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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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히카르두 누누 케이로스 나시멘투
(Ricardo Nuno Queirós Nascimento)
K리그 등록명히칼도 (Ricardo)
생년월일1974년 4월 19일
국적포르투갈
출신지빌라노바데가이아
포지션미드필더
신체 조건183cm, 75kg
유스 팀FC 포르투 (1985~1988)
레이숑이스 SC (1988~1992)
소속 팀레이숑이스 SC (1992~1994)
보아비스타 FC (1994~1997)
CD 아브스 (임대) (1995~1996)
바르짐 SC (1998)
CD 아브스 (1998~1999)
질 비센트 FC (1999~2000)
몽펠리에 HSC (2000~2001)
질 비센트 FC (2001)
SC 브라가 (2002)
SC 살게이로스 (2002~2003)
FC 마이아 (2003~2004)
히우 아브 FC (2004~2005)
FC 서울 (2005~2007)
CD 트로펜스 (2007~2008)
CD 아브스 (2008~2010)
2005년 K리그 도움상
홍순학(대구 FC)히칼도(FC 서울)슈바(대전 시티즌)

1 소개

포르투갈의 전 축구 선수. 포르투갈 리가의 레이숑이스 SC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내고 프로에 데뷔했다. 1993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포르투갈 U-20 대표팀으로 참가하여 조별예선 3차전에 출전하였다.

1994년 포르투갈의 명문 보아비스타 FC로 이적했으며 이후 여러 클럽을 전전하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K리그 FC 서울에서 활약했다.[1]

K리그에서 뛰는 동안 서울 팬들에게 완전소중 히칼도로 불렸고,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으며 히칼도 콜인 아이 러브 히칼도 송 역시 서울 팬들에게 추억의 선수 응원가로 남아있다.

2 영입배경

2004년 연고지 복귀라는 강수를 두고도 부진을 면치 못했던 서울은 2005년 전력보강과 흥행을 위해 다각도로 총력을 기울였다. 성남에서 FA 최대어로 꼽힌 이기형을 데려왔고, 전남에서 백지훈을 이준영과 맞트레이드 했으며 대구에서 노나또를 임대하고, 박성배를 전북에서 트레이드 해왔다. 신인선수로 곽태휘, 김태진, 이상협, 김호준[2]을 입단시켰으며 한국 축구의 희망으로 떠오르던 박주영을 고려대에 잔디 깔아주고 포항 스틸러스 항의는 박주영 개인의 문제라고 떠넘기는 공을 들이며 데려오면서 숨가쁜 이적시장에 화룡정점을 찍었다.

브라질과 동유럽계가 태반인 K리그에서 낯선 존재였던 히칼도는 제대로 된 기사 한줄 없이 조용히 서울에 입단했다.

3 활약상

소리소문 없이 입단해 안양의 히카르도가 히칼도로 개명했냐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인지도가 없었던 히칼도는 개막전부터 그 뛰어난 기량과 존재감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전남과의 개막전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와 활발한 볼 배급으로 팀의 공격을 진두지휘하고 3-2로 뒤지던 순간 멋진 코너킥 어시스트로 팀의 무승부를 이끌어 낸것. 이러한 히칼도의 도우미 본능은 경기를 할수록 점점 빛이 나기 시작해 팀의 프리킥과 코너킥을 전담하면서 그해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박주영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호되게 당한 서울의 상대 팀들은 후반기 들어서자 대놓고 '히칼도를 묶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할 정도로 히칼도를 경계했다.[3]

05시즌 히칼도는 리그 1골 9도움이라는 기록으로 도움왕을 차지했다. 컵대회를 포함한 전체 기록은 4골 14도움. 그해 서울의 성적은 오히려 떨어졌지만, 박주영이라는 새로운 아이콘을 만들어내며 관중몰이에 성공함으로써 강팀으로 치고 나갈 기반을 마련했다.

06시즌의 히칼도는 초반에는 그다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초반 체력적인 문제를 드러내면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박주영과 정조국 등 기존에 호흡을 맞추던 선수들까지 삐걱거리면서 서울 전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전기리그가 끝난 후 김은중, 정조국 등의 플레이가 살아나자 히칼도의 킥도 점차 부활해 그해 서울의 컵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히칼도의 날카로운 킥에 이은 김은중, 정조국의 포스트 플레이는 당시 서울의 핵심 공격루트였다.

