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군

王昭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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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귀비, 서시,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

기원전 1세기 경의 인물로, 흉노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처로 원래는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본명은 장(嬙)으로 성과 합쳐 왕장(...)이 본명이지만, 자가 소군이기에 흔히 왕소군이라 불린다. 훗날 사마소의 이름인 '소(昭)'를 피휘하여 왕명군(王明君) 혹은 명비(明妃)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양귀비나 초선 등에 비하면 일반 대중들에게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인물. 그러나 중국에서는 지지가 확고한 미녀이다. 포사, 양귀비 등 대부분 중국사에 등장하는 미녀들이 국가의 멸망에 관여하는 좋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데 비해, 왕소군은 평화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숭고한 여인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2 뽀샵의 말로

<서경잡기>에 의하면 흉노와 후한은 당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흉노 지도자인 대선우 호한야가 한족 궁녀를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하여 적당히 후궁을 보내게 되었다.[1] 하지만 원제는 가장 추한 여성을 보내려고 후궁들에게 모두 초상화를 그려 바치라고 했다. 그런데 후궁들은 동침할 여자를 고르려는 줄 알았으며, 당시에는 후궁으로 들어가서 황제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죽는 여자도 많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화가에게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쳐댔다. 그때부터 사진관 뽀샵의 전통이 전해진다

문제는 왕소군은 아직 황제와 만나보지도 못한 처지라 돈도 없었고, 천하의 절색이었으므로 뇌물을 주지 않았다는 것. 기분이 나빠진 화가 모연수는 '지가 예쁘면 다야?' 하면서 완전 추녀로 그려 황제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림을 본 원제는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가기 전날에 만나보았더니 웬걸, 천하절색이었다.[2] 그 아름다움을 접하고 넋이 나갔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 흉노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못미[3] 흉노에게 보내기 전에 하룻밤을 함께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초상화를 그린 모연수는? 당연히 으앙 죽음. 원제가 엄청나게 분노하며 모연수를 처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죄명이 뭡니까? 황제 능멸죄 ㅅㅂㄹㅁ

다른 버전도 있는데, 원제가 일일이 궁녀들을 심사할 시간이 없어서 그 대용으로 초상화를 미리 그려놨다가, 호한야에게 여자를 보내기로 약속한 뒤 그 초상화로 심사를 했다고. 물론 왕소군이 뇌물 안 줬다고 추녀로 그려진 것도 똑같고, 화공의 목이 달아난 것도 똑같다.

3 유복한 노후

하지만 호한야 선우는 '이런 미녀를 주다니 전한이 우리 흉노와 잘 지내고 싶다는 거구나'하고 입이 찢어져라 기뻐했으며 정중히 그녀를 대접했다. 그리고 당연히 호한야 선우의 연지가 되어 장남을 낳았고, 호한야 선우의 사후 당시 흉노족의 수계혼 관습대로 호한야 선우의 아들인 복주누약제 선우의 처가 되어 딸을 낳았다.

지금은 물론 당시 한족의 생각으로도 아버지의 처첩을 자식이 물려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패륜이었기에 이를 왕소군의 비극이라고 하기도 한다. 모 개그 만화에서는 잘생긴 남편->죽자 잘생긴 아들->죽자 잘생긴 동생 등으로 가면서 역하렘을 했다는 내용도 있다. 궁에 들어가서 황제의 눈에 띄지도 못하고 살다가 흉노로 갔으니 그럴 가능성도 없잖아 있... 으려나? 그리고 늙은 황제보다는 넓은 초원을 달리는 짐승남들이 나을지도

채옹의 '금조'에 따르면, 왕소군이 흉노의 수계혼 풍습에 따라 친아들과 합방할 것을 강요받자 거부하고 자살했다고 전하며, 민간 전승에서는 심지어 국경을 넘어간 후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함으로써 원제에게 절개를 지켰고, 흉노가 그 의기를 높이 사서 그곳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사실은 전부 열폭. 왕소군은 흉노 땅에서 오래오래 살면서, 한족 문화를 흉노에 전파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다. 후한서 흉노열전에 금조를 참고해서 쓴 범엽은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서모들은 모두 자기 아내로 들이지만, 친어머니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그 부분은 채택하지 않았다. 왕소군과는 상관이 좀 떨어지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 흉노와 한 왕조는 비교적 우호 관계를 유지했고, 흉노의 침략 또한 사그라들었다. 왕소군을 비극적인 여인이라는 모습으로 인식할지언정, 나쁘게 보지 않는 것엔 이런 점도 작용한 듯 하다.

4 미녀와 비극 코드

이런 미녀와 비극 코드(...)는 후대 창작자들을 강하게 사로잡아, 다양한 작품에서 소재로 다루게 되었다.

