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 ~ 907년 | ||||
기원전 206 ~ 220 | 한(漢) | |||
초한전쟁(楚漢戰爭) 전한(前漢) | ||||
신(新) | ||||
현한(玄漢) | ||||
후한(後漢) | ||||
220 ~ 265 | 삼국(三國) | 위(魏) | 촉한(蜀漢) | 오(吳) |
265 ~ 436 | 진(晉) | 서진(西晉) | ||
동진(東晉) |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 |||
439 ~ 589 | 남북조(南北朝) | 송(宋) | 북위(北魏) | |
제(齊) | ||||
양(梁) 한(漢) 후량(後梁) | 서위(西魏) | 동위(東魏) | ||
진(陳) | 북주(北周) | 북제(北齊) | ||
581 ~ 619 | 수(隋) | |||
618 ~ 907 | 당(唐) 무주(武周) |
- 촉한이 아닌 사천지방에 세워진 다른 촉나라의 경우 촉 항목 참고.
중국의 역사 | ||||||
후한(동한) | → | 위진남북조시대/육조시대 | ||||
삼국시대 | ||||||
촉한 | → | 위 |
위의 지도 중 초록색 국가. 중국의 삼국시대 국가 중 가장 작았고 주로 위와 대립했다. 221~263, 2대 43년.
1 개요
인구 | 1,040,000명[1] |
삼국시대의 삼국 가운데 하나이자 스스로 후한의 계승국이라고 칭했던 국가이다.
국호는 한(漢)이나, 여러 연구 서적이나 매체에서는 보통 촉한(蜀漢) 또는 지역 이름을 따 촉(蜀)이라 부른다. 유비가 후한 말년에 세웠다는 뜻으로 계한(季漢)이라고도 불른다.
수도는 성도(221).
영토는 오늘날의 충칭, 쓰촨 성 전체, 윈난 성 대부분, 구이저우 성 전체, 산시 성와 간쑤 성 지역 일부를 포함한다.
파일:Attachment/Example 1 1.jpg
촉한 지역의 행정 영향력이 강했던 지역을 표현한 지도.[2]
2 역사
208년 | 적벽대전 |
214년 | 유비가 파촉을 점거 |
218-219년 | 한중 공방전 |
219년 | 유비가 한중왕으로 즉위, 형주 공방전 |
221년 | 한 멸망 이후 유비가 황제로 즉위, 한나라 재건을 선포. |
222년 | 이릉대전 |
225년 | 남만 정벌 |
227-234년 | 제갈량의 북벌 |
253-262년 | 강유의 북벌 |
263년 | 위나라의 침공 → 위나라에게 멸망 및 병합 |
2.1 군사
유비가 살아 생전에 워낙 이리저리 돌아다녀서 기록이 적지만, 안정된 후에는 기록이 늘어나 많아지는데 이것들만 봐도 촉은 비록 세력은 약하지만 결코 얕볼 수는 없는 국가였음을 시사한다.
유비의 형주에 보냈던 세월까지는 고생이 많아 그에 대한 기록인 선주전을 비롯한 다른 문헌들을 보면 "흩어졌던 사병들이 다시 모였다."는 기록이 여러번 나온다. 예를들어 정사의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한 뒤 한 달쯤 지나 흩어져 달아났다는 병사들이 다시 모였다."는 정사의 기록이 나온다. 이를 바탕으로 영웅 삼국지는 촉의 군사는 소수강병에 서바이벌 스페셜리스트로 표현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유비가 이끈 병사는 다른 세력에서 빌려온 군을 그대로 증여받거나(혹은 탈취하거나) 특정 세력의 잔존병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고 오환기병등 이민족 군사를 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유비의 휘하에 '촉군'으로 일반화할 만한 군이 출현한 시점은 유비가 동맹을 져버린 유장을 치고 그의 군대 일부를 손에 넣음으로서 그때까지 유비 전력의 대다수였던 형주의 유표 잔존군세와 촉의 군세가 결합된 시기라고 보는 것이 옳은데 그렇다면 그전까지 정말 소수의 직할/잔존병력 외에는 상황에 따라 구성이 바뀌는 혼성부대로 안정적 기반을 마련할 때까지 버텼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유비군이 전투력은 몰라도 최소한 생존성 및 부대 재편성, 교육면에서는 확실히 뛰어난 군대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례로 원소군에서 복무하다가 문추의 부하가 되었는데 문추가 전사하자 유비를 따라 여남으로 도주했고 그 이후 신야를 거쳐 형주로 간 뒤 성도까지 유비를 따라갔다가 이릉대전에서 전사한 병사가 아무도 없다고는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이릉에서 살아남아 제갈량의 북벌에도 따라간 병사도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강유의 북벌까지는 따라가지 못했겠지
파란만장한 1세대(관우와 장비 등)에 비해 2세대는 이릉대전에서 대부분 죽어버렸고, 제갈량이 이끄는 소수의 2세대와 3세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들 상당한 능력을 지녔다. 사실 1세대의 인물들이 워낙 대단한지라 관우와 장비 이후 무용이 높은 무장들은 모조리 관우 또는 장비와 비교되었을 정도다. 이전에는 한고제와 싸운 인간흉기와 비교했다. 특히 맹장을 가리켜 관우, 장비에 비견하는 것은 남북조시대에 자주 보인다. 더 나아가서 양대안이라든가 남조 유송의 명장인 단도제의 부장인 고진지와 설융 등도 좋은 예다.
