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지리지

1 개요

世宗實錄地理志.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世宗莊憲大王實錄地理志)라고도 한다.

조선 초기의 지리서이자 한국 역사상 세번째로 만들어진 지리지.[1] 이름 그대로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전국지리지로 실록 안에 실려있긴 하나 부록이 아니라 독자적인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2 역사

세종 6년, 1424년에 세종이 변계량(卞季良)에게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편찬할 것을 명한 것이 최초다. 이에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를 시작으로 1432년에 이르면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완성된다.

세종이 사망한 후 1452년 세종실록이 편찬되는데 세종의 업적이 고르고골라도 너무 많아 도저히 실록 안에만 다 담을 수가 없어서 그냥 칠정산정간보, 오례의,[2] 지리서를 따로 수록해 버렸다. 이 때의 지리서는 신찬팔도지리지를 기본으로 하여 1419년과 1432년에 다시 확인한 지리적 변화들을 추가하고, 4군 6진 개척 이후 편입된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지리 상황을 추가한 것이다.

3 내용

이 부분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항목을 참조하였습니다.

경기도 41개 도시, 충청도 55개 도시, 경상도 66개 도시, 전라도 56개 도시, 황해도 24개 도시, 강원도 24개 도시, 평안도 47개 도시, 함길도 21개 도시에 대한 기록이다.

각 고울에 파견된 지방관의 등급과 인원, 연혁, 각 고을의 별호, 속현과 그 연혁, 진산과 명산대천, 고을 사방 경계까지의 거리, 호구(속현도 따로 기재)와 군정의 수, 성씨(속현도 따로 기재), 토질과 전결(田結), 토의(土宜), 토공(土貢), 약재, 토산, 누대, 역, 봉수, 산성, 제언(堤堰), 사찰 등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는 달리 각 고을의 공물, 조세, 군역 등 국가가 징발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총 정리해 놓았다.

4 의의

첫번째 의의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대로 된 형태로 만들어진 지리지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지리지는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지리지(三國史記地理志)이지만 그 체제나 형태가 삼국사기의 부록 수준으로 매우 미숙하고 내용도 거의 없으며 그나마 있는 내용은 신라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3] 또한 삼국사기지리지는 당대 고려 사람이 직접 전대 삼국의 땅을 견문한 후 적은 것이 아니라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유구(劉昫)의 당서(唐書), 송기(宋祁)의 신서(新書), 가탐(賈耽)의 사이술(四夷述), 구당서-신당서(舊新唐書),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등 중국의 사료들을 토대로 만든 것이라 우리나라 고유의 지리지라고 하기엔 불만스러운 점이 많다.

두번째 만들어진 지리지는 문종 1년인 1451년에 세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로 역시 부록 수준으로 소략(疎略)하게 기록되어 있고 군현 이하의 행정구역인 향(鄕), 소(所), 부곡(部谷), 장(莊), 처(處)의 지명이 많이 누락되어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가 제작되기 3년전 나온 지리지로 사실상 경상도지리지와 함께 세종실록지리지의 프로토타입 같은 느낌이다.

앞의 두 지리지는 기본적으로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후대 왕조가 만든 것으로 그 한계가 뚜렷하고 내용이 정확하지 않으며 분량도 적다. 반면 세종실록지리지는 후대에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비교해 보아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의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으며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제작 목적이 확실하고 실제 나라를 꾸려나가는데 필수적인 내용들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두번째 의의는 조선이 이전 왕조인 고려보다 훨씬 강한 중앙집권국가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자료라는 것이다.

전대 왕조인 고려는 왕권이 가장 강했던 광종 시기에도 행정력이 지방 구석구석에까지 미치지 못했고 지방관 파견도 중앙 5도 지역과 일부 큰 주현에만 한정되었고 기타 속현에는 파견할 수 없었다. 상황 자체가 고려에게 더럽게 흘러갔던 점이 큰데, 고려 자체가 호족 연합체격으로 시작한 나라라 지방세력 통제 실적이 오히려 전 왕조 통일신라보다도 부실했다.[4] 초기에는 호족들이 날뛰었고 중기에는 무신정권이 들어서며 개판이 났기 때문. 그 후인 원간섭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정동행성다루가치가 미쳐 날뛰는 한편, 영토적으로는 평양과 그 이북 지역은 동녕부(東寧府)란 이름으로 30여년간 뺏기고, 함경남도는 98년간 쌍성총관부라는 괴뢰국이 세워지고, 제주도에 대한 영향력도 완전히 상실하는 등 헬고려가 탄생하는 바람에 지방 관리는 커녕 자주권을 지키기에도 급급했다. 말기에는 영민한 군주 공민왕이 등극하며 희망이 보였으나 홍건적이 1359년 4만명, 1361년 10만명이 몰려와 수도인 개경을 털어버리고 이에 왕이 안동까지 피난가면서 폭망... 공민왕도 노국대장공주 문제로 정줄을 놓아버리면서 끝내 고려는 완벽한 중앙집권을 이룩하지 못했다. 결국 고려는 끝까지 지방 속현에까지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각 지방의 백성들은 나라, 그 지역의 호족, 그 지역을 지나는 다루가치, 타락한 절 등에 따로따로 세금을 내야 했다.

조선의 경우 이때를 기점으로 지리지를 편찬하고 전국 모든 고을의 조세 수취, 군역 징발 등의 제반 사항을 중앙에서 직접 통제했다. 지리지를 통해 모든 고을에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중앙에 바치는 조세와 군역 등을 파악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문화, 백성들의 생활과 처한 상황까지 전부 보고해 올리도록 했다. 각 지역에서 난립하던 호족, 문벌귀족-권문세족 들은 조선시대에 이르면 서리(書吏)와 같은 아전으로 격하되었고 중앙정부에 종속되었다.

마지막 의의는 현대 대한민국영토 분쟁에 있어서 중요한 사료라는 것이다. 주요 영토 분쟁 지역인 독도녹둔도 등에 대한 한반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때 가장 먼저 드는 사료다. 특히 독도는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한국 내에서 독도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기록 문헌이 바로 이 세종실록지리지이고, 일본의 최초 기록인 은주시청합기(1667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자료다. 그리고 고려시대 동북 9성의 공험진 위치 비정을 두만강에서 700리 넘어 송화강 유역이라고 적어놓아서 간도 영유권 문제, 간도회복 떡밥이 돌 때도 한번씩 튀어나온다.
  1. 세종실록지리지의 전신인 경상도지리지를 넣을 경우 네번째.
  2. 국조오례의의 전신.
  3. 삼국사기 34권 지리지 1은 신라 상주, 양주, 강주이고 35권 지리지 2는 신라 한주, 삭주, 명주이고 36권 지리지 3은 신라 웅주, 전주, 무주이고 37권 지리지 4는 고구려, 백제, 기타 지역의 내용이다.
  4. 신라는 지방세력의 반란 통제에 실패하거나 휘둘린 적이 멸망할 때 빼고는 없었지만 고려는 지방 연고지를 백으로 둔 권신이나 변경의 군인에게 중앙정부가 털리는 게 거의 연례행사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