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
막시밀리안 1세 | ← | 카를 5세 | → | 페르디난트 1세 |
통일 스페인의 역대 국왕 | ||
카를로스 1세 | → | 펠리페 2세 |
카를 5세, 티치아노 베첼리오作, 1548년 | ||
왕호 |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Carlos I de España y V del Sacro Imperio Romano Germánico) | |
생몰년도 | 1500년 2월 24일 ~ 1558년 9월 21일 (58세) | |
출생지 | 플랑드르 헨트 | |
사망지 | 스페인 유스테 | |
재위 기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1519년 6월 28일 ~ 1556년 8월 27일 |
스페인의 왕 | 1516년 1월 23일 ~ 1556년 1월 16일 | |
대관식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1530년 2월 24일 |
샤를마뉴 이래 서구 최강의 패권자 황제
합스부르크 역대 최대 판도를 이룩한 사상 최강의 먼치킨
의도치는 않았지만 근세 이후 교황권을 사실상 끝장내 역사를 바꾼 무시무시한 황제
합스부르크 가문이 배출한 최고의 엄친아이자 유럽에서는 중세 최후, 근세 최초의 황제로 불리는 인물. 스페인의 공식적인 1대 국왕[1]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이탈리아의 군주 등 국경을 초월한 여러 직함을 갖고 있는, 중근세 유럽에서 가장 많은 나라의 왕관을 쓴 인물. 자세한 것은 아래 본문 참조.
카를 5세 기마상, 안토니 반 다이크, 1620년 | 갑옷을 입은 카를 5세, 산 후안 데 라 크루즈 |
근엄한 군주로서의 이미지[2]. 참고로 합스부르크 왕가는 주걱턱이 집안 내력. |
카를 5세가 구축한 최전성기 합스부르크 제국의 유럽 내 강역(16세기 중엽) |
노란색 :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에게서 상속받은 오스트리아 영토. 주황색 : 할머니 마리 드 부르고뉴[4]에게서 상속받은 플랑드르, 네덜란드, 로트링겐 영토. 빨간색 :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에게서 상속받은 아라곤, 발렌시아, 나폴리, 시칠리아, 밀라노, 사르데냐 영토. 자주색 : 외할머니 이사벨 1세에게서 상속받은 카스티야, 레온, 나바라 영토 및 카를 5세 당대에 정복한 북아프리카 전진기지. 검은선 안쪽 :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명목상 통치권을 가졌던 영토. 검은 점들 : 당시 유럽과 아프리카 정복지의 주요 도시들. |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의 소유자. 유럽의 대격변기를 보냈던, 나폴레옹 이전까지 중근세 유럽 최강의 패자, 제왕이었다.
네이버캐스트도 올라왔다. 요약된 감이 있지만 소소한 에피소드들도 있다.
목차
1 개요
부모와 조상의 후광으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못잖게 가히 세계 역사상의 행운아금수저라 할 만하다. 그것도 사마염처럼 무능한 암군도 아니고 오히려 그 가문빨을 바탕으로 신롬 최고 전성기를 이끈 엄청난 인물이다. 어머니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후아나 공주, 아버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후계자이자 부르고뉴 공국의 대공이었던 펠리페 1세[5]다. 이렇듯 양친 모두 왕가 이상급의 혈통이라서 고귀하다고 여겨졌다.
유럽의 대혼란기에 동서의 강국인 오스만 제국, 프랑스 등과 전쟁을 치뤄내며 매치락을 활용한 혁신적 전술 도입으로 전 유럽을 경악시킨 인물로, 종교개혁으로 인한 가톨릭의 대위기 당시 끝까지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않아, 지금까지도 가톨릭이 유럽에 건재하고 나아가 스페인의 국력으로 동아시아까지 가톨릭을 퍼뜨리도록 이바지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재위 중 행한 일들과 치적이 많고 직함도 화려하지만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군주. 그럼에도 워낙 유럽 역사상 중대 전환점의 핵심에 선 인물이라 이 사람을 빼놓고서는 중세-근대의 격변기를 설명할 수 없다. 카를이 재위한 약 40년간은 그야말로 유럽사 일대 파란기에 해당한다. 바다를 통해 세계를 빙 도는 해로가 속속 개척되었고, 종교개혁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으며, 르네상스가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에 확산되고 있었다. 동쪽의 오스만 제국은 동유럽을 석권한 술레이만 1세가 중부 유럽을 향해 손길을 뻗어오는 최전성기였고,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은 아즈텍과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거침없이 중남아메리카를 석권해 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격변의 시기, 카를 5세는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부르고뉴, 이탈리아, 그리고 신대륙 개척지 및 필리핀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지배하는 동시에 이웃 프랑스조차 힘으로 누른 명실공히 유럽 최대의 맹주였다. 훗날 대영제국이 표방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원조인 셈[6].
그 존재만으로 스페인의 통일을 공고히 다졌으며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통치[7]를 받게 하고 나아가 네덜란드와 벨기에 분단의 단초를 제공한 결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운으로든 실력으로든 여러모로 비범하다. 합스부르크 출신으로 이렇게 잘 나간 황제는 역사상 전무후무했다.
영지에 따라서 칭호는 카럴 1세(플란더런, 네덜란드), 카를로스 1세(카스티야-레온), 카를레스 1세(아라곤-시칠리아)[8], 카를로 4세(나폴리), 카를 1세(오스트리아), 샤를 2세(부르고뉴) 등등 저마다 제각각이지만, 모든 영지 중 신성 로마 제국이 가장 대표성을 띄기에 보편적으로는 카를 5세로 불리며 본 항목에서도 여기에 맞춰 서술한다.
2 그의 타이틀
카를이 보유했던 공식 타이틀은 아래와 같다.
Charles, by the grace of God elected Holy Roman Emperor, forever August, King in Germany, King of Italy, Castile, Aragon, Leon, both Sicilies, Jerusalem, Navarra, Grenada, Toledo, Valencia, Galicia, Majorca, Sevilla, Sardinia, Cordova, Corsica, Murcia, Jaen, the Algarves, Algeciras, Gibraltar, the Canary Islands, the Western and Eastern Indies, the Islands and Mainland of the Ocean Sea, etc. etc. Archduke of Austria, Duke of Burgundy, Brabant, Lorraine, Styria, Carinthia, Carniola, Limburg, Luxembourg, Gelderland, Athens, Neopatria, Württemberg, Landgrave of Alsace, Prince of Swabia, Asturia and Catalonia, Count of Flanders, Habsburg, Tyrol, Gorizia, Barcelona, Artois, Burgundy Palatine, Hainaut, Holland, Seeland, Ferrette, Kyburg, Namur, Roussillon, Cerdagne, Zutphen, Margrave of the Holy Roman Empire, Burgau, Oristano and Gociano, Lord of Frisia, the Wendish March, Pordenone, Biscay, Molin, Salins, Tripoli and Mechelen, etc. etc. 카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임명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독일의 왕, 이탈리아의 왕,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시칠리아 열도, 예루살렘, 나바라, 그라나다, 톨레도, 발렌시아, 갈리시아, 마요르카, 세비야, 사르데냐, 코르도바, 코르시카, 무르시아, 하엔, 알가르베, 알헤시라스, 지브롤터, 카나리아, 서인도와 동인도, 섬들과 대양의 메인랜드의 왕, 기타 등등등. 오스트리아의 대공, 부르고뉴, 브라방, 로트링엔, 슈타이어마르크, 캐른텐, 크라인, 림부르크, 룩셈부르크, 겔데른, 아테네, 네오파트리아, 뷔르템베르크의 공작,슈바벤, 아스투리아와 카탈루니아의 공[9], 알자스의 백작[10] 플랑드르, 합스부르크, 티롤, 고리치아, 바르셀로나, 아르투와, 부르고뉴[11], 에노, 홀란드, 제일란트, 페레테, 키부르크, 나무르, 로씨용, 세르다뉴, 저트펀의 백작, 부르가우, 오르시타노와 고르치아노의 신성로마제국의 후작, 프리지아, 벤디세 마르크, 포르데노네, 바스크, 몰린, 살랭, 트리폴리, 메헬렌의 군주, 기타 등등등.[12] |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 어마어마한 타이틀과 어마어마한 문장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문장과 타이틀 목록 | |||
문장 | 타이틀 | 즉위 | 퇴위 |
세르다뉴 백작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8년 10월 25일 | |
브라반트 공작 카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림부르크 공작 카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로트링엔 공작 카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나무르 후작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아르투아 백작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에노 백작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제일란트 백작 카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부르고뉴 궁중백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6년 2월 5일 | |
부르고뉴 공작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6년 1월 16일 | |
홀란드 백작 샤를 2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룩셈부르크 공작 카를 3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플랑드르 백작 샤를 3세 | 1506년 9월 25일 | 1555년 10월 25일 | |
겔데른 공작 카를 3세 | 1543년 9월 12일 | 1555년 10월 25일 | |
저트펀 백작 카를 2세 | 1543년 9월 12일 | 1555년 10월 25일 | |
카스티야,레온의 왕 카를로스 1세 | 1516년 3월 24일 | 1556년 1월 16일 | |
아라곤,시칠리아의 왕 카를레스 1세 | 1516년 3월 24일 | 1556년 1월 16일 | |
바르셀로나 백작 카를레스 1세 | 1516년 3월 24일 | 1556년 1월 16일 | |
나폴리 왕 카를로 4세 | 1516년 3월 24일 | 1554년 7월 25일 | |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1세 | 1519년 1월 12일 | 1521년 1월 12일 | |
로마 왕 카를 5세 | 1519년 6월 28일 | 1530년 2월 24일 |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 1530년 2월 24일 | 1558년 2월 24일 |
위의 표를 보면 알겠지만 그의 이름은 다양하게 발음되었다. 이 중 가장 대중적인 명칭이 카를 5세와 카를로스 1세인데, 한국에선 황제로서의 직함 쪽이 부각되었는지 주로 그를 카를 5세(Karl V)라고 부른다.
