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다른 뜻에 대해서는 아래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 이 책을 통해 공포된 문자 체계에 대해서는 한글 문서를 참고할 것. 이 문서에서는 《훈민정음》이라는 책과 문자 체계가 아직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조선 시대에서의 취급에 대해서만 다룬다.

《訓民正音》

1 개요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1]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443년) 12월 30일 경술 2번째 기사

이름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창제일은 1443년 12월. 다만 책이 발간된 1446년 9월을 기준으로 하여 오늘날의 한글날이 만들어졌다.[2]

2 서문

여기에서 충남대학교 김차균 교수의 발음으로 전기 중세 국어음에 해당하는 재구음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이렇게 소리를 낸 것 같다고 추측한 것이지 실제로 그러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 나눔바른고딕 옛한글, 나눔명조 옛한글(이 둘은 여기서 다운 가능), 함초롬체 LVT(아래아 한글 항목 참고), 본고딕(또는 Noto Sans CJK KR, 여기서 다운 가능) 중 하나가 설치되어 있으면 제대로 보인다.
  • 원문 표기와 발음, 현대어역을 실었으며, 발음의 경우 전기 중세 국어의 발음을 재구하여 국제음성기호로 표기하였다.
    • 'ㅈ, ㅊ, ㅉ'은 치경음(\[t͡s~d͡z, t͡sʰ, t͡s˭\])으로 표기하였으며, 치경음 뒤에 'ㅣ'계열 모음이 붙어도 구개음화하지 않은 것으로 표기하였다. (예: 샤=\[sja\]), 쟈=\[t͡sja\])[3]
    • 어두자음군은 자음의 연속체로 표기하였다. (예: ㅳ=\[pt\])
    • ㆆ과 ㅸ은 각각 \[ʔ\], \[β\]으로 표기하였다.
    • 모음 ㆍ, ㅓ, ㅡ는 각각 \[ʌ\], \[ə\], \[ɨ\]로 표기하였으며, 이중모음 및 삼중모음은 본모음에 \[j\] 혹은 \[w\]를 붙여서 표기하였다. (예: ㅐ=\[aj\], ㅔ=\[əj\], ㅟ=\[uj\])[4]
    • 받침 ㅅ은 \[s\]으로 표기하였으며, 파열음 계열 받침은(받침 ㄱ,ㄷㅂ 따위) 불파음화를 반영하였다. (예: 랏=\[ɾas\])[5]
    • 성조 표기는 높은 소리의 경우 \[˦\], 낮았다가 높아지는 소리의 경우 \[˨˦\], 낮은 소리의 경우\[˨\])을 붙여 표기하였다. (예: 나랏〮말〯=\[na˨.ɾas˦.mal˨˦\])
    • 동국정운식 한자음에서 된소리는 전탁음을 된소리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고 된소리로 표기하였다.
  • 한자 為(할 위)는 약자로, 爲쪽이 정체자이나, 원문 표기가 為에 가까워 그대로 표기하였다.
  • 전공자 분들의 수정바람.
(원문)


世솅〮宗조ᇰ御ᅌᅥᆼ〮製졩〮訓훈〮民민正져ᇰ〮音ᅙᅳᆷ
나랏〮말〯ᄊᆞ미〮
中듀ᇰ國귁〮에〮달아〮
文문字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姓셔ᇰ〮이〮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
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몯〯ᄒᆞᇙ노〮미〮하니〮라〮
내〮이〮ᄅᆞᆯ〮為윙〮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사〯ᄅᆞᆷ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 便뼌安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

(현대어)

