찾는 사람도 있지만 이 부분은 연구가 부족해서 단정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나마도 춘추시대 초중반에 이들이 가축을 수입해 갔다는 기록이 있어 흉노가 아니거나 최소한 유목민으로서의 흉노는 아니라는 주장이 대세다.

흉노족과 훈족(Hun族)을 같은 민족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며, 흉노의 '匈'은 '훈(Hun)'[1]중국어음차로 부른 명칭이라는 설이 있다.일설에는 돌궐족이 이후 자신들을 흉노족의 후손이라 칭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튀르크족도 흉노족과 관계가 있다고 하며, 유명한 훈족의 경우 남흉노와 한나라 연합의 세력다툼에서 밀린 북흉노가 중앙아시아 유목민에게 동화되면서 그 집단이 유럽으로 일직선 전진한 거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이건 설의 단계. 그래서 터키와 흉노의 역사를 놓고 줄다리기 중이지만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현재로선 그저 미궁일 뿐이다. 대체적으로는 투르크계, 몽골계, 퉁구스계, 페르시아계 등 다양한 인종의 연합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일부 고분에서 발견된 유골 가운데는 인도 유럽계 인종과 유사한 인골들도 출토되었다, 한마디로 중앙아시아의 다양한 유목민족의 집단 연합체가 흉노라는 것. 중앙아시아에 사는 튀르크족으로 추정되는 설도 있다.

따라서 정확하게는 흉노라는 말은 특정한 민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사마천은 《흉노전》에서 묵특에 의한 건국 초기의 일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십진법을 따른 군사, 정치, 사회조직을 관통하고 있다.
2. 남쪽으로 좌, 중, 우로 된 3대 분할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군주를 중앙에 둔 좌우 양익체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 영민, 분지를 가진 24인의 만기들에 의한 연합 권력체이다. 여기에 보충 설명을 가하고 있는 이성의 비소왕들도 그들이 인솔하는 제족 집단을 포함하여 흉노국가는 다원, 다종족의 혼성적인 국가였다.

따라서 흉노는 민족이 아니라 국가명이며 흉노족이라는 명칭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여 현대의 기준으로는 다양한 민족의 혼합체라고 하더라도 당시에는 민족 내지는 그와 유사한 집단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기도 한다. 농경민족도 아닌 유목민족이 현대적 기준으로 민족을 구분했다는 것은 잘못된 가정이다. 또한 흉노가 단순히 국가명이라면 흉노족이 선비족 등의 다른 민족들과 세력다툼을 벌인 것이나 민족 단위로 분쟁이 끊이지 않은 오호십육국시대에 혁련발발이 흉노족 국가를 세운 것(물론 국가명은 '흉노'가 아닌 '하'였다) 등을 설명하기 어렵다. 애당초 송대 이전의 북방민족은 각 민족이 강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시적으로 뭉쳤다가 지도자가 사라지면 다시 다른 지도자를 중심으로 헤쳐모이는 구조였지 국가가 안정적으로 수백년이 유지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3 언어

흉노 민족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만 있기 때문에, 현재 중국어로 음역된 일부 지명이나 이름들을 제외하고는 흉노어의 재구성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튀르크어족이나 몽골어족이 가장 유력하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그 외에도 예니세이어족이나 인도유럽어족 따위의 설이 난무하고 있다.

4 문명

흉노는 한나라나 진나라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전국시대부터 이미 흥기하여 철기 시대에 진입했다. 중국에서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인 기원전 5세기부터 을 생산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서아시아로부터 전해온 것인지 또는 중국이 자체적으로 제철기술을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철의 발상지는 중국의 서쪽이며, 서남아시아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알려져 있고 그곳에서 기원전 3000년경부터 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서역의 앞선 철기 문명을 일찍 접한 흉노가 당시의 중국보다 일찍 철기 문명을 가질 수 있었고, 철제 무기를 이용해서 군사력 역시 강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실크로드 교역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앞선 서역의 문물을 중국에 전달 할 수 있었다. 흉노의 무덤에서는 다량의 철촉, 철검, 철제 마구등이 출토되고 있다.

철기 문화는 흉노의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한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서는 흉노와 한나라 간에 교역이 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교역은 서로 교환할 물건이 확보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또한 흉노는 실크로드를 실질적으로 통제하여 무역권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는 흉노에게 큰 경제적 이익을 주었다. 서역에는 화려한 물품이 많다는 장건의 여행 보고를 읽은 한무제는 이를 탐내기도 했었다.