3 스페인 왕위 등극
카를은 카스티야 왕국과 부르고뉴의 후계자였기에, 외조부 페르난도 2세에 의해 유페당한 어머니와 여동생과 달리 부친이 살던 플랑드르(현 벨기에 헨트(Ghent)의 풍족한 환경에서 부족함 없는 소년기를 누렸다. 국제적 상업도시 헨트에서 출생했는데 모국어는 프랑스어였다.[13] 플랑드르어(네덜란드어의 전신)와 프랑스어를 비롯, 이탈리아어와 독일어, 스페인어에 이르기까지 무려 5개 국어를 익혀 구사했다. 그는 "나는 하느님께는 스페인어로, 여자에겐 이탈리아어로, 남자에겐 프랑스어로, 그리고 내 애마에게는 독일어로 말한다"는 엄친아스런 명대사를 남기기도 했다. 독일어 지못미 다만 실제로 스페인어와 독일어 쪽은 그리 유창하지는 못했다고 한다독일어를 못하는 오스트리아인[14]. 그리고 프랑스빠였기 때문에 그러나 그와 별개로 프랑스는 아주 처절하게 박살냈다(...) 파리에도 자주 다녀갔는데, 깊은 감명을 느꼈는지 "파리는 도시가 아니라 우주다(Lutetia non urbs, sed orbis)"라는 파리지앵스러운 말을 남기기도 했다[15]. 그의 또 다른 명언으로는 저 넘어 더 멀리(PLVS VLTRA)가 있는데 이는 국경과 민족을 허물고자 했던 글로벌리즘적 성향이 잘 드러난다.
카를은 해당 영지는 물론 언젠가 신성 로마 제국을 이어받을 유력 후계자로 점찍어져 일찍이 제왕학 수업을 받았다. 그의 가정교사인 아드리안은 나중에 하드리아노 6세로서 교황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리고 아버지 펠리페가 급사하자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에 등극했다. 한동안은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테[16]가 섭정을 지냈고 1515년 15세가 되자 직접 통치에 들어갔다.
1516년 외조부 페르난도 2세마저 사망하자 스페인은 일종의 공위 시대를 맞는다. 카스티야 왕국의 후아나 여왕은 남편 사후 정신질환 증세가 심해졌는데다 약 10년 가랑 유폐까지 당해 있던 처지라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능력이 없었다. 플랑드르에서 외조부의 장례 명목으로 급거 귀국한 카를은 어머니의 왕위 승계와 함께 고베르나도르 장군으로 받들어졌다. 그는 이 때 탑에 유폐중이던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한편으로 카를의 부계 쪽에서는 그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고자 물심양면으로 공을 들이고 있었다. 할아버지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교황 레오 10세가 그를 지원하고 나섰고 고향인 플랑드르에서도 그를 후원했다. 왕좌를 노리는 세력가들은 많았지만, 카를 5세는 후아나의 장남으로 당시 16세였는데다 일찌감치 제왕학 수업을 받아서인지 나이에 비해 남다르게 기민한 수완을 보였다. 명분상으로도 그의 경쟁자는 없었다.
후아나 여왕을 대신해 섭정으로서 스페인을 통치하려던 프란시스코 추기경은 결국 물러났고, 카를은 1516년 어머니와 함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로서 공동 통치자로 인정받는다. 진정한 통일 스페인 최초의 왕조가 출발하는 순간이었다. 이 당시 그는 스페인이 아닌 고향에 체류중이었다.
4 스페인 통치
카를은 1517년 채비를 갖추고 스페인을 통치하기 위해 입국했다. 그 때까지 섭정을 유지하던 프란시스코 추기경은 새 왕을 맞으러 나가는 도중에 병사했다.
당시 아라곤의 경우 왕위는 남자만 계승권을 갖는 게 원칙이었다. 카를의 외조부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와의 동군연합 형성 과정에서 카스티야 여왕인 이사벨라 1세와 결혼해 '공동 통치자'가 되었고 따라서 이사벨라도 형식적이지만 아라곤 여왕을 겸직했다. 그리고 이사벨라가 죽은 후 10여년간은 딸 후아나가 이사벨라의 뒤를 이어 아버지 페르난도 2세의 '공동 통치자' 위치로서 아라곤 왕국의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2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 계승구도는 흔들리게 되었고, 공동 통치자라는 명분을 잃은데다 실권이 없던 후아나는 아라곤 왕국에서의 왕위를 잃을 위기에 놓여 통합 스페인은 다시 분열 국면에 처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말년의 페르난도가 재혼 상태에서도 아들을 얻지 못하자[17] 몇년 전부터 후아나의 아들이자 외손자인 카를에게 왕위를 물려줄 채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아라곤령의 지배권 확보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카스티야 왕국의 경우,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도 후아나는 정당하게 계승한 국왕이기에, 공동 통치자 형태라도 그녀가 공식적으로 양위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들인 카를이 스페인 국왕이 된다는 것은 현지인들의 반감을 살 수 있었다. 바야돌리드의 카스티야 왕국 의회에는 이 문제를 들어 그의 왕위 승계를 계류시켰다. 하지만 결국 의회는 결국 카를 5세가 '카스티야어를 배우고, 외국인을 국정에 끌어들이지 않으며, 카스티야의 문화재를 보존하고, 어머니를 존중한다'는 조건 하에 공동 통치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가 신성 로마 제국 제위까지 차지함으로써 발생한 전비 지출 문제로 인해 부분적인 저항은 이후로도 이어졌고, 결국 그는 어머니 후아나가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을 완전히 통치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어렵게 카를이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스페인 국민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그가 프랑스와의 전쟁 과정에서 별 관련이 없는 스페인에 큰 과세를 부과했고, 고향의 플랑드르인에게 여러 이권을 나눠준 것에 거부감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곧장 납세 거부 운동이 일어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족 계층인 콤네로스의 반란이 터졌다. 그 뒤에는 카를이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투표를 위해 잠시 스페인을 비운 틈을 타 톨레도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궁정 귀족들은 처음에 이들의 반란을 어느 정도 방조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그러나 반란이 예상보다 급진적 기류로 흘러가자 군대를 편성해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때 마침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어 귀국한 카를 역시 진압을 주도했다. 1521년 4월 비야리르 전투에서 반군 주력이 궤멸당했고 1522년에는 단호한 본보기 조치로 반군을 뿌리뽑아 통해 질서를 바로잡았다. 그럼에도 잔여 반군 세력들은 무려 10년을 버텼다. 이후 스페인은 신성 로마 제국과 갈라설 때까지 찍소리 못하고 합스부르크를 위해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이사벨라)
1527년에는 포르투갈 국왕인 마누엘 1세의 딸이며 카를에겐 이종사촌이 되는 이사벨라 공주와 결혼, 사실상 포르투갈을 영향권에 끌어들였다. 이는 훗날 아들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까지 합방하여 통치하는 명분적 배경이 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펠리페 2세 시절의 치적 중 상당수도 이미 그의 부왕이 결혼동맹으로 예비한 덕이 컸다.
이사벨라는 합스부르크 황가에서도 손에 꼽는 미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카를과 이사벨라는 카를의 부모에 비하면 금슬도 좋은 편인지라, 사별하는 날까지 트러블이 없었다. 그녀는 36세(카를의 나이 39세) 때 산후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이에 카를은 사별한 어미 몫까지 부성애로 챙겨주고자 했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애착이 컸다고 한다.
황후가 죽은 후 카를은 더 이상 후처를 들이지 않고 여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이는 당대 황제치고는 이례적인 일이다. 다만 아버지처럼 바람기 기질도 다분했던지, 그와 염문이 돌았던 애인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생긴 사생아로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대함대를 쳐부순 명장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과 아들 펠리페 2세가 플랑드르의 총독을 맡긴 파르마의 마르가레타[18] 등이 있다.
5 아메리카를 포함한 해외 식민지 정복
본국의 사정과는 별개로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사업은 쾌조로 이루어져 1520년 아즈텍을 무너뜨렸다.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 역시 1530년대 초반에 스페인에게 함락되었고, 정복자들은 몰락한 제국의 옛 수도 대신 연안에 신도시 리마를 건설해 남아메리카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19]. 그러나 카를은 식민지에서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하던 콩키스타도르들을 우대할 의향이 별로 없었다.
카를은 아즈텍을 멸망시켜 멕시코를 건설한 성과를 거둔 에르난 코르테스조차도 파면했으며, 곧 다시 복직시키긴 했지만 행정권을 박탈했고 이후 1540년 영지를 떠나 고국에 돌아온 코르테스를 줄곧 냉대했다[20]. 아메리카에선 무소불위의 정복자 대접을 받았어도 유럽의 왕좌를 석권한 먼치킨적 왕에게 항명할 능력이 없던 코르테스는 실의에 젖어 살다 북아프리카 공략에 진력했고 1547년 쓸쓸하게 죽었다.
카를은 기존 콩키스타도르들의 자리를 자신이 임명한 총독으로 속속 교체했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마구 넘어오는 금과 은으로 가격 혁명이 일어났고 동방과의 교역도 순조로워 스페인은 순식간에 유럽 제일가는 부국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포르투갈과의 사라고사 조약을 통해 1529년 필리핀도 손에 넣었다. 필리핀은 1521년 마젤란이 발견하고 원주민에게 살해당한 후 포르투갈이 영유중인 섬이었다. 본래는 그 전 세기의 토르데시야스 조약 때문에 아시아의 포르투갈령을 건드릴 수 없었지만 이 조약을 거쳐 중국 가까이에 발을 걸치게 됐다. 대신 몰루카 제도를 포르투갈에게 양도했으나 위약금까지 챙겨 결과적으로 훨씬 남는 장사였다. 필리핀은 스페인의 아시아 진출 거점이 되어 명나라와도 교역을 트게 된 것이다. 이 때 신대륙의 무진장한 은이 중국으로 흘러갔다. 다만 필리핀 자체의 개발은 비교적 늦어, 1565년에 가서야 본격적인 식민 지배가 시작된다. 이후 필리핀은 1898년까지 근 4세기에 걸쳐 스페인의 통치를 받는다.
6 신성로마제국 제위 등극
1519년 1월 21일 카를의 조부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했다. 곧 다음 황제를 선출하기 위해 제후들이 소집되었고, 계승 후보자로서 부르고뉴 공이자 스페인의 왕인 카를도 참가했다.
선거후보로는 교황 레오 10세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밀었으나 그가 거부했고, 헨리 8세는 출마를 고려만 하다 포기했다. 결국 과거 플랑드르 영지 문제로도 충돌을 빚은 바 있었고 훗날 일생의 라이벌이 될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경쟁하게 되었다. 프랑스로서는 마침내 신성 로마 제국에 발을 들이밀어 잘 나가는 스페인을 견제하고 유럽을 제패할 절호의 기회였다.