1세대 장수들의 기록이 상당히 무협지스럽다. 관우는 조조에게 의탁하던 도중 관도대전 당시 1만명의 군사 속에 뛰어들어 안량을 베어낸다던가, 또는 장비는 장판파에서 20명만의 병사를 대동한 채 조조군 수천명의 적을 막아냈는 기록이나. 이러한 기록들은 놀랍게도 연의를 쓴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내용만이 아니라 정사의 기록들이다. 아무래도 군세가 많이 약했던 만큼 상장급들도 일선에서 피 묻히며 싸울 일들이 많았던 것 같다. 대규모 회전을 많이 경험한 탓에 전략가, 지휘관 타입이 많은 위나라나, 소규모 유격전에 특화된 오나라와는 또 다른 차이점. 다만 1세대 장수들 중에서 장비와 위연을 제외하면 지휘관으로서 커리어가 훌륭했던 인물이 적다는 것이 단점. 관우의 경우 여러 전투에서 패배했으며[3] 마초는 귀순 후 활약이 없으며 조운의 경우 커리어 자체가 지휘관쪽을 많이 맡았기보단 유비, 제갈량의 직속 무관 성격이 강하고, 황충은 기록이 적다.[4]
그외 2, 3세대 장수들 중에도 1세대나 위나라의 명장들 못지않게 능력이 뛰어난 이들도 상당했다. 강유, 마충, 장억, 왕평, 장익, 요화, 상총, 곽익 등의 좋은 장수들이 있었고 촉 멸망 후에도 나헌은 2천 군세만으로 오나라의 군세를 반년간 막아냈다. 이때 오나라 최후의 명장이라고 불리는 육항도 3만 병력을 이끌고 왔지만 성을 넘지 못했다.
즉, 2세대부터 좋은 지휘관들은 배출되었지만 쪽수가 안 돼서 고생이 많았다.[5]
그러나 실질적인 마지막 재상이었던 비의 사후 진지가 정권을 잡으며 조금씩 무너져 가더니 진지 사후 유선이 환관 황호를 총애하면서 국가의 체계는 붕괴되기 시작했고, 결국 위에게 멸망당한다.
이 부분에 전적으로 황호 & 유선에 책임을 두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는 의견 또한 있는데, 비의 사후 군정의 1인자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기대받았던 강유가 촉내부의 정치적 기반을 다잡지 못하고 안정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북벌을 시도했던 것 또한 촉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비의가 암살당하기 직전 비의는 유선으로부터 개부를 허락받고 한수 일대로 출병했고, 마침 20만 대군을 모아 움직이려 하던 제갈각과의 공동 북벌의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비의가 곽순한테 암살당하자 후계자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하는데, 그러한 일은 무시당하여 실행되지 못하였다. 한편 오의 제갈각은 촉에서 장억 등이 우려하는 가운데서도 꿋꿋히 북벌을 실행시키면서 강유에게 출병을 종용했다.[6] 강유도 어쩔 수 없이 오나라에 호응해 북벌을 나섰지만 진태의 방어와 오가 신성에서 위나라에게 막히면서 곧바로 퇴각한 전력 때문에 권력도 완전히 이어받지 못했다는 말도 있다.
전체적으로 총평하면, 촉한은 위, 오와의 세력적 열세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으나 주어진 자원 한도 내에서 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선전을 보여준 건 맞다. 촉한 이후에도 이 일대에는 성한, 전촉, 후촉.....등의 여러 독립 정권이 들어서지만, 촉한처럼 자원을 능률적으로 관리해서 상당 기간 동안 공세로 일관한 정권은 촉한이 유일하다. 촉한은 물론이려니와 오나라보다 여러모로 월등히 조건이 유리했던 이후의 남조 정권들도, 촉한만큼의 끈질긴 분투를 보여주진 못했다.
2.2 정치
촉한 정치의 특징은 재상의 활약이 대단히 많았다는 것이다.
황제 유선은 내정이나 외치 면에서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는데, 주로 황실 의례적인 면을 담당하거나,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나설 수 밖에 없는 사안을 제외하면 그냥 소소하게 놀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고대 중국의 황제는 진행해야 하는 의례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의례적인 역할이라고 해도 할 일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황제의 권위가 위축되고 귀족의 권위가 상승한 점은 위, 오도 비슷했다. 이에 덧붙이자면, 이러한 그 당시의 상황은 황제가 유명무실했던 시대상황 때문일 것이다. 오대시대에도 특출난 몇몇을 제외하면 바보 같은 황제가 줄줄이 이었지만, 촉한의 독특한 점은 이런 황제가 우두머리이면서도 나라의 정치가 안정되고 상당기간 국정이 순조롭게 잘 돌아갔다는 데 있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이 승상이자 상국으로써 집권 하였고, 제갈량을 구심점으로 두는 정치가 행해졌다. 이 부분은 유선의 모자란 점을 인식한 유비가 제갈량에게 당부했던 일이기도 하다. 더하여 유선도 제갈량에게 상당히 의지한 면도 있었다. 유비의 죽음 이후에도 나타나는 촉나라의 정치적 특징은, 재상의 권력이 강했음에도 이들 모두 근면성실하고 황실에 충성하며 권력을 이용한 부정부패와 자리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일한 경우가 제갈량 사후에 일어난 양의와 위연의 대립이었지만 위연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고[7] 얼마 후 양의도 실각하면서 곧바로 수습이 되었다. 비의와 동윤도 갈등을 빚었지만 이는 업무 스타일의 충돌[8] 때문이었고 권력다툼은 아니었다. 그나마 이러한 갈등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한 제갈량이 곽유지를 둘 사이의 중개자로 배치하면서 별탈없이 해결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단순히 제갈량 개인의 정치력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제갈량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탁고대신으로써 비록 구두상이긴 하지만 유비로부터 황제가 되도 좋다는 윤허까지 받은 제갈량인지라, 제갈량이 승상이던 시절에는 그의 정치력으로 국가가 안정되게 운영되었다고 풀이할 수는 있어도, 제갈량 사후에도 큰 혼란없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 것은 그만한 시스템이 있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실제로 촉한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장완, 동윤, 비의가 차례로 죽고 난 이후였고 기우는 와중에도 위나 오처럼 피바람이 불지는 않았다. 또 사마의나 사마염이 행정처리 문서를 보고 감탄했다는 기록, 개인이 처리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업무가 재상에게 집중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제갈량은 당대 기준으로는 수준이 매우 높고 복잡한 현대의 그것과 비슷한 관료제 체계를 만들어 국정 운용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으로 많은 국정을 제갈량 본인이 직접 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걸 보아, 재상에게 많은 직무와 권한이 집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아쉽게도 기록이 부족하여 상세한 고증은 하기 어렵다.
