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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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이 비범하다. 이 초상화는 손자인 박주수[1]가 그렸다고 하는데, 박지원은 평소에 '초상화 그렸는데 내 실제 모습의 7할에도 못 미치면 그냥 태워버려라'라고 말했으며, 실제로도 중년기의 초상 두 점이 더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박지원이 모두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의 아들 박종채의 <과정록>에는 박지원의 외모가 상당히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아버지는 안색이 불그레하고 윤기가 나셨다. 또 눈자위는 쌍꺼풀이 졌으며, 귀는 크고 희셨다. 광대뼈는 귀밑까지 뻗쳤으며 긴 얼굴에 듬성듬성 구레나룻이 나셨다. 이마에는 달을 바라볼 때와 같은 주름이 있으셨다. 몸은 키가 크고 살이 쪘으며 어깨가 곧추 솟고 등이 곧아 풍채가 좋으셨다."

朴趾源
1737년 2월 5일 ~ 1805년 10월 20일


1 생애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반남 박씨(潘南).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실학으로 대표되는 북학(北學)의 대표적 학자로, 그의 활동 영역은 소설[2], 철학, 경세학(經世學), 천문학, 농사 등 광범위했다. 엄친아 심지어 탐정 노릇까지 했는데 1792년에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임지로 향하던 중 대구에서 경상감사의 부탁을 받고 4건의 살인사건을 훌륭하게 해결했다.[3] 4건 모두 사람이 죽었지만 조사 과정에서 황당하고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아 수령들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감영으로 올려보낸 것들이었다. 물론 일반인들은 소설 이외엔 잘 모른다(…).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 박필균(朴弼均)이며, 아버지는 박사유(朴師愈)다. 그의 가문은 노론의 명문가였지만, 그가 자랄 때는 재산이 변변치 못해 100냥도 안 되는 밭과 서울의 30냥짜리 집 한 채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영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도 외척의 혐의를 피하고자 애썼으며, 청렴했던 조부의 강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1752년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그의 처삼촌이자 성호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홍문관교리 이양천(李亮天)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 경학·병학·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특히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그는 이미 18세 무렵에 〈광문자전 (廣文者傳)〉을 지었다. 1757년 〈민옹전(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소설을 지었다. 이 시기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이 극히 날카로웠으나, 사회적 모순은 대체로 추상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759년 어머니가, 1760년에 할아버지가, 1767년에는 아버지가 별세했다. 아버지의 장지(葬地) 문제로 한 관리가 사직한 것을 알고는, 본의 아니게 남의 장래를 막아버린 것을 자책해 스스로 과거에의 뜻을 끊었다.