초반엔 프랑수아 1세가 유리했다. 교황 레오 10세의 의견대로 성직 선제후 3인(마인츠,쾰른,트리어)이 프랑수아 1세를 밀었고, 팔츠 선제후마저 프랑스에 기울었기 때문 그러나 수완 좋은 카를은 독일의 금융 거부인 푸거 가문[21](Fuggers)과 벨저 가문(Welsers)의 힘을 빌려 85만 두카트의 선거자금으로 30만두카트에 그친 프랑수아 1세를 제치고 선제후들을 매수에 성공, 만장일치로 당선된다.[22]
그리하여 1519년 6월 28일 선제후 회의에서 황제선거에 당선 되었다. 윗항목 작위 타이틀메들리는 위키디피아에서 퍼온것이긴 한데 오류가 있다. 14세기 카를 4세때부터 대립왕 예방을 위해 선제후 선거로만 황제 선출이 확정 되기 때문에 교황의 승인이 필요 없었고,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때부터 황제 대관을 받는것과 상관없이 황제 칭호를 썼으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23] 중세시기와 달리 막시밀리안 시대부터 황제들은 선제후 선거에서 선출되면 선출된 로마 황제 칭호 썼기 때문이다.[24] 굳이 로마왕 기간을 나누자면 1520년 10월 23일 아헨에서 쾰른 대주교에게 대관식을 받기전의 짧은 기간이 될 뿐이다.
1530년 2월 24일 교황에게 다시 로마황제 대관을 받았지만 이것은 2차례에 걸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프랑스편을 든 교황을 거의 포로로 잡다시피해서 누워서 절받기 수준이었고 큰 의미는 없다. 카를 5세 이후의 황제들은 레오폴트 1세 카를 7세와 프란츠 1세를 제외하면 선임황제가 죽기 전 로마왕으로 선출되고 사망하면 바로 황제로 즉위했다. 역시 교황의 허락이나 대관식은 전혀 필요없이.
참고로 황제선거시 여러 공약을 내걸었지만 거의 지키지 않았다. 외국군대 주둔이라던지 제국통치 평의회라든지 제후들의 자주권은 대관식때 다시 지키겠다고 재차 선언했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완고해졌고 결국 슈말칼덴 전쟁에서 이기고도 제후들의 반발 때문에 초라하게 은퇴 할수 밖에 없었다.
7 이탈리아 정복과 대프랑스 전쟁
엘 그레코가 그린 판화. 카를 5세가 중앙 옥좌에 올라앉아 자신이 예전에 군사를 이끌고 패퇴시킨 정적들을 조소하는 그림인데, 그의 주위 인물들은 왼쪽부터 순서대로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1세, 교황 클레멘스 7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클레베 공 빌헬름, 작센 공 요한, 헤센 공 필리프이다. 하나같이 카를 5세에게 깨진 적들의 수준이 장난이 아니다(...)
1520년 약관의 나이에 선제후로 선출되어 부르고뉴, 스페인(+식민지 아메리카와 북아프리카일부), 독일을 지배하게 된 카를의 다음 관심사는 이탈리아였다.
이에 그렇잖아도 선대 막시밀리안 1세 때부터 제국과 앙금이 있었던데다 선제후 선거에서 카를에게 패배하여 앙심이 있던 콩라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당시 지중해에서 마지막 끗발을 부리던 베네치아와 손잡고 공동 대항 전선을 폈다. 이탈리아를 둘러싼 전쟁은 1521년부터 시작되었고, 카를은 스페인 본국의 내전과 프랑스와의 전쟁 모두를 신경쓰게 되었다. 이에 카를은 친분이 있던 교황 및 프랑스에 반감이 있던 영국을 우군으로 끌어들였다.
국면 전환은 1525년의 파비아 전투였다. 여기서 대승을 거둔 카를은 밀라노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심지어 국왕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기사왕으로 불리던 프랑수아 1세는 감옥 안에서 옥살이를 하면 했지 영지만은 내줄 수 없다며 1년 가까이 버텼지만 결국 막대한 배상금 지불 및 전 이탈리아랑 부르군디를 넘기겠다는 굴욕적인 마드리드 조약에 조인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게 결국 이탈리아 북부마저 카를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나 프랑스는 곧 조약을 파기하고 복수하겠다며 다시 투쟁에 돌입했다. 카를의 힘이 지나치게 막강해지자 위협을 느낀 영국의 헨리 8세도 NTR 프랑스 쪽으로 기울었으며, 1523년 카를과 친분이 돈독하던 교황 레오 10세의 선종 후 하드리아노 6세(카를 5세의 가정교사 출신)를 거쳐 교황에 오른 클레멘스 7세는[25] 교황보다 막강한 카를의 권력에 반감이 있었다. 이들의 이해가 일치해 카를에게 대항하는 코냑 동맹이 결성되었다.
1527년 두번째 전쟁에서 카를은 적대자들에게 본때를 보였다. 로마가 황제의 군대에 짓밟히고 교황은 산탄젤로에 피신하여 7개월간 사실상 구금당했다. 쓴 맛을 본 교황도 결국 황제의 영향권에 포섭되었다.
같은 해,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교황에게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때 영국은 스페인을 배신하고 프랑스가 결성한 코냑 동맹에 참가한 상태였고, 캐서린은 카를의 이모이기 때문에 카를은 크게 분노해 불허하도록 교황청에 압박을 가했다. 그 결과 영국은 끝내 교황에게 등을 돌리고 국교로 성공회를 내세운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혼 때문에 고생해야 했던 메리 공주는 여러차례 도움을 준 사촌 오빠 카를을 아버지처럼 의지하게 되며, 나중에 왕으로 즉위한 후 카를의 아들 펠리페 2세와 결혼해 영국은 다시 국교를 가톨릭으로 바꿨다. 이게 다 유럽의 패권자인 카를이 알게 모르게 끼친 영향(…). 메리 1세의 뒤를 이은 메리의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훗날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를 격파했으니, 실로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할 수 있다.
1529년 카를의 고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테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모후 사이에 비밀 교섭이 성사되어 부르고뉴와 밀라노, 나폴리가 맞교환되는 캉브레 조약을 통해 가까스로 전쟁은 수습되었다. 역사적으로 꾸준히 독립된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부르고뉴는 이 때 비로소 프랑스령으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프랑수아 1세는 불리한 조건에서 진행된 이 조약에 승인하고서야 볼모로 잡혀간 아들들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장남은 오래지 않아 사망했는데, 이 때 프랑스 전체가 비탄에 잠겼고 심지어 카를 5세가 은밀히 독살했다는 음모론까지 파다했다고 한다.
1536년에는 카를 5세가 먼저 선수를 쳐 로마에서 선전포고를 한 후 프랑스의 프로방스를 침공했다. 전황 자체는 유리하게 돌아갔지만 프랑스군이 워낙 강하다보니 프로방스를 점령도 못해서 작전 경과가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게다가 북쪽 플랑드르에서 봉기 조짐이 있어 양국은 전쟁 2년만에 교황 중재로 강화 협상에 들어갔다.
1542년 다시 전쟁이 터졌다. 밀라노 공작이 직계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사망하자 카를은 자신의 어린 아들인 펠리페(훗날의 펠리페 2세)를 그 자리에 앉혔다. 프랑스는 즉각 이것을 구실로 재차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자존심을 접고 오스만과 손을 잡아 니스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이에 발끈한 카를 5세는 영국과 다시 손을 잡고 직접 전선에 뛰어들어 프랑스 북부를 공략하고 밀라노 역시 사수했다. 다만 사보이는 내줘야 했다. 전쟁은 크레피 강화를 통해 3년만에 종식되었다.
이후 긴 시간 프랑스와의 국경 문제는 안정국면에 접어들었으나, 1547년 작센 선제후에 등극한 모리츠가 황제를 배신하면서 새로운 국면이 발생했다. 본래 모리츠는 카를 5세의 동생인 로마왕 페르디난트 1세와 친선관계였으며 자신과 6촌인 요한 프리드리히로부터 작센 선제후의 자리를 강탈한 것 역시 신교도 이면서 황제중심 구교도 동맹에 가담한 점을 고려하여 특별히 하사된 지위였다. 그러나 모리츠는 내심 검은 속내를 숨기고 있었다. 마침 황제와 맞서던 헤센 방백 필리프 1세가 황제에게 패배해 포로 신세가 되자, 신교도이면서 구교도 동맹에 가담했기 때문에 영지 대다수를 차지한 신교도 주민들의 노골적인 불만으로 통치가 어려워졌고, 신교도 제후에 몰수한 영지 배분문제와 장인어른인 헤센의 필리프를 관대하게 처분한다는 황제의 약속도 카를 5세가 스스로 무시했기 때문에 모리츠는 이번엔 황제를 상대로 칼을 갈게된다. 결국 프랑스의 자금 지원을 받아서 일시적 패망했던 신교도 세력을 거의 복구했고, 모리츠는 다시 신교도 동맹에 가담하여 황제를 공격한다.
이 때 카를의 맞수였던 프랑수아 1세는 이미 사망하고, 평생 화병에 시달리다 죽은 부왕의 복수를 다짐하며 절치부심중인 아들 앙리 2세가 프랑스 왕좌에 있었다. 1551년, 모리츠는 앙리 2세에게 손을 내밀어 원교근공의 전략으로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 또한 브란덴부르크의 제후 알키비아데스 역시 모리츠와 마찬가지로 앙리 2세에게 가담했다.
이리하여 이탈리아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마지막 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에서 앙리 2세는 독일의 내분 국면을 교묘히 활용해 다른 독일 제후들도 교사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부추겼다. 때를 맞춰 제국의 서쪽이자 프랑스의 동쪽 국경인 로렌에서도 교전이 있었다. 1552년 앙리 2세는 프랑스-독일 접경 지역인 로렌을 대규모로 침공했고, 앙리 2세에게 붙은 모리츠는 병력을 모아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에 웅거하던 황제를 비밀리에 급습했다. 계략에 당한 카를 5세는 인스부르크에서 하마터면 포로로 잡힐 뻔하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카를 5세는 보복전을 위해 병력을 증강했지만, 그 와중에 먼저 동생인 페르디난트가 내전보다는 프랑스군 격퇴가 우선이라 판단하고 모리츠와 교섭해 신교도의 권익을 존중하는 파사우 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황제 측과 또 다시 동맹관계로 돌아선 모리츠는 이번에는 자기와 같이 앙리 2세 편에 붙었던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의 알키비아데스와 영지문제로 대립하다 지버하우젠 전투에서 총에 맞아 전사했다.
이러한 서쪽 국경에서의 비보와 달리 남쪽 이탈리아 전선에서 카를 5세는 계속 선전했다. 이후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2세기에 걸쳐 합스부르크 치하로 편입되었다. 반면 프랑스의 앙리 2세는 결국 부왕의 한을 설욕하는데 실패하고 1559년 스페인과 카토-캉브레지 평화 협정을 맺었으며, 같은 해 궁정에서 마창시합 도중 사고로 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직후 프랑스는 자신들이 독일을 분열시킨 것 이상으로 격심한 분열 국면에 빠져들어 위그노 전쟁의 내전이 발생한다.