재상 | 생몰년도 | 재직 |
제갈량 승상 녹상서사 영익주목 | 181~234 | 223~234 |
장완 대장군/대사마 녹상서사 영익주자사 | ?~246 | 235~246 |
비의 대장군 녹상서사 영익주자사 | ?~254 | 246~254 |
강유 대장군 녹상서사 영양주자사[9] | 202~264 | 256~263 |
여기에 강유를 제외하고 동윤까지 더해 촉의 사상(四相), 사영(四英)이라고 부른다. 비의가 장완의 익주자사직을 승계하면서 상서령이 되어 조정의 사무를 책임졌다.
남아있는 기록만 보면 특이한 점이 있는데, 바로 위나 오에 비하면 사상/처벌이 관대했다는 것이다. 삼족을 멸한 예는 위연 정도이며 그나마도 양의의 개인적 감정이 들어간 것이고[10] 유선이 나중에 부분적으로 복권을 시켜주었다. 역모를 꾀한 팽양의 경우는 그 당시로서는 놀랍게도 오직 팽양 본인만 처형당하는 정도로 정리. 그 외에는 대부분 귀양이나 좌천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제갈량과 마찰을 빚은 이엄 등도 겨우 귀양 정도로 끝났고(당시 위나 오에선 권력자와 마찰을 빚으면 피를 봤다) 그런 그들도 자신들을 내쫓은 제갈량이 자신들을 다시 불러주기를 바랬다.[11] 심지어는 위에 정통이 있다고 주장한 인물들을 탄압한 기록도 없다. 사상과 처벌 면에선 아주 자유로웠다는 점에서 꽤나 특이했던 국가. 사실 인재가 부족해서...
다른 특이점이라면 관리가 많았다는 점. 무슨 소리냐면 동맹이었던 오나라에 비해 인구는 2분의 1도 안되는데[12] 관리 수는 오나라가 3만 2천일때 촉은 오히려 4만으로 더 많았다. 정확한 통계가 아니라 다소 농담이 섞인 말이긴 하지만 '과로사가 많다'는 것이 특징으로 꼽히기도 한다. 유언이 다스리던 시기부터 호족들의 정리를 위해 노력했으나 유장시기 엉망이 되었던 것을 유비와 제갈량이 정리하면서 중앙집권이 이루어졌고 유비는 익주의 행정과 재정, 토지와 인구를 장악하여 호족세력을 적극적으로 제어하고 내부안정을 꾀했다.
부정적인 특징은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후한의 병폐인 '환관의 전횡'이 재현된 국가라는 점이다. 위나라-진나라, 오나라는 환관이 전횡하는 일이 없었는데, 촉한은 황호의 전횡이 나타났다. (오나라의 잠혼은 실제 역사에서는 환관이 아니다.) 유선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위나라-진나라, 오나라에도 결점이 많거나 막장스러운 군주는 있었다. 그럼에도 환관이 국가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록은 이 시대에는 오직 촉한에만 나타났다. 이는 촉한의 정치체계가 후한을 답습하여 환관의 전횡에 대한 대비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원인을 생각해보자면 위나라-진나라는 문벌귀족이, 오나라는 호족 세력이 각각 정치적으로 강력하여 환관이 세력을 키울 환경이 원천적으로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촉한은 후한의 정치체계를 전반적으로 답습하면서 국내의 호족 세력이 약하다보니 유약한 황제 아래 환관이 전횡하는 후한 말의 병폐도 재현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진 탓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황호의 전횡은 유선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유선이 외정의 강유와 내정의 황호를 분리한 일종의 정치적 안배라는 분석도 있다.
2.3 경제
촉한의 영토는 성도평원 중심의 파촉,익주 북쪽의 한중분지, 익주 서남부의 남중(오늘날의 운남)지역으로 나눌수 있다. 원래부터 그 옛날부터 익주, 지금의 사천땅은 초한대전 당시 한고제의 중요 기반이 되었을 정도로 물자, 특히 식량이 풍부한 지역이었고 파촉과 한중은 전국시대 부터 꾸준히 발전해 경제수준이 중원지역에 뒤지지 않아 ‘옥야천리’, ‘천부지토’라는 찬사를 들었다지만, 거기에 더해 촉한 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제갈량의 능력 덕분인지 나라의 규모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대단히 번영했다. 제갈량은 사람들을 조직해 도강언을 정리하고 보수하여 농업의 관개를 보장하였다. 농업에 힘써 생산량을 늘리고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고 농사시기, 세금와 역을 적절하게 하여 농민이 농사일에 전념하도록 하였으며 수공업도 장려하였고 소수 상공인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억제하였다. 지금의 운남인 남중에서는 남만정벌 이후 금, 은, 단, 칠, 밭갈이 소 등이 공품으로 들어와 촉한의 군비에도 다소 공급되었고 국가를 부유하게 했다. 또 한중(漢中) 지방의 수리 시설을 재정비하고 사람을 이주시키고 군대를 활용해 개간하고 경작을 장려하여 한중 경제의 활력을 회복하였다.