서한 초기 흉노의 위협에 직면해 이를 막아낼 수 없었던 한나라는 국력의 한계를 느끼고 흉노와 화친하여 무역하는 방법을 택했다. 한은 흉노의 침입을 막기에 급급했었다. 전국시대부터 쌓은 장성도 흉노로부터 한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무력으로 맞설 수 없던 한이 할 수 없이 택한 방식은 화친과 교역이었다. 한 무제가 흉노를 정벌하기 전까지, 흉노는 중국보다 상위에 있었으며, 무제의 정벌 이후에, 서역지배권을 빼앗긴 흉노는 실크로드 무역을 통하여 얻었던 경제적 이익을 상실하였지만, 흉노가 분열되고 나서부터 이 주도권 관계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4.1 유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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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몽골 자치구내 전시된 흉노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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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발굴한 흉노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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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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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벨트 버클[2]

5 편제

사마천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흉노족의 우두머리를 선우(單于, 단우가 아니다)라 부르며, 선우 밑에 좌현왕, 우현왕, 좌곡려왕, 우곡려왕, 좌대장, 우대장, 좌대도위, 우대도위, 좌대당호, 우대당호, 좌골도후, 우골도후를 두었다. 이들은 크게는 1만 기, 작게는 수천기의 병사를 거느렸으며 그들을 둘러싸고 24인의 군단장이 있었는데 이들을 만기라고 불렀다. 군단장들은 천인대장, 백인대장, 십인대장, 비소왕, 상, 봉, 도위, 당호, 저거 등의 관리를 두었다.

태자는 좌도기왕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현명하다.', '어질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즉, 좌도기왕=좌현왕).

각 부족들은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그 안에서 이동하며 살았다. 좌우현왕과 곡려왕의 영역이 가장 컸다.

매년 정월과 5월에 군단장들이 선우에게 모여서 회합을 가지고 제사를 지냈다. 가을에는 대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백성과 가축의 수효를 점검했다.

6 풍습

북아시아의 미개척지대에서 목축을 하며 이동생활을 했다고 한다. , , 등을 주로 길렀고 개중에는 낙타, 나귀, 노새, 버새 의 진귀한 가축도 있었다.

농사는 짓지 않았으며 일정한 주거지가 없었다. 평화시에는 목축, 수렵으로 생계를 이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부족 전원이 전투에 임해 약탈에 나섰다고 기록된 것이 중국측 기록이나, 러시아 학자들에 의한 발굴에 의하면, 러시아 흉노 유적지에 농사와 축산과 일정한 주거지, 철기와 청동을 생산한 대장간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또 독특한 문양의 예술품도 있는 것이 밝혀졌다.

과거 중국측 기록이 이들을 일부러 야만스러운 오랑캐로 묘사한 것일 가능성이 높으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몽골의 경우와 같이 피지배계층이 농업과 공업을 하고, 지배계층은 목축과 수렵을 하는 체계를 수립한 경우인 가능성이 더 높다.

군주 이하 모든 백성들이 고기를 주식으로 했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고 한다. 건장한 자가 존중되었고 노약자는 천대되었다. 식사를 할 때 맛좋은 살코기는 장정들이 먹고 노인들은 남은 것을 먹었다.

아버지나 다른 식구가 먼저 죽을 경우, 그의 부인과 첩을 취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당연히 생모는 제외된다. 이와 비슷한 풍습으로 고구려에는 형사취수제라 하여 형이 죽으면 그 부인을 동생이 데리고 사는 풍습도 있었다. 이는 대부분의 유목민에게서 나타나는 제도이다. 토지를 소유하는 정주민족은 가장이 죽더라도 남은 유가족이 생활할 수 있지만, 유목민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딸렸던 식구들의 부양을 책임지워 노동력 감소를 방지하려는 사회적 의무이고 게르만을 포함한(카이사르도 신기하게 생각했다) 대부분의 유목민족들에게서 나타난다. 역시 유목민족야만인 느낌이 강했던 진(秦)나라에서도, 상앙의 변법이 있기 전까지 부자(父子), 형제가 처첩을 공유했다고 한다. 나중에 상앙이 자뻑드립할 때 언급된다. 유동성이 강한 현재의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에서도 형제의 처첩공유는 흔하다.

전시가 아닐 때 을 한 자 이상 뽑은 자는 사형에 처했다. 도둑질한 자는 재산을 몰수했다.

