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가기관.
기원은 고려초부터 있었던 대비원에서 유래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정책을 계승해서 동서 대비원을 두어 병자와 빈민을 구휼하게 했다. 이후 태종 이방원이 1414년, 대비원이라는 말을 활인원으로 고쳤고, 세종대왕은 활인원을 활인서로 개칭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동서 활인서를 두어 동활인서는 동소문(당시 홍화문, 후에 중종 때 혜화문) 밖에, 서활인서는 서소문(당시 소덕문, 영조때 소의문) 밖에 두어 병자와 오갈데 없는 자들을 거두어 치료하고 옷과 음식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주된 임무는 세종실록의 기록대로 환자와 오갈데 없는 사람들을 거두어 치료하고 먹이는 의료기관 겸 복지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설치된곳을 보면 알수 있듯이 어디까지나 도성 한양(부터 성저십리)안에 사는 병자와 오갈데 없는 자들에게만 해당되었다. 지역의 경우는 지역 수령이 대충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게 했던것 같지만 제대로 시행된것 같지는 않다.
그외에 전염병이 창궐할때는 환자들을 격리수용 치료하고 사망시 매장까지 담당하는 임무도 있었다.
비슷한 기관으로 혜민서가 있었는데 혜민서가 일반 서민의 치료기관이었다면 활인서는 그보다 더 못한 자들을 위한 치료 복지기관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다.
임진왜란때 일시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기도 했으나 이후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고질적인 재정난때문에 1709년에는 혜민서와 통폐합되었다.
일각에서 1743년에 폐지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그렇지는 않고 이후에도 유지되다가 최종적으로 고종 19년인 1882년에 없어진다.
MBC 드라마 닥터 진의 주요 배경이다. 극 초중반부의 의료활동은 대부분 활인서에서 이뤄지는데, 조선에 창궐한 콜레라를 막기 위해 진혁이 활인서에 발령났기 때문. 다만 후반부에는 진혁이 아예 내의원 어의로 올라가 활인서의 비중이 조금 줄어든다. 고종때 활인서에는 홍씨성을 가진 뛰어난 여의원이 있었다나 어쨌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