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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葛瞻
(227 ~ 263)
1 개요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무장. 자는 사원(思遠)으로, 아버지는 촉한의 정치가 겸 전략가로 이름높은 제갈량이다. 학경이 남긴 『후한서』 「제갈첨전」에 따르면 제갈량과 황부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한다.
위의 사마소와 사마사, 오의 제갈각와 마찬가지로 출세가도를 달렸다는 점은 다른 삼국의 유명한 대신들의 2세와 비슷한 점이지만 사마염이 서진을 건국할 정도의 기반을 쌓아둔 사마씨 형제나 잠시나마 대권을 주도한 제갈각과 달리 기록이 적어 행적이 많이 남지 않은 편이다. 이는 제갈첨의 능력이 다른 2세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시사하지만 동시에 묘하게도 공신의 후손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사례가 없는 촉한의 정치구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제갈량의 늦둥이 아들로 제갈량이 무려 47세였을 무렵에 태어났다. 나이에서 볼 수 있듯이 제갈량에게 오랫동안 친자식이 없어 형인 제갈근의 차남인 제갈교를 양자로 들였지만 제갈교는 아들로 제갈반 하나만 남긴 채 요절했다.[1] 이런 불운에 불구하고 친자가 태어나 대를 이을 수 있었으니 제갈첨에 대한 제갈량의 기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듯. 제갈량이 제갈근에게 제갈첨을 언급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제갈)첨도 이제 여덟살인데 총명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저는 이 애가 너무 일찍 숙성하여 큰 인물이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2]
“제갈첨은 이제 벌써 8살로 총명하고 사랑스러우나 그 조숙함이 걱정되니, 중기(重器-중요한 인물, 큰 그릇)가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3]
서신의 내용에서 읽어볼 수 있듯이 제갈량은 8살에 불과한 아들이 너무 조숙한 나머지 큰 인물이 되지 못할까 벌써 걱정하고 있다. 특히 「제갈량집」에 남은 제갈근과의 서진중 대부분이 촉한내 사정을 알리는 사무적인 서신[4]은 굳이 아들 첨에 대한 편지를 제갈근에게 보낸 것을 봐선 특히나 사랑스러웠던 모양이다. 늦둥이 아들내미 앞에선 제갈량도 팔불출 아비다. 다만 조금 씁슬한 부분이라면 제갈량이 이 편지를 보낸게 다름아닌 234년 2월이다. 제갈량이 대군을 이끌며 마지막 북벌을 위해 야곡을 지나면서 형 제갈근에게 보낸 서신이라 한다. 서신을 쓰기 전에 여덟살배기 제갈첨과 만나봤던게 아마 제갈량과 첨의 마지막 만남이었을 것이다. 제갈근에게 굳이 제갈첨에 대한 서신을 보낸 것도 아들과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는 아쉬움 때문이었을지도.
234년, 겨우 제갈첨이 8살되었을 무렵에 아버지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사망했다. 촉빠 중에선 제갈첨이 너무 늦게 태어났다며, 만약 제갈첨이 젊어서 아버지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는 사람도 있다. 10대 초중반이면 몰라도 8살에 사별한 것이라면 가르침은 커녕 제갈량에 대한 기억조차 별로 없었을 것이다.
2.2 놀라운 출세가도
제갈량이 죽은 뒤 아버지의 작위인 무향후를 이어받아 장차 촉을 이끌 인재로 기대를 모았다. 『촉서』 「제갈량전」에 부록된 「제갈첨전」에 의하면 제갈첨은 글과 그림에 능하고 기억력이 좋았다고 한다. 제갈량을 좋아하는 촉인들에게 특히 기대받아 제갈첨의 재주와 총명함을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243년, 17살의 제갈첨은 공주에게 장가들어 유선의 부마가 되고 기도위에 임명되었다. 244년에 우림중장랑으로 임명되고 다시 여러번 승진해서 사성교위, 시중, 상서복야에 군사장군으로 봉해졌다. '여러 번 승진하여'같은 구절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순식간에 거쳐간 관직이 너무 많아서 생략된 것도 좀 있는 듯하다.
261년, 제갈첨은 행도호 위장군으로 봉해져 같이 평상서사를 맡은 동궐과 함께 상서의 일을 관장했다고 한다.
제갈첨의 출세가도는 실로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불과 35세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군부 내에서 대장군 강유 다음가는 자리인 위장군을 꿰찼다. 물론 한왕조 장군 서열을 그대로 적용하여 군부만을 따지고 본다면 제갈첨이 위장군으로 임명된 262년엔 이미 260년에 임명된 염우, 장익, 요화가 제갈첨보다 군부 서열이 위로 볼 수 있지만 유비 생전부터 이미 촉 장군들의 서열은 꼬일 대로 꼬여있기 때문에 함부로 끼워맞추는 것은 위험하다. 오히려 대장군 비의 밑에서 위장군을 지내고 있던 당시의 강유가 실전지휘관 중 최고 서열 대우를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촉한의 장군 서열은 위장군이 대장군 바로 다음가는 서열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있지는 않으나 고작 30대였던 그가 이런 중임을 맡았다는 데서 그 역량을 가늠해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된다.