8 카를 5세와 종교개혁
세계사에 있어 이상의 내용보다도 더 카를 5세가 자주 언급되는 것이 종교개혁과 관련된 부분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을 시작으로 가톨릭에 반하는 움직임이 전유럽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급물살의 한복판에 카를 5세가 있었다.
카를 5세는 가톨릭 개혁파에 해당하는 하드리아노스 신부에게 교육을 받았기에 교회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었다. 교황청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신교도를 억압한것은 제국내 분열의 우려 때문. 1521년 개최한 보름스 회의도 루터를 소환해 취소 할 기회를 주려는 호의에서 비롯되었지만 루터는 황제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를 그 자리에서 붙잡아 죽이자고 여론을 조성했지만 카를 5세는 당초 약속대로 책임지고 루터의 신변을 보호하여 돌려보내 주었다[26]. 그러나 당초 제국추방령 남발자제와 적법절차에 따른 공소권 없이는 제국추방령을 내리지 않겠다는 황제즉위 약속과 달리 400여명의 제국 의회 의원들의 대부분 뜻과 상관없이 이단 명목으로 루터와 루터 추종자들에게 제국추방령을 내린다. 당연히 신교도 제후들은 쌩깠고 오히려 제국의 분열이 촉진 되었다.[27] 1521년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카를 5세가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곧 레오 10세가 사망했기 때문에 일단 문제는 흐지부지 되었다.
로마에선 1521년 12월 레오 10세가 죽고 콘클라베는 스포르차 추기경과 훗날 클레멘스 7세[28]인 메디치 추기경의 표가 비슷하여 수십일간 교황선출이 무산되자 카를 5세는 자신의 스승 하드리아누스의 추천장을 보내자 타협으로 그가 교황 하드리아노 6세로 선출 되었다.
하드리아노 6세는 가톨릭 교회의 개혁파로 루터의 교리는 단호히 반대했지만 종교개혁의 명분인 가톨릭 교회의 타락에 대해선 교회가 죄를 지었다며 강한 개혁 의지를 드러냈었다. 이는 이탈리아인들에게서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고, 20개월의 기간중 로마에서 통치는 겨우 1년이 조금 넘는데다가 거의 왕따를 당했기 때문에[29] 평화적으로 종교개혁이 마무리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카를 5세가 독일을 비울 동안 페르디난트가 대신 제국통치평의회 의장 역을 맡아서 실질적으로 제국을 통치 했는데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이 높아지자 1526년 1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1521년 내려진 루터파 제국추방령을 유보한다. 그러다가 이탈리아에서 프랑수아 1세를 연신 처바르고 1529년 다시 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제국추방령 유보를 번복하자 5개의 신교도제후와 14개 제국도시들이 항의(Protest)[30]를 하고 다시 종교전쟁의 기운이 높아졌다. 이때 루터는 그동안 자신의 신학 이론에 따라 신교도 제후들에게 황제에 순종할 것을 권고했는데, 1530년에야 "독일에 더이상 지도자가 없다"며 황제에 대해 깊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한편으로는 1530년을 전후해 스위스에서도 종교를 둘러싼 본격적인 내전이 터졌다. 스위스의 가톨릭파는 자존심을 접고 오스트리아에 손을 내밀었고, 카를 5세는 기꺼이 병력을 지원했다. 그 결과 카펠 전투에서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스위스 개신교군은 압도적 열세로 패전하고 츠빙글리 본인도 전사했다. 이후 10년여에 걸쳐 스위스는 다시 가톨릭이 장악한다.
1530년 프랑스를 두번이나 까부수고 그의 동맹 클레멘스도 포로로 잡혀서 로마 땅밟기도 시전하고 볼로냐에서 황제 대관식까지 치뤘지만 다시 신교도를 본격 탄압할 순 없었다. 동생 페르디난트의 로마왕(차기 황제) 선출을 위해 신교도 제후들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선제후 7명중 가톨릭 성직자가 3인이고 개신교 선제후는 작센 선제후 하나였지만[31] 황제 선거시 공약과 대관식때 세습은 포기한다고 선언해 놨기 때문에 선제후 선거시까진 일단 조용히 치뤄야 했다. 같은 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회의가 열려 제국의 종교 일원화를 토의가 시작되어 루터파의 일부 양보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제출[32]되었으나 양측 강경파 때문에 공전으로 흘렀고 의회에서 가톨릭이 다수파라 결국 채택되진 못했다. 이에 루터파는 매우 실망했고 남은 건 실력대결 밖에 남지 않았다. 신교도 제후들과 도시들은 슈말칼덴 동맹, 가톨릭 제후들은 안할트 동맹을 맺어 서로 적대시 하게 된다.
1534년 종교개혁의 회오리 속에서 황제에게 치이고 개신교에게도 치이던(...) 교황 클레멘스 7세도 선종했다. 새 교황 바오로 3세는 종교개혁에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덕분에 교황령은 격렬한 저항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교황은 시간이 지나면서 보수화하여 후에 적극적인 이단 심문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 때 예수회가 조직되어 스페인의 국력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 가톨릭을 전파한다[33].
1539년 카를의 고향인 겐트에서 반 스페인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자신의 고향까지 반발하는 것은 상징성 면에서도 묵과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다. 폭동은 순식간에 진압했고 13명의 주동자가 본보기로 처형되었으며 새로 요새를 구축했다. 이후 한동안 플랑드르의 소요는 멎게 되었다.
1541년 카를 황제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신교도 제후중의 양대축중 하나인 헤센방백 필리프 1세가 1532년 카롤리나 법전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두 번째 장가 (중혼)를 가고 싶어한 것... 루터와 루터파에선 1539년 이혼보단 중혼이 낫다며 인정해주는 흑역사를 쓰며 잡으려고 했지만 뒤가 매우 찜찜했던 필리프는 카를 황제에게 면책 당하는 조건으로 신교도 동맹에서 쑥 빠져버린다.
1542년 카를 5세는 프랑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교황청과 관계를 강화하고 종교개혁 논리에 방어하기위해 트렌토에서 공의회 소집을 요청한다. [34] 영국의 헨리 8세와 손을 잡고[35] 프랑스로 쳐들어 갈 계획까지 세웠다. 프랑스가 신교도 제후들에게 바람질 해대면서 제국의 분란을 조장했기 때문.
황제는 1544년 제국 회의에서 일부 신교도 제후들의 양보와 분열로 지원을 얻었고 프랑스와 일전을 치뤄서 재차 굴복시켰으며 크레피 조약을 맺어서 마무리 했다.[36] 1545년 터키와 강화 하는데 성공했고 이제 독일 신교도에게만 화력을 모을 수 있었다.
마침 1546년 마르틴 루터도 죽고 프랑수아 1세도 죽고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동안 유화적이던 태도를 버리고 제국 통합을 방해하는 신교도 제후들은 이단 척결 명목으로 제국 추방령을 내리고 역적의 수괴 작센 선제후[37]는 궐석 재판서 사형을 선고했다.
전쟁중 작센-마이센 공 모리츠[38]는 신교도면서도 전쟁에 중립을 지키고 있었는데 선제후 자리를 주마 하고 꼬셔서 배신을 유도했고 차마 카를과 동맹은 직접 맺지 못하고 황제의 동생 페르디난트와 동맹을 맺는다.
1547년 4월 카를은 스페인 군대 4만 명과 네덜란드 군대 1만7천 병력을 포함한 5만 7천의 병력을 이끌고[39] 나가 뮐베르크에서 전황을 가름할 대승을 거뒀다. 강력한 제후인 작센 공 요한 프리드리히를 격파하고 비텐베르크에 입성했다. 황제는 관대하게(?) 사형을 취소하고 직접 항복문서의 서명을 받고, 영토 할양과 선제후직을 박탈하는 정도로 마무리 했다.[40] 다시 신교도 동맹으로 돌아갔던 헤센의 필리프는 자진출두해서 나란히 수감된다.
카를 5세는 군사적인 정복은 마무리했고, 트렌트에서 공의회가 미적거렸기에 자신의 구상대로 교리적 통합해서 1548년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새로운 교리를 제출하고 강요했다. 교황이 되고 싶으셨나보다 대충 가톨릭 기존 교리에 성체성사에 평신도 포도주 허용, 사제의 결혼 허용 정도를 양념 친 것인데 이런 결정은 의미가 없는게 그 결과 대립이 소강국면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가톨릭도 개신교도 공존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교도에서는 이정도로 만족치 않았으며 가톨릭교회에서도 교리 타협은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가톨릭 제후인 바이에른 공작마저 회의적으로 바라봤다) 강력한 황제권으로도 신앙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1548년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명령에는 어쨌든 신교도 제후들이 패망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신교도 지역에서 굴복했지만 한곳에서는 죽어라고 거절했다. 북독일의 마그데부르크였다... 황제는 마이센의 유다에게 마그데부르크 토벌을 명령하는데 이것이 치명적인 패착이 되었다.
마이센의 유다 모리츠는 한번 더 배신을 때렸다. 이번엔 거꾸로 황제에게 프랑스의 새로운 왕 앙리 2세는 프랑스어권 메츠, 툴, 베르됭을 제국에서 분리하려고 독일 신교도 제후들을 한번 더 지원했다. 모리츠는 남아있는 신교도 제후들을 모아서 병력을 모았고 은밀히 황제가 있던 인스부르크를 급습하였고 황제는 도피하고 근처 트렌트의 공의회도 중단하고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모리츠는 헤센의 필리프의 사위였는데 필리프를 풀어준다는 약속을 황제가 씹고 5년이나 수감하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황제가 마그데부르크를 탈환하면 자기 주기로 했다가 씹히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가문 방계 듣보잡에게 돌려줘서 빡쳤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황제의 패착은 또 하나 있었는데 30년동안 자신을 대리해서 다스리던 동생 페르디난트 1세를 제치고 자기 아들 펠리페에게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영토 일부를 떼서 물려주려고 시도했고 이는 가톨릭제후들 마저 반발하게 된다. 결국 마이센의 모리츠에게 털리는데도 소닭 보듯 불구경했고 카를 황제는 독일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 오지 않았다. 세상사에 지친 카를은 1556년 10월 퇴위를 선언했다. 그 와중에 페르디난트는 1552년 모리츠와 황제의 상의 없이 단독으로 강화했고 1555년 신교도 제후들의 영지 내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아우크스부르크 합의에 서명했다. 1558년 3월 황제의 퇴위는 선제후 회의에서 가결 되었고 새 황제는 신교도에 진짜로 유화적인 동생 페르디난트가 이어나간다.
