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 항목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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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의 사진은 말년의 모습이다.[1]
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 조선은 적어도 동방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
갑신정변의 주동자이자 한국사의 풍운아.
목차
1 소개
안동 김씨의 일문인 김병기[2]의 양자로 들어가 어린 나이에 과거 급제, 그 후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 와중에 개혁 선구자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역관 오경석, 의원 유홍기, 승려 이동인[3] 등을 만나 개혁 사상을 배우게 되고 박영효, 서재필과도 친구가 된다.
임오군란 이후 3차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이때 17만원의 차관을 받아 한성순보를 발행하였다. 이후 일본을 배워 급진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 주장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에 군인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실패가 원인 중 하나가 되어 급진개화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하자, 그 직후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본의 지원을 받아서 정권을 탈취하려는 목적으로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우정국에 불을 내어 온건개화파로 전향한 옛 동지 민영익을 부상 입히고 기타 정객들을 제거 후 스스로 호조참판의 자리에 올라 개혁을 단행한다.
하지만 조선에 주둔한 위안스카이가 청군 1,500여명을 이끌고 진입, 일본 공사의 배신으로 실패 후 일본에 도주, 이와다 슈사쿠로 개명하고 망명 생활을 한다. 일본 정부는 그를 부담스러워 했는지 체포하여 오가사와라 섬, 그리고 홋카이도 섬에 유배 보냈다가 풀려난다. 1894년 당시 주일 공사로 있던 이홍장의 아들의 설득으로 윤치호 등을 대동하고 한·중·일 세 나라가 힘을 합해 서양의 침략에 맞서자는 삼화(三和)주의를 중국의 최고실력자 이홍장에게 설파하기 위해 하루 전 상하이에 도착했던 김옥균은 호텔 동화양행에서 민씨척족의 심복인 이일직에게 매수된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한다. 김옥균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홍종우를 신뢰했는데, 이는 그가 프랑스 유학파라는 것과 죽은 홍영식의 먼 친척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홍종우에게 암살 당할 때 그는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으며, 총을 3발 맞고 죽었다고 한다.
김옥균씨조난사건,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중국 상하이에서 암살을 당할 때를 묘사한 그림이다.
암살 후 홍종우는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나고, 김옥균의 시신은 썩지 않게 페인트를 칠해 운송한 후에 능지처참되었으며 그의 목은 효수되어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써갈겨진 천이 붙었다.
당시 사진. 김옥균의 목이 매달려있는 사진이므로 혐오주의
그리고 그의 생부, 생모, 형제들도 떼죽음을 당했다. 양아버지는 유배형을 받았는데 얼마 뒤 복직한다. 안동 김씨 문중에서는 역적이 된 김옥균을 수치스럽게 여겨서 균 자 항렬의 이름을 전부 규 자로 바꿔버렸다(...).
그의 머리는 평소 존경하고 따르던 일본인이 훔쳐내어 도쿄의 어느 절에 묻었다. 하쿠산역 인근에 위치한 이 절 뒤뜰에는 높이 3m 이상의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상단이 파손된 것으로 보이는 얇고 높은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을 찾아오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시피하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무덤은 양자[4]가 그 머리에서 머리카락만 가지고 와 따로 묻은 것이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서광범과 김홍집의 상소로 복권되었으나 아관파천 뒤 취소되었지만, 1910년 순종황제 때 다시 복권되어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간단히 말해서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지면 높여지고, 약해지면 떨어졌다고 보면 쉽다. 갑오개혁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시작되었고, 다시 복권된 1910년이면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완전히 사라지던 해이다. 이건 모두 일본의 의도라고 봐도 무방하다. 왜 일본이 김옥균을 이렇게 높이 평가하게 되는지는 뒤에 설명된다.