익주엔 중원전란을 피해 유민들이 계속 들어왔으며 파촉땅은 산이 많지만 관개 농업을 통해 계단식으로 개간했고, 넓은 분지에는 농사를 짓기에 알맞고 기름졌다. 그리고 날씨는 온후하여 일년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더욱이 전한 시대에 이루어진 뛰어난 관개 사업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홍수로 인한 피해와 물 부족은 걱정이 없다. 등애는 촉한을 정벌한 직후 촉한의 경제를 이용하여 오를 칠 전초기지로 사용하자고 주장도 했다.익주엔에 도강언(都江堰)을 위시하여 양전언楊塡堰, 오문언五門堰 등의 수리 시설이 큰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제갈량은 이런 수리 시설들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 농업을 장려하고 정비했다.
유비는 익주 점령 후 펼친 경제정책에서 조위와는 차이를 보였다. 우선 대규모 둔전 위주 정책을 펼치는 대신 주군의 농업경제 육성과 발전에 힘썼다. 일례로 익주 평정 후 성도의 토지와 저택등을 상으로 내리자는 건의에 조운이 반대하고 나섰다. '밭과 집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생활이 안정된뒤 역조(役調)를 지운다면 백성들도 기쁘게 받아 들일것입니다' 유비는 조운의 의견을 받아들여 농업발전의 기본정책으로 삼았다.
그리고 유비, 제갈량의 통치하에 소금 수입을 막기 위해 암염을 개발했다. 촉은 원래부터 정염(井鹽)과 철광자원이 풍부했는데 정염은 정확히 말하면, 지하수에 녹아있는 소금을 끓여서 결정화시키는 것이다. 당시에 ‘집에 염천이 나는 우물이 있고, 임공(臨邛)의 염정에서는 ‘물 1곡에 소금 다섯말을 얻는다.' 라고 할 정도였다. 유비와 제갈량은 익주를 점령하자마자 소금과 철을 전매케했고 당시 우연적이고 경험적으로 행해지던 정염 생산을 화정(火井, 천연가스)를 이용하여 본격화시켰다. 고대에는 소금이 전략물자였으므로[13], 공명은 이를 국가적인 사업으로 발전시켜 생산량을 늘리고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면서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었다. 염부교위(鹽府校尉) 혹은 사염교위(司鹽校尉)를 두고 그 아래 염부전조도위(鹽府典曹都尉)를 두어 염업을 국가가 관리하게 했다. 이로서 촉한은 국가 단위에서 소금과 철의 정제를 관리함으로써 질과 양을 성장시켰으며 소금 산업의 비약적인 향상을 통해 파촉 지역의 소금은 촉한이라는 국가가 사라진 뒤에도 큰 명성을 떨쳤다.
또 파촉 땅에는 전한기부터 제철 사업으로 갑부들이 많았다. 공명은 이 좋은 쇠와 무릉의 석유, 천연가스로 무기와 갑옷 따위를 비롯한 쇠붙이를 만드는 기술을 발달시켰다고 하며 사금중랑장(司金中郎將)을 두어 농구기와 무기를 제조하게 했다. 염철(鹽鐵)을 정부에서 관리하여 국가적 수요를 만족 시켰을 뿐 아니라 국가 재정 수입도 늘렸다. 또 공명은 이를 이용하여 무기를 개량하였다. 결과적으로 강력한 무기와 단단한 철갑은 촉나라 군방력을 강화하였다. 공명의 북벌시에 사마의는 촉한의 군사와 대치만 할 뿐 감히 대적하지 않았으며, 촉한의 험준한 지형상 군수물자 수송이 어려운 것을 알고 공명이 군사를 물리기만을 기다렸다.
더불어 공명은 촉금을 국가의 중요 물자라고 인식하고 본래 유명하던 촉한의 비단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규모를 넓혀서 금관이란 기관을 만들어 민영/관영 할 것 없이 직간접적인 관리를 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나라의 특산물로 삼았다. 당시 촉금과 관련된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위진 이래 촉금이 생겨나서 양읍의 자리를 빼앗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양읍은 견직물을 생산하는 쪽으로 변하여 결국 얇은 채색비단은 촉지방에만 있게 되었다.주개검의 〈사수필기 絲繡筆記〉
삼국시대 때 제갈량이 촉나라를 다스리자, 잠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촉나라 비단이 일시에 유명해졌다. 위나라 문제 조비는 '촉나라 비단' 무늬의 참신함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그는 뭇 신하에게 "전후로 매번 촉나라 비단을 얻었으나, 서로 비슷하지 않다." 라고 말했다.〈예문류취 藝文類聚〉 권 85
장호가 일찍이 촉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오나라 비단, 절강의 비단을 가지고 관청으로 와서 사천의 비단과 같이 붉게 물들였다. 뒤에 경사(京師)로 돌아와 장마철이 지나자 오와 절강의 비단은 모두 색이 변했으나, 오직 촉나라 비단만이 예전과 같았다.〈능개재만록 能改齋漫綠〉권 15