군주가 죽으면 측근 신하나 애첩이 순장당했는데 많을 경우 수백에서 수천을 넘기도 했다. 이외에 과 의복 등을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무덤에 봉분을 쌓지는 않았으며, 상복도 입지 않았다.

장례엔 죽은자를 애도하기 위해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죽은 자의 이마를 흘리는 이면이라는 풍습이 있었고 머리카락 일부를 베어 묻는 전발의 풍습이 있었다. 이 풍습은 순장을 억제하여 노동력 감소를 막기 위한 목적도 있다.

남아있는 기록이 중국측 기록뿐이어서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분야다. 다만 발굴된 흉노의 유적은 중국측 기록과 다른 점이 있다.

7 전투

을 잘 다루었는데 어린이들도 양을 타고 다니면서 작은 짐승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활을 당길 만한 힘을 가진 남성 전원이 기병으로 활약하였다. 접전시에는 칼과 짧은 을 사용했다고 한다. 한나라의 효경제 시절 한 군관이 수십기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단 3기의 궁기병을 만나 병사를 모두 잃고 본인도 중상을 입은 일이 있다.

싸움에 있어서 후퇴를 불명예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싸움이 유리하면 무작정 전진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사정없이 도망쳤다.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를 잡으면 상으로 한잔을 받았다. 노획품이나 포로는 그대로 당사자의 소유가 되었다. 전사자의 시신을 거두어 돌아온 자는 그의 재산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눈 앞의 이익을 위해 맹렬히 싸웠고 패색이 짙어지면 맹렬히 도망쳤다.마치 우리가 대규모 멀티 플레이 게임을 할때와 비슷하다

전쟁을 하거나 큰 일을 일으킬 때 의 모습을 보고 점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 달이 차고 빛나면 좋은 징조이고 흐릿하면 나쁜 징조였다.

8 대외관계

8.1 중국과의 관계

산해경에 따르면 흉노는 의 마지막 왕인 이계의 자손이라고 하나,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게다가 산해경이라는 책 자체가 소설에 가까워서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이 못 된다. 아예 사마천은 산해경을 '감히 말할 수 없는 기서'라면서 깠지만, 정작 그런 사마천도 사기에서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夏后氏)의 후예(苗裔)라고 적어놓았다. 이는 상술한 바처럼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비롯된 억지스런 갖다붙이기라는 견해가 강하다.[3]

중국사에 흉노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인 설원(說苑)에 따르면 312년 누번의 영토에 거주하는 흉노가 급습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만 이 정보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전국칠웅 중에서도 북방의 조(趙)나라를 꾸준히 괴롭히다가, 그만 이목의 기만책에 낚여서 처절하게 발려버린 기록이 있다. 이때 자그마치 10만이 죽고 선우는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고 하니, 이목도 이목이지만 10만이나 모여있던 흉노도 그저 ㅎㄷㄷ. 물론 중국 사서의 특성상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없지않아 있다. 어쨌든 이 한 판으로 흉노의 조직은 거진 와해된 셈이다.

하지만 그러고도 남은 무리들은 서쪽 오르도스 지방[4]에 모여 살면서 진(秦)나라의 우환이 되었는데,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명을 받은 몽염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해 밀어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황하 밖으로 오르도스를 빙 둘러서 만리장성을 쌓아버렸다. 오르도스 확보와 만리장성 축조는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자원을 소모하여 결국 진의 멸망으로 이어졌지만, 흉노의 약화라는 목적만은 달성할 수 있었다.

시황제 아래에선 끽소리도 못하고 지내던 흉노였지만 진말의 농민봉기에 이은 내전으로 중국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다시 남하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이룬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묵돌선우.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건 유방나라를 세우고 나서부터이다.

한고조 유방은 기세좋게 토벌에 나섰지만 그야말로 캐관광. 흉노는 유방의 조심성을 역으로 이용하여 유방의 보병을 유인한 뒤 기병 포위전략을 써서 유방을 떡발랐다. 진평의 계략으로 겨우 풀려났지만 결국 패배는 패배. 한은 흉노에게 한나라 여인을 선우의 아내로 바치고, 그 외 각종 물자와 인력을 보낸다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화약을 맺게 된다. 그나마 거란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을 때 송 쪽이 역할을 맡아 체면이라도 차렸는데, 이 화약의 경우엔 한나라 쪽이 동생이었다... 망했어요 하지만 한은 나중에 복수라도 했지 송은 그 이후로도 ....

