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칼도의 저주

1 개요

2008 시즌부터 2010시즌까지 K리그 FC 서울에 전해져왔던 저주

히칼도는 포르투갈 출신의 축구 선수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간 FC 서울에서 활약했다. 비록 푸른눈의 이방인이었지만 화려한 테크닉과 팀에 대한 무한한 애정, 확실한 팬 서비스로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히칼도는 2007년 터키 출신 세뇰 귀네슈 감독의 부임 이후 팀에서 입지를 상실해갔고 2007시즌 종료후 방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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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에 대한 애정이 실로 남달랐던 히칼도는 떠나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고 머리로는 그의 방출을 이해하던 팬들도 가슴으로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 서울은 한가지 지긋지긋한 징크스에 시달리게된다.

바로 히칼도의 자리를 대신한 3번째 외국인 선수가 하나같이 부진하거나 오래 머물지 못하고 훌렁 떠나버린다는 것이었다. 이장수 감독의 유산인 아디, 인천에서 검증된 데얀 다미아노비치를 제외한 서울의 세번째 용병은 늘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팬들의 신뢰를 얻지못했다.

서울 팬들은 이 현상을 히칼도의 저주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2 2008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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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칼도를 대체한 첫번째 용병은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의 키키 무삼파 였다. 프리메라리가 말라가와 프리미어 리그 맨체스터 시티에서 활약하며 상당히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고 귀네슈 감독이 지휘하던 터키 트라스존스포르에서 선수 생활을 한 적있는 무삼파는 그때까지 K리그를 거쳐간 용병들 중 가장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기대에 찬 서울은 '거물 미드필더의 영입' 이라면서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고 언론에서도 역대 최고의 EPL 출신 용병이라면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입국했던 히칼도와 달리 거창한 입단식을 치르고 들어온 무삼파의 데뷔전은 상암에서 열린 인천과의 하우젠 컵 경기였다. 선발 출장한 무삼파는 유려한 드리볼을 선보이며 서울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 냈습니다. 수호신들은 무삼파가 볼을 찰때마다 " 그래 이게 우리가 원했던 플레이라고!!" 라고 외치며 기대를 아끼지 않았다.

K리그의 빠른 템포를 따라가기에는 다소 느린 스피드와 불안정한 몸상태를 지적받긴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곧 컨디션을 찾을수 있을거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무삼파는 지속적으로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부진을 면치 몸했다. 킥과 센스는 좋았지만, 체력이 많이 부족해서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고 활동량이 적어 쉴새없는 공격과 패싱게임을 추구하던 귀네슈 감독의 전술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 후평이었다.

결국 무삼파는 2개월간 5경기만 치르고 계약 해지 수순을 밟았다. 서울은 역대 최고의 설레발이라는 타팀팬들의 비웃음을 뒤집어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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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삼파의 뒤를 이은 것은 터키 출신 미드필더 제이훈이었다.

귀네슈 감독과 동향이라 적응하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고 터키 출신 감독이 자신의 의중을 반영해서 뽑았을테니 이번에는 좀 낫겠지라는 의견이 많았다. 서울은 투르크 특급이라는 거창한 닉네임을 붙이고, 제이훈의 영입을 발표했다.

그러나 서울은 곧 속았다는걸 알게된다(…).

역시 킥력이 좋고 센스가 있는 선수이긴 했지만, 활동량이 적고 플레이는 공수 양면에서 하나도 특출날거 없는 밍밍한 수준이었다. 인천에게 컵대회에서 K리그 커리어 중 유일한 골을 뽑아냈지만, 당시 인천은 컵대회에 의욕없이 2군 내보내기 바빴던 상황이라서 큰 의미는 없었다. 게다가 시즌 중에 대상포진에 걸려서 시즌 막판 서울과 수원의 1위 쟁탈전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결국 8경기를 치룬 채, 제이훈은 터키로 돌아갔다.

3 2009시즌

미드필더를 영입하며 두번이나 실패를 맛본 서울은 이번에는 수비수를 영입했다. 프랑스 국적의 케빈 하치. 거창하게 선전했다 또 피보기 싫었는지 조용히 영입된 케빈은 그런데로 서울에 잘 녹아들어가는가 싶었다. 그러나...

시즌 개막전에서 전남을 6대 1로 탈탈탈 털면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두었던 서울의 다음 상대는 그해 처음 창단된 강원 FC였다. 괴물 공격수 김영후를 앞세운 강원은 원정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밀리지 않고 치열하게 맞불을 놓았다. 0-0으로 팽팽하게 맞섰던 전반 39분,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코너킥 상황에서 강원 선수가 헤딩슛을 하자, 케빈이 그대로 날아가서 펀칭해 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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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안이 벙벙해진 심판은 바로 레드카드를 꺼냈고, 열두살 케빈은 쓸슬히 '나홀로 락커룸'을 찍으러 들어가 버렸다. 실점 위기도 아닌데 왜 손을 썼는지는 지금도 미스테리다.