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제갈량의 아들이라는 출신 때문에 (실제 역량과는 관계없이) 꽤나 기대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진수는 삼국지에 아버지 덕에 사람들이 제갈첨이 하지 않은 일들도 그의 업적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매번 조정에 선정(善政)이나 좋은 일이 있으면 비록 제갈첨이 제안한 일이 아니더라도 백성들은 모두 서로 전하며 말하길, ‘갈후(葛侯)가 한 일이다’고 했다. 이로써 아름다운 명성과 과분한 칭찬이 그 실제를 넘어섰다." -『촉서』 「제갈첨전」
물론 『진서』 「진수열전」에 의하면 촉한 시절에 진수가 제갈량 부자에게 모욕을 당한 일이 있어 『정사 삼국지』에서 그 둘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보니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5] 하여튼 간에 승진 속도만 보면 촉한 인물들 중 최고속으로, 제갈첨을 제외하고 최고속 승진 속도를 자랑하는 강유조차 위장군을 40대 중후반에나 달았다.
제갈량의 아들이라는 타이틀 덕에 정권내에서도 기본적으로 영향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여 시사하는 기록 또한 남아있다. 「종예전」에 의하면 258년에 제갈첨이 처음으로 조정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일흔이 넘은 요화같은 사람이 32살의 제갈첨을 찾아가자고 종예에게 말했다고 한다. 「장익전」에 의하면 259년에 장익이 좌거기장군에 봉해졌다고 하는데 요화가 우거기장군을 맡은 것을 고려하면 259년에 요화 또한 우거기장군에 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제갈첨을 방문한 효과인지는 사서에서 자세히 기록하지 않기에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제갈첨을 방문한 바로 다음 해에 승진한 것을 보면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장억전」에 의하면 장억은 제갈각의 무모한 북벌을 막아야한다는 장문의 서신을 제갈각의 사촌 동생인 제갈첨에게 보냈다고 한다. 장억이 할일 없어서 제갈첨에게 제갈각의 실패를 예견한 것도 아닐테고 서신을 읽어봐도 왜 제갈첨이 제갈각의 출전을 말려야하는지 역설하는 내용임이 확연하다. 그러나 제갈첨이 제갈각에게 보낸 서신의 전문은 커녕 서신을 보낸 여부조차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장억이 제갈첨에게 제갈각에 대해 독촉한 것을 봐서는 이전부터 제갈각과 서신을 교환했을 가능성이 있있다. 계속 제갈각이 대권을 잡았다면 제갈량과 제갈근 형제가 그랬듯이 두 사촌끼리 소통하며 촉오관계를 증진하고 중앙정권내 제갈첨의 입지도 더욱 상승했을지도 모르지만 제갈각이 253년에 암살당한 탓에 무산되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촉오의 제갈씨는 양국의 외교라인의 주축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제갈각이 주살당하고 대가 끊겨서 제갈첨에게 힘을 실어줄 방식이 하나 줄은 것은 두고 두고 아쉬운 점이다.
2.3 강유 탄핵에 대한 해석
(경요) 5년(=262년), (강)유가 군대를 이끌고 한(漢), 후화(侯和)로 출병하였다가(※) 등애(鄧艾)에게 격파되니 답중(沓中)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강)유는 본래 기려(羈旅,객지생활하는 나그네) 신세로 나라에 의탁하였는데 여러 해 동안 공전(攻戰,공격하여 싸움)하였으나 공적(功績)을 세우지 못하였다. 그런데 환관(宦官) 황호(黃皓) 등이 내부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우대장군(右大將軍) 염우(閻宇)가 (황)호와 더불어 협비(協比,결탁)하니 (황)호는 은밀히 (강)유를 폐하고 (염)우를 심고자 하였다. (강)유 또한 이를 의심하니 이 때문에 스스로 위구(危懼,두려워함)하여 다시 성도(成都)로 돌아가지 않았다. -『촉서』 「강유전」
등애(鄧艾)가 촉을 평정한후 세운 경관(京觀)이 덕양현(德陽縣) 북쪽 33리 되는 곳에 있다. 등애는 경원 4년 촉을 정벌하여 제갈첨을 면죽에서 크게 깨트리고 대를 쌓아 경관(京觀)을 만들었다. 당초 제갈첨은 부현(涪縣)에 있었는데 등애는 이미 강유로 들어왔다. 제갈첨이 말하기를 “나는 안으로는 황호를 제거하지 못하였고, 밖으로는 강유를 제압하지 못하였으며, 나아가서는 강유를 지키지 못하였다. 내게는 (이) 세 가지 죄가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면죽으로 돌아가 주둔하겠느냐.” 하고 다리를 (땅에) 묻고서 싸우다가 (제갈첨) 부자는 죽었다. - 『촉서』 「제갈첨전」 주
경요(景耀) 4년(262년), 행 도호(行 都護), 위장군(衛將軍)이 되고, 더불어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에 동궐(董厥)과 함께 평상서사(平尙書事)가 되었다. 이 때 환관(宦官) 황호(黄皓)가 안에서 정사를 어지럽히고[亂政] 강유(姜維)는 밖에서 무력을 남용하였다[黷武]. 제갈첨은 이를 깊이 근심하여 동궐(董厥), 번건(樊建)과 더불어 염우(閻宇)로써 강유를 대체할 것을 모의하고 제(帝=유선)에게 아뢰었으나[啓] (유선은) 따르지 않았다. -『학경 속후한서』 「제갈첨전」
처음에 강유는 떠돌다가 한나라에 의탁하였는데, 몸소 중한 임무를 맡아서 몇 년 동안 군사를 일으켰으나 아무런 공적을 세우지 못하였다. 황호가 궁중에서 권력을 잡고 우대장군 염우와 친하게 잘 지내면서 속으로 강유를 폐하고 염우를 세우고자 하였다. -『자치통감』 78권
제갈첨, 동궐 등은 강유가 전쟁을 좋아하나 공이 없고 국내가 피폐해졌다 하여 후주에게 표를 올려 그를 소환해 익주자사로 삼고 그 병권을 빼앗으려 했다. 촉 장로(蜀長老)는 제갈첨이 표를 올려 염우(閻宇)로 하여금 강유를 대신하도록 했다는 고사가 있다 한다.