어렸을 때 달을 보고 "저 달은 비록 작으나 온 천하를 비추는구나."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바둑을 매우 좋아하고 잘 두었다고도 하며 과거보러 가던 중 하인이 노름으로 날린 돈을 그날 밤 노름꾼들에게 달려가 투전판을 휩쓸어 되찾아왔단 얘기도 있다. 뭐야 이거... 김옥균의 바둑과 관련된 다른 일화로는 그가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당시, 일본의 혼인보 슈에이가 김옥균과 함께 3개월 간 바둑을 두며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슈에이와 6점 접바둑을 두어 김옥균이 이긴 기보가 존재한다. 기보로 추정하는 김옥균의 기력은 바둑 아마추어 3~4단으로 추정된다고 한다.관련칼럼1관련칼럼2
2 평가 및 형상화
매우 영민하고 시세를 잘 파악하는 개혁적인 인물이었지만, 너무 일본을 믿었다는 점을 실패의 요인으로 평할 수 있다.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일본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나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ref>[5][6]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독립협회에서 친일적인 인사가 나온 점, 백성의 지지가 없는 그들만의 개혁 때문에 여러가지로 한계를 가진 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더군다나 한때 본인이 원수처럼 여겼던 청의 이홍장을 만나 복권을 꾀하자는 말에 낚인 것도 그를 평가절하하는 요소로 꼽고 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인사들 중 이상재, 남궁억처럼 독립운동가가 된 사례로 있는 만큼 일부 인사가 친일파가 되었다고 독립협회와 개화파를 무조건 친일파로 규정하는건 부당하다. 더구나 독립협회와 대립한 황국협회에서도 민영기 같은 친일파가 나왔다. 또한 김옥균 본인이 일본과 손잡긴 했어도 매국 행위는 일절 하지 않았고 청과 접촉한 것도 국익을 위해서 노력한 것으로 비춰질 여지도 있기에 마냥 평가절하할만한 요소는 아닌 면도 있다.
한편 당시 김옥균은 일본에서도 처치 곤란한 인물이라 언제 조선에 넘겨질지 모르는 상태였고, 그런 김옥균이 청을 통해서라도 살아남으려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위험 가능성이 있으니 위험이 확실한 지대로 피신을 한다는 말도 안되는 발상일 따름이다. 오히려 김옥균이 일본을 떠나 청과 교섭을 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김옥균에게 일본은 그저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이용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생각했기에 언제든지 손잡을 대상을 바꿀 수 있다는걸 잘 보여준다.
여하튼 넓은 의미의 친일파라는 이름이 붙어도 이상할게 없지만 한국에서는 친일파=매국노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일본에게 이용당했지만 매국을 한게 아니라서[7] 친일파로 부르지는 않는다.
흔히 같은 개혁 동지인 박영효와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우로 오인되지만, 사실은 정변 실패 이후 둘의 사이는 급격히 틀어졌고 김옥균이 일본 망명 생활 중 주색잡기로 소일하는 것을 박영효는 무척 싫어했다. 훗날 박영효는 김옥균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김옥균의 장점은 사교적이다. 외교술뿐만 아니라 시서화 모두 능했다. 그러나 그의 단점이라면 덕이 없고 모략이 없다는 것이다." "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내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인 일본인 할거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 쓰듯 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년에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때문이지.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렇게 된 거지. 그렇다고 옥균이가 진짜 리더인가? 나랑 홍영식이 다했지.." |
그래도 옛 정은 남아 있었던 듯, 김옥균이 홍종우와 함께 청으로 건너갈 때 박영효가 홍종우는 위험하다면서 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김옥균은 박영효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왕도의 개>의 김옥균. 밑의 그림의 안경 쓴 남자는 박영효.)
왠지 일본에서는 혁명가적인 인물로 높이 평가 받는 것 같다.
