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an de Cartagena
생몰년도 미상
스페인 출신의 인물.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일주에 동참했으며, 후안 로드리게스 데 폰세카의 조카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숨겨진 아들이었다.
스페인의 해군 감찰관으로 마젤란 함대에서는 콘셉시온 호의 선장이면서 마젤란 함대의 검열관이었으며, 루이 팔레이로가 사임하면서 폰세카의 입김에 따라 카를로스 1세에게 임명을 받아 마젤란과 공동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519년 4월 6일에 마젤란 함대에 가담해 함대를 감독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아 마젤란보다 급료를 더 많이 받아 11만 마라베디를 받게 되었고 페르소나 콘훈타라는 직위를 받았다.
카르타헤나는 항해 과정의 모든 상업 결정권을 부여받은 왕실의 수석 회계사, 국고 대리인 역할을 했으며, 또한 함대의 통상 거래가 국가 수익을 고려하는 것인지에 대해 감독하면서 기록해 물품 거래 내역을 점검하고 일일이 승인했다. 그렇기에 함대의 모든 업무에 참견했고 이 때문에 마젤란의 부하들은 최종 결정권자를 마젤란이 아닌 카르타헤나로 생각했다.
1519년에 마젤란 함대가 출발했지만 카나리아 제도에 있을 때 포르투갈 쾌속선이 추격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 대서양 서쪽으로 가는 예정된 항로에서 벗어나 아프리카 남서쪽으로 향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60일 동안 항해하면서 선원들이 불만을 품었으며, 저녁에 선장들이 트리니다드 호에 가서 마젤란에게 예를 갖추어 새 지령을 받기로 되어있지만 카르타헤나는 그 절차를 무시하기로 한다.
그래서 대신 조타수를 보내서 보고하다가 마젤란이 받아들이지 않자 카르타헤나는 저녁 보고를 하지 않기로 했으며, 10월에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곤살로 고메스 데 에스피노사, 두알테 바르보사, 크리스토방 레벨로 등에게 진압되어 형틀에 묶이면서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1520년 3월에 1520년 3월부터 세인트줄리안 항구에 머무르면서 다른 선장들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고 4월 1일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가스파르 데 케사다,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30명의 선원들과 함께 산 안토니오 호로 가서 장악했다. 반란이 진압되었지만 카를로스 1세가 직접 선장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마젤란은 제국의 통수권자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차원에서 사형만은 면하게 했다.
그러나 페드로 산체스 데 라 레이나와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키려고 모의하다가 발각되자 세인트줄리안 항에 남겨두기로 했으며, 8월 11일에 가까운 작은 섬에 유배하기로 했고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