하지만 실제 그가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은 이유는 벗인 이희천의 죽음으로 보인다. 이희천은 청나라 태학사(太學士) 주린(朱璘)이 1696년에 편찬한 《강람회찬(綱鑑會纂)》을 소장했다는 이유로 영조 41년(1771) 처형되었다. 그런데 당시 서울의 많은 지식인들이 강람회찬을 소장하고 있었다는 현실을 감안했을 때 이희천의 죽음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연암은 절친한 벗 이희천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음에 틀림없다. 산송문제로 과거를 폐하기로 한 후로도 남시(監試)에 수석합격하기도 했으나, 이희천이 처형당한 후 한 번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다. 김윤조 교수는 연암의 과거 포기의 직접적인 동기를 이희천과의 우정에 기초한, 현실의 모순에 대한 울분의 표출에서 찾는 것이 기존에 확인된 연암의 행동 양식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1768년 서울의 백탑(白塔, 지금의 탑골 공원) 부근으로 이사했다.[4] 박지원 주변에 이덕무(李德懋),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 등도 모여 살았고, 박제가(朴齊家), 이희경(李喜慶) 등도 그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 당시 그를 중심으로 한 '연암 모임'이 형성되어 많은 신진기예의 청년 인재들이 그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고, 새로운 문풍(文風), 학풍(學風)을 이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었다. 문학에서는 당시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가 4대시가(四大詩家)로 일컬어졌는데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이었으며,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1780년 진하별사(進賀別使)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淸)의 베이징(北京)에 갔다. 박명원은 영조의 부마로서 그의 8촌 형이었다. 5월 25일에 출발해 8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베이징에 머물렀고, 10월 27일 서울에 돌아왔다. 이 연행에서 청의 문물과의 접촉은 그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어 이를 계기로 그는 인륜(人倫)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利用厚生)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는 귀국한 이후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호질(虎叱), 허생전(許生傳)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인상과 조선의 제도, 문물에 대한 비판 등도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였다.[5] 그리고 교과서와 모의고사에도 나올만큼 위대한 작품이다. 교과서랑 모의고사에 나와야 위대한 작품인가 1783년 무렵에 일단 탈고되었으나,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개작과정을 거쳐 최종적인 수습은 그가 죽은 뒤 1820년대 초반의 어느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열하일기는 공간되기도 전에 이미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특히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당시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反淸) 문화의식에의 저촉 때문에 찬반의 수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문체반정을 지향한 정조도 1792년에는 그에게 자송문(自訟文, 반성문)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렸다. 이 시기 그는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패의 폭로가 더욱 원숙해졌고, 사회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드러냈으며, 이용후생의 실학을 대성하기도 했다.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지냈으며, 자송문을 바치라는 명을 받은 이후에도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의금부도사, 의릉령(懿陵令), 1797년에는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下敎)에 응해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를 부록으로 붙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생산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그의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9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의 묘는 지금 북한 땅인 황해도 장단군(長湍)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만년의 그의 사상은 구체적 개혁안의 제시에 주력하는 경향이었고, 따라서 비판력은 약화되고 개량적·타협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 어른의 손자가 바로 조선 후기 개화파 형성의 거목인 환재 박규수.

해학과 날카로운 풍자가 가득 담긴 글을 많이 남겨서 '유쾌한 지식인'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외모 자체는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이미지와는 좀 차이가 나는 편. 당시 박지원의 모습을 묘사한 글에서도 위의 초상화처럼 풍채가 당당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가졌다고 묘사하고 있다.


1.1 철학사상

그는 해박한 자연과학 지식의 소유자였다. 홍대용(洪大容)과 더불어 지구설(地球說),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해 주자성리학에서의 지방지정설(地方地靜說)에 반대했다. 그는 세계는 천체로부터 자연 만물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으로 실재하며, 티끌이라는 미립자가 응취결합(凝聚結合)하고 운동·변화하는 과정에서 우주만물이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교의 천주재설(天主宰說)을 비판하고, 자연은 자연필연성을 가지고 자기운동을 할 따름이며, 그 어떤 목적의지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하늘이 의지를 가지고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 감응한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도 반대했다. 또한 미신적·신비적인 참위설(讖緯說)과 오행상생상극설(五行相生相克說)에 반대했다. 그는 이러한 과학적 지식에 기초해, 물질적 기(氣)의 일차성을 주장했다. "만물이 발생함에서 무엇이나 기 아닌 것이 없다. 천지는 커다란 그릇이다. 차 있는 것은 기이며 차는 까닭은 이(理)이다. 음과 양이 서로 작용하는 그 가운데 이가 있으며 기로써 이를 싸는 것이 마치 복숭아씨를 품은 것과 같다"라고 했다(→ 이기론). 만물의 시원은 기이고, 이는 그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운동변화의 법칙성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는 또 감각의 원천은 객관적 외부세계이며, 감각·의식은 객관적 외부세계의 사물이 감각기관에 작용한 결과 발생한다는 인식론을 전개했다.


