熱河日記
1 개요
1780년(정조 4) 연암 박지원이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 사실 당시 박지원은 공식적인 벼슬이 없는 평범한 선비였다. 그럼에도 박지원이 사절단으로 갈 수 있던 것은 당시 사절단의 수장인 정사가 삼종형(8촌 지간)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1]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박지원은 박명원의 자제군관(일종의 개인수행원)[2] 자격으로 사절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
본디 목적지는 연경(燕京)(오늘날의 베이징)이었으나 당시 건륭제가 열하의 피서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되었다. 여름의 베이징은 가보면 알겠지만 너무 덥기 때문에 북경보다는 북쪽에 황제 전용 여름별장인 피서산장이 있다. 실제로 가보면 상당히 크고 아름답다. 베이징의 자금성이 웅장함이 있다면 피서산장 역시 중국 스케일이기 때문에 크긴한데 나름 정원과 나무에 아기자기(?)한 면이 있고 궁전보다는 이화원의 느낌쪽에 가깝다. 현대에도 현지 중국인들이 여름이 많이와서 노닐고 있다.
황제따라 열하까진 간 덕에 <열하일기>란 제목이 붙여졌다. 조선 사신단은 건륭제가 연경에 없다는 소식을 듣자 그냥 연경에서 구색만 맞추다 돌아가려 했지만 결국 열하까지 가야 했고, 일정이 촉박해 상당히 하드코어한 여행을 하게 된다. 이 때의 고생은 박지원의 산문인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3]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4]에 생생하게 실려 있다.
2 내용
내용을 보면 현대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해학적이고 재미있는 묘사가 많다. 야간에 숙소에서 나가는 게 금지된 상황에서 하인에게 "나 찾으면 뒷간 갔다고 말해라!!"고 시킨 뒤에 밤새도록 놀다 새벽에야 돌아오는 장면[5], 비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자 벌어진 도박판을 싹 쓸어버린 일 타짜[6], 사신단이 접견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옆에서 '일이 꼬이면 귀양가겠는데... 잘 됐다! 귀양가면 중국 여기저기 구경하겠네!' 같은 생각을 하는 등[7], 여러모로 웃기는 구절이 많다. 말을 타고 가는 도중에 졸다 깨고는 그 사이 하인이 낙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음번에 신기한 게 보이면 주저하지 말고 자신을 깨우라고 채근이라고 쓰고 징징이라고 읽는다대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8], 심지어는 박지원이 어느 주점에 들어갔다가, 현대로 치면 조폭들이 자주 드나드는 엄한(?)[9] 곳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채고, 처음 나온 작은 술잔을 치워 버리곤 큰 잔에 술을 원샷하는 호기를 부려 주점에 있던 남자들이 어이쿠 어르신하며 술을 대접하고 설설 기는 장면도 있다.[10] 물론 박지원도 속으론 꽤 겁을 냈다고 솔직하게 토로한다.[11] 중국술에 대한 간증도 있다. 독한 것 같지만 마시고 일어서면 모두 깬다고.. 저 말 믿고 중국 술 들이켰다가 요단강 건널 뻔 했다.
또한 박지원의 실학 사상이 잘 드러나있는 명작이다. 당시 조선은 벌레가 우글거릴 수 밖에 없는 초가집에서 대부분 살았는데 청나라의 경우 일반 백성도 벽돌로 2층집을 지어 튼튼해서 문만 닫으면 금고가 되어 도둑도 방지한다는 감탄이 있다. 당시 박지원이 받았을 컬쳐쇼크를 엿 볼 수 있다. 대부분 청나라의 좋은 점을 들면서 아직도 상공업적으로 낙후된 조선의 모습을 비판하는 장면이 있다. 고대의 우수한 기술도 이어받지 못하여 결함투성이로 전락한 조선후기 온돌의 현실을 지적하고, 이로 인한 낭비와 비합리성을 대차게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실용적 학문과 기술의 연구에 소홀했던 당시 시대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또한 아직도 자신들을 명의 후계로 자처하며 실학을 멸시하고 북벌론이라는 허상에 빠져 있는 당시 조선 사대부를 비판하는 부분이 많다. 특히 관내정사나 이제묘기(夷齊廟記 : 충절의 상징이라 일컬어지는 백이와 숙제의 사당 관람기)등에서 이러한 비판을 엿볼 수 있다.