진 영화(永和) 3년(347년), 촉의 사관인[6] 상거(常璩)는 촉 장로가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진수가 일찍이 제갈첨의 관원이 되었다가 제갈첨에게 모욕당했는데, 이 일 때문에 죄악의 원인을 황호에게 돌리며 ‘제갈첨이 능히 바로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손성의 『이동기』
오직 『촉서』만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유선에게 총애받는 환관 황호가 강유를 염우로 대체하려던 촉한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단순한 기록일지도 모르지만 『학경 속후한서』와 손성의 『이동기』의 기록덕분에 상당히 다채로운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학경 속후한서』와 『이동기』는 모두 공통적으로 동궐과 제갈첨이 강유의 북벌을 반대하여 강유의 병권을 염우에게 맡기려 했다고 한다. 『촉서』에 의하면 황호 또한 유선에게 동일한 제안을 했다고 한다. 두 시도 모두 좌초되었는데 덕분에 제갈첨과 동궐이 황호와 청탁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하는 점은 『이동기』를 참고하면 제갈첨은 강유의 병권을 빼앗는 대신에 강유를 익주자사로 삼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강유는 그간 대장군+녹상서사+양주자사였는데 또 다른 양주자사는 위연임을 고려하면 양주자사는 북벌의 실무책임자를 의미한다. 그에 비해 이전의 촉한의 최고 실권자들의 관직은 각각 대장군/대사마+상서령+익주자사(장완), 대장군+녹상서사+익주자사(비의)로 대장군+녹상서사+양주자사였던 강유가 익주자사로 봉해진다는 것은 결코 의미없다고 볼 수 없다.[7] 촉한은 황제국으로 스스로를 칭하였으나 전토가 익주에 불과한만큼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다른 자사직과 달리 익주자사의 의미는 권위를 높여주는 실권직이라 해도 무방하다.
왜 하필이면 황호와 결탁한게 확연해보이는 염우에게 병권을 맡기려고 했다는 점이 문제인데 아직 명망이 적은 우대장군[8] 염우가 경력이 다른 원로급인 진남대장군 종예, 좌우거기장군 장익과 요화, 우표기장군 호제보다 다루기 쉬우리라 여겼기에 그러했다는 해석도 있있다.[9]
다만 황호 또한 강유를 염우로 교체하려했다는 『촉서』의 기록을 고려하면 강유-염우 교체책은 외정의 강유와 내정의 황호 둘 다 동시에 제어하기 위해 내세운 제갈첨과 동궐의 묘책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익주자사로 봉해진 강유가 내정권한이 강해진다면 262년에 황호를 죽일 것을 건의할만큼 황호를 경계했던 강유가 내정을 어지럽히는 황호를 두고 볼 리가 없다. 최소한 익주자사 책봉을 통한 권위강화는 성도에서 위협을 느껴 답중으로 피신가야했던 262년의 답없는 상황만큼 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유를 단독으로 익주자사로 봉하려했다면 유선의 총애를 독차지한 황호의 위기감서린 반대를 맞설 수 밖에 없는데, 제갈첨과 동궐은 황호와 친한 염우에게 강유의 병권을 내어준다는 매력적인 제안으로 설득하려 한 것으로 추측된다. 제갈첨과 동궐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간에 『촉서』에서만큼은 황호가 단독으로 강유를 염우로 교체하려 했다고 기록할만큼 황호는 강유-염우 교체책에 매우 호의적이었다.[10] 더불어 제갈첨과 동궐은 강유의 북벌 또한 문제로 봤는데, 강유의 병권을 염우에게 양도함으로 북벌을 쉴 수 밖에 없도록 강제하려던 것이라 볼 여지가 있다.
해석을 요약하자면 제갈첨과 동궐은:
1. 강유를 익주자사로 봉해서 내정권한을 강화하고, 2. 강유의 군권을 박탈해서 북벌을 중단할 수 밖에 없게 만들고, 3. 대신 염우에게 군권을 양도해서 근시안적인 황호의 지지를 얻는다. |
라는 희대의 정치적 묘수를 획책했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제갈첨과 동궐의 정치적 능력에 대해 훨씬 더 높은 평가를 줘야할 것이다.
제갈첨이 면죽에 주둔하면서 강유와 황호 둘 다 제압해야하지 못했다고 한탄한 것을 보면 황호와 강유를 동시에 제어하려 했다는 교체책의 결론과 딱 들어맞는다. 어쩌면 제갈첨의 한탄은 이 교체책이 실패한 것에 대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유선이 강유-염우 교체책을 반대함으로[11] 앞서 언급한 모든 의도와 가능성은 증명하지 못한 채로 좌초되었다. 그리고 이 해석마저도 사서나 역사서에서 주장된게 아닌 지독하게 짧은 『촉서』의 한계를 등업어 몇줄의 해석을 이리저리 끼워맞춰서 해석한 가설인만큼 틀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조심해야하는 부분은 『이동기』에서 일부분 촉의 장로의 증언을 자료로 쓴다는 점이다. 다행히 『이동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익주자사 부임책은 손성의 기록으로 장로의 구술은 『학경 속후한서』와 교차검증을 할 수 있는있는 제갈첨과 염우가 병권을 염우에게 주려고 했던 부분이다. 특히 신뢰도를 높이는 부분은 상당히 아슬아슬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배송지의 비판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학경은 원나라 사람이어서 『이동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기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워낙 아슬아슬한 가설이라 위의 기록중 하나라도 허구로 밝혀진다면 말그대로 와장창이나 마찬가지다.