세종어제 훈민정음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 이를 위하여 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여겨 날마다 쓰기에 편한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국제음성기호)

sjəj˦.d͡zoŋ˨.ŋə˦.d͡zjəj˦ hun˦.min˨.d͡zjəŋ˦.ʔɨm˨.
na˨.ɾas˦.mal˨˦.s˭ʌ˨.mi˦ tjuŋ˨.guj˦.gəj˦ tal˨.ɦa˦.
mun˨.t͡s˭ʌ˦.wa˦.ɾo˦ sə˨.ɾɨ˨ sʌ˨.mʌs˨.ti˦ a˨˦.ni˦.hʌl˨.s˭ʌj˨.
i˦.ɾən˨ t͡sjən˨.t͡sʰʌ˦.ɾo˦ ə˨.ɾin˦ pʌjk̚˦.s˭jəŋ˦.i˦ ni˨.ɾɨ˨.go˦.d͡zjə˦ hol˦.p˭aj˦ i˨.sjə˦.do˦.
mʌ˨.t͡sʰʌm˦.naj˨˦ t͡səj˨ ptɨ˨.dɨl˦ si˨.ɾə˦ pʰjə˨.di˦ mot̚˨˦.hʌl˨ no˦.mi˦ ha˦.ni˦.ɾa˦.
naj˦ i˦.ɾʌl˦ uj˦.hʌ˦.ja˦ ə˨˦.jəs˨.pi˨ nə˨.gjə˦.
saj˦.ɾo˦ sɨ˦.mɨl˦.jə˨.dɨl˦.t͡s˭ʌ˦.ɾʌl˦ mʌjŋ˨.gʌ˦.no˨.ni˦.
sa˨˦.ɾʌm˨.ma˨˦.da˦ hʌj˨˦.jə˦ su˨˦.βi˨ ni˨.gjə˦ nal˨.lo˦ psu˨.məj˦ p˭jən˨.ʔan˨.kʰɨj˦ hʌ˦.go˦.d͡zjə˦ hʌl˦.stʌ˨.ɾa˦.mi˦.ni˨.ɾa˦.

  • 위의 훈민정음의 언해본 서문 글이 깨진다면(서문만 궁금한 경우 . 모든 것을 보는 경우에는 바로 밑의 사이트에 가서 볼 수 있다.)
이 블로그에 들어와서 볼 수 있다. pdf도 제공해주어 다운해서 볼수 있다. [1]
  • 언해본의 나머지 원문과 그 현대어 해석은 여기서 볼 수 있다.
  • 억양을 들어보면 서울 사투리와 비슷하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 文字는 전통적으로 한자를 칭하는 표현으로, 최소한 설문해자 때부터 등장한다.(비슷한 맥락으로 한문은 원래 文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홍윤표 전 연세대 교수는 원문의 文字가 뜻하는 것이 글자 또는 한자가 아니라 '한자로 된 숙어나 성구(成句) 또는 문장'이라고 한다. '문자 쓰고 앉아 있네' 같은 표현의 '문자'와 같다고 한다. 즉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문 구(句)·문장과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으로 (한문 구·문장을 쓸 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능히 말할 수가 없다'라고 한다. 또한 왜 '문자'를 새로 만들었는데 훈민정문(文)이나 훈민정자(字)가 아니라 훈민정음(音)인지에 대해서도 이 점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주장은 이 글의 4쪽부터 13쪽을 참고.
  • 여기서 '이르고자'라는 뜻은 단순하게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란 뜻 외에도 민원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한문을 중시하던 조선이었기에 공문서는 당연히 한문으로 작성했을 것이고, 한문을 몰랐던 일반 백성들은 대필자를 비싼 돈을 주고 따로 구하여 민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6][7] 국가는 교서(敎書)를 반포하거나 각 기관에서 관-감결-전령의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했다.[8] 문제는 한문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었기 때문에 글을 아는 사람이 읽어준 뒤 구전으로 전하는 방식으로 정보가 전파되었다. 한글을 안다면 굳이 읽어주는 사람이 없이도 국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감영에서 군현으로 내리는 문서인 관에는 각 군현에서 한글로 번역하라는 명령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전령은 한글로 번역되어 각 마을에 붙여졌다.
  • '능히'라고 된 부분의 언해 부분은 '시러'인데, 직역하면 '얻어'('실어'가 아니다)이다.[9] 중세 한국어의 '싣다'는 현대 한국어의 '싣다'와 '얻다'라는 뜻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이 단어에서 파생부사 '시러곰'(능히)이 생겼다.
  • '사람이'라고 된 부분의 언해 부분을 직역하면 '놈이'이다.(위의 원문에 보면 '노미'라는 표기가 보일 것이다.) 당대의 '놈'은 비칭(卑稱)이 아니라 '사람'을 가리키는 평칭이었다.
  • 당시에 중국의 국호는 '명'이었고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던 표현이며, 문제의 '듕귁에 달아'는 '나라 가운데에서 달라(=국내에서 차이가 있어)'로 해석해야 한다는 사이비 역사 측의 트롤링 엉터리 주장이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중국은 중국이었다.[10] 애초에 '중국'이란 단어 자체가 중국 역대 왕조 및 국가를 통틀어 이르는 일련의 국가 체계를 의미하는 말이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11] '중국'이 중국(China)인 증거는 이 문서의 이미지. 훈민정음 언해본 이미지를 보면 '중국' 밑에 "황제가 계신 나라, 우리나라에서 흔히 하는 말로 강남을 말한다"라고 작은 글씨로 분명히 부연되어 있다. 강남은 장강(양쯔강) 이남을 말하며, 중국의 이칭 중 하나다. ‘강남 가는 제비’'강남 천자'와 같은 말에서도 나오는 표현. 명 초기에는 남경(난징)이 도읍이었기 때문. 게다가 한글과 같은 표음 문자는 지방마다 말이 다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한자와 같은 표의 문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3 관련 서적