카를은 중년까지 종교개혁 문제로 매우 골머리를 앓았으나 자신은 끝까지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지켰다. 만약 그가 개종했다면 유럽과 스페인 식민지에서는 훨씬 빠른 속도로 개신교가 득세했을 것이다. 종교 문제는 그로부터 1세기 후 30년전쟁이 끝나고서야 겨우 일단락되었다.
9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카를 5세의 치세에 오스만 제국은 술레이만 1세의 최전성기였다. 서유럽 최강국과 동방 대제국간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카를 5세가 프랑스와의 전쟁과 반란 수습, 종교 갈등으로 늘 분주한 와중에, 술레이만 1세는 뒤에서 동유럽을 야금야금 잡아먹고 있었다. 오스만군이 발칸반도를 장악한지 얼마 되지 않아 1526년 중부 유럽의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가 결정적으로 패배해 왕이 죽고 나라가 무너졌다. 오스만은 이제 신성 로마 제국과 바로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헝가리 왕실의 정통성은 훗날 카를 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차지했지만 헝가리 영토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에 편입당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의 중핵인 빈은 오스만군의 바로 코 앞에 있었다. 술레이만 1세는 12만의 대군으로 1529년 최초로 빈 포위를 시도했으나 형 카를로부터 오스트리아를 할당받은 페르디난트 1세의 결사적인 수성으로 겨우 격퇴에 성공했다.
1532년 카를 5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뉘른베르크 칙령을 내려 개신교의 환심을 샀다. 그만큼 오스만군이 입힌 후유증은 대단했다. 이 해 그는 결전을 벌일 태세로 친히 8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해 이끌고 빈에 진주했으며, 마침 오스만 측도 술레이만 1세 본인이 다시 헝가리로 직접 나서 임전태세로 대치하고 있었다. 사실상 황제의 최종 교전 승인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스페인에서 불온한 기미가 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카를은 지휘권을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넘긴 채 스페인으로 귀국했다. 이후 술레이만 1세 또한 겨울을 지탱하기 힘들다고 판단해 군을 철수시켜 2차 교전은 무산되었다.
이 때문에 슐레이만 1세는 유럽 장악의 목전에서 좌절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영민한 그는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가 대립하는 정세를 읽고 그것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그는 카를 5세의 숙적인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체결하고 1535년 지중해의 합스부르크 식민지를 겨냥해 함대를 보냈다[41]. 스페인의 북아프리카 거점 튀니지에서 교전이 벌어졌으나 이번에도 카를 5세는 오스만군을 격퇴하여 승리했다. 그 결과 튀니스와 할크알와디가 스페인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튀니지는 반세기 뒤인 1574년까지도 계속 스페인령으로 남을 수 있었다.
카를 5세는 승전에도 불구하고 동방으로부터의 위협이 예사롭지 않음을 실감했다. 실제로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은 교황과 베네치아가 주축이 된 신성동맹 함대를 물리치고 다시 지중해 패권을 장악했다. 카를 5세는 날로 강성해지는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고자 1538년 적국인 베네치아와도 연합했다. 뒤에 술레이만 1세와 휴전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간신히 오스만 제국과의 세력 균형이 이뤄졌고, 이는 1683년 2차 빈 포위까지 1세기 이상 불안하게 지속되었다[42].
어째서인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사는 이런 아버지보다도 아들인 펠리페 2세가 더 유명하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투입해 오스만 제국에게 대승을 거둔 것 때문인데, 빈 포위전이 방어전이었다면 레판토 해전은 반격전의 성격이라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레판토 해전 당시 오스만 제국은 술레이만 1세의 아들 셀림 2세의 통치 아래에 있었는데 어찌 보면 세기의 대결 구도가 아들한테까지 물려받은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아들들이 아버지의 위업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펠리페 2세나 셀림 2세나 판박이일 것이다.
10 카롤리나 법전 공포
라이벌이자 '입법자'라는 별칭을 보유한 술레이만 1세와 마찬가지로, 카를 5세 역시 재위 초부터 법에 관심을 갖고 이를 정비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유럽 본토만 해도 서쪽으로는 스페인부터 동쪽으로는 오스트리아에 달하는 광대한 땅을 직접 경영하는 제국의 지배자로서,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532년, 마침내 역사적인 그 유명한 카롤리나 법전(Constitutio Criminalis Carolina)이 카를 5세에 의해 공포된다. '카롤리나' 법전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카를 5세의 적극적인 주도로 작업된 이 법전은 법 제도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로마법과 독일법을 망라한 통일법전으로서 무려 219개 조항을 담고 있었다. 현대 형법의 근본적인 기틀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법전의 중요한 의의는 개인의 복수권을 공권력에 위임한다는 형법의 근본 이념을 역사상 처음으로 함의했다는 점이다.
이 법전은 이후 나폴레옹 법전이 나타나기 전까지 3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법전으로 여겨졌으며, 또 신성 로마 제국이 18세기 초까지 3세기를 더 지탱하는 과정에서 치안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도움을 주었다. 이후의 형법은 사실상 이 법전을 개수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이 법의 위치를 크게 잡으면 안되는 것이 대륙법이 대륙법이라 불리게 된 이유를 만들어준 나폴레옹 법전이 있기 때문이다. 대륙법의 대표적인 예인, 체계적이기로 유명한 현대 독일법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법전도 나폴레옹 법전. 그러나 이 법도 나폴레옹 법전엔 못 미치나 굉장한 영향을 주었으므로 그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어떤 의미로는 카를 5세가 행했던 수많은 치적들을 제치고 이것이 현대 인류에게 미친 가장 기념비적인 업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11 르네상스 예술의 열렬한 후원자
카를 5세는 공교롭게도 경쟁자인 예술광 프랑수아 1세, 술레이만 1세처럼 그 자신 또한 엄청난 예술 마니아였다. 어쩌면 이런 경향은 르네상스 말기인 16세기 초 군주들의 공통적인 특성일지도 모르지만, 당대 군주들 중 예술적 후원이 후대에 끼친 영향은 카를 5세가 가장 강력했다.
카를 5세 이전의 스페인은 사실상 예술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당시 이탈리아(특히 피렌체와 베네치아), 프랑스 등 이웃 나라들이 막대한 후원과 부를 바탕으로 르네상스기 예술사에 한 획을 긋는 찬란한 문예부흥을 뽐내고 있었던 반면, 수세기에 걸친 레콩키스타로 전 국토가 전장이나 다름없었던 15세기까지의 스페인은 그야말로 예술의 깡촌이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중세 시대까지 옛 로마시대 건축 유적 말고는 도무지 볼 것 없던 나라가 스페인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예술적 빈곤함이 카를 5세 치세에 획기적인 전환을 맞았다.
일단 카를 5세가 예술사적으로 행한 최고의 업적은 말살 위기에 처했던 이슬람 문화재를 보존한 것이다. 16세기 초 당시 장기간의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스페인 국민들의 이슬람에 대한 악감정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이미 북부 스페인에 남아있던 이슬람 유물들은 엄청난 파괴와 훼손이 가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스페인은 종교개혁 당시 유럽에서도 최강급의 열렬 가톨릭 신봉국가였다. 이교도의 유산은 파괴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이슬람을 믿는 무어인들은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심지어 카를 5세 자신조차도 재위 초 알함브라 궁전 일부를 훼손시키고 그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딴 별궁(카를로스 5세 궁전)[43]을 건립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카를 5세는 이슬람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자신도 열혈 가톨릭 교인이었지만, 신앙과는 별개로 이슬람 예술은 그 수준이 중세 유럽보다 훨씬 발달해 있었기에 그 깊이에 매혹된 것이다. 그 결과 카를은 알함브라에 건립된 자신의 별궁을 끝으로 더 이상 이슬람 문화재를 훼손하지 말라는 칙명을 내렸다. 이러한 왕명 때문에 당시 이단심문관들을 비롯해 종교열이 둘째가라면 서러운 스페인 사람들도 이슬람 문화 훼손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이후로도 가톨릭의 이교도 박해가 지속된 스페인이었지만 중세까지 만들어진 무수한 이슬람 유적들은 왕가의 비호 덕에 잘 보호될 수 있었다. 이슬람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도 카를 5세의 보호 조치가 아니었으면 지금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44] 카를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는 아버지보다 훨씬 강경한 가톨릭 광신도였지만, 그도 결국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이슬람 문화재를 잘 보존했다.
유럽 회화-건축 예술의 중심이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간 계기도 카를 5세 때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플랑드르 출신으로 대륙 본토의 휘황찬란한 예술 붐과 달리 정작 스페인 내에서 볼 만한 작품이 드물어 아쉬워하던 카를 5세는 적극적으로 유럽 각지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을 초빙했는데, 이들이 바로 근현대 내내 예술 강국으로 꼽히게 될 스페인의 예술인 1세대로서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훗날 유럽의 문예사조를 휩쓰는 바로크 예술이 첫 싹을 틔운 것도 이 시기이며, 절대왕정기 유럽 각국의 왕실은 스페인 궁정의 후원을 그 본보기로 삼았다. 이처럼 후원 정책으로 단기간에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급성장을 이룬 케이스는 스페인이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카를 5세의 예술적 심취와 이해도가 높았던 것이다. 회화계 최고 거장 파블로 피카소, 건축계 최고 거장 안토니오 가우디가 모두 스페인 출신이라는 점도 이런 역사적인 토대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11.1 티치아노와의 인연
카를 5세가 스페인에 초빙했던 여러 예술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인물은 당대의 대표 화가 베첼리오 티치아노다. 티치아노는 본래 베네치아 태생이었지만, 그 활동 영역이 유럽 각지에 걸쳐져 있었던 세계 최초의 국제 화가였다.[45] 즉 그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진정한 월드스타가 바로 티치아노였다.
피렌체 회화와 쌍벽을 이루는 베네치아 회화의 최고 대표 작가로서 그는 독특한 유화 기법으로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했다. 그 뛰어난 화풍 덕에 각국 군주들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카를 5세는 물론이고 프랑수아 1세를 비롯해[46] 여러 굵직굵직한 군주들로부터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아 일감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 명성이 얼마나 자자한지 위로는 황제와 왕들부터 아래로는 총독, 제후들에 이르기까지 권력 깨나 쓰는 이들이라면 티치아노에게 의뢰하려 안간힘을 썼으며 실제로 지금 남아있는 작품들도 대부분 그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처럼 유럽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빽이었기 대문에 티치아노는 반농담조로 '재야의 권력자'로까지 불렸다. 실제로 16세기 유럽에서 이 정도로 부와 명성을 쌓아 출세한 화가는 없다. 그렇게 일생을 유럽 각지에서 활약하면서도 누군가의 전속 궁정화가로 한곳에 매이길 거부해온 티치아노였지만, 그런 그도 자신의 최대 후원자인 카를 5세와는 매우 각별한 관계를 맺는다.