나중엔 여후에게 묵돌 선우가 그대가 과부가 되었다고 들었소. 우리 서로 부족한 것을 결합해 나와 혼인하는게 어떻겠소 같은 식의 무례한 편지를 보내도 토벌도 할 수 없었다.

그 뒤로 평소엔 평화유지비 받아먹고 먹을 거 떨어지면 국경을 두들겨대다가 복수의 칼날을 갈던 한무제에게 된통 걸려서 너죽고 나죽자로 싸우게 되었는데, 수십년간 지든 이기든 10만 이상씩 계속 초원으로 원정군을 보내는 쇼미더머니 소모전에 밀려 결국 선우정이 막북으로 쫓겨가게 된다. 그래도 능력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한의 총공세를 기적적으로 막아내 민족 자체는 지켜낼 수 있었지만 세력은 쪼개지고 황하 상류 서쪽의 4군(무위·장액·주천·돈황)을 잃으면서 서역과 실크로드 무역로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 경제적으로 궁핍해졌다.

적어도 두만 때부터 흉노는 장자 세습의 원칙을 이어갔으나, 한무제와의 대전 중에 급했는지 이 원칙을 깬 적이 있었다. 한번 세습의 원칙을 깨먹으니 후계에 대한 정통성이 점차 결여되어, 결국 한무제의 손자인 선제 때에 이르자 후계 구도가 막장으로 치달았고 한때는 선우를 일컫는 자가 다섯 명이나 되는 혼란상에 빠져들었다. 그 중 호한야가 겨우 대충 아우르나 싶더니 그전까지는 조용하던 형 질지가 갑자기 들고일어나서 호한야를 두들겨 내쫓았다. 궁지에 몰린 호한야는 한에게 칭신하고, 질지 역시 한과 잘 지내려고는 했지만 서로 대등한 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한은 호한야의 편을 들었다. 고립된 질지는 서쪽으로 활로를 찾으니 호한야의 세력은 동흉노, 질지의 세력은 서흉노가 되었다. 서흉노는 강거로 가서 서역의 패권을 잡을려고 시도했지만 한의 토벌로 멸망하였다. 그 잔존세력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재.

후한대에 이르어서 다시 선우직 문제로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다. 북흉노는 그후 여러번 국경을 침범하다가 후한 명제~화제반초의 서역 정벌과 화제 때 두헌(竇憲)의 북방 정벌 이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반초의 아들 반용(班勇)의 서역 정벌 때 다시 털리다 결국 155년경 선비족의 단석괴에 의해 멸망한다. 그 후 4세기 엄채국[5]을 함락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었다.[6]

이후 후한은 남흉노에 대한 회유정책을 펴 남흉노는 사실상 후한에게 복속된 상태가 되었으며 결국 관내로 집단이주시켜 군사적 용병으로 써먹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흉노의 명목상 선우 직위는 계속 유지 되어왔는데 건안 16년(216년) 조조가 흉노 부락을 좌,우,남, 북, 중의 5부로 분할하고 각 부 중에서 "수(帥)"를 선발해 통솔시키고 수 아래 한인의 사마(司馬)를 두어 감시했으며 5부 전체는 사흉노중랑장이 감시하게 했다. 중랑장은 태원(太原)에 주둔했는데 병주자사(幷州刺史)를 겸했고 남선우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으므로 흉노 전체가 노예 상태가 된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위나라-서진의 지배를 받았으며 흉노는 정치적으로 자립성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경제생활에서도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한인들의 멸시를 받았다. 이후 흉노가 다시 흥기한것은 서진의 팔왕의 난, 영가의 난으로 인한 혼란 때문으로 결국 진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며 오호십육국시대 한(漢),[7] 전조(前趙), 북량(北凉), 하(夏)[8] 등의 국가를 세우기도 한다. 이후 선비족이 중심이 된 북위가 흉노 호한체제 국가들을 멸망시키면서 흉노의 명맥은 완전히 사라진다. 몇몇 후세 인물들이 흉노의 후손이라는 기록만이 남았을 뿐이다.

10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중국 북부를 헤집고 다닌 관계로 중국 문화에는 흉노와 관련된 코드가 많다. 천고마비, 만리장성, 왕소군 등이 대표적이다.

관롱집단의 대명사로 유명한 수문제의 부인 독고씨는 흉노의 후예이다.