3.1 언해본


세조 때 발간된 《월인석보[12]의 권두에 세종의 서문, 본문(예의)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한문(+현토)+언해'의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이것이 '언해본'이며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나랏말싸미…'도 여기서 나왔다. 이를 《훈민정음》 언해본이라고 부른다. 현재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은 1459년 간행된 《월인석보》에 붙어있는 것이며, 이외의 언해본으로 2종(박승빈본, 일본 궁내청 소장본)이 더 현전하지만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

그런데 사실 위 두 그림 중 아래 그림이 실제 《월인석보》에 실린 내용에 해당하며, 위의 그림은 창제 당시의 것으로 예상되는 모습을 국어사학회에서 디지털 기술로 재구한 것이다. 관련 기사. 서울대 김주원 교수의 저서 《훈민정음》(2013)에도 관련 서술이 나온다.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일단 제목이 《훈민정음》과 《세종어제 훈민정음》으로 각각 다르다. 또한 아래의 《월인석보》에 실린 언해 부분(한 줄에 우리말 작은 글자로 두 행을 써 넣은 부분)의 첫 네 줄은 같은 책 다른 대목의 언해 부분과 글자체나 글자 간격 등이 상당히 다르다. 전자가 뭔가 더 각진 글씨인 데다, 글자를 욱여넣은 듯한 모습. 여타 대목에서는 한 줄에 작은 글자 16자가 들어가지만 첫 네 행에서만은 20자까지 들어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세조 시대에 《월인석보》가 발간되었으므로, 선대 왕의 시호인 '세종'을 추가하는 과정에서 글자 수가 늘어났기에 목판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즉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그냥 《훈민정음》이라는 타이틀을 단 채로 위 그림과 같이 가지런한 언해가 붙었을 것이지만, 세종이 승하한 이후 세조 시대에 발간된 《월인석보》에 실린 《훈민정음》에는 '세종어제'라는 말을 추가하면서 언해 부분에도 글자를 추가로 욱여넣었던 것. 사실 '세종' 등의 시호는 해당 임금의 사후에야 붙여졌으므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쓰인 책에 '세종어제'라는 말이 쓰였을 리 만무하다.

