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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não de Magalhães (포르투갈어,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
Fernando de Magallanes (스페인어, 페르난도 데 마가야네스)
Ferdinand Magellan (영어, 퍼디낸드 머젤런)
1480~1521
1 소개
해양 지도에 가장 정통한 그는 진정한 항해 기술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그는 참고할 만한 사례를 제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천재성과 용맹성에 의존해 지구 일주를 시도하는 방법을 알아냈으며, 지구 일주에 거의 성공했다.
-안토니오 피가페타
포르투갈 왕국 출신의 항해사로, 스페인에 귀화하여 국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후원으로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에 도전한 모험가이다.
마젤란 본인은 중도에 필리핀 막탄 섬에서 사망하여 세계 일주 항해에 실패하였으나, 그가 인솔하였던 함대가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고 또한 마젤란이 그로부터 10여년 전에 동쪽으로 항해하여 필리핀에 도달했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두 번에 나누어 하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돈 인물이므로 최초 세계 일주자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한번의 항해로 지구를 한 바퀴 돈 사람은 스페인의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로 스페인에서는 이 쪽을 더 쳐주기도 한다.
선배인 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쿠 다 가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조반니 카보토(존 캐벗) 등과 더불어 대항해시대를 대표하는 모험가이자 항해자로, 사실상 대항해시대의 정점을 장식한 인물이다. 마젤란 이후 바다에는 모험가보다는 군인/해적, 선교사, 학자들이 득세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마젤란은 1480년 포르투갈 사브로자(Sabrosa)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부모님을 여의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왕실과 연결되어 있어 그는 열 두살 때 왕궁의 시종으로 발탁되었다. 포르투갈 무장상선대의 일원으로 향료제도 탐험에 종사하고,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의 부하로써 1511년에는 동남아시아의 요충지인 말라카 정복에 참가하기도 한 베테랑 항해자 겸 모험가 겸 군인이었다. 이 때 몰루카 제도의 암보이나에서 현지인 여자와 결혼하고, 트르나테 섬 술탄의 고문관으로 근무하는 등 현지화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 때 신대륙에서 서쪽으로 대양을 가로질러 아시아로 항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나고 차가운 성격의 마젤란은 뛰어난 능력에도 적이 많아서 상관과 동료들과는 늘 불화 상태있었다. 그래서 항상 그들한테 심심찮게 모함당하는 신세였다. 거기에 1513년 모로코에서의 아자모르 전투 중, 무어 족의 진지를 공격하다가 무릎에 부상을 입어 상이군인[1]으로 퇴역, 결국 포르투갈로 반강제적으로 귀환하여, 한동안 실업자 상태로 지내는 안습한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에 귀환한 후로는 아시아에서 자신이 구상한대로 대서양과 태평양(물론 이 때에는 아직 태평양이란 이름을 얻기 전이지만)을 가로질러 아시아의 향료 제도로 가는 모험 항해를 후원받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국은 실패. 그 모난 성격 탓에 국왕인 돈 마누엘 1세를 들이받는 기행을 벌인 끝에 1517년, 스페인으로 도주 이주하여 스페인 국적을 얻고 스페인 여자와 결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2]
사실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남단을 지나 인도양을 가로질러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정기항로가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 중이었던 데다가, 마젤란의 계획에 따르려면 토르데시야스 조약상 스페인 세력권인 남아메리카를 통과해야하는 떨떠름한 상황 탓에, 마젤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것.
어쨋거나 스페인에서 마젤란은 같은 포르투갈 출신 지리학자 루이 팔레이루[3]의 협력 덕분에 당시 스페인이 보유하고 있던 남아메리카의 해도를 열람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해도를 샅샅히 뒤지면서 남아메리카의 남단을 회항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4]
어렵사리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훗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알현한 마젤란은 현란한 프레젠테이션으로 카를로스 1세의 흥미를 끌 수 있었고, 결국 다섯 척의 선박[5]을 포함한 항해자금 전액 지원, 발견한 영토에 대한 총독 직위(마젤란이 '발견'한 영토의 크기를 생각해보자!) 약속, 항해 수익의 20% 분배 등 엄청난 조건으로 항해에 대한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모험항해를 낙찰받을 수 있었던 배경으로, 당시의 국제 관계를 들 수 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세계의 바다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미 동방 항로를 통해 향료제도에 도착, 전 인도양에 걸친 무역망을 건설중이던 포르투갈에 비해,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거두고 있는 수익은 별 볼일 없는 수준이었다. 아직은 포토시 은광도, 플랜테이션 농장 건설도 본격화되기 전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이미 땅따먹기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정리된 상황….