8.2 한반도와의 관계

좌현왕 이하의 장군들은 예맥, 고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 흉노의 왼팔이 잘렸다고 중국 사서에서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고조선 왕이 내린 작호 중 하나인 비왕(裨王)은 흉노족의 비소왕(裨小王)에서 따온 말로 추정된다. 아마, 위만조선이 흉노와 연계하여 나라에 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마립간 시대에 적석목곽분의 등장을 흉노계 유목민족이 신라를 정복해서 나타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어처구니 없는 주장은 아니지만 고대사라 확실한 증거가 없어 그대로 믿기 힘들다. 이와 별도로 신라 중대 이후 신라인들은 자신을 흉노 귀화인인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자칭하기도 했다.

8.3 그 밖에

서역 국가들을 여러 차례 위협하면서 부세를 여러 번 거두기도 했으며, 서역 국가들의 싸움에 개입해 그 왕을 죽여 옹립할 정도로 강력해 말을 듣지 않으면 개입했다. 이 때문에 서역 국가들이 한나라와 흉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되었다.

터키에선 괵튀르크(돌귈)와 더불어 튀르크계 인종으로 자기들 조상 역사로 본다. 때문에 몽골이나 유라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꽤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지만 중국과 마찰이 심하여 중국과의 연계 연구는 그다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흉노의 귀족들은 연제(攣鞮), 혁련(赫連), 호한(呼韓) 등의 성을 사용했다.

9 역대 선우

여기서 선우란 군주를 지칭한다. 황성은 '난제(攣鞮)'.

9.1 흉노

대수칭호재위기간
1대두만(頭曼)두만(頭曼)? ~ BC 209
2대묵돌(冒頓)모돈 혹은 묵특(冒頓)BC 209 ~BC 174
3대노상(老上)계육(稽粥)BC 174 ~ BC 161
4대군신(軍臣)-BC 161 ~ BC 126
5대이치사(伊稚斜)이치사(伊稚斜)BC 126 ~ BC 114
6대오유(烏維)오유(烏維)BC 114 ~ BC 105
7대오사려(烏師廬)오사려(烏師廬), 첨사려(詹師廬), 아(兒)BC 105 ~ BC 102
8대구려호(呴犁湖)-BC 102 ~ BC 101
9대저저후(且鞮侯)-BC 101 ~ BC 96
10대호록고(狐鹿姑)-BC 96 ~ BC 85
11대호연제(壺衍鞮)-BC 85 ~ BC 68
12대허려권거(虛閭權渠)-BC 68 ~ BC 60
13대악연구제(握衍朐鞮)도기당(屠耆堂)BC 60 ~ BC 58

9.2 서흉노

대수칭호재위기간
1대호한야(呼韓邪)계후산(稽侯狦)BC 58 ~ BC 31
2대복주루약제(復株累若鞮)복주루(復株累)BC 31 ~ BC 20
3대수해약제(搜諧若鞮)저미서(且麋胥)BC 20 ~ 12
4대차아(車牙)저막차(且莫車)BC 12 ~ 8
5대오주류약제(烏珠留若鞮)낭지아사(曩知牙斯)BC 8 ~ 13
6대오루약제(烏累若鞮)합(咸)13 ~ 18
7대호도이시도고약제(呼都而尸道皋若鞮)여(輿)18 ~ 46
8대오달제후(烏達提侯)-46