하여튼 간에 제갈첨이 중앙정권에서 놀고 먹던 것만은 아니라는 점 하나는 확실하다.
2.4 면죽에서의 최후
대망의 263년. 위의 종회, 등애, 제갈서는 총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촉한을 침공했다. 여러 악재끝에 한중을 상실했으나 강유는 무사히 제갈서의 포위망을 회피하는 현란한 기동전을 보이며 검각에서 결사적인 항전을 펼쳤다. 종회의 주력군은 검각에서 막혀서 발이 묶였지만 등애의 별동대는 음평으로부터 작은 길을 돌파해 강유성을 거저먹고 재정비 후 한의 덕양정을 지나 부현을 공략한 이후 성도를 향해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대장군 강유, 좌우거기장군 장익, 요화가 검각에서 필사적으로 종회군을 막아내고, 우대장군 염우와 우표기장군 호제가 사서상 증발(...)한 만큼 가장 직위가 높은 위장군 제갈첨은 제갈상(제갈첨의 장남), 황숭(황권의 차남), 장준(장포의 아들), 이구(이회의 조카)등을 이끌고 등애를 막으러 나섰다. 이들 지휘관 중 군사경험이 기록된 인물이 하나도 없다는 점은 등애의 음평침공이 얼마나 시급한 비상사태였는지를 시사한다.
제갈첨은 성도의 병력을 인솔하여 부현으로 진격했다. 상서랑 황숭은 제갈첨에게 곧바로 요충지(덕양으로 추정)를 점해서 평지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등애군을 저지해야한다 건의했으나 제갈첨은 주저할 뿐 전진하지 않았다. 황숭은 이후에도 제갈첨에게 요충지를 점해야한다고 여러 차례 권유했다. 그러나 제갈첨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않으니 황숭은 급기야 눈물까지 흘렸다.
왜 황숭의 눈물겨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에 대한 여러 설들이 분분하다. 이중 대표적인 것은
1. 황권이 위에 투항한 사실을 상기하고 황숭의 건의를 믿지 않았다. 청나라의 학자 주수창이 세운 이론이지만 황권의 투항은 이미 40년 전의 일인데다가 유비가 황권의 항복은 본심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직접 보증했다. 그런고로 가능성이 많이 낮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이 가설을 채용했다. 2. 녹록치 않은 후방 사정. 이미 종회의 대군이 익주에 진입한 상황에 등애의 별동대 덕에 성도의 예비군마저 동원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제갈첨이 신속히 등애를 격파하지 않고 미적인다면 민심이 동요하는 것은 그리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특히 적을 지연시키며 결판을 내지 못하는 장수가 간신의 모함에 몰락한 일화는 여러번 되풀이된 사례고 유선 옆에는 이를 이행하고도 남는(...) 황호가 있었다. 특히 초주같은 항복론자에 의한 선동을 고려하면 확실한 불안요소라 해도 무방하다. 이쪽이 1번 가설보다 확실히 가능성에서 훨씬 높다. |
하여튼 간에 먼거리를 달려온 등애의 부대는 경험차를 과시하듯이 제갈첨의 선봉을 격파했다. 제갈첨은 후퇴해 면죽으로 물러났다.
등애는 제갈첨에게 서신을 보내 회유하려 했다.
“만약 투항하면 반드시 표를 올려 낭야왕(琅邪王)[12]으로 삼겠소.”
분노한 제갈첨은 그자리에서 등애의 사신의 목을 베고 진을 치고서 등애의 군대를 기다렸다.[13]
등애는 아들 등충에게 우익을 맡기고, 사찬에게 좌익을 맡겨서 제갈첨을 공격했다. 등애는 군의 삼등분해서 포위섬멸 노린 것으로 보이지만 놀랍게도 군사부문으로 아마추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제갈첨의 군대는 등충과 사찬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등충은 이미 후작위를 달고 있는데다가 나이와 경력은 등애를 따라서 만만찮을텐데다가 사마 사찬 또한 최소한의 전투 경험을 겸비했을텐데 한번도 전투를 지휘해보지 못한 제갈첨에게 한차례 패배했다는 점은 의외로 군재에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14][15]
격퇴당한 사찬과 등충은 다시 돌아와 등애에게 아룄다.
"적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등애는 화내며 말했다.
"존망의 구분은 이 한 싸움에 달려 있다. 어찌 불가능함이 있겠는가?"
등애는 사찬과 등충을 나무라며 아예 목을 베어버리려 했다.[16] 등충과 사찬은 다시 출진해 제갈첨군과 교전했는데 이때는 촉군이 대패했다. 제갈첨과 같이 싸웠던 황숭, 장준과 이구는 모두 전사하고 제갈첨은 진중으로 끌려나가 참수되었다.
『촉서』 「제갈첨전」에 주석으로 기재된 글귀에 의하면 제갈첨은 등애가 마막의 도움으로 강유성을 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안으로는 황호를 제거하지 못하였고, 밖으로는 강유를 제압하지 못하였으며, 나아가서는 강유를 지키지 못하였다. 내게는 (이) 세 가지 죄가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면죽으로 돌아가 주둔하겠느냐.”[17]
동일한 열전에서 주석으로 기재된 『화양국지』에 의하면 제갈첨의 장남 제갈상은 촉군의 괴멸을 바라보며 한탄하며 말했다.