2012년 10월 9일 한글날에 네이버에서 디지타이징 버전으로 무료 공개한 버전은 국어사학회에서 재구한 위 버전이 아닌, 《월인석보》에 실린 모습인 아래 버전이다. 보러 가기

3.2 실록본

《훈민정음》은 《세종실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해례본에는 실려 있는 '해례'와 '정인지 서문'을 제외한 '세종 서문', '본문(예의)'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를 실록본이라고 따로 칭하기도 한다.

3.3 해례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파일:Attachment/unesco-memoryoftheworld.gif
이름한글《훈민정음》 해례본공식명칭한글《훈민정음》
영어Hunminjeongeum Manuscript한자訓民正音
프랑스어Hunminjeongeum영어Hunminjeongeum Manuscript
국가·위치대한민국 서울분류번호국보 70호
소장·관리간송미술관소재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02-11
등재유형기록유산분류기록유산 / 전적류/ 목판본/ 관판본
등재연도1997년시설1책
제작시기1443년지정연도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조선, 1443년

훈민정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발음기호 등이 기록된 책으로 언어 창제 과정이 기록된 유일한 책이다. 자세한 내용은 훈민정음 해례본 참조.

4 조선시대 훈민정음 취급에 관하여

4.1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

한글을 창제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국문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문제이다. 한 예로 한글 창제 이후로는 양반들이 한문을 공부할 때, 우리말과는 체계가 애초에 다른 한문글의 구절마다 한글로 된 토를 달아서(현토) 훨씬 배우기 쉽게 하는 등 양반들에게도 무척 유용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양반은 한문을 배울 기회가 없는 부녀자[13] 및 평민들[14]과 글로 소통할 필요성이 있었고 천자문이나 소학같은 기초교육교재도 한글로 음을 달거나 뜻을 풀이하는 식으로 출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지라 기본 소양으로 한글을 모두 알고는 있었다. 물론 연암 박지원처럼 끝내 한글을 배우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실제 조선시대에 쓰인 한글은, 글 읽기보다 생계에 바빴던 평민층에 비해 오히려 양반 부녀자층이나 중인층에게 유용하게 쓰였으며, 특히 실질적인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중인층에게 유용했다는 점에서 통치 체제 강화에 적지 않게 일조하였음이 눈에 띈다. 세종이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지었다면, 정작 그의 치세에 한글로 번역되거나 반포된 책들이 《월인천강지곡》 같은 불교언해나, 아니면 이성계의 역성혁명[15]을 정당화하는 《용비어천가》 등의 책들 말고는 왜 그다지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지에 대해서도 고려해 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훈민정음》의 주된 창제 이유를 지배 체제 강화에서만 찾는 것은 성급한 오류이다. 애초에 양반들을 비롯한 지배층의 편의성이 주된 이유였다면 만들 때 반포 이유로도 그것을 내세우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고 반대에 부딪힐 이유도 훨씬 줄어든다. 더욱이 훈민정음의 창제는 이후 양반 지배층 이외의 계층들 사이에서도 문화를 꽃피우는 근본이 되었다는 점에서, 단지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 세종의 근본적인 의도가 관철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는 저서 《한글의 탄생》에서, 당대 조선에서 사용되던 기록은 모두 붓을 사용하여 한자로 쓰여진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붓으로 글씨를 쓸 때에 생기는 획의 삐침이나 획 사이의 여백, 그리고 글씨를 이어서 쓰는 연서 등은 필연적인 것이자, 동시에 글씨의 형태를 완성하는 데 있어서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자는 연필 등의 다른 필기구로 쓰여지지만 이러한 삐침은 사라지지 않고 획 자체에 포함되어 유지되고 있다. 만일 사대부들의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서 글씨를 만들었다면 당연히 그들이 사용하는 필기구인 붓을 사용할 것을 전제로 자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훈민정음》 책 자체는 붓으로 쓰여졌지만) 훈민정음의 자모만큼은 그러한 삐침 등이 완전히 생략된, 다시 말해 나뭇가지와 같은 원시적 도구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선과 원으로 이루어진 간결함의 극치를 보인다.[16]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붓을 쓰던 시대에, 훈민정음은 자형을 만드는 단계에서 이미 을 쓰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졌다. 노마 히데키는 훈민정음의 극도로 단순한 모양은 붓과 먹, 종이 같은 필기 도구를 살 형편이 안되는 백성들까지도 문자를 쓰게 될 것을 배려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저자의 말을 덧붙이면...