9.3 북흉노

대수칭호재위기간
1대포노(蒲奴)-46 ~ ?
2대우유(優留)-? ~ 87

9.4 남흉노

대수칭호재위기간
1대혜락시축제(醢落尸逐鞮)비(比)48 ~ 56
2대구부우제(丘浮尤鞮)막(莫)56 ~ 57
3대이벌어려제(伊伐於慮鞮)한(汗)57 ~ 59
4대혜동시축후제(䤈僮尸逐侯鞮)적(適)59 ~ 63
5대구제차림제(丘除車林鞮)소(蘇)63
6대호야시축후제(胡邪尸逐侯鞮)장(長)63 ~ 85
7대이도어려제(伊屠於閭鞮)선(宣)85 ~ 88
8대휴란시축후제(休蘭尸逐侯鞮)둔도하(屯屠何)88 ~ 93
9대-안국(安國)93 ~ 94
10대정독시축후제(亭獨尸逐侯鞮)사자(師子)94 ~ 98
11대만씨시축후제(萬氏尸逐侯提)단(檀)98 ~ 124 / 94 ~ 111
12대오계후시축제(烏稽尸逐侯提)발(拔)124 ~ 128
13대거특약시축취(去特若尸逐就)휴리(休利)128 ~ 140
--차뉴(車紐)140 ~ 143
14대호란약시축취(呼蘭若尸逐就)난제두루저143 ~ 148
15대이릉시축취(伊陵尸逐就)거차아148 ~ 172
16대도특약시축취(屠特若尸逐就)모 (某)[9]172 ~ 178
17대-호징(呼徵)178 ~ 179
18대-강거(羌渠)179 ~ 188
--수복골도후(須卜骨都侯)188 ~ 189
19대특지시축후(持至尸逐侯)어부라(於夫羅)188 ~ 195
20대-호주천(呼廚泉)195 ~ 216
흉노 멸망
-좌부수(左部帥)유표(劉豹)-

10 흉노 소속 인물

10.1 흉노 분열 이전

★는 한나라 → 흉노, ☆는 흉노 → 한나라로 투항한 인물이다.

  • 김윤(☆) - 김일제의 동생.
  • 김일제(☆)
  • 도륭기(☆) - 우현왕과 함께 연제박서당을 도기선우로 세운 인물.
  • 도리호차
  • 만구신(★)
  • 복다(☆)
  • 성만(☆) - 개화왕
  • 연제박서당 - 도기선우로 독립한 인물.
  • 연제선현탄(☆)
  • 연제어단(☆)
  • 연제호도오사 - 질지골도후 선우로 독립한 인물.
  • 오려굴(☆)
  • 오려온돈(☆)
  • 왕항(★)
  • 위율(★) - 흉노 후기의 권력자.
  • 이광리(★) - 한나라의 이사장군.
  • 이리목 - 이리목 선우로 독립했다가 질지 선우에게 패했다.
  • 이서(★)
  • 이릉(★)
  • 제제거당(☆)
  • 조리(★)
  • 조신[10]
  • 중항열(★)
  • 한신(★)
  • 형미앙
  • 호독니(☆) - 혼야왕의 부하인 비왕.

10.2 흉노 분열 시기

  • 호우휘(呼尤徽)

10.3 남흉노 멸망 이후

  • 노송다(路松多) - 도각흉노 사람으로 신평, 부풍에서 군사를 일으켜 사마보에게 붙었으며, 초벽을 점거해 진, 농산에 사는 저족, 강족의 호응을 받았으며, 전조의 유요가 장수를 파견해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해 유요가 직접 공격해 초벽을 함락하자 농성으로 퇴각했다.
  • 대두득일육국(大豆得一育鞠) - 흉노의 도독으로 287년에 종족 부락 1만 1천 5백명을 인솔해 진나라에 항복했다.
  • 석무(石武) - 흉노의 휴도왕으로 322년에 상성을 바치고 전조에 항복해 진주자사에 임명되고 주천왕에 책봉되었다.
  • 위사호(萎莎胡), 호도대박(胡都大博) - 흉노의 인물로 286년에 각기 종족 부락 10여 만명을 거느려 옹주에 와서 사마준에게 항복했다.
  • 유고승원(劉誥升爰) - 흉노의 수령. 유맹의 아들로 유맹이 하정의 계략으로 살해당하자 그 무리를 관장했으며, 그가 죽자 유호가 계승해 철불부를 이루었다.
  • 장배독(張背督), 풍막돌(馮莫突) - 흉노의 인물. 석륵의 설득으로 307년 겨울 10월에 전한에 귀부해 장배독은 친한왕, 풍막돌은 도독부대에 임명되었다. 장배독의 한자의 배는 정확히는 勹, 背를 합친 한자이다.
  • 장숭(張崇) - 흉노의 수령. 서하에 거주하고 398년에 대군으로 옮기는 것에 불만을 품고 복속하고 있던 북위를 공격했지만 유악의 공격을 받아 격파되었다.
  • 조곡(曹穀) - 흉노의 인물. 우현왕으로 전진에 항복했다가 365년에 전진을 배반했고 무리 2만 명을 이끄고 행성을 공격했으며, 부견이 군사를 이끌면서 8월에 격파되었다. 조활이 죽자 항복을 요청해 전진에 항복했다.
  • 조홍(曹弘) - 흉노의 인물. 416년에 병주의 호족 수만 락이 후진에 대항해 평양으로 들어가면서 조홍은 대선우에 추대되었으며, 흉노보에서 요성도를 공격했지만 요의의 공격을 받아 토벌되면서 사로잡혀 장안으로 보내졌다.
  • 조활(曹活) - 흉노의 인물. 조곡의 동생. 365년에 조곡과 함께 전진을 배반해 행성을 공격했다가 부견의 공격으로 전사했다.
  • 학노(郝奴) - 흉노의 인물로 노수에 거주하다가 386년에 전진의 형양태수였던 조곡이 장안으로 부르자 이에 호응했고 왕린이 마외를 점거하자 군사를 파견했으며, 4월에 학다가 후진의 공격을 받아 붙잡히자 항복했고 진북장군, 육곡대도독에 임명되었다.
  • 학다(郝多) - 흉노의 인물로 노수에 거주하다가 386년에 전진의 형양태수였던 조곡이 장안으로 부른 것을 학노가 호응했는데, 왕린이 마외를 점거하자 학노의 지시로 왕린을 공격했고 4월에 후진의 공격을 받아 붙잡혔다.
  • 학도원
  • 학산(郝散) - 흉노의 인물로 294년 여름 5월에 봉기해 상당을 공격해 장리를 살해하고 가을 8월에 무리를 인솔하고 와서 항복했다가 풍익도위가 이들을 살해했다.
  • 호연철(呼延鐵) - 흉노의 수령. 이석에 거주하고 398년에 대군으로 옮기는 것에 불만을 품고 복속하고 있던 북위를 공격했지만 유악의 공격을 받아 격파되었다.
  • 호태아후(胡太阿厚) - 흉노의 인물. 요새 밖에 있다가 285년에 부락민 2만 9천 300명을 거느리고 진나라에 항복했으며, 사마염은 그들을 요새 안쪽 서하에 두도록 했다.