부자가 나라의 무거운 은혜를 받고서 일찍 황호의 목을 베지 못하고 나라를 무너지게 하고 백성들을 죽게 하였으니 살아본들 무엇에 쓰겠는가?"
그리고 말을 때리며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격하다 사망했다.
제갈첨의 죽음으로 성도의 방어선이 한큐에 무너졌다. 이에 패닉에 빠진 촉한 조정은 초주의 설득에 등애에게 항복하면서 촉한은 멸망한다. 당시 제갈첨은 37세에 불과했다.
아버지 제갈량이 한중왕 즉위로 인생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할 무렵 아들 제갈첨은 촉을 지키려다가 전사했다.
2.5 사후
후손이 없는 제갈상과 함께 죽는 바람에 대가 끊길 위기에 처했지만 다행히 제갈상 아래로 차남 제갈경이 있었다. 제갈경은 촉이 멸망한 뒤 하동으로 이주했다가 서진이 세워진 뒤 강주자사가 되었다.
오늘날 제갈량의 직계 후손들은 바로 제갈경의 핏줄을 이었다고 하며 저장성 란시시에 집성촌인 제갈팔봉촌이 있다. 사마염이 나헌한테 촉의 인재들에 대해서 물어볼때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등 다른 인물들과 함께 추천되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쓰촨성 몐주시에 제갈첨 부자와 장준, 황숭, 이구를 모신 제갈쌍충묘사가 있어 면죽 전투 당시 전사한 이들의 넋을 기린다고 한다.
3 평가
제갈첨은 글과 그림에 능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촉인들이 제갈량을 그리워하니 모두 그의 재주와 총명함을 사랑했다. 매번 조정에 선정(善政)이나 좋은 일이 있으면 비록 제갈첨이 제안한 일이 아니더라도 백성들은 모두 서로 전하며 말하길, ‘갈후(葛侯)가 한 일이다’고 했다. 이로써 아름다운 명성과 과분한 칭찬이 그 실제를 넘어섰다. -『촉서』 「제갈첨전」
“비록 제갈첨의 지혜가 위급함을 구원하기에는 부족했고 그 용맹이 적과 맞서기엔 부족했으나, 밖으론 나라를 저버리지 않고 안으론 부친의 뜻을 바꾸지 않았으니 충효가 여기에 있었다.” -『촉서』 「제갈첨전」에 기재된 간보[18]의 제갈첨에 대한 평.
"제갈첨(諸葛瞻)은 음평(陰平)을 지키지 못하고 후퇴하여 면죽(綿竹)에서 죽었다. 그가 아비의 충성은 있었지만 그 아비의 재주가 없었으므로 결국 자신이 죽고 집안이 망했을 뿐더러 나라에도 이익이 없었던 것이니, 애석하도다. 그러나 군사를 해산시키고 적에게 항복한 강유의 무리에 비교하면 또한 사람의 마음을 약간 격동시켰다. 그가 황호(黃皓)를 죽이지 않았던 일에 대해서는 그의 아들도 죽음에 임해서 격분하고 한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일을 가지고 죄목을 삼는다면 그에게 너무 까다롭게 책비(責備 완비하기를 바라는 것)하는 것이니, 이것은 ‘군자(君子)는 사람과 더불어 착함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홍대용의 『담헌서』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恪)은 비록 일이 잘못되어 적신(賊臣)에게 살해를 당했으나, 그 역시 나라를 위한 마음은 제갈첨(諸葛瞻 제갈량(諸葛亮)의 아들)의 부자와 더불어 거센 물결 속에 꿋꿋이 서 있는 지주(砥柱) 같았다. 어찌 집안에서 이런 충성과 절개가 이처럼 한꺼번에 났을까? 추측컨대, 그 부조(父祖)들의 교양에 따라 그렇게 되었던 것인 듯하다. 탄복할 만하고 공경할 만하다. -이익의 『경사문』어째 제갈각에 대한 평에 가까운 듯하지만 넘어가자
소열제는 어려서 진원방(陳元方 진기(陳紀))과 정강성(鄭康成 정현(鄭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예절을 익힌 터라 충분히 자신을 굽힐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삼고초려(三顧草廬)하여 마침내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뒤지지 않는 천하제일의 보좌 제갈 무후(諸葛武侯)를 얻었고, 자신은 탕왕(湯王)ㆍ문왕(文王)과 나란히 칭해지게 된 것이다. 한나라를 중흥시킨 것은 주(周)나라 선왕(宣王)과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 비견되며, 나라가 망할 때에도 영예로움이 있었다. 북지왕(北地王) 유심(劉諶)은 종묘에서 곡하다 죽었고 제갈첨(諸葛瞻), 제갈상(諸葛尙) 부자는 면죽(綿竹)에서 전사하였으니, 이들의 순국(殉國)은 모두 그의 유업(遺業)인 것이다. 각정(卻正)은 후주(後主)를 따라 낙양(洛陽)으로 들어가면서 죽어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니, 유선(劉禪)이 어찌하여 이런 충신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선제(先帝)가 특별하게 대우해 준 것을 추념하여 그에게 보답한 것이다. -성대중의 『청성잡기』이것도 유비에 대한 평에 가깝지만 넘어가자
고금을 막론하고 제갈첨에 대한 지배적인 평가는 재주와 지혜는 아버지만 못하지만 충성심만큼은 아버지 못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면죽전투에서 등애는 실제로 이행할 의지나 권한이 있는지는 차치하고 투항하면 제갈첨에게 낭야왕으로 삼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만약에 제갈첨이 장서와 마막과 같은 부류였다면 뒤도 안돌아보고 받아들였겠지만 분노한 제갈첨은 등애의 사신의 목을 베고 등애군을 맞서싸울 준비를 했다. 덕분에 제갈첨은 강유성의 마막이나 양평관의 장서처럼 허무하게 위군의 입성을 허용하지 않았고 최소한 한 차례 격퇴함으로써 혹시 군사적 재능이 있던게 아닐까 하는 상상마저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황숭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등애군을 평지에 진입하기를 허용한 것은 이런저런 변명을 차치하고 비판의 소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오점이다.