'훈민정음은 어리석은 백성이 모래 위에 나뭇가지로 낙서하듯 그리기에 어려움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참고로, 훈민정음에 연서와 삐침이 등장한 것은 창제 후 수 세기가 지나고 궁체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이와 비슷하게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많은 문자들이 대개 복잡하면서 장식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실용성만을 고려하여 장식성을 완전히 배제한 초창기 훈민정음의 모양은 어떻게 보면 당대의 서체 미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전위적인 형태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거의 근대 모더니즘을 연상케 한다.

즉, 세종이 한글을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훈민정음》 서문에도 잘 나와 있듯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펼칠 수 없는 백성들을 위해서였다.[17] 다른 이유가 섞여 있을지라도, 가장 중요한 목적을 덮을 수는 없다. 세종대왕이 공들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덕분에 당대의 많은 백성들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우리들까지도 한글을 잘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세종대왕이 뭔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한글을 만들었다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4.2 왕실 입장에서의 훈민정음

'언문'이나 '암클'은 구한말에 살았던 한글 학자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하어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조선시대 내내 '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글 비하와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

조선 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하늘이 내린 위대한 성인(聖人)이신 세종대왕범인(凡人)을 초월한 성지(聖知)로서 지어낸 글자이다. 여기에는 세종대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세종대왕의 업적을 드높이려는 의도가 있다. 바로 지금 이순간에 모든 사람들이 널리 쓰고 있는 문자보다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알기 쉽게 드러내는 업적은 없다. 심지어 현대에 조선 왕조를 비판적으로 보는 견해에서도 세종대왕과 한글을 부정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한글로 쓰인 문장은 속된 것이며 낮은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문자 자체는 왕조의 위업으로 여겨져 조선시대 내내 극한 칭송의 대상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왕이나 왕족들도 한글로 편지를 보낸 것이 많다. 여기 참조. 다만 위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편지를 한글로 보낼 때는 보내는 이 혹은 받는 이가 여자였다. 이는 조선시대에 여자들이 한자나 한문을 배우는 것이 금기시되었다는 사회적 배경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실제로 허난설헌 같은 사례를 제외하고 여자들에게 한문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주어진 적이 드물었다.

4.3 연산군의 훈민정음 탄압

연산군은 자신을 비방하는 언문(한글) 투서를 보게 되면서, 한글이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대상이라고 규정하여 훈민정음 사용을 전면 금지시키고 한글을 쓰는 자는 무조건 체포하도록 지시하였으며 관련 서적은 소각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이미 세종대왕의 확고한 업적으로 민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를 억압하였으니 연산군의 행동은 곧 조상이자 선대왕인 세종대왕의 업적을 모독하는 사례가 되었으며, 폭군 기질을 가진 연산군의 포악성이 만대에 드러났음을 알리는 사례이기도 하였다.

비슷한 사례로 연산군은 환관 김처선이 자신에게 훈계를 했다는 이유로 김처선을 처형한 후 처서조서로 바꾸게 하는 등 가 들어가는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지시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 시기 탄압은 말에서 그쳤는데, 그가 놀기위해 만든 흥청의 음악교본이 언문으로 제작되었다.