11 관련 문서

12 인터넷상에서 사용되는 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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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경상도를 깔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유래는 흉노족 신라왕족설인데, 제대로된 역사적 근거가 없는 설이다.[11]
  1. 이 외에도 몽골어로 사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2. 두마리 고양이과 동물이 산양의 목을 물어뜯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
  3. 사실 고대에서는 이런 식의 갖다붙이기가 비단 중국만의 일은 아니었다. 서구에서도 로마 바깥의 현재 프랑스나 독일, 스페인 땅의 부족들이 자신들은 그리스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는 경우가 흔했다. 즉 말하자면 오디세이아나 일리아드, 기타 그리스 신화 세계관에 나왔다가 서쪽 어느 지방으로 이동한 누구누구의 후손이라고 자칭했던 것인데, 이는 말하자면 세계관의 문제, 고대의 문화권력의 한 양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남들과 교류하려면 자기 자신들이 누군지 밝혀야 하는데, 남들 다 똑같이 쓰는 세계관에서 자기만 다른 세계관을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중국인인 사마천이 갖다붙인 방식이지만, 역시 흉노에게도 통일된 세계관에서 비롯한 동인설정(...)을 갖다붙여주는 것이 고대인 기준으로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수 있다.
  4. 티베트 고원에서 내려온 황하가 북쪽으로 크게 곡류하면서 만드는 중간지대. 그 때문에 하투(河套)라고도 하고, 하남(河南)이라고도 한다. 중국 한복판의 하남성과는 다르다.
  5. 중앙아시아 일대에 거주했던 이란계 유목민족.
  6. 6세기경 수서에서 수나라가 다시 서역으로 진출해 동로마까지 기록에 남기지만 흉노는 없는걸로 보아 시베리아로 튀었거나 망했거나. 현재로서는 추측할 단서가 없다.
  7. 흉노족인 유연(劉淵)이 흉노와 형제의 관계였던 한이 멸망했으니 그 전통을 형인 흉노가 잇겠다며 국호를 한이라 했고, 실제로 한나라의 황제에게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8. 북하, 호하등으로 불리는 국가로 역사상 마지막으로 흉노국가임을 내세운 국가였다. 결국 선비족의 북위에게 멸망한다.
  9. 이름이 유실되어 아무개란 뜻으로 모(某)표기
  10. 흉노에서 한나라로 투항했다가 다시 흉노에 항복했다.
  11. 만에 하나 흉노가 신라에 정착했을 정도면 그 중간에 있는 고구려와 이웃한 백제 역시 영향을 안 받았을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