진수는 밖에서는 강유, 안에서는 황호를 제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동궐과 더불어 비판적인 평가를 남겼지만 강유 탄핵건에서 볼 수 있듯이 최소한 놀고 먹던 것만은 아니며 병권교체라는 초강수를 통해 최소한 강유만큼은 제어하려 했다는 점은 『학경 속후한서』에서 검증할 수 있는있는 대목이다.
제갈첨에게 아쉬운 부분은 비슷한 2세인 제갈각이나 사마소, 사마사 형제와 달리 불과 8살에 제갈량이 별세함으로 별다른 가르침이나 경험을 전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갈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제갈첨이 조금이라도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제갈량을 수행하며 경험을 쌓았을 것이다. 제갈량과 함께 일하며 공을 세운 수준에 도달했다면 제갈량 사후 혈통 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지마저 이어받는 진정한 후계자로써 권위 또한 황호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을 가능성이 높을테지만...역사는 모두 다 아시다시피... 뭐, 제갈량의 아들이 황위를 찬탈해서 아버지 이름 먹칠할 기회조차 없었다는데 안도해야할지도...
사실 제갈첨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은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점이다. 겨우 34살에 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258년부터 조정에 관여하기 시작해 불과 5년후에 나라가 망했다. 강유-염우 교체책에 대한 해석이 맞다는 가정하에 제갈첨의 정치적 능력은 나이에 비해 상당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중앙정권에서 일한지 겨우 5년밖에서 촉한이 망했는데 진수의 황호를 제어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인물평에 상당히 깐깐한 편인 홍대용조차도 제갈첨 부자가 황호를 죽이지 못한 것을 두고 죄를 물으려하는 것은 "너무 까다롭게 책비(責備 완비하기를 바라는 것)하는 것"이라는 평을 남겼다.
결론적으로, 제갈첨은 황숭의 간언을 듣지 않고 등애의 평지진입을 허용하는 등 제갈량에 비해 떨어지는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충성심만큼은 제갈량과 함께 묶여 칭송받을 정도로 흠잡을 구석이 없었으며 허무하게 배신한 장서와 마막과 달리 등애의 공격을 한차례 격퇴하며 촉한의 마지막 관문을 허무하게 넘겨주진 않았다. 죽었을 무렵 37세에 중앙조정에서 일한지 불과 5년이었다는 점에서 너무 늦게 태어났고 나라가 너무 일찍 망해서 유망주급 기대를 꽃피우지 못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아쉽다 할 수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버지와 견주어 호부견자 수준으로 아버지 얼굴을 먹칠했다는 소리를 들을만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
촉 멸망 후 종회는 제갈량의 후임이었던 장완의 아들 장무에게 편지를 보낸 바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와 촉에는 재능과 지혜가 있는 문인과 무인이 많은데, 그대와 제갈사원(諸葛思遠:제갈첨)에 이르러서는 초목에 비유되며, 나와 똑같은 천지의 기(氣)를 받았습니다. 옛 선인에 대한 존경은 지금이나 과거나 중시했던 일입니다. 서쪽에 도착하면 , 그대 부친의 산소를 차아가 받들어 인사하고, 묘지를 깨끗이 청소하여 경의를 표하려고 합니다. 선친의 산소 위치를 알려주기 원합니다!
종회가 조조 시대부터 조정의 최고 원로급이었던 종요의 아들로서 당시 이미 일류 명사였음을 감안하면 제갈첨에 대한 평가가 그리 박한 편은 아니다. 다만 종회는 강유를 파격적으로 우대하거나, 혜강을 모함할 때 와룡드립을 치는 등 과장된 평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음은 고려해야 한다.[19]
4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첨은 역사와 비슷한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황호의 난정을 근심해 출사하지 않다는 설정으로 매우 후반부에 등장한다. 등애가 음평을 돌파하자 극정의 추천으로 면죽을 방어하며 아버지의 목상을 앞세우고 싸워 위군은 제갈량이 되살아난 줄 알고 혼란에 빠져 물러났다는데, 위에서 보면 알겠지만 제갈첨도 정치 할 건 다 했고 제갈량 목상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촉 최후, 촉 측 캐릭터들의 저항을 강조하려는 나관중의 의도인 듯. 더불어 홀라당 항복해버린 유선은 전사한 캐릭터들과 비교되어 또 한 번 까이는거다.
5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정말 평범한 능력치. 모든 스탯이 평균적으로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에 있다. 인재풀이 마르는 후반부를 생각하면 아주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상대가 등애라서야 뭐 하나 내세울 만한 게 없다.
삼국지 6에서는 이름마저 저갈첨으로 잘못 나오는 굴욕마저 당했다.