이처럼 촉의 비단은 삼국의 귀족들 사이에 평판이 높아 오나라와 위나라가 촉한으로부터 수입하는 중요한 수입품 중 하나였다. 이 당시 촉한의 상업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교빙(交聘)과 호시(互市) 형태의 무역이다. 제갈량은 말과 비단을 손오와의 교빙예물로 보냈고, 위는 촉한에서 비단을 사들였다. 교빙이든 호시든 각국의 화폐가치가 달라 물물교환이 이루어 졌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촉한의 경내에서 이루어진 화폐를 이용한 무역이다. 익주 평정후 직백전(直百錢)을 주조해 물가를 안정시키고 수개월만에 국고를 충실케 했는데 전시의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화폐의 작용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후 촉한에선 기존 오수전을 잇는 화폐가 계속해서 주조되었다. 이는 남정으로 한대부터 구리를 공급하던 지역을 차지한 이후 더 원활해졌다.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사천땅은 서쪽으로는 차마고원을 통하여 티벳과 인도 그리고 중동으로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당대에 남만이라고 불렸던 운남성과 베트남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좋은 차와 농지로 유명하다. 그리고 운남성의 무릉에서는 석유와 가스가 발견되어 등갑옷을 만들때나 쇠를 주조할때 연료로써 쓰여왔다. 앞서 언급했지만, 무후는 이러한 특산품들의 이점을 이용하여 강한 무기와 갑옷을 만들었다. 이러한 점을 봤을때, 촉한의 경제력과 정치적 안정성 그리고 국방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더하여 새로 주조된 촉한의 화폐는 위나라의 서북 지역, 오나라의 남부 지역에도 통용되어 촉한의 경제권과 연결될 정도로 신뢰성이 높았다고 한다. 다만 이전시대의 화폐에 비하면 악화였고 촉 내부와 촉한 일부 인접 지역에서만 유통되었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촉한이 삼국 중 가장 국력상 열세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물론 제갈량을 중심으로 한 국가운영이 당대 기준에서는 매우 탁월하고 효율적이었으며, 사천분지가 엄청난 곡창지대이기에, 촉한이 '질적인 측면'에 있어서 '하나의 주'가 발휘할 수 있는 역량과 생산력을 훨씬 상회한 면모를 보여준 건 별로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가령 후주전을 보면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촉한이 동원한 군사력이 20만명이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물론 적당히 과장으로 필터링해야겠지만, 당대 난세 난리통 속에 급전직하한 중앙권력의 통치력과 피폐해진 생산력을 감안했을 때 고작 '하나의 주'에서 보여 줄 수 있는 동원력이라곤 상상하기 힘든 규모다. 그것도 이릉대전이라는 엄청난 참사를 겪고 난 이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경이로운 수준. 참고로 1개 주에 인구 100만명 남짓을 확보[14]한 촉나라가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보여준 20만명이라는 최대 군사동원력은 표면적으론 (거의) 3개 주에 인구 250~300만명을 확보한 오나라가 한참 나중에 제갈각의 북벌을 통해 보여준 최대 동원력과 똑같다. 게다가 토착 호족과 유력 명문가의 입김이 강한 동오의 정치 체제 하에서 20만명이라는 대군을 동원한 것은 그 자체로서 엄청난 무리수[15]였다는 건 익히 잘 알려진 사실. 그러니까 북벌에서의 승패와 무관하게 이미 이 시점에서 제갈각 몰락의 단초가 뿌려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제갈량과 다른 사영들을 중심으로 일궈진 리즈시절 촉한의 내부역량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듯.
그러나 '절대량'에 있어서는 결국엔 '하나의 주'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노정하게 되니 본질적으로 후달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오나라 같은 경우는 장강 이남지역은 개발이 별로 진척되지 않았고 호족연합체라는 정치적 리스크까지 안고 있지만 그래도 결국은 개발이 잘 된 장강북부 일부와 비옥한 양쯔강 삼각주를 장악했고 표면적으로는 (거의) 3개의 주를 확보했으니 근본적으로 뿌리내린 영토가 협소한 촉나라가 절대적인 볼륨 면에서 오나라를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2.4 이민족
위의 경우는 이민족을 노예화시켰고[16], 오는 이민족과 아옹다옹 칼질하며 살았던 것과 달리, 무릉만의 사마가를 동맹으로 삼거나 반란을 일으킨 남만의 맹획을 정3품의 고위관직에 임명하고 맹획의 일가쯤 추정받는 맹염은 후에 5차 북벌에 참가하는 등 상당히 이민족을 잘 포용한 편이다. 촉한은 강, 저족 같은 서쪽의 소수 민족과 화합하면서, 후방의 '서남이(西南夷)'라고 부르는 이민족을 회유해 서남 소수 민족들은 점차 산림을 떠나 평지로 옮기고 마을을 이루었으며 농업에 힘써 이 지역이 대대적으로 개발되었다.
이민족들과 싸우기도 했지만 남만 지역에 제갈량에 호의적인 전설 등이 남은 것으로 봐선 시간이 지나도 원한이 남을 정도의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던 듯하다.