2 문학사상

그는 청년기와 장년기에 11편의 소설을 썼는데, 현재는 9편이 전해지고 있다. 〈광문자전〉에서는 광문이라는 거지의 의리있는 도덕행동[6]과 사리사욕과 명예에 눈 먼 양반을 대치시킴으로써 양반의 가식적 도덕을 폭로·비판했다. 〈마장전 馬傳〉에서도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의 건강한 도덕성과, 고결성이 퇴색되고 비속화된 양반들의 사교를 대비시킴으로써 양반의 허식적 생활을 풍자·비판했다. 〈예덕선생전 穢德先生傳〉에서는 똥거름 치는 근로자인 주인공 엄행수(嚴行首)의 삶에서, 서민적 덕성(德性)으로서의 건실한 생활철학을 형상화했다. 근로 인민의 도덕이야말로 진실한 도덕이라고 강조하고, 엄행수는 성인(聖人)도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장년기의 작품인 〈양반전 兩班傳〉은 양반도덕의 허위성, 위선적인 양면성, 몰염치한 착취에 기반한 무위도식, 양반의 무능성에 대한 날카로운 규탄과 폭로로 관통되어 있고, 양반 몰락의 역사적 현실성과 필연성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리고 역사 교과서에서 많이 나온다. 그는 양반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하늘에서 사람을 낼 때 4가지 종류로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선비란 것이 가장 고귀하다. 선비는 양반이라고도 부르는데 잇속이 그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농사도 하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고 책권이나 대충 훑으면 크게는 문과에 급제하고 적어도 진사는 떼놓았다. (중략) 우선 이웃집 소를 끌어다가 밭을 갈리고 동네 백성들을 끌어다가 김을 매게 한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겠는가.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그 놈의 코에 잿물을 부어 넣으며 상투를 잡아 휘두르고 귀쌈을 때린들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인간관계가 엄격하게 신분제에 의해 규제되고 게다가 양반사회는 당론(黨論)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교제에 바탕을 둔 평등윤리로서의 우정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폭로하고, 그 평등윤리인 우정의 세계를 희구하면서, 그것을 서민의 생활도덕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서민군상(庶民群像)과 함께 호흡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지식인 체질이었으며, 서민군상 자체가 새로운 사회의 주도층이 될 수 있는 사회층으로 성립되어 있지도 못했다. 결국 박지원의 신분관 역시 성리학과 유학에 있어서의 원형적 신분제로서의 복귀라는 체제 유지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박지원은 현실 양반들의 허례허식을 비판하면서도 제대로 된 처사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유교적 방식을 버리지 못했고, 박지원의 작품속에서 양반은 비판의 대상이 될지언정 다른 신분이 양반을 대체한 적도 없고 같은 수준으로 올라선 적도 없었다. 그래서 박지원의 소설 속에서 진정한 양반은 장사치와 비견되는 존재이다. 허생은 스스로 장사를 하면서도 '나를 장사치로 아는가'라고 했고, 양반전의 양반이 박지원에게 가장 비판받는 대목은 놀고먹다가 환곡을 천섬이나 쓴 것이 아니라 '족보를 장사치처럼 매각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본문과는 달리 잘 알려져 있는 서문에서 대놓고 언급되는 부분이다. 이처럼 박지원 역시 허생(許生)처럼 기재(奇才)를 가지고 고독하게 숨어 살면서 세상을 풍자하고 개탄하는 한 양심적 지식인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고등학교등에서 허생전에 관해 가르칠 때 '결국 양반이라는 신분과 선비의 입장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 작가의 모습을 반영한다'라고 가르치기도 하며,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한 작품에서는 홍길동과 허생을 비교하면서 말하기를 '허생은 선비라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영웅이 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라는 학생의 말을 통해서 언급되기도 한다.

정조의 문학 탄압인 문체반정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정조 대에는 기존의 성리학 경전에서 사용하는 고문체(古文體)에서 벗어나 참신한 방법의 문체가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그 선두에는 바로 열하일기 등 박지원의 글이 있던 것이다. 철저한 성리학 원칙주의자였던 정조는 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였고 문체반정을 일으킨 것. 다만 정조는 정작 박지원 본인에겐 고문체를 사용한 반성문을 내면 중용하겠다며 온건하게 대응하였다.