그러다보니 스페인은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절박했고,[6] 이러한 상황에서 마젤란의 제안은 스페인에게는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는 아시아 무역에 한 몫 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물론 마젤란의 제안이 당시 스페인이 보유하고 있던 지리 정보에 비추어보아도 어느정도 합리적이었던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뒤늦게 정신차린 포르투갈 정부가 함대와 스페인 주재 영사까지 동원한 방해 공작을 펼쳐서 원정포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마젤란은 단호히 거절하고 1519년 9월, 스페인 함대를 지휘하여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하였다.[7]
2.2 세계일주 항해
마젤란 함대의 세계일주는 수많은 역경을 돌파하며 이뤄낸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이름높다.
1519년, 5척의 배와 270명의 선원으로 스페인을 출발한 마젤란의 함대는 라플라타 강까지는 수월하게 도착했지만 루이 팔레이로의 계산에 따르면 라플라타 강이 바로 마젤란 해협이었어야 했다.[8]
여기서부터 최초로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데 두달 가까이 폭풍에 시달리는데다 마젤란 특유의 모난 성격 때문에 다른 함장들의 자율권을 박탈하다시피 하며 위압적으로 대하는데다 모든 정보를 틀어쥐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함대의 다른 함장들과 충돌이 일어났다.[9] 특히 왕의 측근으로 마젤란을 감시하기 위해 원정에 동행한 후안 데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의 독선적인 처사에 화가 나 노골적으로 그의 명령에 불복했다. 분노한 마젤란은 카르타헤나를 체포했다가 다른 선장들의 만류로 풀어주었는데, 이는 머지않아 더 큰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결국 1520년 겨울이 되도록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지 못하자 선원들은 불만을 품고 그들에 의한 최초의 반란[10]이 발생했다.[11] 마젤란은 이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고 주동자를 처형[12]하게 된다.
남아메리카 연안에서 겨울을 지낸 뒤 이듬해 봄 마젤란은 결국 마젤란 해협[13]을 발견한다. 그야말로 위대한 발견이었지만, 마젤란 해협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산티아고 호가 난파되고, 메스키타가 지휘한 산 안토니오 호[14]는 결국 함수를 돌려 함대에서 탈주하고 만다.[15][16] 두 척의 배를 잃은 상태에서 나머지 세 척은 마젤란 해협을 돌파[17], 태평양에 진입한다.
하지만 이후의 항해는 그야말로 '굶주림'[18]과 '괴혈병'과의 사투... 세계지도의 태평양 부분을 보면 그래도 수백개의 섬들이 존재하고, 마오리족같은 비교적 발달한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섬도 상당했지만 이들이 지나간 항로에 섬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피가페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우리는 가루가 다 된 오래된 비스킷밖에 먹을 게 없었다. 벌레가 득실거리고 쥐가 음식을 먹고 그 위에 싸놓은 오줌 냄새가 지독헀다. 한 조각에 은화 반냥이 거래되는 쥐도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었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이런 여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무인도라도 나와야 물과 식량을 보급받을 탠데 그런것 조차 없으니, 80여일에 걸친 태평양 항해는 식량이 다 떨어져 마스트를 묶은 쇠가죽도 뜯어먹는 등 그야말로 지옥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폭풍이라도 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가까스로 괌 섬에 상륙할 수 있었으나 이곳에선 이들의 배를 처음 본 차모로 원주민들이 보트를 훔쳐가버리는 바람에 원주민들과 옥신각신 했다. 참고로 '괌'이란 이름도 원주민인 차모로족 추장이 "우리 부족중 도둑놈이란 없다!" 라고 발뼘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차모로어로 없다라는 뜻의 단어가 'Guaham' 이기 때문.