삼국지 9에서는 그나마 제갈량의 아들답게 나온다. 능력치는 통솔 73/무력 65/지력 74/정치 78에 노병 최강 병법 연노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덤으로 아들 제갈상도 연노를 기본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분투, 석병, 덫, 배반도 있기 때문에 후반기 장수 중에서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8/무력 61/지력 72/정치 61/매력 70에 특기는 명사등 총 7개. 초중반 시나리오에 나왔으면 이런 걸 어디다 쓰나 싶겠지만, 제갈첨이 등장하는 최후반 시나리오는 인재의 질은 차치하고 양적으로 절대적으로 열세인 촉 세력이기 때문에 어디다가 써도 상대적으로 그럭저럭 쓸만한 정도이다. 병법 24편은 강유가 물려받았지만 제갈첨은 사륜차를 물려받아서 필드에서 이동 속도 보정을 받고 퇴각 성공율이 100%이다.
삼국지 11에도 등장하나 특기는 상잉여 취급받는 매복. 덧붙여 아들 제갈상은 그나마 무력 하나만 70대 후반 찍어주는 정도지만, 아버지인 제갈첨과 마찬가지로 상잉여 특기인 노발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안습이긴 마찬가지다. 제갈량 자식으로서의 이미지가 못내 아쉽다면 PK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 잘 육성시켜 보는 수밖에 없다.
삼국지12에서는 수염이 없어졌으며 다른 2세대 장수 일러스트와는 달리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았다. 능력치는 무력이 52로 내려가는 대신 모든 능력치가 70대 초반이다. 전법은 창군견수.
삼국지 13에서는 통무지정 70/57/76/72의 능력치이다. 전법은 적군을 후퇴시키는 전법인 위보.
삼국지 공명전에서는 게임에 약간이나마 육성 요소를 집어넣은 장본인. 선택지에 따라 다른 병과로 키울 수 있다. 그러나 지력에 특화가 되어있어 선택지를 어떻게 골라도 지력이 제일 높으니 웬만하면 군사쪽으로 키우자. 특화를 무시하고 열심히 모은 열매를 투자할 경우 무력의 열매를 잔뜩 먹여 키우기 어려운 포차대로 키운다거나 할 수도 있으나, 공명전에선 기병대, 궁기병대, 무도가, 군사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클래스의 효용도가 매우 낮고 공명전 자체의 난이도가 워낙 낮기 때문에 야리코미 플레이에 불과할 뿐이다.
반삼국지에서는 중반부터 반 주역급으로 활약. 전투뿐만 아니라 말빨에도 재능이 있어 제갈탄을 설득해 촉 진영으로 투항시키기도 한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제갈량이 TS당한 만큼 제갈량이 직접 제갈첨을 낳는다. 근데 생김새가 조운 mk.2 인 걸로 봐서는 아버지는 조운인 듯(...). 그리고 독자들은 조운이 해냈다 해냈어 라며 광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30대에 중요 관직에 오른 능력자로 묘사되지만 바로 그 장면에 '제갈량 아들' 이란 꼬리표가 달린걸로 봐 현대의 논란거리를 어느정도 반영한 듯 하다. 설명만 보면 전사의 마음을 가졌다는둥 상당히 호의적인 편이지만 나름대로 병권을 염우에게 줘서 강유를 제어하려하는 등 초강수를 둔 인물에 대해 강유-염우 교체책이 짤려서 황호에게 방심해서 실권을 잃었다는 식의 묘사를 하는 등 좀 안좋게 나오는 편이다. 검각 전투 편에서 등애의 음평돌파와 맞물려 다시 등장했는데 황숭의 간언을 황권이 배신해서 안믿었다는 가설을 채택하고 등애의 낭야왕 회유 또한 짤려서 더더욱 안좋게 보이는 것은 덤.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당연하겠지만 클론 등장.(...) 여담이지만 3편 정발판에서 이름이 제갈선이라는 오타가 나서 얘기치 않게 강제 개명당한 사태가 발생했다. 클론 등장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시리즈 초중기의 경우 후반 시나리오를 조명한 적이 거의 없어서 그나마 초기작 중 비중있게 나온 전투는 검각방위전 단 하나이며 이후 감감 무소식이다가 6편에서 진나라와 함께 후반기 시나리오가 편입되면서 겨우 부각된다. 주로 역할은 검각-음평-면죽 부근에서 등애에게 썰리는 역할.(...) 왜 검각전에서 종회가 아니라 등애에 썰리는 사태가 났는가 하면 이상하게 등애에게 주역 기믹이 부가되면서 검각전에 종회가 안나오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본인은 젊은 문관형 클론무장이지만 아들은 수염난(...) 문관형 클론무장이다.- ↑ 훗날 제갈근의 장남 제갈각이 정쟁이 휘말려 제갈근의 집안이 멸문당했다. 그래서 제갈반은 나중에 손침이 주살되고 제갈각이 복권되자 동오로 되돌아가 제갈근의 대를 이었다.
- ↑ 이 번역은 신원문화사에서 「제갈량집」을 번역한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에서 발췌했다.
- ↑ 이 번역은 파성넷에서 번역된 촉서 「제갈첨」에 기술된 서신을 발췌했다. 둘 다 원문이 동일할테지만 세세한 의역이 다름으로 둘다 항목에 게재한다.
- ↑ 다른 사적인 편지 중 하나는 양자 제갈교에 대한 서신인데 이마저도 제갈교가 맡은 임무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에 비하자면 제갈첨에 대한 편지는 어린 제갈첨의 기특한 특성을 묘사하며 아버지로써의 마음을 보여주는 등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개인에 대한 내용이다.