조선뿐만 아니라 한족 여성들의 전족 같은 불합리한 풍습과, 청나라에 대한 아부로 점철된 한족 지식인들의 현실 역시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모습은 <호질>에서 범[12]과 그에 아첨하는 선비 북곽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조선의 소중화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중화주의의 허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는 것이다. 사실 (고전적인 의미의)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것은 오랑캐이며 되려 중화에 비판적인 내용인 것. 또한 전체적으로 한족보다 만주족에 호의적인 시선이 깔려 있다(...). 예를들면 사기나 뒤통수를 치는건 대부분 한족이라든가... 그 외에 청나라인들조차도 되놈이란 단어를 알고 있었다는 장면도 있다. 청나라 사람이 스스로를 "'도이노음'이요(擣伊鹵音爾么)"라고 소개하는데, 이건 "되놈"을 한자로 음차한 것.
박지원의 코끼리 구경[13]이나 마술 관람 등도 재미있는 부분. 데이빗 커퍼필드 귀싸대기를 날릴 마술들 20개가 소개되어 있다. 심지어는 티베트의 법황을 만난 이야기까지 실려 있다. 당시 건륭제는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조선 사신단을 기쁘게 맞이한 건륭제는 조선 사신단에게 법황을 소개해 주었다. 법황은 달라이 라마 바로 아래 지위인 판첸 라마로 정식 호칭은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 Penchen Erténi)'. 작중에서는 주로 '활불(活佛, 살아있는 부처)'이라고 표현된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활불은 조선 사신단을 만나보고 불상 등 여러 선물을 주었는데, 사신(문관)들은 더럽다고(...) 역관에게 준다. 그러나 역관들도 역시 이것을 쓸 수 없다며, 팔아서 은 70냥을 만들어 마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불상 개불쌍 그러나 마부들조차도 '이것으론 술 한잔 사 먹을 수 없다'(...)면서 받지 않으려 했다. 조선의 오래된 숭유억불 정책이 어떤 식으로 고착화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처음엔 활불과의 면담 자체도 어떻게 천한 중놈과 만날 수 있냐며 고집을 피우다가 "그러다가 황상께서 열받으시면 큰일난다"는 판단에 형식적으로 만난 것. 또한 황제 및 법황에게 절을 해야할 순서가 오자, 조선 사신단은 숭유억불에 대해 말하면서 법황에게 절을 못하겠다고 버틴다. 여기에 빡친 건륭제는 수도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조선 사신단에게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는다. 눈치껏 좀 행동하지
박지원조차도 여기엔 "우리나라에선 원래 선비로서 불교와 한번 인연이 있고 보면 평생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이 장하긴 하지. 그런데 너 활불이 황제한테 이르면 어쩔래?"라고까지 할 정도로 숭유억불 사상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심했다. 법황이 선물한 불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조선에 그대로 가져가면 유생들에게 비난받을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청나라 황제가 존대하는 자가 준 선물을 함부로 다루면 황제가 어떻게 화를 낼지 모르니 사신단이 알아서 몰래 처리한 모양이다. 열하일기에 직접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런 경우 전통적(...)으로 쓰던 방법은, 조선 땅도 아니요 청나라 땅도 아닌 압록강에다가 몰래몰래 띄워서 버렸다고.
박지원은 여기서 중국 인사들과 만나 며칠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필담으로. 음악, 예절, 역사, 문헌고증, 시문, 과학[14]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필담을 교환한다. 자세한 필담의 내용은 북한 학자 리상호가 번역한 열하일기나, 김혈조 선생께서 번역한 돌베개판 열하일기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참고할 것.
박지원과 일행이 만주 벌판을 바라보며 읊은 단상은 '한 번 울어볼만한 대지'(호곡장론(好哭場論) 이라는 제목)는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있기도 하다.
박지원의 작품 중 호질이나 허생전은 원래 열하일기에 실려있는 작품이다. 각각 관내정사(關內程史)와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려 있다. 박지원은 필화(그러니까 검열)를 피하기 위해 호질의 경우는 '이거 내가 쓴 거 아니고 중국 여관 벽에 있던 거 퍼옴 베껴옴'이라고 둘러대고, 허생전같은 경우는 윤영이라는 가상의 이야기꾼[15]이 해주었던 변승업 이야기의 딸림 이야기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박지원의 창작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정설.
그 당시 사람들의 (현대와 많이 다른) 가치관을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만히 지나가던 몽골 사신단 하인을 조선 마부가 갑자기 급습(...)해서 파운딩을 하고 흙을 먹인다거나.[16] 그래 놓고 조선측이나 몽골측이나 서로 웃으며(...) 잘만 제 갈 길 간다. 우리나라 대외관계가 의외로 개방적인 면이 있었던 듯. 중국인들이 길거리에 잔뜩 늘어서서 '조선에서 왔다구요? 청심환 하나만 주셈'이라고 하도 졸라대서 조선 사신단은 가짜 청심환[17]을 잔뜩 준비해 갔다는 장면이 있다.