1532년 첫 만남 이후 몇 차례 초상화 작업으로 카를 5세와 인연을 맺으면서 티치아노는 차츰 카를 5세의 예술적 열정에 감화되었는데, 그것을 극명히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언젠가 한번 티치아노가 카를 5세의 초상화를 그리는 중 그만 실수로 붓을 땅에 떨어뜨리자 화가인 자신보다 모델인 황제가 먼저 몸을 숙여 떨어진 붓을 줍고서는 그것을 건네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티치아노 정도의 거장이라면 기꺼이 황제로부터 시중을 받을 자격이 있지! "
- (리돌피, 티치아노 전기 中)
이 때 티치아노가 느꼈을 정신적 감명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이후 지금까지도 줄곧 미술인들에게 후원자의 가장 모범적인 전형으로 통하고 있다. 카를은 티치아노를 극진히 총애하여 화가인 그에게 기사 작위와 백작 작위까지도 수여했다.
이런 까닭인지 말년의 티치아노는 자주 스페인에 왕래하며 거의 궁정화가나 다름없는 예우를 받게 된다. 특히 카를 5세와는 교분이 두터웠기에 소싯적 카를 황제가 자신의 애견과 같이 노는 사사로운 모습부터 제후 반란을 진압하고 위풍당당하게 개선하는 영예로운 모습까지 온갖 초상화를 전담하여 도맡다시피 화폭에 옮겼다. 위에 올려져 있는 카를 5세의 이미지 상당수가 바로 티치아노의 솜씨다. 물론 군주의 초상화로만 작품을 한정한 것도 아니라서, 걸작 <신성과 세속의 사랑>을 비롯해 대담함이 넘치는 풍속화와 종교화, 누드화를 그려내기도 했다.
카를 5세 사후 티치아노는 카를의 아들 펠리페 2세의 후원 하에서 노년을 보냈다. 사이가 친밀하여 자주 만남을 가졌던 카를 5세와 달리 궁정 안에 틀어박힌 펠리페 2세와는 평생 단 2번밖에 만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잦은 편지 교환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청년 시절 펠리페 2세의 모습도 티치아노가 작업한 초상화이다. 이렇듯 티치아노는 회화의 불모지인 스페인의 예술 환경을 대폭 업그레이드시킨 1세대 화가로서 후대 스페인 화가들의 영원한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으며, 피터 폴 루벤스를 비롯한 바로크 화가들은 국적을 초월하여 이 티치아노를 자신들의 교범으로 삼고 흠모했다. 당연히 스페인 내에서의 상징성은 말할 필요도 없고, 특히 스페인 미술사학자들은 오히려 벨라스케스나 고야, 피카소같은 화가들보다 스페인 회화의 근본적 뿌리인 티치아노를 더 중요시 여길 정도다. 이 티치아노의 화풍은 이후 다음 세대의 거장인 엘 그레코에게 계승되어 본격적인 스페인 바로크의 포문을 연다.
12 말년과 사후
카를 5세의 말년에는 유난히 관련 인물들의 사망 소식이 많다. 1546년에는 카를에게 가장 큰 짐을 지워주었던 마르틴 루터가 사망했고, 1547년에는 영국왕 헨리 8세,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가 2달 간격으로 연달아 사망했다. 아메리카를 정복하고도 카를에게 냉대당하던 코르테스가 실의에 잠겨 살다 사망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게다가 3년 후인 1550년에는 가톨릭을 개혁한 교황 바오로 3세가, 1555년에는 어머니인 후아나가 세상을 떠났다. 정치적 라이벌들의 사망 소식은 그에게 미묘한 기분을 주었을 것이고, 특히 모친 후아나의 죽음에는 큰 충격을 받았는지 이후 카를 5세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47]
그는 이런 일련의 소식을 접하면서 업무에 너무 지쳤고 황제로서 죽기보다 인간으로서 안식을 찾고 싶었던지, 모친이 죽은 이듬해인 1556년에 그는 전격적으로 퇴위를 선언했다. 카를은 자신의 적장자인 펠리페 2세에게 자신의 모든 유산, 스페인 왕위는 물론 신성로마 황제의 지위도 물려주고 싶었겠지만 펠리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는 결격 사유가 많았다. 스페인·이탈리아·독일·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의 지배자로서 특정한 나라에 자기 정체성을 강하게 결부시키지도 않았고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아버지와는 달리, 펠리페는 스페인인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데다 라틴어와 스페인어 정도밖에 구사하지 못했다. 게다가 독일어나 독일의 문화, 전통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러니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신교니 구교니 할 것 없이 단결해서 콧대 센 스페인인은 싫다며 항명했고, 대신 카를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를 지지했다. 페르디난트는 일찍이 1521년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작위 중 신성로마제국 제후를 대표하는 작위인 오스트리아 대공직을 형에게 물려받아서 오랫동안 신성로마제국을 자기 대신 통치해왔고 1531년에 황위 계승자에게 주로 내리는 로마 왕에 책봉되었기에 제후들의 입장에서는 '황제 자리는 페르디난트에게 주시죠?' 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와 해외 식민지는 펠리페 2세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오스만 제국의 빈 포위를 막아내고 빈을 사수한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각각 양위했다. 이는 당시 페르디난트와의 갈등도 있었지만 아들 펠리페가 생의 대부분을 스페인, 동생 페르디난트가 오스트리아에서 지냈다는 것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은 어느 쪽이든 모두 카를의 부모인 펠리페 1세와 후아나의 자손들이 제국을 물려받은 셈. 이렇게 돼서 부계로 얻은 작위는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주고 모계로 얻은 작위는 펠리페에게 물려주는 모양새가 됐는데, 이중 할머니 부귀공 마리에게서 물려받은 문제의 플랑드르 땅만은 펠리페에게 주었다. 카를 본인의 고향이자 최초의 직할령이었다는 상징성이 큰 작위였기에,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을 만큼 플랑드르에 대한 애착이 깊었다. 결과적으로는 그 아들이 다 말아먹긴 했지만(…).
예수회를 창설한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카를의 퇴위를 이렇게 평했다. "황제께서는 이리하여 후계자들에게 귀중한 모범을 실천하셨다. …황제께서는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임을 입증하셨다. …주님께서 이제 황제께 자유를 주실 것이리라 믿는다."
퇴위 후 1556년 오스트리아를 떠나 스페인에 돌아온 카를은 1557년 겨울 자신이 마지막으로 머물 곳이라 낙점한 유스테 수도원으로 입소한다. 퇴위 후에도 그는 아들이 프랑스와의 전투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고 포르투갈을 스페인 왕가로 끌어들여 이베리아를 통일시키기 위한 물밑 작업 등 뒷바라지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포르투갈의 섭정인 카타리나가 바로 카를의 누이였기 때문에 친밀한 교류가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아들 펠리페가 스페인을 떠나 네덜란드에 머무르는 기간에도 그는 당시 스페인 임시 섭정이었던 딸 후아나를 실질적으로 보조했다.
퇴위 2년 후인 1558년, 카를 5세는 외진 유스테 수도원에서 조용히 사망했다. 향년 58세. 기록에 따르면 카를은 통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져 휠체어를 타고 다녔지만, 수도원 제단에서 풍겨오는 향 냄새를 맡을 때엔 그 어느 때보다도 기뻐했다고 한다.
카를 5세는 재위 중에 어떻게든 권력이 분산된 독일을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이끌려 했으나 종교개혁이라는 악운이 겹쳐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독일의 절대왕정은 이웃인 프랑스보다 한참 뒤쳐져 영방국가로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유럽의 패권 또한 점차 프랑스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그가 다져놓은 신성 로마 제국은 30년 전쟁으로 유명무실해지다가 3세기 뒤에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했다.
또한 카를 치세에서 유럽 최강의 국력을 구가하던 스페인도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걸으며 영국에 해상권을 내주고 만다.[48]
13 평가
카를 5세의 치세는 이미 전술했던 신대륙 개척, 종교개혁, 전술사상 대변혁, 오스만 제국과의 경쟁 등에 지동설까지 맞물리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까지 한 세대 내에서 이뤄진 최대의 격변기가 되었다.
오늘날 스페인과 독일권에서 그는 통일을 일구고 황금시대를 열어젖힌 대제이자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포르투갈과 특히 네덜란드, 벨기에에서조차 자국 출신으로 유럽을 평정한 인물로서 의외로 평이 좋다. 그의 치세 과정 또한 워낙에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스페인, 독일 등지에서는 역사물의 소재로 즐겨 다뤄지고 있다. 영국 쪽의 경우도 일단 대단한 군주라는 점을 인정하고 들어가지만, 자국의 왕이 재혼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크게 욕봤기 때문에 대놓고 추켜세우기는 힘든 탓인지 다소 두루뭉술한 카리스마형 악역 대마왕 기믹으로 설정하는 편. 한국사로 치면 청태종같은 느낌일지도. 대신 그 아들내미만큼은 확실하게 찌질이로 만들어 일점사로 깐다 프랑스? 에드워드 왕세자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 대마왕 계보 사이에 위치한 트라우마로 취급 중.[49] 물론 그 사이에는 리슐리외와 나폴레옹이라는 용자가 있기는 하다터키에서는 자신들과 맞선 적의 수괴마왕 취급.
게다가 대체로 암울했던 스페인 역사 중 그나마 레콩키스타로부터 카를 5세로 이어지는 이 시대가 가장 영광스런 시대이기도 하다. 바로 다음 대인 펠리페 2세만 해도 당시까지 듣보잡이던 영국에게 무적함대를 까먹는 아픔이 있어서(…). 그러나 정작 1588년의 무적함대의 몰락으로 유명한 영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스페인이었고, 영국은 1604년 런던에서 스페인에 유리한 내용을 담은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무적함대의 패배 직후 영국은 1589년 스페인을 공격했으나 스페인이 무적함대를 잃었을 때보다 더 많은 상실을 겪었다. 그러나 칼레의 승리만 알려진 것은 세계사가 얼마나 영미권에 편향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50]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 카를 5세는 프랑스 그리고 오스만과의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엄청난 빚을 졌는데 그 규모가 무려 3900만 두카트 가량이다. 카를5세 치세 때 식민지로부터 벌어들인 귀금속의 가치가 3500만 두카트였던 걸 보면, 카를 5세가 진 빚과 채무가 그야말로 엄청났다. 카를5세는 빚을 부담하기 위해 '후로'라는 공채를 발행했는데, 이자가 무려 10%. 그런데도 후로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엄청난 인기를 몰았고 나중에 후로의 이자율을 7%로 낮췄는데도 불구하고 인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후로에서 나오는 연금에 의존한 채 스페인의 제조업과 농업을 외국인에게 차례 차례 넘겨줬다.