북벌 때는 제갈량이 가비능 등의 이민족 대장들도 잘 포섭했었고 서융족 등의 협력을 얻기도 했으며, 왕평이 이민족 부대의 대장이 되고 좀 더 올라가면 유비 휘하에 이민족 기병이 있었다는 기록도 볼 때 이민족에게 군사적 포용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민족들을 기병 전력으로 활용하는 것은 위에서도 했고, 전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촉한도 이런 예를 따랐다고 볼 수 있지만 촉의 경우 이민족에게 가장 친화적인 국가였음은 변함이 없다. 당장 위에 나오는 맹염도 직위가 호보감, 즉 근위보병사령관이었다. 당시 위와 오가 이민족에게 저런 고위 관직을 주면서 중앙관서에 편입시키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3 역대 황제
대수 | 재위기간 | 묘호 | 시호 | 성명 | 약력 |
30대[17] | 221-223년 | 열조(烈祖)[18] | 소열황제(昭烈皇帝) | 유비(備) | 한나라의 계승을 표방. 161년 출생, 223년 사망. 63세. |
31대 | 223-263년 | - | 사공(思公)[19] 효회황제(孝懷皇帝)[20] | 유선(禪) | 정통성을 이룬 황제와 유능한 재상이 공존하는 삼국에서 가장 안정된 정치체제 이룩, 허나 말기에 들어 후한의 병폐인 환관의 전횡이 재현됨. 207년 출생, 271년 사망. 65세. |
4 계보
추존황제 태상황 유태공 | ||||||||||||||||||||||
1. 고제 | ||||||||||||||||||||||
2. 혜제 | 5. 문제 | |||||||||||||||||||||
3. 소제 | 4. 소제 | 6. 경제 | ||||||||||||||||||||
7. 무제 | 장사정왕 | 유승 | ||||||||||||||||||||
8. 소제(昭帝) | 유박 | 유진 | 용릉절후 | |||||||||||||||||||
9. 폐제 | 10. 선제 | |||||||||||||||||||||
11. 원제 | 유오 | |||||||||||||||||||||
12. 성제 | 정도공왕 | 증신효왕 | 유훈 | |||||||||||||||||||
13. 애제 | 14. 평제 | 玄. 경시제 | 16.광무제 | |||||||||||||||||||
유현 | 17.명제 | |||||||||||||||||||||
15. 유자영 | 18.장제 | |||||||||||||||||||||
19. 화제 | 유강 | 유수 | ||||||||||||||||||||
20. 상제 | 21.안제 | 22.소제 | ||||||||||||||||||||
23. 순제 | 26. 환제 | |||||||||||||||||||||
24. 충제 | 유홍 | |||||||||||||||||||||
25. 질제 | 27. 영제 | 30. 열제 | ||||||||||||||||||||
28. 소제 | 29. 헌제 | 31. 효제 |
5 여담
본 삼국지와 삼국지가 울고있네의 저자 리동혁의 연구에 의하면 멸망 직전 민간인은 28만호 94만명이었으며, 장병 10만 2천명으로 인구는 도합 약 104만명이었고, 관원 수는 4만명이었고, 창고의 식량이 40여 만섬, 금은은 각기 2천근 가량, 비단과 채색비단은 각기 20만 필이었다고 한다.
촉나라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인구가 100만 내외 수준이지만, 실제 촉에 100만명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유민이 많았던 데다 가족의 구성원들 중 일부는 호적에서 누락하는 일도 있었으며, 인두세를 내지 않기 위해서 일부로 호적에 올리지 않는 경우가 허대했었다. 그래서 실제로 촉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그보다 몇 배 이상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분은 위와 오도 마찬가지.
5.1 명칭
후한을 이은 왕조라는 정통성을 주장했으므로 정식 국호는 단지 한(漢)이었다. 촉(蜀)은 이 나라의 별칭인데 촉한 스스로는 잘 안 썼고 위나라나 오나라 내부에서 주로 썼다고 여겨진다.
중국사에서는 국호를 漢이라고 쓰는 나라가 많은 탓에 국가의 위치인 촉 지방의 이름을 붙여서 촉한이라고 부른다. 사실 위진남북조시대에도 이 지역에 한(漢)이 또 나온다. 이쪽은 이민족 국가로 흔히 후촉(後蜀)이나 성한(成漢)이라 일컫지만, 이쪽도 "촉한"이라 부를 수 있으니 촉한이라는 표기라면 문제가 있다.
이 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역사가들은 계한(季漢, 전한, 후한에 이은 '마지막' 한이라는 의미)이라고도 불렀다.
촉한에서는 스스로를 정통 한나라로 보아 한나라로 불렀기 때문에 이를 존중하여 삼국지평화에서는 그냥 한(漢)이고 해도 한이라 불려 판소리 등에 "한말 위한오 시대 때"라고 부르는 경우가 잦았다. 하지만 역사서 삼국지에는 그냥 촉으로 나오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도 촉이라고 불렀다.
여러 모로 국공내전 때 대만으로 이주해 정통성을 주장한 중화민국의 처지와 비슷하다. 실제로 제갈량의 출사표에 등장하는 말인 한적불양립(漢賊不兩立: 한나라(촉한 포함)와 도적(역적)[21]은 양립할 수 없다)이라는 용어는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말로 인용해 왔고 지금도 강경한 사람들은 이 말을 쓴다. 자기들이 주장하는 나라 이름(한나라, 중화민국) 대신 지배하는 중심지역의 지명(촉, 대만)으로 더 유명하고 그렇게 주로 불린다는 점도 비슷하다.
5.2 촉한정통론
후한을 계승한 촉한에 그 정통성이 있다는 평가. 정통성은 전왕조에 기준을 두는 만큼 비록 세력은 작았으나 한을 계승한다는 명분이 충분했던 촉한에 정통을 두는 논리다. 마찬가지로 동진과 바로 이어지는 남조 또한 북조에 비해 세력이 작고 마지막 왕조인 진이 북조에서 나온 수에게 멸망당했음에도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하려는 논리가 있는것처럼 정통성에 대해 세력보다는 전왕조와의 연결성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촉한정통론이 생겨난 것이다.
5.3 창작물
작은 세력으로 계속 노력했다는 이미지 덕분에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선 주역으로 많이 등장하며 연의가 주로 촉 위주로 흘러가 유비, 관우, 장비 3명을 위주로 촉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창작물도 엄청 많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망해버린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비장함을 부여하기도 좋은 데다가 역사상의 본인들이야 죽을 맛이었겠지만(...) 인재가 적다는 것은 문학 등으로 창작했을 때 여러 인물에 포커스가 흩어지는 게 아니라 한두사람에 집중되어서 주인공으로 띄워주기 좋다. 특히나 파보면 강력한 모습은 보기 힘들어도 의외로 튼실한 면도 보여서 이런 점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대부분의 창작물이 전쟁을 다루다보니 위에서 언급된 촉의 다른 장점인 정치 체계나 경제력은 거의 무시받는다. 대부분 제갈량이 정치를 잘했다 정도로만 끝나 안습. 하지만 정작 촉한은 제갈량이 죽고 나서도 30여 년을 더 존속했고, 게다가 위가 전력을 다해 수십년을 더 싸우고도 오와 달리 힘으로 정면대결해서 멸망시킨 게 아니라 간첩을 엄청난 규모로 보내고, 강유를 철저하게 묶으며, 여기에 유선의 병크까지[22] 줄줄이 운이 따른 결과임을 생각하면 상당히 억울한 상황이라고 하겠다.