여담으로, 한문학에 비해 정작 한글은 제대로 알지 못했던 모양.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언문(한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3 경제사상

그는 학문에서 귀중히 여길 것은 실용임을 강조했다. "글을 읽고서 실용을 모를진대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학문이 귀한 것은 그의 실용에 있으니, 부질없이 인간의 본성이니 운명이니 하고 떠들어대고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승강질하면서 제 고집만 부리는 것은 학문에 유해롭다"며 학문의 초점을 유민익국(裕民益國)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맞추었다. 유민익국의 요체로서 생산력의 발전을 급선무라고 인식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는 북(北), 즉 청에서 선진 기술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는 그것이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국가에 유용할 때에는, 비록 그 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주저없이 배워야 하며 다른 사람이 열 가지를 배울 때에 우리는 백 가지를 배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생산력을 복구·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생산 도구의 개선과 영농법의 개량, 농사 시설의 복구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방책을 저서 〈과농소초〉에서 제시하고 있다.

과농소초에서는 절기와 그에 따른 전답(田畓)의 구획법, 농기구의 개량, 토지의 경작과 개간 및 수리 사업과 그 설비, 토양, 거름, 곡물의 품종, 종자의 선택, 파종, 김매기, 해충 구제, 수확, 곡물 저장 등 다방면에서 구체적인 개선 대책을 제시했다. 특히 관개 사업의 복구·발전을 강조하면서, 저수지를 구축해 수차(水車)[7]와 기타 수리 시설을 광범위하게 이용할 방책을 제시했다.

한편 박지원은 당시 생산력의 발전을 생산관계가 저지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생산관계를 개혁할 것을 제기했다. <과농소초>의 뒤에 부록으로 첨부한 〈한민명전의〉에서 토지제도의 개혁안을 제기했다. 당시의 토지 소유관계의 형편에 대해 "농민들의 속담에 '일 년 내내 뼈가 빠지게 일해도 소금 값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농가 중에서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건 부농의 경우로서 열에 겨우 한둘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토지 소유관계의 개혁안으로서 한전법(限田法)을 제창했는데 전국의 토지 면적과 호구를 조사하여 1호당 평균 경작 면적을 국가가 제정하고, 누구든지 그 이상으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법률적으로 제한하되, 이 법을 시행하기 이전의 토지 소유는 그대로 인정하고, 새로운 매입은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하면 수십 년이 못 가서 전국의 토지는 고르게 나누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또한 그는 국가가 확고한 화폐 정책을 실시하여, 상평통보의 발행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것과 은(銀)을 화폐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또 생산품이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지 못하기 때문에 수공업도 농업도 발전하지 못하므로, 우선 교통을 발전시켜서 생산품이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도록 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광범위하게 수레와 선박을 이용하여 국내상업과 외국무역을 촉진할 것도 제기했다.

이상에서와 같이 그는 생산력의 발전을 가장 중요시했고, 이를 위해 한전법을 통한 농업 생산관계의 개혁을 제기했으며 상품의 전국적 유통을 주장했다. 이는 객관적으로는 통일적 내수 시장의 형성을 가져올 수 있는 개혁안이었다. 그는 또 이러한 개혁의 일차적인 책임이 지식인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용이 있은 다음에야 가히 후생이 있고, 후생이 있은 다음에야 가히 덕(德)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이용후생 위주의 새로운 사고 방식을 종래의 인륜 위주의 사고 방식을 대신하게 함으로써, 한국 사상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4 그의 작품

  1. 박규수의 동생이다.
  2. 마장전에서 츤데레를 정확히 정의하는 등
  3. 정약용과도 유사한 면이다. 물론 지향하는 방식은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4. 현재의 계동. 박규수의 집으로 알려진 헌법재판소는 박지원 사후 아들인 박종채가 옮긴 집이다.
  5. 당시 박지원은 조선으로 돌아와 자기집 정원을 중국식으로 꾸며놓았다고 전해진다.
  6. 그런데 실제 광문의 모델이 된 거지두목 달문검계와 연루된 사람이었다...
  7. 박지원 선생은 특히 수레의 도입을 조선의 제일 숙제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