또한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금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고 스페인의 제조업과 농업은 가격경쟁에서 타국에게 패배하게 된다. 몰락한 제조업과 수공업을 대체하기 위해 타국에서 수입[51]을 하게 되고 막대한 금마저 해외로 유출하게 된다. 결국 카를 5세 치세 때부터 스페인의 몰락은 시작됐다.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서는 카를 5세의 일대기 묘사에 거의 한 챕터(제22챕터 "선행?")를 할애[52]해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루면서 재위 39년간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하고 포토시[53]를 발견하였으며 루터파, 칼뱅파, 예수회가 발호하고 지동설이 대두한데다 오스만 투르크가 빈을 두 번이나 포위하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라 평하였다. 근데 중요한 것은 이 설명조차도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역사적 비중이 큰 인물임에도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언급 자체가 적은 편이다. 교과서에서 그를 언급한 경우는 대체로 종교개혁 파트(보름스 회의, 아우구스부르크 화의 등)다. 예를 들어 7차 교육과정 지학사 교과서엔 이런 내용이 있다.
독일 황제 카를 5세는 1521년 보름스 국회를 소집하여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루터는 이를 거부하여 법의 보호를 박탈당하였다. (215p)
또한 같은 교과서의 탐구 단원(물론 그다지 관심받기 힘든 부분)에도 나오긴 한다.
[55]어쨌든 교과서상에는 직접 거명되는 경우가 드문 탓에 교과서 내용으로만 세계사를 알고 있는 학생들은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 혼자나 에스파냐(카를로스 1세)만의 듣보잡 군주고 고인드립 신성 로마 제국 및 그 내부의 오스트리아가(한자동맹 정도 빼면) 오토 1세 이후 프리드리히 대제까지 쭉 망했어요 분위기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안습. 그리고 절대 왕정 부분 중 스페인에 관한 설명에선, 스페인 혼자 아즈텍, 잉카를 멸망시켰다던가, 펠리페 2세 혼자 왕권을 강화한 것처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나마 유명한 한국의 교양서인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 편에선 카를 5세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카를 5세에 대해 아는 한국 사람들이 늘었다.[56] 가장 늦게 출간된 에스파냐 편에서는 카를 5세와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의 비중이 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네덜란드편보다도 그의 비중이 크게 나온다. 더불어 꼬일대로 꼬인 유럽 왕가의 가족관계도도. 크루세이더 킹즈의 콩가루 집안 플레이는 과장이 아니다.
14 부인과 가족관계
원래는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와 안 드 부르타뉴가 낳은 2명의 딸들과 약혼 관계에 있었는데 둘 다 결혼전에 사망을 하게 된다.[57]
부인은 포르투갈의 이사벨라(1503년 - 1539년) 로 콜럼버스를 지원했던 이사벨라 여왕의 외손녀가 된다. 부모는 포르투갈의 왕인 마누엘과 아라곤의 마리아. 어머니는 이사벨라가 14살이 되던해 사망하고 새어머니로 이후 시누이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 여대공이 오게 된다.[58] 이사벨라와 카를5세는 사촌관계인데 이때 당시 이사벨라의 오빠인 주앙3세는 카를5세의 여동생 카타리나와 결혼을 하여 이중으로 혼인관계를 맺게 된다. 부인인 이사벨라는 아름다운 외모에 지적이고 영리해서 남편이 대제국을 다스리느라 부재중일 때는 정치를 잘 꾸려나갔다. 부인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고 총 6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부인은 6번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다. 이사벨라를 많이 사랑했던 카를5세는 이후 늘 검정색 상복을 입고 지냈다. 유명한 티치아노의 초상화에서도 칙칙한 검은 옷만 입고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15 그 외
그의 재위 초기인 1523년, 덴마크로부터 스웨덴이 독립했다.
그의 스페인 군대가 프랑스군을 매치락으로 박살낸 파비아 전투는 유럽사에서 최초로 화기인 총이 전면에서 활약해 대승한 전투로 평가된다. 그 놀라운 위력을 실감한 유럽 각국은 재빨리 총의 제식화를 추진하게 되었으며, 그의 재위 말년에 이르면 총기가 이미 유럽은 물론 일본까지도 전파된다. 따라서 그의 재위기는 창검같은 냉병기가 몰락하고 본격적으로 총의 시대가 열린 급변기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아이러니컬하게도, 파비아 전투에서 활약한 스페인 테르시오는 마지막까지 백병전을 염두에 둔 테르시오 전술을 유지했다. 이들이 로크루아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유럽 전술의 대세는 총기의 화력을 극대화하는 선형진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렇듯 총이 뜨면서 자연히 기사계급은 몰락을 걷고 경보병이 승패를 가르는 시대가 열린다. 이에 따라 기사가 중핵을 이루는 봉건제도 또한 구조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개혁으로 인한 가톨릭의 퇴조 크리와 맞물려 드디어 중세가 완결된다.
별로 긴밀한 관계는 없지만 러시아의 악명 높은 차르 이반 뇌제의 치세와도 겹친다. 조선으로 치면 11대 중종, 12대 인종, 13대 명종 연간에 걸친 시기이다.
예수회가 가톨릭을 명에 처음 포교하고, 일본이 처음으로 스페인 출신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에 의해 가톨릭과 접한 시기도 바로 그의 재위 기간이었다. 이 때 처음으로 스며든 기독교 사상은 이후 꾸준히 민중에게 파고들어 훗날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 일본의 시마바라의 난으로 이어진다.
그의 재위 중에 그 유명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다. 훗날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까지 경탄할 이 사건은 당시 유럽 사회 전체를 일대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것이야말로 중세적 사고가 근세로 넘어가는 분기점이라 칭해도 좋을 것이다.
코에이의 게임 대항해 시대 초창기 시리즈가 바로 그의 치세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에스파냐 왕으로만 나오는지라 이토록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가뜩이나 생김새도 주걱턱을 버리고 여러 왕들 중 평범하게 생긴 편이라(...)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에서는 카를 5세의 혼령이 자신의 손자인 돈 카를로스(주인공)의 조력자 역할로 등장한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혼령인 그는 손자를 위해 자신의 유해가 이장된 엘 에스코리알 궁전 성당으로 인도한다. 베르디의 또 다른 오페라이자 빅토르 위고의 운문 사극을 바탕으로 작곡된 에르나니에서는 늙은이와 결혼이 예정되어 있는(그것도 정략결혼) 한 여자를 꼬시려다 에르나니와 실바한테 발각되어 사각관계(…)까지 일으켜 버린다. 막판에서는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확실하게 단념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 연적 에르나니와 엘비라의 사랑을 축복하는 것으로 마무리. 물론, 비극 오페라답게 에르나니와 엘비라가 죽는 것이 진짜 엔딩이지만(…).
헨리 8세를 다룬 미드 튜더스에서도 당연히(?) 잠깐이나마 등장했다. 주걱턱을 보면 캐스팅 배역의 싱크로가 쩐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영국에서도 합스부르크 하면 주걱턱은 상식 수준인지라 오히려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했을 것이다. 이건 한국인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 하면 바로 원숭이가 떠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이전 왕들은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 그리고 기타 등등의 왕계로 분류된다. 카를의 모친 후아나 여왕이 유폐 상태에서도 형식상 공동 통치자였지만 그녀는 왕조 개창자로 볼 수 없는데다 실권은 전적으로 카를이 갖고 있었기에 대체로 카를 본인만을 스페인의 1대 국왕으로 취급한다.
- ↑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이 이미지를 채택했다.
- ↑ 실제로 카를은 입을 꾹 다물 수가 없어서,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음식을 포도주와 함께 그냥 삼키다보니 평생 소화불량에 시달린데다, 근시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식사도 도저히 여의치 않은 상황이 아닌 한 혼자서 했다고 한다. 카를의 할아버지이자 정략결혼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크게 넓힌 시조격인 황제 막시밀리안 1세도, 아들인 필리프(펠리페)에게 '손주를 낳아준 건 고마운데, 왜 하필이면 저런 머저리 같은 놈(...)을 낳았느냐' 라는 말을 남겼다.
- ↑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공작으로 카를 5세의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했다.
- ↑ 부르고뉴는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인 마리(카를의 조모)가 계승권을 갖고 있었고, 마리가 사망한 후 장남이자 제국의 황태자였던 펠리페 1세=필리프 대공이 대공 지위를 계승했다. 덧붙여서 이 때의 부르고뉴는 그 전대의 혼인합병으로 지금의 네덜란드-벨기에 일원인 플랑드르를 꿀꺽한 상태였다.
- ↑ 원조 정도가 아니라, '짐의 제국에는 해가 지지 않는도다' 라는 말을 실제로 남겼다.
- ↑ 아이러니하게도 카를이 스페인의 왕이 되도록 도와준 게 네덜란드 인이었다. 그는 원래 네덜란드를 다스렸는데, 겸직한 스페인 왕이 주가 되면서 네덜란드가 거꾸로 스페인의 종속국이 되었다.
- ↑ 통일 스페인 왕국이라고는 하지만 카스티야-레온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여전히 다른 정부를 가지고 있었고, 카를 5세를 한 사람의 군주로 섬기는 동군 연합의 형태였다.
- ↑ prince는 보통 왕자로 번역되지만 대공 등 다른 의미도 있다.
- ↑ 란트그라프는 보통 방백으로 번역된다. 궁중백이나 변경백보단 낮지만 일반적인 백작령으로 구분되며 신성로마제국의 성립 후 발전한 제국 백작과도 구분된다(제국 백작은 제국의회에 투표권이 있는 직위.)
- ↑ 참고로, 프랑슈 콩테 지역은 백작령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 ↑ 그의 지위 중 쿠바·멕시코 등을 포함하는 광대한 아메리카, 포르투갈로부터 영유권을 넘겨받은 필리핀, 그리고 알제리·튀니지 등을 포함하는 아프리카 식민지는 제외한 것이다.
- ↑ 할머니 마리 드 브르고뉴의 영지였는데. 외증조 할아버지는 용담공 샤를 이었고 프랑스계였으며, 그때만 해도 유럽에서는 프랑스어가 지금의 영어 이상의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왠만한 학계는 물론 대다수 나라의 상류층에서는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게 당연시 여겨졌었다. 사실상 라틴어의 후계자이자 영어의 전임자 격의 위치였다.