다른 일화도 있다. 박지원은 중국에서 중국인들과 골동품에 관해 필담을 하면서 나중에 덧붙인 말에, '대개 중국 골동품은 그 연대와 시기를 아주 교묘하게 속이는 것들이 많아, 어수룩한 사람은 물론이고 좀 안다 하는 사람도 사기를 당해 비싼 값을 주고 사기 십상이다'라고 하며 리스트를 적어주었다. 물론 이 리스트도 열하일기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과연 메이드 인 차이나의 위용은 20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다.
3 번역
최초의 번역은 김성칠이 1948~50년 내놓은 번역본인데 역자의 별세로 인해 3분의 1가량만 번역되었다. 1955~57년 북한에서 리상호에 의해 첫 완역본이 발간되었으며, 1966~73년 이가원의 <국역 열하일기>와 1982~84년 윤재영의 박영문고본 완역 등이 주요한 번역으로 꼽힌다. 2009년 기존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김혈조의 완역본이 출간되었다.
4 여담
하마터면 잿더미로 사라질 뻔한 적이 있었다. 손자뻘 되는 후손인[18] 박남수가 책을 불태우려다가 다른 식구들과 친척들이 막아서 위기를 막을 수 있었다. 다른 가족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열하일기를 못 볼 뻔했다. 숨겨진 한국 문학사의 공로자들 책자에 담겨진 조선에 대한 풍자와 비난이 하마터면 집안을 거덜낼 것이라고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현대에는 인터넷 국까&조선까조까들이 "조선은 초빈민국이었고 중국과 일본은 전통적 부국이었다"라는 주장을 펼 때 악용당하는 책이기도 하다. 물론 악용하는 것들은 이 책에서 중국, 일본을 칭찬하는 건 칭찬하지만 욕하는 건 신나게 욕하고 풍자하는 건 나몰랑 아몰랑 헛소리만 하거나 거론도 안한다.
당시 사신단은 상대국의 상황을 본국에 전달하는 역할도 했기 때문에 중국 측에서는 정보노출을 막기 위해 사신단 일행이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어느정도 이동에 제약을 두었고 그래서 조선은 청에 대해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았던 박지원은 밤마다 숙소를 몰래 빠져나와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고, 그 덕분에 단편적으로만 알아왔던 청의 다양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조선 내에서는 청을 오랑캐로만 치부하고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팽배했었는데,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통해 조선이 몰랐던 청의 발전된 모습을 소개하자 수많은 학자들과 선비들도 이에 충격을 받았고 오랑캐라도 배울 것은 배우자는 풍조가 생기게 되었다. 게다가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박지원의 맛깔난 글솜씨 덕분에 열하일기는 지식인 사이에 엄청난 인기를 끌어 수많은 선비들이 필사해갔다고 한다.
5 구성
열하일기의 구성(김혈조[19] 번역본 기준)[20][21]
- 압록강을 건너며(도강록) :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
- 심양의 이모저모(성경잡지) :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에 대한 필담 중심의 기록.
- 말을 빠르게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수필(일신수필) :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9일간의 일을 쓴 기록.
- 신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관내정사) : 산해관(山海關)에서 북경에 이르는 11일간의 기록. 여기서 호질이 나온다.
- 북경에서 북으로 열하를 향해(막북행정록) : 북경에서 열하(熱河)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
- 태학관에 머물며(태학유관록) : 열하에 도착해서 그곳 태학관에 머무는 15일간의 기록.
-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환연도중록) : 열하를 출발하여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
- 열하에서 만난 중국 친구들(경개록) : 중국에서 만난 지식인들의 이력과 면면을 묘사한 일종의 스케치.
- 라마교에 대한 문답(황교문답) : 중국에서 만난 지식인들과 더불어 나눈 라마교에 대한 대화를 쓴 기록.
- 반선의 내력(반선시말) : 반선과 청나라에 전파된 라마교에 대한 내력을 적은 기록.
- 반선을 만나다(찰십륜포) : 라마승과 반선의 모습, 조선사신들이 판첸라마를 만난 일 등을 적은 기록.
- 사행과 관현된 문건들(행재잡록) : 조선과 청나라 황실 사이에 주고 받던 외교문서와 외교문서를 쓴 내력를 옮겨적은 기록.
- 양고기 맛을 잊은 음악 이야기(망양록) : 중국 지식인들과 필담형식으로 주고 받은 음악이야기.