서울은 08년 이청용, 구경현이 핸드링으로 퇴장당한데 09년 케빈이 화려한 핸드링 반칙을 선보이며 축구장에서 배구한다는 비아냥을 들으며 개망신을 당했다.

그래도 케빈의 플레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수비는 그냥저냥 무난한 수준이었지만 센터백은 물론 오른쪽 풀백까지 소화할수 있는 멀티플레이어라 유리몸 이종민과 안태은이라는 그 해 리그 최악의 오른쪽 풀백외에는 자원이 없던[1] 서울의 측면에 보탬이 되었다.

하지만 펀칭의 임펙트가 컸던데다 당시 야심차게 전관왕을 노리던 서울은 무난한 정도로는 K리그와 ACL을 모두 잡기 힘들것이란 판단에 케빈을 집으로 보냈다. 11경기를 뛴것이 K리그 커리어의 전부.

뒤를 이어 서울을 찾은 선수는 192cm의 장신 스트라이커 안데르손이었다.

터키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던 안데르손은 초반부터 연속골을 뽑아내면서 서울의 새로운 공격자원으로 자리매김 하는듯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팀 전술이 문제였다. 다이렉트한 패스 플레이 위주였던 서울 공격전술은 전방에 위치한 안데르손의 장신을 활용한 포스트 플레이를 거의 보여주지 못했고 안데르손은 얼마안가 전방에 홀로 고립되는 일이 많아졌다.

공격루트 다변화에 실패한 서울은 결국 무관으로 시즌을 접어야 했다. 3경기 연속골을 넣으면서 팀에게 승점을 안겨주긴 했지만, 서울과의 이질적인 팀컬러를 보이며 녹아들지 못한 안데르손도 귀네슈 감독과 함께 서울을 떠나야 했다. 그가 K리그에 남긴 기록은 13경기 4골 1도움.

4 2010시즌

2010시즌 새롭게 온 선수는 세리에에서도 뛰었던 에스테베즈였다. 포르투갈 출신이라는 히칼도의 향수를 떠올린 팬들도 적지 않았다. 존 듀어든은 칼럼에서 서울의 격에 맞지 않는 선수라고 지적하긴 했지만, 신임 빙가다 감독은 오랫동안 지켜본 선수라면서 영입을 추진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본 에스테베즈의 플레이는 그저 그랬다. 윙으로 쓰기에는 발이 느린편이었고, 미드필더로 쓰기에는 볼터치나 패싱, 움직임이 날카롭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골과 어시스트는 기가막히게 잘 쌓아어 주면서 서울의 초반 고공행진을 이끌었다. 팬들은 그를 가리켜 스텟을 잘 쌓는다며 에스텟베즈라고 불렀다.

그러나 전반기가 끝나자 에스테베즈와 갑작스럽게 서울과 상호계약 해지를 하고 팀을 떠났다. 상호 발전을 위해 계약을 해지했다는데... 에스테베즈는 이후 유로파리그에 출전하는 CS 마리티무로 이적했다.

왜 이적료를 챙기지 않았는지 미스테리지만, 자세한 계약사항은 알 길이 없다. 어쨌든 14경기 4골 5어시라는 준수한 활약을 보였던 에스테베즈도 한 시즌을 못 버티고 서울을 떠났다.

5 마침내 풀린 저주

이렇게 몇년을 이어오던 저주는 2010년 7월 우즈벡특급 세르베르 제파로프를 6개월 임대로 영입하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합류했지만 좋은 테크닉으로 16경기 1골 7도움을 기록해 서울의 우승에 기여했다.

제파로프는 2011시즌 몰리나와의 호흡문제로 전해보다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다 7월 알샤밥으로 이적했으나 11시즌을 앞두고 성남 일화 천마에서 영입된 몰리나가 본격적으로 터지면서 저주를 완벽하게 깨부셨다. 성남 시절부터 '몰느님'이라 불리며 특급용병으로 대우받았던 몰리나는 이적 초기에는 데얀, 제파로프와 동선이 겹치는 문제로 고전했으나 제파로프 이적후 데얀 호흡이 좋아지며 데몰리션이란 역대 최고의 용병듀오를 구성해 서울의 후반기 상승세를 주도했다. 데몰리션은 최용수 감독의 혹사로 몰리나의 폼이 하락한 13시즌 후반기 이전까지 리그 최고의 공격콤비로 자리잡아 12년 우승, 13년 AFC 준우승을 이끌었다.

  1. 시즌 내내 팀의 구멍으로 삽을 푸다 09시즌 종료 후 최효진과 트레이드되어 포항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