이해 히칼도는 3골 7도움으로 전년만 못한 공격포인트를 기록했으나 그의 비중은 여전히 거대했다.[4]

07시즌 이장수 감독이 사임하고 세뇰 귀네슈 감독이 부임하면서 히칼도의 입지는 순식간에 좁아졌다. 귀네슈 감독은 히칼도가 나이가 많고 플레이 스타일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방출의사를 보였으나 히칼도는 강한 잔류의지를 표명했고 어찌어찌 서울과 1년 재계약에 성공하면서 07시즌을 맞았다.[5]

그러나 귀네슈 체제의 서울에서 히칼도는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귀네슈는 히칼도의 훈련 태도가 불성실하다며 다시 한번 방출을 통보했었고 히칼도는 면담을 통해 다시 서울에 시즌 끝날때까지 남는다는 확답을 받아냈다.[6]

이후 서울의 주전들이 연이은 부상으로 대부분 전열에서 이탈하면서 히칼도는 기회를 잡게되었다. 하지만 그의 복귀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고[7] 지나친 쇼맨쉽과 다혈질로 카드를 긁어 모으면서 귀네슈 감독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07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대구FC와의 경기에서 1-0으로 패하면서 서울은 대전에 밀려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비기기만 해도 성공이었던 이날 경기에서 히칼도는 열심히 뛰어다니며 결정적인 찬스도 잡았으나 골대를 맞히면서 서울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좌절되었되고 히칼도의 K리그 도전도 끝났다.

4 포르투갈 복귀 이후

이후 히칼도는 고국 포르트갈로 돌아가 2부리그 CD 트로펜세(C.D Trofense)로 이적하여 팀의 1부리그로 승격에 공헌했다. 이후 CD 아베스(CD Aves)라는 2부리그 팀에서 뛰다가 2010 시즌 직전 은퇴하였다.

2010년 서울에게 연고지 복귀 후 첫 리그 우승을 안긴 넬로 빙가다 감독은 서울에서 오퍼가 들어오자 히칼도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가 서울을 적극 추천하여 한국행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를 밝히기도 했다. 히칼도 이후 서울의 3번째 용병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방출되는 양상이 2008년부터 2010년 여름까지 반복되었는데 서울 팬들은 이러한 현상을 히칼도의 저주 라고 불렀다.

5 플레이 스타일

뛰어난 프리킥과 칼같은 패스, 정교한 크로스와 슈팅, 아름다운 조율능력을 자랑했지만 느린 발에 몸싸움 능력이 떨어져 상대의 압박에 극히 취약했고 팀 공격이 전적으로 히칼도 개인에게 의존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만약 그를 공격중심에 놓지 않을경우 잉여자원에 돼버리곤했다. 고전적 플레이메이커의 모순을 너무나도 극명하게 드러냈던 선수.

6 기타

실력 외적인 요소로 팀에 대한 충성심이 굉장히 강하고 쇼맨쉽이 뛰어났던 선수이기도 하다. 골을 넣을 때면 언제나 팬들에게 달려가 환호를 이끌어냈고 가끔은 타팀 팬들을 자극하기도 했다. 2005시즌 '레알수원'으로 불리던 호화군단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고 그랑블루 앞에서 세레모니를 선보였고 2006시즌 컵대회에서 역시 그랑블루를 상대로 세레모니를 펄쳐 수십개의 물병이 경기장에 날아들게 만들었다.[8]

이런 행동으로 불필요하게 카드를 받아서 감독이 골머리썩고 경기를 거칠게 만들기도 했지만 팬들의 인기도 한몸에 사서 그가 떠나고 몇 년간 서울 팬들은 진정한 서울의 영혼, player of Seoul은 히칼도 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다. 겨우 3시즌. 그나마 한 시즌은 감독 눈밖에 나 제대로 뛰지 못했던 선수가 이런 평가를 받는다는 데서 히칼도가 서울 팬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푸른 눈의 이방인이었지만 누구보다 팀을 사랑하며 팬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보람으로 삼았던 진정한 프로.
  1. 이장수 당시 서울 감독은 포르투갈에 와서 히칼도의 경기를 관전하고 직접 히칼도를 만나 한국에 와달라고 간청할 정도로 정성을 들였다.
  2. 4명 모두 지금은 서울을 떠났다. 가장 크게 성공한 선수는 곽태휘.
  3. 이 때문에 히칼도의 어시스트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장수 감독은 후반기 막판에는 아예 히칼도를 빼고 박주영을 공미로 기용하는 강수를 두었다.
  4. 다만 히칼도에 크게 의자하는 단조로운 공격루트는 이때부터 계륵으로 지적받았다.
  5. 이때 히칼도는 "내가 남는 것은 오직 팬들을 위해서" 라는 말로 소감을 밝혔다.
  6. 이무렵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2007시즌 슈퍼매치에서 1-0으로 패한 이후 '감독이 생각하는 내 문제점이 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쏟았다.
  7. 히칼도가 아무리 패스를 찔러주고 크로스를 올려도 박주영, 정조국, 김은중이 모두 부상으로 이탈하고 성남 시절보다 확연히 폼이 떨어진 두두와 전문 공격수도 아닌 이상협만 남은터라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
  8. 이 골로 서울은 수원의 홈인 빅버드에서 2004년 서울로 연고지 복귀를 하여 1990년 서울 연고지에서 리그 우승 이후 다시 서울 연고지에서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기에 서울 팬들로선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물론 수원 팬들은 뒷목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