2.3 죽음과 후일담
1521년 필리핀의 막탄섬에 상륙해 현지 원주민과 교류해 식량과 물을 공급받고 가톨릭을 전파하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방식을 따라, 지역 통치자와 친밀관계를 형성하고 그의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지역의 호응을 얻고자 하였다. 추장 라자 후마본과 의형제 관계를 형성하고, 그의 정적 라푸 라푸(Lapu-Lapu)[19]를 죽이겠다고 약속한다. 낙승을 예감한 마젤란은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막탄 섬에 당도하나, 1,500여명의 부족 전사들과 맞닥뜨리고 결국 부하 8명과 함께 살해당했다. 퇴각 와중에 무거운 갑옷과 불편한 무릎 때문에 뒤쳐지고 말았고, 하필 다친 무릎에 다시 부상을 입어 결국 쓰러지고 만 것이다.[20] 명성에 비해서는 결코 곱지 못한 최후를 맞았다[21]. 피가페타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적들은 모두 마젤란에게 달려들었다. 적들 중 한 사람이 크기만 조금 큰 언월도와 비슷하게 생긴, 칼몸이 흰 넓적한 단검으로 마젤란의 왼쪽 다리를 베었다. 그 공격에 마젤란은 앞으로 고꾸라졌고, 적들은 철창과 죽창, 칼몸이 흰 넓적한 칼로 마젤란에게 달려들어서 우리의 거울이자, 빛, 위안을 주는 사람이자 진정한 안내자를 죽였다."
그러나 그가 이끌던 배들은 항해를 계속해 결국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물론 수월하게 나머지 일정을 마친 건 절대 아니다.
마젤란의 충직한 노예이던 엔리케[22]가 자기 주인이 죽은 이유는 선원들이 멍청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젤란의 목숨값을 받아내기 위해(!!) 세부의 술탄을 충동질하였고, 술탄의 식사 초대에 아무 생각 없이 응한 많은 베테랑 선원들이 독살당하여 불귀의 객이 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남은 선원들도 공격받아 겨우 탈출했다. 탈출한 다음 모아보니 배 세척을 운용하기엔 턱없이 모자랐고, 결국 콘셉시온에 불을 질러 자침시키기에 이른다.
남은 두 척의 배 트리니다드와 빅토리아는 항해를 계속하여 목적지인 몰루카 제도[23]의 티도르 섬에 상륙했다. 티도르 왕의 비호 속에서 대량의 향신료를 탑재하고 이제 귀향길에 오르려는 순간, 이번에는 마젤란 함대의 기함이었던 트리니다드의 함체가 오랜 항해로 파손되어 항해가 불가능해졌다[24]. 결국 트리니다드 호는 티도르 섬에 남았고, 마젤란 함대에서 가장 작은 배였던 빅토리아만이 스페인으로 향한 귀환길에 오른다.[25] 그런데 이 귀향길도 고난의 항로였다. 애초에 마젤란이 동쪽이 아닌 서쪽을 택한 이유가, 귀항로가 포르투갈 영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빅토리아호는 귀향길에 항구에 거의 기항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괴혈병과 영양부족에 시달렸고 항로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뇌물로 적재한 향료를 뿌려대 식량을 교환했다. 다행히 인근 원주민들은 적대적이지 않아서 교역은 성공적이었고 항해하기에 충분한 식량과 물을 얻을수 있어 식량문제를 해결했다.
함대가 스페인을 출발한 지 3년만인 1522년, 마젤란 함대 중 빅토리아호 단 1척[26]과 18명의 선원만이[27] 최초의 세계일주라는 대 기록을 세우며 스페인으로 돌아온다. 3척의 배가 침몰하고 200여명의 선원을 잃었지만, 빅토리아호 한 척에 실린 향료만으로 모든 항해 비용을 상쇄하고도 상당한 이익이 났다.
마젤란의 업적이 이후 생존한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와 칼바리요에 의해서 증거가 인멸되었다가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igafetta, 1491~1534)가 자신의 고향인 베니스로 돌아간 후 이 기록을 '최초의 세계일주에 대한 기록(Relazione del primo viaggio intorno al mondo)'이라는 책[28]으로 엮었기 때문에 극적으로 그의 행적이 알려질 수 있었다...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한국어 위키백과에도 적혀 있는 이 이야기[29]는 신빙성이 지극히 의심스럽다.
우선 칼바리요라고 알려진 인물은 마젤란 사후 세계일주 함대의 함장이었다 트리니다드 호가 고장나자 티도르 섬에 남은 인물이다. 그가 콘셉시온 호를 불태운 것이 증거인멸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신빙성이 낮다.[30].