사실 김옥균과 관련한 문학화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은 일본으로, 1890년대부터 김옥균과 관련한 창작이 활발하였다. 이는 김옥균이 일본에 처음으로 온 정치 망명객 제1호인 점과, 그의 상하이에서 맞이한 비극적인 죽음, 그리고 일본제국의 팽창과 아시아주의와 관련한 일본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경향과 다른 특이한 작품을 꼽자면, 아키타 우자쿠가 발표한 희곡 <김옥균의 죽음(金玉均の死)>(1920)이 있다. 이는 같은해 7월 김동환이 번역하여 『창조』지에 게재되었다. 여기서 김옥균은 영웅이라기보다는 범부로 그려지고, 정치적인 허무주의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일본 신극운동을 주도하던 오사나이 가오루의 희곡 <김옥균(金玉均)>(1926)이 있다. 이는 김옥균의 <갑신일록>을 바탕으로 창작되었으며, 김옥균을 시대에 맞서는 개혁자로 형상화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일본 정부와 근대화를 막는 전통과 관습을 비판했다.[8]
이와 달리, 한국의 경우에는 1928년 김진구의 희곡 <대무대의 붕괴>[9]가 사실상 처음으로 형상화된 작품이다. 작가의 성향상[10] 아시아주의에 동조하는, 친일적인 색채가 엿보인다. 이후 30년대에는 주로 민족 수난사의 하나로 김옥균이 다루어졌으며, 대체적으로 비운의 인물로 그려진다.
이와 달리, 김기진은 <심야의 태양>(1934, 이후 <청년 김옥균>으로 이름 변경)이라는 소설을 발표한다. KAPF 멤버였던 김기진은, 이 소설에서 김옥균을 실패한 혁명가로 묘사하며, 혁명은 민심을 읽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1940년대에는 주로 친일적인 작품 속에서 오족협화나 대동아공영권의 '선구자'로 자주 등장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박영효의 친일극<김옥균의 죽음>(1944).
한편,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에선 아예 김옥균을 존경하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11], 에가와 타츠야의 <러일전쟁이야기>에서도 등장. 이 만화에 등장하는 조선측 인물들 중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이다. 현재까지도 한국의 김옥균 무덤보다 일본의 김옥균 무덤이 더 정비가 잘 되어 있으며, [12] 김옥균 연구모임이라는 일종의 팬클럽도 존재한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에 의하면, '김옥균은 갑신정변 이전부터 일본에서 유명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고 했다. 당시 일본인들 반응으로 김옥균이라는 인물은 '매우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인물'로 그렸다고...</ref> 일부에서는 김옥균을 조선의 사이고 다카모리로 보는 정도인데, 당연한 이치로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강력하게 김옥균 미화사업을 벌일 정도였다. 몰락한 김옥균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가 총독과 식사를 한다거나 김옥균 처의 수기가 연재되거나 했다.[13]
친일 문학 작품으로 망명하려는 김옥균이 조선관헌에게 송환될 위기에 처하자 일본 선장이 나와서 총을 들이대면서 묄렌도르프 일당에게 호통쳐서 위기를 넘기는 단편도 있다.[14]
일본 웹등에서 김옥균 이름을 쳐보면 김옥균을 높이 쳐주는 포스팅이나 게시글 등도 종종 발견된다. 그런 곳에서 그에게 붙는 칭호는 혁명가, 혹은 시대를 잘못 만난 영웅(...). 애매한 '풍운아' 라는 표현을 즐겨쓰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다만 이는 일본인들이 일본을 모범으로 삼고 일본식 개화를 통해 한국을 개혁하려고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당시 잘 나가는 일본을 따르려고 한 그를 혜안이 있는 자로서 칭송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후원자는 후쿠자와 유키치였으니... 여기서 한 발짝 더 잘못 나가면 식민사관과도 접점이 있는 만큼 일본의 김옥균에 대한 높은 평가는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강점기 시절, 일본이 김옥균을 영웅시한 사례를 참고하자. 그렇다고 일본이 띄워줬다는 이유로 평가절하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해야 하니...
일본은 김옥균의 죽음을 반청 감정의 고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김옥균은 (그 자신이 어떻게 생각했느냐에 관계없이) 거의 일본인이었고 사건이 일어난 호텔이 일본인 소유였다는 점을 들어 김옥균 암살 사건을 일본 주권의 침해로 받아들였고, 김옥균 시신 처리를 통해 조선과 청을 상종할 수 없는 야만적인 국가라고 선전하였다. 이렇게 고조된 반청 감정은 후일 청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걸 보고 위에 서술된 왕도의 개에서는 정작 김옥균이 도움을 구할때는 아무도 없다가 그가 죽자 일본이 태도를 정 반대로 바꿔 죽음을 이용하고 배신하였다며 비판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오가사와라 제도에 오랫동안 귀양 보내는 등 푸대접하다가 죽은 다음에야 호들갑떤 게 맞긴 하다.