4.4 숙종

숙종이 뜬금없이 《훈민정음》 후서를 썼다. 왕이 후서를 썼다는 것은 숙종대에 새로이 훈민정음의 중간본을 냈다거나 내지는 이와 관련된 책을 낸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게 하지만 실록에 아무 기록이 없어 그냥 숙종이 책과 무관하게 쓴 것으로 보인다.

4.5 훈민정음에 대한 비하 표현 논란 - 언문과 암글(암클)

4.5.1 언문

'언문'이라는 표현이 정말로 한글/훈민정음을 낮추어 보는 표현인가, 양반들이 한글을 과연 어떻게 생각했는가, 한글 창제 당시에 반대가 있었던 것의 진의가 과연 무엇이었는가 등의 문제들도 학계에서조차 분명히 결론이 나지 않았으므로 쉽게 단정짓기 어렵다.

원래 언(諺)은 한문(고문, 문어)과 대비되는 '구어'를 말한다. 중국에서의 '한문'은 원래 전국시대부터 당나라 시대까지 쓰인 '고어'에 해당하고 이후에는 거의 텍스트의 형태로만 쓰였으며, 그 이후에 통용되는 구어 중국어는 이 한문과는 전혀 달랐는데, 바로 그 구어체 문장을 "언" 이라고 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서도 아마 한글 문장을 이런 구어체 정도로 본 것 같다. 실록에서는 이렇게 한글로 기록한 문장을 '언서(諺書)'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꼭 낮춰서 불렀다기보다는 그냥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구어)이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꼭 낮춰서 봤다고 보기도 어렵다.

국조보감에도 '언문'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일본의 가나 문자를 '언문'의 일종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리고 한글 창제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쓴 글이 있으니 참고할 것.

4.5.2 암글(암클)

언문에 이어서 중화권 문화에 익숙한 양반들이 한글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붙인 이름인데 이름의 뜻은 여자들이나 쓰는 천한 글이라는 뜻이었다. 원래는 암클이라고 불렀다[18] 현재 맞춤법에 따르면 암글이다[19].

'암글'이라는 호칭은 한글은 천한 여인네들이나 쓰는 천한 글이라며 한문을 중시했던 양반들이 비하하여 부른 것으로, '언문'에 비해서 매우 천박하기 짝이 없는 호칭이지만, 정작 한글이 여성들에 의해서만 쓰였다는 근거는 없다. 물론 처음에는 주로 사대부의 아내들과 여성들이 많이 사용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이 때 암클이라고 불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점차 쓰는 사람들이 많아져 사대부의 처와 일반 백성들이 주로 사용하다가 점차 사대부들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애초에 창제자인 세종 역시 성별과 신분을 막론하고 '사람마다 쉽고 널리 쓸 수 있도록' 창제한 글이라고 반포하였기 때문.

일본에서 한자마나\[真名\](=진짜 글자)라고 하였고, 고유의 표음 문자에 대해서는 가나\[仮名\](=가짜 문자)라 하였듯이, 한자에 대해서는 '형음의(形音義)가 일체인 참된 글자, 진짜 글자'로 보아, 남성 우월주의적 가치를 투영하여 남성적 글자라고 본 한편, 한글에 대해서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으며 소리만을 옮길 뿐인 보조적 문자, 진짜가 아닌 문자'로 보아 여성적 글자라고 보았기에 '암글'이라고 불렀으리라고도 짐작된다. 물론 이와 같은 성차별적 사상과 문자관이 오늘날에도 온당한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이 必要韓紙?

5 여담

국어학자들 가운데에서는 왜 '훈민정문(文)'이 아니라 '훈민정음(音)'이었을까 하는 물음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문자를 창제해 놓고서는, 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문자’라 하지 않고 ‘바른 소리’라 했을까 하는 것.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난립할 뿐 아직까지 이렇다 할 정설은 없는 실정인데, 이 의견들 가운데에서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감안하여 '새로 문자를 만든 게 아니다' 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국어학이나 사학이 아니라 언론학 교수의 글임은 감안하자. 또 성음의 원리를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예를 들어 알파벳에서는 동일 조음점과 조음방식인 v, f가 형태적으로 서로 완전히 관련없는 반면, 한글 ㄱ, ㅋ, ㄲ는 하나에서 다른 둘을 파생시켰고, 그것은 소리상의 차이를 나타낸다.