두번째로 엘카노는 마젤란의 공적을 축소한 적이 없다. 스페인 왕실 서기였던 막시밀리안 트랜실바노가 엘카노 외 3명을 조사한 기록에 의하면 엘카노는 피가페타보다 반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서술했으며[31] 항해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행적을 밝혔다. 애초에 다른 기록을 모조리 없앴다고 하는데 생존자들이 남긴 기록중에서는 빅토리아호의 항해사였던 프란시스코 알보의 항해일지까지 남아있었다. 이 기록들은 피가페타의 기록보다 먼저 작성되었지만, 피가페타의 기록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다. 오히려 엘카노는 마젤란이 모함을 받았다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노력했다. 다만 엘카노는 이 과정에서 마젤란이 왜 죽었는지, 그리고 선원들이 어떤 방탕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 숨기려고 해서 그 신빙성을 스스로 깎아먹는 결과를 낳기는 했다.
마지막으로 엘카노가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인물이라고 불린 것은 근거가 없는게 아니다. 오히려 최초의 세계일주 후보인 엔리케, 엘카노, 마젤란 중에서 마젤란의 입지가 가장 떨어진다. 셋을 비교하면 이렇게 된다.
- 말라카의 엔리케: 원래 필리핀 출생으로 동쪽으로 떠났고, 서쪽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엔리케의 고향은 말라카인데, 필리핀은 말라카보다 동쪽이다. 세부에서 활동한 이후 엔리케의 행적은 알 수 없다.
- 마젤란: 포르투갈에서 활동하던 시절 몰루카 제도의 암본섬에 온 적이 있고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갔다가 총함장이 되어서 서쪽에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 엘카노: 마젤란 사후에도 살아서 남은 선박을 지휘해서 기타 17인과 함께 스페인으로 귀환했다.
마젤란의 경우 엔리케보다는 다소 유리하다. 마젤란이 유럽에서 가장 동쪽으로 이동한 곳과 스페인에서 출발하여 죽을때까지 이동한 지역이 경도상으로는 지구 한바퀴가 되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라카에서 포르투갈까지 동쪽으로 절반, 스페인에서 필리핀까지 절반해서 한 바퀴이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필리핀까지의 항해를 마젤란이 지휘했다는 것도 강점이다. 문제는 마젤란의 세계일주는 경도상으로는 그렇다라는 것이다. 마젤란은 출발점에 도착하지 못했다. 마젤란은 이전에 필리핀까지 간 적이 없기 때문에 마젤란의 항로도는 일생을 기준으로 잡아도 닫힌 선이 되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S자의 동쪽끝 필리핀과 서쪽끝 몰루카 제도 사이의 중간 선이 없다는 것이다.[32]
반면 엘카노의 경우는 엔리케와 마젤란에 비해서 유니크한 장점이 있는데, 한번의 항해를 통해서 출발한 곳으로 돌아온 최초의 세계일주를 한 18인의 대표라는 것이다[33]. 마젤란과 엔리케의 경우는 한번의 항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항해를 후원한 스페인 입장에서는 도중에 사망한 마젤란보다는 생존한 엘카노를 최초의 세계일주를 한 인물로 인정하는게 당연했다고 할 수 있고[34], 마젤란의 입지가 엄청난 지금도 엘카노는 스페인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35].