SD건담 삼국전에서는 '상(翔)'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유비 건담이 자기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익주로 가서 건국을 선포한다.
5.4 쓰촨성의 관광유산
쓰촨성에는 난세가 오면 나라가 하나씩 나왔다. 그런데 이 나라들이 대체로 혼란기에 지방 실력자가 한 몫 잡고 험준한 산악에 기대 버티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나태해지다가 대륙의 정세가 바뀌어 천하대세가 갈리면 흐지부지 멸망하는 일을 자주 보여준다. 그래서 인지도가 낮고 관심도 덜 받는다. 당장 촉한이 멸망한 지 40년 뒤 촉 땅에 성한이라는 이민족 왕조가 나왔는데 이런 식으로 망했다. 물론 촉한에 비해선 아웃 오브 안중 취급(...).
쓰촨성의 지정학적인 상황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할 듯한데, 촉한은 망하기 직전까지 공세를 펼친 특이사례다.[23] 유비의 한중 공방전, 이릉대전,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 등 끝없이 싸워왔다.
이 때문에 촉한은 쓰촨성 관광계의 희망이자 별이자 모든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다른 지방에서는 완전 듣보잡 수준인데 촉한만은 삼국지의 영향으로 인기가 높아서다. 대충 이 동네 전통 관광 유산의 90%가 촉한 관련이라고 한다. 무후사는 물론이고, 낙봉파 같은 연의에 나온 가상의 지역까지의 도로도 만들었다.
예외인 것은 전촉 황제 왕건 묘나 도강언, 당나라 시기 시성 두보가 살던 초당, 진(秦)나라에게 멸망하기 이전 고대 파촉 문명 정도? 그나마 이쪽도 촉한 관련 유적보다는 인기가 없는 듯.
- ↑ 멸망 직전 인구로 군인까지 포함한 숫자로, 멸망 직전 민간인은 28만 호(戶) 94만 명 정도였으며, 멸망 직전 군인 수는 약 10만 2천명 가량 되었다고 한다.
- ↑ 해당 지도는 촉한의 '실제 통치 영역'이라고 알려진 잘못된 지도이지만, 해당 지도 내용은 당시 시대의 실제 행정력이 미쳤던 지역을 잘 표현했기에 첨부함. 색칠된 영역이 중앙 권력의 영향력이 적용되는 지역이다.
- ↑ 다만 이는 기록이 풍부한 위의 기록과 너무나 부실한 촉한의 기록 차이로 인해 관우가 패한 전투만 부각되기에 생기는 착시 현상이라 볼 수 있다. 관우가 패했다고 알려진 전투는 확실히 전세를 바꾼 번성 전투시의 서황과의 전투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악진, 문빙 등 개개인의 열전에 나오는 내용들이며 이들 전투들은 도대체 언제 벌어진 전투인지조차 가늠을 못할 정도로 영향력도 떨어진다.
- ↑ 이건 위에도 설명하였듯이 촉군 자체가 상당히 늦게 성립된 것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장수 혼자서 돌격해서 다 썰어버리는 연의와 달리 실제 전쟁은 장수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병사들의 전투력이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
- ↑ 물론 연의에서 미화받은 장포, 관흥, 마대은 제외한다.
- ↑ 오서 제갈각전 배주 제갈각별전 中.
- ↑ 작정하고 일으킨 반란이라기보단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죽은 뒤 자기버리고 군대가 철수한 것에 홧김에 그랬다.
- ↑ 비의는 업무의 큰 줄기만을 잡고 그 외는 아랫사람들을 적절히 이용하는 스타일인 반면 동윤은 자신의 업무를 직접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죽어라 일하는 동윤의 눈에 당연히 비의가 일도 안 하고 놀기만 하는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훗날 동윤이 비의의 뒤를 이어 상서령이 된 후 무지막지한 업무를 받아 본 후에야 "사람의 재능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인가!"하고 비의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더욱 무지막지하게 일을 해서 업무를 처리하다가 과로사했다. - ↑ 강유는 일단 비의 사후 대장군이 될 때까지 시간이 걸린데다, 비의 사후에는 조정을 유선이 황호와 진지(상서령. 직임이 강유의 녹상서사와 겹친다!) 등을 내세워 직접 통할했으므로 제갈량, 장완, 비의와는 그 역할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난다. 다만 군부와 조정의 어른격인 대장군 녹상서사직에 올라 있었고, 한중방어체제 개편이나 건국공신들의 추증 등 국사에는 강유가 개입한 바 있으므로, 강유 또한 재상 계보에 드는 것이 가능하다.
- ↑ 그 양의도 상당히 중대한 죄를 지어 나중에 제재를 받지만 그냥 본인만 자살하게 하는 걸로 끝났다.