혹은 이전까지 여러 가지 한자음이 쓰인 것을 통일하기 위해 표준 기호를 제정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그 기호가 훈민정음이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은 한국에 사투리가 있는 것처럼 중국에서 사투리가 있었고, 그런 사투리들이 한국에까지 들어와 영향을 미쳤다는 것. 예를 들어. 꽃이름인 모란(牧丹)을 '목단' 이라고도 했고 '모란' 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한자표기의 통일화를 함께 발맞춰 훈민정음 창제 뒤 머지 않아 동국정운을 통해 조선 당대의 한자소리를 같은 때 중국(명나라)의 기준에 맞춰 소리를 다시 정립하고 싶어 했던 세종의 덕후 기질을 볼 때 훈민정음을 말의 음표로서 지었다는 추론도 해볼만 하다.

1443년 훈민정음 창제 후 시험삼아 사용해보기위해 1445년에 용비어천가를 완성했다. 용비어천가는 1446년 훈민정음 반포 이후인 1447년에 간행됐다.

애당초 글을 지을 때 초중종 삼성(三聲)이 모여야 합자(合字)를 이룬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ㅍㅜㄹㅇㅓ" 쓰지 말라고 하던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이렇게 낱자를 만들어 놓곤 다시 모아 쓰는 글꼴을 보인다. 훈민정음은 표음문자지만 한자처럼 한 토막마다 하나의 완성자가 들어간다. 이는 어쩌면 오늘날과 달리 훈민정음 만들었으니 한자버리고 한글만 쓴다던지 아니면 거꾸로 어디 천박하게 한글 따위를 섞어쓰냐며 한문으로만 주구장창 쓸게 아니라 섞어 쓰는것도 생각하고 지은 뜻인지도 모른다......오늘날 한글화 된걸 고맙게 여기자

  • 훈민정음 해례본에 일종의 이스터 에그가 있다는 식의 설이 있다. 해례본에 각 자음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ㄱ"을 설명하는 글자로 임금 군(君)자를, "ㄲ"을 설명하는 글자로 아기룡 규(虯)자를, "ㅋ"를 설명하는 글자로 즐거울 쾌(快)자를, "ㅇ"을 설명하는 글자로 일 업(業)자를 사용했는데 이를 합치면 君虯快業(군규쾌업), 곧 임금과 용(세자 문종)이 즐겁게 일을 이루었다는 뜻이 된다는 것. KBS 역사저널 그날 신문 기사
  • 훈민정음에 나온 중국을 지칭하는 듕귁이 대륙의 기상을 지칭하는 단어로 인터넷에서 쓰이고 있다.
  • 해례본에 따르면 글자를 만들 때 역학(易學), 즉 음양오행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페이지의 첨부파일에 원문과 해석이 있으니 참고.
  • 교육부 구 로고나 현용 통합 로고인 대한민국 정부 통합 상징의 글씨체인 '대한민국정부체' 역시 역시 훈민정음의 글씨체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6 관련 문서