왕소군이 흉노족에게 시집을 갈 때 고향 생각에 금을 켜자 기러기가 그 소리에 취해 떨어졌다고 하여 낙안(落雁)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과는 좀 다르다. 원래 이 말은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 편에 나온다. 제물론에서는 진헌공의 애첩인 여희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면서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 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물고기가 가라앉고 기러기가 떨어지고 달은 숨고 꽃도 고개를 숙이는 미모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각각 침어, 낙안, 폐월, 수화에 대응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4대 미녀가 정해진 것이다.[4] 정작 이 묘사의 주인공인 여희는 듣보잡인 게 유머

미인도에는 미녀들을 상징하는 아이템이 있는데, 왕소군의 경우는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호복이고, 보통 함께 사용된 것이 비파이다. 그래서 만일 말 옆에서 모피옷 비슷한 것을 입고 비파 같은 현악기를 든 미인 그림을 봤다면 90%는 왕소군을 묘사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5].

그 외에 흉노의 추운 날씨(고향에서 보던 꽃과 풀이 없으므로)를 비관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건 사실과 다르다. 이 시는 정확하게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 동방규가 지은 시 '소군원(昭君怨, 왕소군의 원망)'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昭君怨
漢道初全盛 한나라 비로소 번성하여
朝廷足武臣 조정에는 무신들 넘쳐나건만
何須薄命妾 어찌 하필 박명한 아녀자인고
辛苦遠和親 괴로워라 멀고도 먼 화친 길

掩涕辭丹鳳 눈물을 삼키며 궁궐을 작별하고
銜悲向白龍 슬픔을 머금은 채 흉노 땅으로 향하네
單于浪驚喜 선우는 놀라 그저 기뻐하지만
無復舊時容 예전의 낯빛을 다시 찾을 길은 없구나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自然衣帶緩 자연히 허리띠가 헐렁해지는데
非是爲腰身 이는 가는 허리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네

또한 죽은 뒤 흉노 땅에 묻혔는데, 그 무덤의 풀이 겨울에도 시들지 않아 청총(靑塚)이라 부른다고 한다. 네이멍구 지역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신할 수는 없다.

유명한 시인 이태백백거이나 시와는 별 상관 없어 보이는 왕안석, 석숭도 왕소군을 읊은 시를 남기는 등 미인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아래는 이태백이 남긴 시 2수이다[6]

소군원昭君怨
昭君拂玉鞍 왕소군이 옥안장을 떨치며
上馬啼紅頰 말 위에 오르니 붉은 두 뺨에 흐르는 눈물
今日漢宮人 오늘은 한나라의 궁인이지만
明朝胡地妾 내일이면 오랑캐의 첩이 되는구나
漢家秦地月 한나라 시절 옛 진나라 땅에 떠 있던 달은
流影照明妃 그림자를 내려 명비를 비추네
一上玉關道 한번 옥관도에 올라
天涯去不歸 멀리 떠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네

漢月還從東海出 한나라 달은 돌아와 다시 동해에 떠오르건만
明妃西嫁無來日 명비는 서쪽으로 시집가 돌아올 줄 모르네
燕支長寒雪作花 연지산은 늘 추워 눈꽃을 만들고
蛾眉憔悴沒胡沙 미인은 초췌해져 오랑캐 모래에 사라지도다
生乏黃金枉畵工 살아선 황금이 없어 초상화를 잘못 그리게 하더니
死遺靑塚使人嗟 죽어선 청총을 남겨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케 하네

대만의 개그만화 "크레이지 스토리"에서 위에서 언급한 형사취수 관련 풍습을 재치있게 패러디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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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온라인에서 중국 문명의 보좌관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사항은 추가바람 인기가 없다 안습
  1. 다른 이야기로는 부마국이 되려고 공주를 보내 달라고 했으나, 공주가 너무 어린 나머지 춥고 험한 북쪽으로 공주를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렸던 원제가 호한야 선우한테 공주 대신 궁녀를 보내주겠다고 하고 양해를 구한 이야기도 있다.
  2. 혹은 평범하게 그린 다음 당시 '과부가 될 상을 가졌다'는 미신이 있는 점을 찍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황제가 그림의 그 점을 보고는 어디 여자 안고 복상사나 해버려라 하고 보냈는데 점도 없는 절색이었다.
  3.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선우에게 보낼 때까지 눈치 채지 못했다가 선우가 좋아라 하는 걸 보고 나서야 뭔가 크게 잘못됐음을 알고 분노한다. 국내에 90년대 중순에 나온 중국 역사 만화 1권짜리(제목 불명)에서도 똑같이 나와서 황제가 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다.
  4. 그리고 이 댓구에 끼지 못한 조비연은 4대 미녀 취급을 받지 못한다.
  5. 왜 100%가 아니냐면 채염 문희가 있기 때문이다. 이쪽도 사정이 비슷해서 이미지가 서로 섞인다.
  6. 이백의 시는 조각조각으로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첫번째 시의 앞 4연이 위에 언급된 동방규의 소군원에 붙어 나온 것도 있다. 즉 오언율시 2수인지 오언절구 1수인지 헛갈린다. 아래 시까지 줄줄이 이어져서 하나의 시처럼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건 이것대로 헛갈리는 게, 애초에 오언율시니 칠언절구니 하는 정형시 구조가 두보 이후에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즉 아래시는 1+2+3도 있고, 1 2+3도 있고, 1 2 3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