- ↑ 참고로, 이 대사는 카를의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 ↑ 실제로 이건 상당히 언어적 기교가 넘치는 표현으로, Urbs(도시)와 Orbis(우주)의 철자상 유사성을 적절히 활용한 명언이다. 적국의 수도인 파리에 대한 애착이 잘 드러나는 동시에 그의 재치를 엿볼 수 있는 부분.
- ↑ 그녀는 여걸 기질이 강해서, 프랑스가 플랑드르를 깔보고 조공을 요구하자 전쟁을 벌여 프랑스군을 발라버리기도 했다.
- ↑ 정확히 말하면 아들이 한명 태어 났는데 요절해서 포기한 쪽에 가깝다.
- ↑ 마르가레테의 아들이 17세기의 곤살로 데 코르도바와 같이 명장 반열에 올라있는 알렉산더 파르네제이다
- ↑ 다만 잉카의 왕족은 피신하여 항전을 계속하다가 1572년에 마지막 황제가 사망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 ↑ 당시 코르테스는 신대륙에서 찾아낸 초콜릿을 진상하며 필사적으로 왕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초콜릿의 기원. 그러나 이미 카를 5세에게 너무 크게 찍혀버린 탓에 결국 죽는 날까지 박대를 당했다. 그 주된 이유가 신대륙에서의 하극상을 비롯한 월권행위 때문이었으니, 결국 자업자득이랄까.
- ↑ 현재 대귀족 가문으로 슈탄데스헤어 공작이다.
- ↑ 푸거가문에게 50만 두카트를 빌린 대가로 은광 구리광산 채굴권을 하사했다. 야코프 푸거는 막시밀리안 1세 시절 이탈리아 원정군 자금 15만 두카트를 대출해줘서 제국백작이 되었고, 같은 시대 종교개혁시기 면죄부 판매의 교황청과 독일 교구사이 송금역할을 맡아서 역시 떼돈을 벌었다.
그러나 어차피 펠리페 2세 시대에 가선 스페인에 대부해줬다가 쫄딱 망하고 금융업을 접고는 그냥 귀족이 되었다. - ↑ 막시밀리안 1세는 이전문서에서 황제대관을 받지 못해서 교황이 되려고 했다는 해괴하고 근거없는 서술이 있었으나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대리인 트렌트 대주교가 대관을 해주었다. 물론 이전부터 황제로 칭하고 다녔다.
- ↑ 오스트리아의 역사 (임종대)
- ↑ 북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부 역할을 했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이다.
- ↑ 훗날 카를 5세는 루터는 악마의 하수인이기 때문에 인간의 약속은 지키지 말아야했다고 후회했다.
- ↑ 아이러니하게도 교황 레오 10세는 1521년에야 황제 즉위를 승인할 정도로 카를 황제에 비협조적이었고 루터는 처음에 카를황제가 당선되자 기대감을 드러낼 정도였지만 그 입장이 바뀌게 되었다.
- ↑ 전임 레오 10세의 조카이다
- ↑ 이탈리아인들은 정치적으론 독일인(?)의 지배는 받아도 이탈리아인이 아닌 야만인(?) 취급을 했고, 막상 하드리아누스가 로마에 오자 "이탈리아어를 못하는데 경악하고 라틴어 발음은 끔찍하다"며 후회했다고 한다. 부패한 이탈리아인은 참아도 청렴한 야만인(?)은 못참는다는 신조... 하드리아누스 6세는 금방 선종했고, 그 후 비이탈리아인 교황이 뽑히는건 460년이 걸렸다.
- ↑ 프로테스탄트의 유래가 된다
- ↑ 팔츠 선제후는 카를 황제가 페르디난트와 함께 제국평의회를 공동으로 운영하고 제국섭정으로 지정할 정도로 오른팔이었다.
- ↑ 가톨릭 교회와 교리가 같은 내용을 주로 만들고 교황권 비난은 일체 적지 않았다.
- ↑ 심지어 명나라까지 진출했다.
- ↑ 단, 공의회 자체는 가톨릭 교회에서는 황제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게 들어간 종교회의는 미적 거렸고 교리 통합을 위해 제의한 신교도 대표들은 제의를 거부하고 불참해버렸다.
- ↑ 이미 수장령으로 가톨릭은 떠난 상태였지만 가톨릭 국가 프랑스를 치기 위해 손잡았다.
종교는 장식인거다. - ↑ 프랑스에서 이탈리아와 저지대(네덜란드 등) 영토와 종주권 주장을 모두 포기했다.
- ↑ 루터를 보호했으며 신교도중 가장 큰 세력이었다.
- ↑ 베틴 가문의 본가는 작센 선제후 가문인 에른스트 계열이나 모리츠는 방계출신 알브레히트 계열이었다.
- ↑ 스페인에서 병력 차출은 국내분쟁에 외국군대로 해결을 금지한다는 제국법과 황제공약 위반이었다. 카를 5세가 잘나갈땐 조용했지만 가톨릭 제후들마저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다음은 내가 아닌가 할 정도로 황제한테 반감을 가졌다.
- ↑ 모리츠는 종가를 배신하고 선제후직을 얻었다하여 마이센의 유다로 불리게 된다.
- ↑ 사실 프랑스도 당시 종교문제로 인한 내부적인 갈등이 심했다. 종교를 우선하자면 사실 프랑스는 카를과 협력해야 하는데, 카를을 싫어한 나머지 반대로 행동했다. 자국의 내분보다 카를 5세에 대한 앙금이 더 클 정도로 트라우마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 ↑ 당시 오스만은 강국이라곤 해도 급작스럽게 영역을 확장하여 내부적으로 불안정했는지라 그 힘을 효율적으로 쓰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실제로 빈 포위 때만 해도 오스만군은 퇴각하기 무섭게 동유럽 각처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게다가 카를 5세의 경우도 총력으로 맞서긴 커녕 당시 프랑스와의 전쟁, 내부 반란 진압, 종교적 내홍 수습, 아메리카&아프리카 개척과 빈 포위 수성을 모두 동시에 수행했다.
- ↑ 정작 자신의 스페인 왕명은 카를로스 1세였지만... 이후에 그라나다에 스페인 국왕이 오면 머무는 궁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 ↑ 하지만 카를로스 5세 궁전으로 인해 알함브라 궁전의 지반에 영향이 간다고 한다. 조금만 일찍 깨달았어도 더는 손상을 입지 않았겠지만...
- ↑ 지금이야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등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이름을 덜치지만, 당대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로 활동 영역이 한정되어 있었으며 프랑수아 1세 정도의 예술 마니아 외엔 타국 군주들에게 특별히 주목받지 않았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말년에 자신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재정난에 시달렸다.
- ↑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도 티치아노가 그린 것이다.
- ↑ 근데 정신병자인 모친을 싫어해서 평생 가둔것은 카를 본인이였다.
- ↑ 영국이 유럽의 해상 강국으로 도약하는 시기는 18세기로 16세기와는 상당히 먼 차이가 있다. 서양사를 이해하는 대표적인 오해중 하나. 16세기이래 17세기 후반까지 영국은 국력이 약해서 변변찮은 세력으로 남아 있었고, 몇 차례 해상 진출을 시도했으나 빈번히 네덜란드에게 막혀 3번이나 실패하는 굴욕을 겪고 살았다. 17세기동안 3차례에 걸친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3번 모두 영국이 이기지 못했다
- ↑ 아직까지도 적잖은 프랑스인들은 프랑수아 1세의 왕자들이 카를 5세에게 살해되어 발루아 왕가에 망조가 들었다는 카더라를 신뢰하고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다만 이건 '카더라' 라고 할 수 만은 없는데, 우선 아버지의 뒤를 이을 왕세자감으로 주목받고 있던 장남인 프랑수아가 스페인에서 인질 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기 때문. 게다가 '카를 5세에게 살해' 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모호하지만, 프랑수아 다음으로 부모나 귀족들로부터 사랑받았던 막내 샤를도 합스부르크 황가의 동맹이었던 잉글랜드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 ↑ 레판토 해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몰락했다는 것과 비슷한 시각이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는 오스만 해군이 재기 불능의 타격을 입었을 뿐 육군은 여전히 강력했고 유럽은 1683년의 2차 빈 포위 이후에야 오스만이 예전만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는데, 1588년의 무적함대의 몰락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 ↑ 상단들이 물품을 넘기고 막대한 은화와 금화를 넘겨 받았는데 스페인 사람들이 "타국 놈들이 우리를 서인도 놈처럼 여겨!" 라고 말할 정도
- ↑ 이것을 특별히 언급한 이유는 저 책에선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스케일이 방대한 이 작품에서 각각의 챕터는 보통 수 세대 동안의 사건을 다루며 각각의 인물에는 매우 짤막짤막하게 초점을 맞췄다. 심지어 에이브러햄 링컨조차 등장이 채 한 페이지를 못 넘겼다. 그런 책에서 카를 5세의 기록이 자세한 건
래리 고닉의 애정 보정에 더해종교개혁 등 당대의 이슈가 워낙 풍부했기 때문이다. - ↑ 현재의 볼리비아에 있는 은광(銀鑛)으로, 19세기까지 매년 엄청난 양의 은이 산출되어서 가격 혁명을 일으키는 등 유럽의 경제를 뒤흔든 거대 광산이다. 현재는 은 보다는 텅스텐 등 다른 금속을 주로 채굴하고 있다.
- ↑ 이 문서를 꼼꼼히 읽은 위키러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식인 '카를로스 5세' 가 아니라, 에스파냐식의 표기인 '카를로스 1세' 가 옳다.
- ↑ 이건, 세계사 교과서의 경우 그 특성상 세계사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 게 아니면 아무리 네임드급 인물이라도 대체로 언급을 자세히 안 하는 편이라서 그렇다(아예 다뤄지지도 않는 역사적 인물들도 부지기수다). 다만 직접 '카를 5세'라 거명되지 않더라도 직위인 황제, 왕으로 치환되어 언급된 예는 더러 있다.
- ↑ 네덜란드편이니만큼 현 네덜란드 지방을 통치할때의 행적 정도밖에 없지만, 이 군주에 대한 인지도가 올라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 ↑ 둘이 한번에 결혼 아니고 차례대로 하나씩
- ↑ 주걱턱이 나왔던 엘레오노르는 그다지 미인이 아니였고, 마누엘이 사망한 이후 두번째 남편이 바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다. 프랑수아는 이 부인을 너무 싫어해서 대놓고 무시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