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8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항공기
전투기영국에어코 DH.2, RAF F.E.8, 숍위드 펍, RAF S.E.5, 솝위드 삼엽기, 솝위드 카멜, 솝위드 스나이프
프랑스Morane-Saulnier L, Morane-Saulnier N, 뉴포르 시리즈, 스패드
폭격기경 폭격기RAF R.E.8
중 폭격기핸들리 페이지 폭격기 시리즈, 빅커스 비미, 일리야 무로메츠, Caudron G.4,카프로니 시리즈
기타 항공기샘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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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원

34851669.jpg

  • 전장 : 8.5m
  • 전고 : 3.47m
  • 익폭 : 12.98m
  • 엔진 : RAF4a(150hp)
  • 최고 속도 : 해수면 고도에서 166km/h (103 mph, 90 knot)
  • 실속 속도 : 76 km/h (47mph, 41knot)
  • 비행 시간 : 4시간 15분
  • 실용 상승 고도 : 4,115m (13,500ft)
  • 상승 시간 : 1,980m (6,500ft) 까지 21분.
  • 무장
  • 폭장량 : 102 kg
  • 생산대수 : 4099대

2 개요

[1]
1916년부터 1차 세계대전동안 영국군이 운영한 복엽 복좌 폭격기정찰기. 로열 에어크래프트 팩토리(RAF)에서 개발되었으며 기존에 운용되고있던 B.E.2 2인승 복엽기를 대체하고자 개발된 새로운 항공기였다. R.E.8 복엽기는 당시 대부분의 2인승 복엽기가 주로 수행했었던 임무인 정찰 활동과 폭격 임무 그리고 아군의 포격 지점을 유도해주는 지원 비행을 1916년 말 부터 전쟁이 끝나는 1918년 까지 도맡아 수행했을 정도로 영국에서 널리 사용된 기종이었다.

3 개발과정

정찰 실험기체 8호(Reconnaissance Experimental 8)라는 가명칭 아래 1915년 말 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같은 곳에서 개발중이던 단좌 항공기인 B.E.12 복엽기와 비슷한 시간대에 개발되었던 탓인지 굉장히 비슷한 외형을 지녔었다.
Raf_BE12.jpg
B.E.12

다만 이착륙시 더 나은 비행 성능을 얻고자 R.E.8의 엔진이 뒤 쪽으로 약간 경사지게 설치되었다는 점이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특이하게도 배기구가 위쪽 날개위로 뻗어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데, 조종사가 매연을 뒤집어 쓰지 않도록 배기구가 수직으로 향함과 동시에 배기구 끝이 윗 날개 위 쪽으로 돌출되어서 매연을 공중으로 날려버리는 용도였다.
2인승 항공기에 대한 인식이 전투기에서 경폭격기나 정찰기의 개념으로 바뀐 뒤로 새롭게 만들어진 R.E.8은 1916년 6월 17일에 두 대의 시제기가 만들어져서 첫 비행을 마쳤으며 7월에는 두 번째로 만들어진 두 대의 시제기들이 프랑스로 보내져서 시험 비행을 실시했다. 프랑스에서 평가된 R.E.8 복엽기는 굉장히 성공적이었으며 조종사들 또한 이 새로운 항공기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해서 9월 부터는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했다. 후방 무장은 기본적으로 기관총의 방향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스카프 링(Scarff ring)에 달린 루이스 경기관총 이지만 초기에는 스카프 링 없이 그냥 기둥에 루이스 기관총을 설치해서 임시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이후 히스파노 수이자 엔진을 장착한 개량향인 R.E.8a도 등장하였다.

3.1 기타 장비

후방 사수석에 매우 기본적인 조종 장치가 설치되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접어놓고 있지만 유사시에는 승강타나 방향타를 조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엔진 출력을 조절하는 쓰로틀 까지 조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보조 날개는 조종하지 못했다.

4 실전


정찰용 카메라를 점검중인 R.E.8의 조종수

폭탄을 장착중인 승무원들

보통 신예기종이 배치를 받을 때 정예 부대로 배치되는 것과 달리 경험이 부족한 영국 육군 항공대 소속의 제 52 비행중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구형 B.E.2 복좌기를 사용하던 초보 파일럿들은 별로 만족하지 못했다.


52 비행중대의 조종사들은 착륙하던 도중 급작스럽게 실속에 빠지는 사고를 자주 겪기 시작했으며, 이와 같은 사고로 몇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신형기에 대한 신뢰는 급격하기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런 항공기를 지속적으로 몰아야했던 조종사들의 사기 또한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기 시작하는 역효과가 발생했다. 결국 이들은 1917년 1월에 34 비행중대가 사용하던 B.E.2e와 교환하게 되면서 R.E.8 를 떠나 보냈는데 52 비행중대의 조종사들은 성능이 떨어지지만 익숙하고 안전한 B.E.2e 복엽기를 다시 조종하게 된 것에 대해서 굉장히 고마워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34 비행중대에 배치된 이후로는 착륙과정에서 발생하던 사고가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34 비행중대의 기량이 뛰어났었던 덕분이었다. 이 덕분에 R.E.8 복엽기의 재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이어서 구식의 B.E.2 복엽기를 빠른 속도로 대체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이 착륙시 별다른 사고를 겪지 않았던 비법은 바로 고속을 유지하면서 착륙하는 것 이었다.[2]

한편 스핀에 자주 빠진다는 평가를 듣자 설계자들은 조종사들의 우려를 없애고자 스핀에 빠진 상황에서 더 쉽게 회복할 수 있도록 수직 안정핀의 면적을 살짝 더 늘리는 개수를 가하여 안정성을 높여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했다. 수직 안정핀의 개선으로 R.E.8의 양산형들은 B.E.2e 만큼이나 안정될 수 있었고, 이 덕분에 포격 유도 비행이나 사진 정찰 활동에서도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며, 적 전투기와의 교전에서도 잠깐이나마 적기의 기동력을 상회할 수 있었고 아예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기체에는 더 커다란 수직 안정 핀이 장착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어 R.E.8이 상당히 많이 배치되었을 무렵은 연합군 조종사들에게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던 고성능의 알바트로스 전투기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고, 이 결과 피의 4월이라고 불렸던 1917년 4월 부터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지막지한 손실율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3] 다만 피의 4월이 신형 전투기의 등장과 조종사들의 기량 향상으로 끝나감에 따라 손실률은 줄어들었지만 일부 조종사들을 제외하고는 이 느린 구형 기종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1. 영상에서는 후방 사수가 탑승하지 않았다.
  2. 현장에서 조종사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R.E.8의 착륙 속도가 B.E.2e보다 빨랐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두 항공기에 사용된 날개의 크기가 비슷했었던 반면에 R.E.8의 중량이 B.E.2보다 더 훨씬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R.E.8 복엽기는 착륙시 B.E.2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야 실속에 빠지지 않고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었다.
  3. 이 기간에 R.E.8기의 피해가 어느정도였는지 잘 알 수 있는 우울한 일화가 있는데, 1917년 4월 13일, 영국 육군 항공대 소속의 59 비행중대에서 이륙한 6대의 R.E.8은 정찰 임무를 띄고 독일군의 참호 전선 위로 날아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필이면 붉은 남작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이 지휘하는 6대의 알바트로스 전투기를 만나게 되었고 리히토펜의 알바트로스 전투기들은 이들을 5분만에 모조리 격추시켜버렸다고 한다.전멸이라고? 5분도 채 안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