조선의 근대화 수레바퀴를 빠르게 앞으로 당겨놓길 원했던 그의 뜻과는 달리, 갑신정변 시점에 잠시 존재했던 개혁의 흐름은 실패와 동시에 오히려 몇 보 후퇴하고 말았다. 갑신정변에 이리저리 휘둘렸던 고종과, 김옥균과 급진 개화파에게 당한 수구파, 온건 개화파가 급진적인 개혁 움직임에 더욱 경계를 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에서 박은숙 씨가 저술한 김옥균 평전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를 두고 김기협 씨와 박은숙 씨가 논쟁을 벌인바 있다. 김기협의 서평 박은숙의 반론 격렬한 김옥균까인 김기협도 문제지만 박은숙도 지나치게 김옥균을 고평가하는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게다가 그녀는 김홍집을 지나치게 까면서 김옥균을 견줘 찬양하고 있다.
3 기타
의외로 포경과도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1883년 고종으로부터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 겸 '포경사(捕鯨使)'로 임명받아 울릉도 개척 겸 포경 산업 전반을 관할했기 때문이다. 다만 갑신정변으로 그게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포경과 관련된 이권은 열강들에게 넘어갔지만 말이다.
일본인 첩을 두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일본에서 세계사 수업 시간에 김옥균의 이름이 나오면 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름이 金玉均 인데 일본어에서 긴타마(金玉)는 고환이므로.(…)
한때 자신을 '김옥균의 친손자'라고 사칭하는 남자가 나타난 적이 있다. 1934년 2월, 18세의 한 소년이 자살극을 벌이다가 종로경찰서로 오게 된다. 어눌한 한국어로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김옥균의 손자, '김원세'라고 설명한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로부터 한국어를 배웠지만 어눌하다는 것. 할아버지가 김옥균이라는 사실을 듣고 조선 땅에 오게 되었는데, 돈이 떨어져서 상하이 조계촌의 조선인과 상하이 일본영사관의 도움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김옥균의 친척들이 직접 와서 확인하였으며, 김옥균과 관련하여 상당히 자세하고 정확한 내용을 진술해서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로마에서 윤심덕과 김우진이 악기점을 하고 있었다고 진술한다. 이로써 전 언론의 집중을 받았다. 이에 종로경찰서는 이탈리아와 상하이에 신원조회를 요청했고, 그러자 그의 행방이 갑자기 묘연해진다.
그리곤 며칠 뒤 또 자살소동을 벌이는 소년이 발견된다. 이 소년은 자신을 상하이 출신의 '이영태'라고 소개하며, 고국이 그리워 누이와 함께 조선으로 오던 중 만주에서 마적들에게 가족을 잃고 흘러흘러 조선에 왔다고 진술한다. 신원조회 과정에서 이 소년이 앞서 '김원세'라고 자칭한 인물과 동일인임을 확인되고, 그의 거짓말이 들통난다. 사실은 강원도 암자의 중으로 산사 생활이 지겨워서 이와 같은 행동을 저질렀다고. (...관심병 환자임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한국 인터넷 등에서도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던 인물로 평가받은 탓인지, 현대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넷 유머인 한국에 태어났으면의 주인공(?)으로 등장, 천재들을 환생시켜 줘도 되려 그들을 망쳐놓는 한국의 현실에 절망하는 역할로 나오기도 한다(...).- ↑ 한자
중간의 일본어 の(~의) 빼고로 조선독립운동지사 김옥균이라 씌여져 있다. 사진의 상태로 인해 다크서클로 착각할 수 있으나 실제론 안경을 착용한 모습이다. 좀 더 화질이 좋은 다른 사진으로는 [1]가 있다. - ↑ 안동 김씨의 세도가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金炳冀)와는 다른 인물이다. 김옥균의 양부는 김병기(金炳基)로 김좌근의 조카에 해당한다.