- ↑ 이엄같은 경우는 제갈량이 죽자 자신이 복권될 일은 이제 없을 것이라고 통곡했을 정도였다. 보통 이런 경우 쫓겨난 자들은 쫓아낸 자들이 죽고나서야 돌아갈수 있다고 안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촉한에선 반대였던 특이 케이스. 그리고 이엄의 아들 이풍은 아버지가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태수로 승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 ↑ 오의 호구가 230만 정도였을때 촉은 90만이었다. 다만 오와 달리 촉은 명백한 중앙집권국가고 그 집중도만 따지면 오히려 위보다 결속력이 더 강했다는 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장 나라가 망할 당시에도 위는 촉을 멸망시키기 위해 그 엄청난 우위의 국력에도 불구하고 불과 두 배의 병력만 동원했고, 그나마도 운이 겹치고 또 겹친 결과 멸망시키는 게 가능하였다. 게다가 원래 위의 1차 목표는 유엽의 건의에서 보듯이 촉이 아니라 오였다.
- ↑ 한 제국 시절에 이미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관리하고 전매케 하는 법이 있었으며, 촉한 정벌 이후 등애가 "익주에서 소금을 굽고 철을 벼리며 차근차근 준비해서 오를 쳐야 합니다"라는 진언을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소금과 철은 중요한 물자였음을 알 수 있다.
- ↑ 누차 강조되듯 실제 익주에 살고 있는 사람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촉한의 통치 자장권 내에 들어온 인구수가 100만 정도란 얘기.
- ↑ 상술에서는 촉한과 동오의 정치시스템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인구 대비 관리수'를 예시로 들었는데, 이보다 더 두 나라 간의 차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예시가 바로 군사동원력이다. 동오는 촉한에 비해 2배 이상의 인구수와 병사력을 확보했지만 실제 대위전에 '무리 없이' 투입 가능한 최대 전력은 촉한과 비슷한 수준인 10만 정도로 여겨진다. 20만이라고 칭해지는 제갈각의 북벌을 제외하면 10만을 넘어가는 병력을 동원한 적이 전무하다. 문제는 10만이라는 병력은 촉한 입장에선 거의 전력의 전부이지만 동오의 전력에 비춰보면 절반 이하이다. 그러니까 동오가 확보한 군사력은 대략 20~25만명으로 추정되는데, 한마디로 동오는 나라가 망할 때까지 풀전력을 가동한 적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가령 적벽대전 같은 경우를 보면, 그 시점에 동오는 이미 10만명이라는 만만치 않은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과 이민족의 준동, 토착 호족들 간의 알력다툼에 피치 못하게 개입해야 했기에, 반드시 전력을 집중시켜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어쩔 수 없이 전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실제 적벽대전에 투입된 병력은 전력의 절반 이하인 3~4만명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1만 정도는 손권 본인이 쥐고 있어야만 했다. 실상이 이러했기에 유비는 형주의 패잔병을 중심으로 꾸려진 고작(?) 2만명 수준의 병력을 들고 적벽대전에 참전해 전후 자신의 지분을 주장할 수 있던 것이고, 동오 역시 이를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결국 나중엔 최악의 파국으로 파토났을망정. 아무튼 촉한이 이렇게 전력투구 할 수 있는 있는 배경에는 제갈량을 중심으로 다져진 반석과도 같이 굳건한 정치시스템이 깔려있다. 일견 연의에서 엄청난 미화와 보정을 받은 걸로 여겨지는 '신출귀몰 천재 군사' 제갈량이 곰곰이 따져보면 실제 정사 상의 '관중과 소하에 비견되는 명재상' 제갈량에 한참 못미친다는 평가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어쨌든 전체 국력의 규모 면에서 한참 격차가 벌어지는 촉한과 동오가 실질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똑같이 국가의 전력을 투입해 패배한 제갈량의 1차 북벌과 제갈각의 북벌을 비교해 볼 때 전자는 별 사달이 없었지만 후자는 최악, 최흉의 결말(물론 이는 두 제갈씨 사이에 가로놓인 넘사벽 인품의 간극과 거기에서 기인한 사후 처세술, 자기관리를 반드시 고려해야겠지만)을 맞았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이는 촉한이 당시 기준으론 얼마나 황권과 신권의 조화를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체제가 잘 확립됐는지, 동오가 얼마나 호족들간의 '느슨한 연합체'였는지를 동시에 웅변하는 대목이다.
- ↑ 이때 (중국 입장에선) 이민족이던 고구려도 작살이 났었다. 관구검이 고구려 동천왕을 깨뜨렸고, 당시 고구려는 수도가 불타고 거의 망할 뻔했다. 다만, 한반도 일대에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시도는 실패했다. 교역권 배분을 통해 삼한을 분리 통제하려던 것이 마한의 경제적 이권과 정면 충돌해서 마한과 군사적 대결을 벌였는데, 위나라가 이겨서 주장을 관철시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위나라도 심각한 군사적인 타격을 입었고, 이 과정에서 마한 내의 경쟁 국가들이 약해지거나 없어진 탓에 백제가 급속도로 세력을 키우게 된다.
기껏 뺏었다 치던 고구려가 국토를 수복해 결과적으로 망했어요가 된 건 덤. - ↑ 후한의 계승을 천명했기에 초대가 아닌 30대로 칭했다.
- ↑ 촉한에서 붙여준 정식 묘호는 아니고, 후세의 역사가들이 추증한 묘호다.
- ↑ 서진에서 내려진 시호.
- ↑ 전조의 유연이 붙인 시호.
- ↑ 당장은 위나라를 가리켜서 賊이라 표현했겠지만 내심 오나라도 賊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목표는 삼국을 통일해서 옛 한나라의 정통을 승계하는 것이니깐.
- ↑ 유선을 안락공으로 봉하고 잘 대해준 것도 실상은 촉 내부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서로 보인다.
- ↑ 전한도 여기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애시당초 전한 왕조는 파촉에서 몇년 있다가 바로 관중을 주 거점으로 삼아 활동했으니 장기간 파촉을 거점으로 삼고 활동한 촉한과 분위기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