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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홍대용하면 교과서에 주로 실리는 그림. 청나라의 문인인 엄성(嚴誠)이 그렸다고 한다.
1 개요
조선시대의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고 상공업을 육성하자는 북학파 실학자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 노론 산림의 으뜸으로 꼽히던 석실서원의 미호 김원행을 스승으로 학문을 연마했으며 처음으로 조선에서 지전설을 주장했고 대중에서 설파한 과학자이기도 하며 당대 연경에서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해 본 적이 있다는 얘기가 있을정도로 음률에도 밝았다. 1731년 5월 12일에 태어났으며 1783년 11월 17일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저서로는 《담헌서》, 《사서문의》, 《의산문답》, 《임하경륜》, 《건정필담》, 《주해수용》, 《을병연행록》이 있다. 그의 인물평이 깐깐한 편인데, 나무위키에도 촉한의 인물인 강유와 제갈첨의 인물평이 실려있다.[1] 해당문서는 각각의 항목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구태여 여기 적지 않는다.
을병연행록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와 함께 조선 후기의 3대 중국견문록으로 꼽힌다. 또한 그의 지전설은 을병연행록에서 나온 중국 여행에서 지전설을 알고 그동안의 조선의 우주관을 넓히려 했다. 후에 나경적과 함께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 제작.
2 정조와의 만남
1775년(영조 51년) 그는 세자익위사의 시직으로 출사하여 젊은 세손(정조)을 보필하고 가르치는 자리를 1년간 맡게된다. '계방’으로 불리는 세자익위사(그래서 이 시절에 세손과의 문답을 기록한 홍대용의 담헌서 내부의 기록도 '계방일기'다)는 세자시강원과 함께 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는 서연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시직은 종8품으로 품계는 낮지만 믿을 만한 공신이나 재상의 자제들이 임명되는 명예로운 자리였다. 세자의 말동무도 하고 과외선생도 하는 까닭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요직에 발탁되기도 했다. 홍대용은 이후 외직만 돌았고 세손이 보위에 오른 이후 몇년 안가 세상을 떠났으니 아쉽게도 정조가 중히 쓸 일은 없었지만...
세손은 서연자리에서 홍대용에게 연경의 풍속을 묻기도 하고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와 퇴계 이황의 주서절요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등 1년간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의양이 홍대용을 고문으로 두라고 추천하자 정조는 홍대용의 막힘 없는 대답을 보고 "몇 차례 보고 이미 그럴 만한 사람인줄 알고 있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두사람의 정치관은 다른 편이었는데 격물치지와 실천을 중시하던 홍대용에 비해 그게 중요한것은 알지만 치국 평천하의 일을 버릴수는 없다라고 답한다던지, 강희제의 치세가 성군의 치세였다라던지 연경의 번화함을 연경의 등으로 설명하는 홍대용에게 조선 궁중에서 사용하던 등이 매우 아름다웠다며 응수하는 세손의 모습은 이후 두 사람의 행보가 갈린 이유를 설명해주는 일화일런지도 모른다.- ↑ 담헌서의 사론에는 주로 삼국시대 후반서부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 시대 인물들의 인물평이 주로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