- ↑ 진수가 제갈량을 너무 옹호해서 사마염에게 비는(...) 글을 「제갈량전」에 첨부한 것을 보면 제갈량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비판은 옳지 않다. 애초에 「제갈량전」에서 제갈량을 평하며 그의 뛰어난 점을 부각시켰고 비판한 부분도 상당히 사소한 편이다. 그러나 제갈첨의 경우에는 거의 의도적으로 폄하한 듯한 기록이 있는 것을 봐선 의심해볼만 할지도 모른다.
- ↑ 촉한에 사관이 없었다는 진수의 기록과 대치되는 부분이기에 간혹 논쟁의 대상이 되는데 애시당초 후주전을 보면 알겠지만 정작 진수의 저 기록 몇 줄 위에 있는 경요 원년에는 사관이 기록한 내용이 있으며, 유지기는 이런 내용을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배송지도 이건 진수의 사사로운 감정이 들어간 평이라고 평가를 내렸다. 물론 여기서 언급하는 "촉"은 성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촉한이 멸망한지 80년이 넘게 지났는데 촉한의 사관이 살아남았을 리가 없다.
- ↑ 물론 제갈량은 익주목인데, 이건 제갈량의 개국공신으로서의 입지가 특별한 거였기 때문이다.
- ↑ 이전까지 항목에서 염우를 우대위장군으로 칭했는데 『자치통감』과 『정사 삼국지』를 막론하고 염우를 우장군으로 표기할지언정 우대위장군으로 표기한 기록은 없다.
- ↑ 반대로 제갈첨이 도호직을 행(行-직책앞의 '행'은 정확히 그 직책을 처음 맡은 자로서 해당 직책의 역할을 할 경우에 붙인다)했다는 시점에서 제갈첨의 지위를 다른 장수들의 앞에 놓는 의견도 있는데, 이것 또한 애매하다. 행도호가 아니라 도호는 이엄이나 장완 등이 군권을 잡을 때 맡던 직책으로, 후한 시대에는 이민족 정벌을 맡던 직책이다. 이엄의 경우 제갈량이 있던 상황에서 전적으로 군권을 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불어 장완이 군권(군령권 - 군사 작전 및 훈련을 명할 수 있는 권한- 과 군정권 -군 인사권 및 행정권 - 모두였을 것이다.)을 가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도호이기도 했지만 더불어 군부 최고 직책인 대사마 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후한 기준으로 대사마는 대장군에게 따르는 직책인 동시에 삼공보다 위에 위치한다.
- ↑ 다만 『촉서』에서는 익주자사 부임책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가설은 『이동기』의 기록이 허구라면 그냥 끝짱나는 만큼 당당하게 정론으로 쉽게 표기할 수 없는 해석이다.
- ↑ 만약에 이 가설이 맞다면 유선의 반대도 다각도로 비춰볼 여지가 생긴다. 당시 국정을 농단하던 황호의 권세는 모두 유선의 서포트 하에 가능한 것이어서 강유가 녹상서사+익주자사의 권한으로 황호를 제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면 유선의 권위 또한 위협할 수 있는 셈이다. 유선의 황호에 대한 신뢰도는 전쟁준비마저 좌지우할 수준이었는데 황호마저 지지한 방안을 유선이 반대했다는 것은 유선은 장기적으로 강유-염우 교체책의 위험성을 꿰뚫어봤다고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유선은 정치적 권위를 세우는 능력 하나만은 상당히 뛰어나다는 평이 있는데 이 가설마저 맞다면 유선의 통찰력은
안좋은 쪽으로만 써서 그렇지상당히 뛰어난 편이다. 물론 이건 가설 위에 얹은 또 하나의 가설이기에 그냥 "이럴 수 있을지도"식으로 이해하는게 좋다. - ↑ 제갈량의 고향이 낭야다. 아마 이를 꼬집어서 낭야왕으로 봉한다고 회유한듯.
- ↑ 사실 사마소조차도 겨우(?) 진공에 촉한을 정복한 공로로 진왕에 올랐음을 고려하면 제아무리 낭야왕이 이자왕으로 진왕보다 두 단계낮다지만 마음대로 임명할 권한이 있을 리가 없다. 후일 황제였던 유선도 왕이 아닌 안락공에 봉해진데다가, 낭야왕에 책봉된 인물이 사마주에 서진통일 이후 대부분 사마씨 종친들이 이자왕이었음을 고려하면 등애의 무리수가 더더욱 부각된다.
- ↑ 그러나 제갈첨이 2차전에서 등충과 사찬에게 대패했다는 점에서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는 군세의 깡에 힘업어서 그렇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 ↑ 다만 정예군을 상대로 아무래도 질이 낮을 수 밖에 없는 전력으로 한차례 승리했다는 점은 쉽게 무시할만한 점이 아니라는 평도 있다. 하여튼 간에 완전히 군사적으로 무능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 ↑ 등애가 아들에게까지 공사를 구분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임과 동시에 등애도 제갈첨을 넘지 못하면 뒤가 없는 도박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 ↑ 삼국전투기에서 제갈첨의 유언으로 등장했는데 제갈상의 유언이 훨씬 더 인지도가 높다보니 장남 제갈상의 유언을 제갈첨이 빼앗았다는 오해가 있었다.
안습 - ↑ 동진시대의 인물이다.
- ↑ 다만 종회의 와룡드립은 진심으로 혜강이 제갈량같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사마씨의 숙적인 제갈량과 비유함으로 사마소에게 혜강을 죽이도록 종용한 것이다. 장무와 제갈첨에 대한 평가와는 의도에서부터 매우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