- ↑ 개화 승려로 유명하지만, 임종국의 책 '실록 친일파'에 의하면 원래는 정식 승려도 아니었고, 일본 불교와 접하면서 승려가 된 인물로 현재에는 일본 밀정으로 취급되고 있다. 공식적으로 창씨개명 제 1호로 일본식 이름은 아사노 도진.
- ↑ 일본인 여자 사이에서 낳은 친자라는 설도 있다. 이 사람은 일제강점기때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친일파가 되었다.
- ↑ 김옥균이 일본의 힘을 빌리려 한 것 때문에 일각에서는 갑신정변이 일본의 공작이었고 김옥균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물론 설득력없는 주장이긴 하지만, 일본의 지원이 없어지면서 금방 몰락해버린 김옥균의 행보 때문에 그런 주장이 나올만도 하다. 그러나 갑신정변 이후 한성 조약과 톈진 조약을 통해 조선이 이래저래 덤터기를 쓰게 된 것은 사실이므로 판단은 각자가 할 몫이다.
- ↑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극우적 태도가 갑신정변의 실패를 계기로 나타났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적어도 후쿠자와의 탈아론이나 정한론의 경우 갑신정변이 실패 후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평가는 접어두더라도, 김옥균이 생전이나 갑신정변 당시에 후쿠자와의 그런 태도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분명 존재한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에서는 갑신정변 후 일본에 머물던 김옥균이 후쿠자와와의 대화 후 '저 분이 저렇게 변하다니.' 하고 그의 변화를 한탄하는 연출로 이러한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 ↑ 김옥균은 어디까지나 조선을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 실패했다는 게 문제라고는 해도 명성황후 민씨 같은 인물과는 다르다.
- ↑ 정확하게는 김옥균과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가져와서 당대 일본 정부와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 ↑ 대무대는 김옥균이 구상한 미래로, 아시아주의에 맞닿아 있다.
- ↑ 그는 일본 유학시절 일본 우익인사들과 친교를 쌓았고,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을 반죽하여 한 덩어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 혁명 실패와 몰락의 과정에서 주인공의 처지와 거의 흡사한 것으로 묘사된다. 김옥균 본인도 나름 비중있는 인물로 나오며, 조선의 혁명가로 일부 고관들은 이제 한물 간 인물로 보고 있지만, 민중들에게는 인기가 있으며 사람은 괜찮은 인물로 묘사된다. 글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일본 기생집에서 이름을 대면 공짜로 해주려 하는 묘사가 있으며, 카츠 카이슈는 "인물은 인물이지만, 솔직해서 일을 그르칠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박영효나 고종황제가 좀 없어보이게 나오고, 명성황후가 대놓고 흑막처럼 나온 것과는 대조적. 여담이지만 해당작에서는 지나가는 언급으로 흥선대원군 역시 뛰어나다고 언급된다.
- ↑ 도쿄의 아오야마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그런데 묘소 관리비를 몇 년 째 아무도 내질 않아서(…) 철거될 뻔했는데, 이걸 알게 된 주일한국대사관에서 황급히 체납분을 내서 철거되는 일을 막았다고 한다.
- ↑ 춘사 나운규도 김옥균 전기 영화를 만들었는데 어른의 사정으로 삭제가 많았다.
- ↑ 민족 문제 연구소가 꼽은 친일작품이기는 하지만 한국 위키나 이곳저곳에서 치토세마루 호의 츠치 선장이 김옥균의 망명을 도왔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쪽을 보면 그냥 내려주면 죽는데 인도적인 측면에서 숨기고 거짓말을 한것처럼 표현되는데, 이는 그가 망명 후 저술한 <갑신일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실제로 인도적인 차원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이 일화는 위의 왕도의 개에서는 김옥균이 일본인을 믿지 못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데 쓰인다. 한국인은 친일문학으로, 일본인은 당시의 일본을 비판하는데 쓴 소재라는 걸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