참고로, 그가 죽은 필리핀에는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동상과 그를 죽인 라푸라푸의 동상이 같이 세워져 있는데, 마젤란의 동상에는 세계 최초로 세계일주를 성공시킨 그를 추모하는 내용이고, 라푸라푸의 동상에는 필리핀 최초로 침략자를 물리친 것에 대한 찬사다(…). 필리핀에서는 극우적 인사들이 라푸라푸 동상에 가서 헌화를 하고 필리핀 애국주의를 외치는 반면, 마젤란 동상은 해외 관광객이나 가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정치인같은 해외인사들이 들른다고 한다(…). 참고로 이 라푸라푸 동상은 한국 극우반공단체인 자유총연맹에서 세워준 거다. 아무래도 필리핀이 6.25 전쟁 당시 UN군 소속으로 대한민국을 도와준 우방국이고 냉전 때 같은 아시아권의 반공 국가로 교류가 많아서 그런 듯. 스페인이랑 포르투갈에서 불쾌해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사실은 듣보잡
물론 생존자들을 통해 마젤란과 스페인 선원들의 죽음은 스페인 정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스페인 정부는 보복을 결심해 대규모 원정대를 필리핀으로 보낸다. 필리핀에 도착한 스페인 원정대는 조직적인 공격으로 적대적인 필리핀 원주민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했다.[36] 특히 저항이 심했던 사이판 섬의 차모로족은 잔혹하게 학살당하였고 다른 섬으로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하면 스페인은 이 지역을 지배할 수 없었으나, 포르투갈과 시라고사 조약을 새로 맺으면서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다. 그리고 다시 미국-스페인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식민지로 변한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큰 십자가가 필리핀에 세워져있는데 이거 또한 현재는 보호판으로 둘러싸여있다. 과거에는 이걸 조금씩 떼어내서 먹으면(?) 몸에 좋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좋은 미신과 같이 반대로 침략자 수괴 XX를 뭐하러 기리냐며 허구헌날 십자가에 불을 지르거나 저주하거나 고소해하는 글귀를 적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 ↑ 부상 후유증으로 보행이 불편했다 하며, 이는 나중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 ↑ 원주민 아내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는데 말이 원주민이지 몰루카 제도에 사는 나름대로 괜찮은 수준의 사람으로 생각해도 좋다. 이 당시 향료 무역을 위해 진출한 유럽인들이 현지처를 가지는 건 평범한 일이었고 현지처들도 상인 계통 인물들이 많았다. 현지처 입장에서 말하자면 권위와 무력으로 상권을 뒷받침하는 것. 마젤란이 결혼한 현지처가 상인 계통인지는 모르지만...
- ↑ 이 분 대항해시대 2에도 지리학자로 등장하신다.
- ↑ 당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신대륙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던 스페인은 파나마 지협을 육로로 횡단하여 태평양의 존재를 이미 확인하였고, 남아메리카 남부의 라플라타 강 하구에까지 함대가 진출한 상황이었다.
- ↑ 산안토니오, 콘셉시온, 트리니다드, 빅토리아, 산티아고 등 각각 다른 배수량의 갈레온 5척
- ↑ 모험항해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투자였고, 항해 중 손실을 메우기 위해서는 높은 수익률이 필요했다.
- ↑ 이는 포르투갈 정부를 화나게 만들어 마젤란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고, 그를 붙잡기 위해 훗날 대서양이며 향료 제도로 추적대를 급파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마젤란이 죽어서 실패
- ↑ 루이 팔레이로는 남위 40도 부근에 마젤란 해협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마젤란 해협은 훨씬 남쪽에 있다!!!
- ↑ 거기다 마젤란은 포르투갈인이었지만 함장과 선원들이 전부 스페인인이었기 때문에 외국인 주제에 너무한다며 이 갈등은 더욱 증폭된다.
- ↑ 정확히는 최초가 아니었고 후안 데 카르헤타나가 이전에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공동 사령관에서 박탈당했다.
- ↑ 5척 중 3척이나 반란을 일으켰다.
- ↑ 4인의 스페인인 선장 중 멘도사는 협상하는 척 하면서 죽였고, 케사다는 사지를 찢어서 끔살, 카르타헤나와 신부(사제)였던 페드로 산체스 데 라 레이나는 해변에 버려졌고 엘카노만이 용서받았다. 가담한 선원 40명도 일손 부족으로 용서해주었다.
- ↑ 마젤란은 발견할 당시에 빅토리아 호를 따서 빅토리아 해협이라 불렀다.
- ↑ 마젤란 선단에서 가장 큰 배였다. 한 때 선단에서 풍랑으로 이탈했던 산 안토니오 호의 선장 메스키타는 본 선단을 찾아서 합류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항해장이었던 에스테반 고메스와 선원들은 남은 식량이 3개월분 뿐이라는 것을 들어서 스페인으로 돌아갈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돌아가고 만다.
- ↑ 이전에는 이 배의 선장이 엘카노라고 적혀 있었다.
- ↑ 산 안토니오 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원정이 실패했다고 단언하며 모든 책임을 마젤란에게 덮어씌웠다. 덕분에 에스파냐에 남아 있던 마젤란의 가족은 당국의 탄압을 받았으며, 이런 오해는 마젤란의 사후까지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 ↑ 샌 안토니오 호의 합류를 기다리면서 척후를 파견하다가 해협의 돌파사실을 알게 된다.