- 천하의 대세를 살피다(심세편) : 박지원 스스로가 본 당시 중국의 형세와 이를 면밀히 보는 법을 적은 기록.
- 곡정과 나눈 필담(곡정필담) : 중국 지식인들 중 하나인 곡정과 장장 16시간 동안 벌인 과학, 역사, 철학, 시문 등의 필담을 정리한 기록.
- 피서 산장의 기행문들(산장잡기) : 열하(熱河)의 피서산장에서 쓴 아홉 편의 기행록을 엮은 기록.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코끼리 이야기(상기:象記)가 여기서 나온다.
- 요술놀이 이야기(환희기) : 중국에서 본 마술에 대해 묘사한 기록.
- 피서산장에서 쓴 시화(피서록) : 중국에서 본 시들에 대해 기록하고 평한 시화(詩話)의 기록.
- 장성 밖에서 들은 신기한 이야기(구외이문): 열하에서 들은 이야기나, 박지원이 직접 겪은 이야기들을 짧은 잡기 형식으로 모아놓은 기록.
- 옥갑에서의 밤 이야기(옥갑야화) : 사신들과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갑[22]에서 밤을 지새우며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모은 기록. 여기에서 그 유명한 허생전이 나온다.
- 북경의 이곳저곳(황도기략) : 북경의 명승지와 건물들에 대한 내력과 묘사를 엮은 기록. 성당과 서양화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
- 공자 사당을 참배하고(알성퇴술) : 북경의 유교명승지를 둘러보고 쓴 기록.
- 적바림 [23] 모음 (앙엽기) : 북경 안의 기타 종교 유적들을 둘러 보고 쓴 기록.
- 동란재에서 쓰다(동란섭필) : 주로 중국과 조선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연암의 의견이나, 중국의 견해를 짧은 글 형식으로 쓴 기록.
- 의약 처방 기록(금료소초) : 중국 의서에서 본 치료요법이나, 자신이 가장 효험을 본 민간요법을 적은 기록.
- ↑ 영조의 부마로 그가 가장 총애한 딸인 화평옹주의 남편이다.
- ↑ 당시에는 사신들이 자신을 호위할 군관을 지정할 수 있었는데 정사는 4명을, 부사는 3명, 서장관은 1명의 군관을 동반할 수 있었다. 잘 알고 지내던 무관을 지명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친척들 가운데 전도 유망한 선비를 지명하는 것도 가능했기에 박지원이 사신단에 참여할 수 있었던것. 이들은 공식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활동의 제약이 적어서 중국 선비들과 교류하거나 유람을 하거나 서적 등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 ↑ 말 그대로 하룻밤에 강을 9번 건넜다는 이야기.
- ↑ 구한말의 뛰어난 한학자이자, 1900년에 연암집을 발간한 김택영이 이 글을 가리키며 조선 5000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ㅎㄷㄷ
- ↑ 성경잡지 7월 11일
- ↑ 도강록 7월 2일
- ↑ 태학유관록 8월 10일
- ↑ 성경잡지 7월 12일
- ↑ 원문에서는 "술집에 몽고인과 회회인(위구르계로 추정)패거리들이 앉아 있었다. 오랑캐들의 모습이 더럽고 사나워 주점에 올라온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술을 시킨 뒤라 그냥 앉았다"
중원판 이태원동? - ↑ 태학유관록 8월 11일
- ↑ 박지원 항목에 나와있는 초상화를 보면 알 수있지만, 박지원은 거구에 부리부리한 눈 등으로 딱 봐도 비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설설 기는게 이해될 법 하다
- ↑ 짐승으로서 중국과 조선 지식인 입장에서의 청나라를 은유함.
- ↑ 박지원은 그 당시 황제의 진상품으로 나온 침팬지나, 타조의 모습도 상세히 적어놓았다!
- ↑ 지동설도 있다!
- ↑ 윤영이란 이 이야기꾼도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애매하게 서술해놨다.
- ↑ 이유는 '심심해서'(!).
- ↑ 진짜는 높으신 분들용 뇌물.
- ↑ 박지원은 박남수의 삼종조(할아버지의 육촌형제)이다.
- ↑ 박지원 문학에 대한 연구로 알려져 있다.
- ↑ 명작이니만큼 번역본이 많은데, 2009년에 김혈조 교수가 새 번역본을 발간하였다. 기본적으로 박영철본을 따르되, 부분마다 다른 판본을 참고한 것이 있다.
- ↑ 괄호 안은 원 제목이다.
- ↑ 정확히 어디인지는 불분명하다고 카더라.
- ↑ 나중에 참고하기 위하여 간단히 적어둠, 또는 그런 기록을 뜻하는 우리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