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 혼인보 슈사이(秀哉 1874~1940).[1] 혼인보 가문의 마지막 당주이자 일본 전통바둑 최후의 명인.
본명은 다무라 호쥬(田村保壽)이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에 가려 했으나 선교사의 죽음으로 실패하고 어느 사찰에 들어가 바둑공부를 하며 주지스님의 바둑 상대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갔다. 이후 일본 망명 중인 김옥균과 알게 되었고 김옥균이 19세 혼인보 슈에이와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슈에이에게 소개를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 슈에이는 다무라를 탐탁지 않아했지만 그와 테스트 대국을 두어보고는 문하로 받아들임과 함께 단번에 四단 면장을 수여했다. 이후 김옥균이 오가사와라 제도에 유배당했을 때 그는 당시 배로 몇 주가 걸리는 거리를 직접 찾아가 함께 바둑을 두기도 했을 만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1908년 혼인보 가문의 당주가 후계자를 미처 정하지 못하고 급사하는 일이 발생하자, 당주 자리를 놓고 문하의 양대 실력자인 다무라와 가리가네(雁金準一)가 대결을 펼치게 되었는데, 다무라는 여기서 승리를 거두었고 결국 혼인보 가문의 21세 당주가 될 수 있었다. 이후 혼인보의 전통에 따라 슈사이(秀哉)로 불리게 된다.
1914년에는 명인 칭호를 얻었는데 이 무렵 전통바둑의 최고 권위인 고도코로(碁所)가 일본 정부에 의해 폐지된다. 1924년에는 재벌 오쿠라의 주도로 일본기원이 창설되며 현대바둑의 시대가 열렸는데 슈사이는 이를 지원하는 입장에 있었다. 일본기원이 창설되자 슈사이의 라이벌인 가리가네가 이에 대항하여 다른 단체를 만들고 슈사이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둘의 대결은 20일동안 계속되며 요미우리 신문에 기보가 연재될 정도로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2] 결과는 슈사이의 불계승. 콩라인 가리가네
이후로는 일본 바둑계의 대원로로 대접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1932년에는 요미우리 신문이 주최한 이벤트로 프로기사를 대표하여 나온 우칭위안과 대국을 펼쳤는데, 여기서 우칭위안이 3의 3, 화점, 천원에 첫 착점을 하며 큰 논란을 일으켰다. 전통바둑에서 첫 착점은 무조건 소목(3의 4)에 하는 게 관례인데, 사람들은 우칭위안의 착점을 전통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3]
말년에는 기존 방식의 세습을 포기하고 '가장 강한 프로기사에게 혼인보 명칭을 수여하자'고 천명했고, 이는 현대 프로기전인 '본인방전'으로 이어졌다. 1938년 기타니 미노루와 은퇴 대국을 치렀고, 1940년 사망했다. 당시 이 대국의 관전기자로서 관전기를 신문에 기고하였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대국을 모티브로 명인(名人)이라는 소설을 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