- ↑ 이건 냉정하게 평가해서 일정정도는 자업자득+외부적 상황의 결합에 의한 것이었다. 마젤란은 원래 엄청난 양의 식량과 무기, 교역품을 싣고 항해에 나설 예정이었으나 포르투갈의 방해와 여타한 문제로 항해 준비에만 8개월 이상을 소모했지만 보급을 다 끝내지 못했고 식량은 착오로 인하여 절반도 싣지 못했다. 산 안토니오호의 회항이 선원들의 동조를 얻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특히 식량이 많이 실렸던 산 안토니오 호의 이탈은 원정대가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원인제공을 했다.
- ↑ 필리핀에서는 이 사람을 영웅으로 추대하고있다.
- ↑ 필리핀 원주민들은 스페인 원정대의 단단한 투구와 갑옷이 방어 하고 있지 않은 다리를 집중 공격했었다.
- ↑ 원주민군의 창에 끔살된데다 시체마저 수습하지 못했다고...
- ↑ 일부 사람들은 이 엔리케가 처음으로 세계 일주에 성공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엔리케는 필리핀 출신이었고, 마젤란과 함께 항해에 참가해 필리핀으로 돌아온 셈이기 때문. 물론 정설은 아니고 일종의 야사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 ↑ 다른 말로는 향료군도.
- ↑ 정향을 잔뜩 싣고 출발하려는 순간 침수가 발생했다. 결국 수리기간이 4개월이 걸렸다.
- ↑ 트리니다드는 이후 포르투갈 함대에 나포, 선원 중 단 4명만이 스페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 ↑ 빅토리아의 뜻(승리)을 생각해 보면 이름값을 한 셈이다..
- ↑ 1)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선장), 2)프란시스코 알보, 3)미구엘 데 로다스, 4)후안 데 아쿠리오, 5)안토니오 롬바르도(=피가페타), 6)마르틴 데 후디키버스, 7)에르난 데 부스타만테, 8)그리스인 니콜라스, 9)미구엘 산체스, 10)안토니오 에르난데스 콜메네로, 11)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 12)후안 로드리게스, 13)디에고 카르메나, 14)아첸의 한스, 15)후안 데 아라티아, 16)바스코 고메즈 갈레고, 17)후안 데 산탄드레스, 18)후안 데 주빌레타
- ↑ 이 책이 완전히 출판된 것은 18세기 이후이다. 그 전에는 책의 일부분만 출판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그나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프랑스어 판본으로 여러차례 변조가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 ↑ 다른 언어 위키백과에는 없다.
- ↑ 엘카노가 마젤란 해협에서 도주한 배의 선장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로 마젤란 해협에서 돌아간 배는 산 안토니오 호이고, 그 배의 선장은 메스키타라는 스페인 항해사이며 실제로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선장을 설득한 인물은 항해장이었던 포르투갈인 에스테반 고메즈이다. 이 배는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길에 섬들을 발견했다고 하는 곳이 일명 산 안토니오 제도 혹은 스페인어로 말비나스 제도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현대의 포클랜드 제도이다.
- ↑ 마젤란파였던 피가페타는 오히려 포르투갈인었던 마젤란과 스페인 항해사의 대립에 대해서 약간 두루뭉술하게 넘긴 흔적이 있다.
- ↑ 그래서 엔리케의 세계일주가 언어적이라면, 마젤란의 세계일주는 수학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 ↑ 그래서 현재 최초의 세계일주를 한 사람은 엘카노를 포함한 18인으로 꼽는게 일반적이다. 마젤란이 아니다.
- ↑ 막말로 항해가 성공한 것은 엘카노가 이끌고 온 빅토리아호가 향료제도라고 불린 몰루카 제도에서 사온 향료 때문이었다. 몰루카 제도는 이미 알려져 있던 지역으로, 다만 이 지역이 포르투갈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뿐이다. 결국 이 항해의 이득은 이 향료 대금에서 나왔다.
- ↑ 현재 스페인 해군 해사생도 훈련함(기범선) 이름이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함이다. 한국 해군사관학교도 몇년에 한번씩 방문한다.
- ↑ 투항한 원주민들은 건드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