7 대중매체 속 훈민정음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세종이 새 글자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하다가 "民音訓正(백성의 소리를 새김이 마땅하다)"을 쓴 후 아나그램을 시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개그 콘서트 위대한 유산 코너의 황현희가 등장할 때마다 훈민정음을 읊는데 "니르고져"를 건너뛰어버리고 "홇배이셔도"를 많이 반복한다.
  1. 언문이라는 표현이 훈민정음의 비하가 아니라는 주요 근거 중 하나.
  2. 반포일 기준 1446년 9월상한(10일) -> 양력환산 -> 1446년 10월 9일
  3. 중세국어에는 (변이음의 차원에서든 음소의 차원에서든) 경구개음이 없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4. 오늘날의 단모음 'ㅐ', 'ㅔ', 'ㅚ', 'ㅟ'이 중세국어에서는 전부 이중모음이였다.
  5. 받침 ㅅ이 발음되었다는 주장이 힘이 있다. 중세국어 당시에 받침 ㅅ이 정말로 음소를 가지고 발음이 되었냐는 논란은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여 확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6. 당시 민간문서(명문, 분재기, 소지 등)는 이두로 작성되었고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후에도 쭉 이두가 사용되었다. 이러다보니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은 대필을 담당한 필집(執筆)을 대동해서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후에도 문서는 이두로 작성된 것을 보면 문서에서 한글이 쓰이기는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양식도 일정하긴 했어도 지역별로 차이도 컸다. 그덕에 17세기 이후에 『유서필지』 처럼 문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적어놓은 가이드북 등이 발간되기도 했다. 반대로 왕실, 관청문서는 반드시 한문으로 작성했고 『경국대전』에 규정된 양식 그대로 작성되었다. 참고로 대필자는 글을 써주고 나면 수수료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수수료는 0.2~0.3%였다지만 성과에 따라 후하게 사례하거나 술값으로 퉁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7. 조선시대에서 민원을 올리기 위해서는 소지(所志)를 작성해서 관청에 제출해야 했다. 관청에서는 이를 보고 입안(立案)이라는 양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공증했다. 문제는 소지는 이두로 작성하는데 입안은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글을 읽지 못하면 입안을 받고도 그 지역에서 학식이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 그 뜻을 물어봐야 할 정도.
  8. 관은 상급기간(주로 6조→감영)에서 하달하는 문서고 감결은 감영에서 각 군현으로 내리는 문서였다. 전령은 군현에서 각 마을로 전달했다. 정조는 특이하게도 자기가 전령을 내리는 기행(...)을 했다. 관의 경우 동급기관끼리 문서를 주고받을 때도 쓰였다. 반대로 하급기관에서 올리는 문서는 계/첩정이었다.
  9. 이 '얻어'도 한문 부분의 '할 수 있다'라 뜻을 가진 得(얻을 득)을 직역한 것이다.
  10. 다만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중국(중화민국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고, 흔히 말하는 '중원(中原)'의 다른 표현이 바로 '중국'이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또는 '중화(中華)의 나라\[國\]', '세상의 중심(中心)이 되는 나라\[國\]'라는 의미로 '중국'이라 부른 것으로 이해해도 된다.
  11. '중국사'라고 해서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만 배우는 것이 아니듯.
  12. 월인석보는 석가모니의 생애를 다룬 일종의 불교 경전으로, 세종조의 《월인천강지곡》과 세조조의 《석보상절》을 합친 책, 《석보상절》에 해당되는 부분은 《월인석보》를 만들며 다시 썼기에 《석보상절》과 내용상 다소 차이가 있다.
  13. 예를 들어 집안의 여자 어른
  14. 드물지만 토지매매 계약서같은 것
  15. 실패했으면 역모다!
  16. 실제로 아이들이 한글을 처음 배울때 쓰는 글씨체를 보면, 삐침이 완전히 생략되고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며 사각형 모양을 가진다. 즉 판본체에 가깝다. 그리고 훈민정음은 처음 반포될때 이러한 글꼴을 지녔는데, 그야말로 '어리석은 백성'들에 최적화된 애민정신의 극치라 할 수 있다.
  17. 사실 그 이전에도 이두라는 문자 체계가 있었지만 이두 역시 한자의 음과 석(훈)을 기본적으로 알아야 했기에 사용 방법이 복잡했다.
  18. 성별을 의미하는 '암-, 수-' 등의 접두사는 뒤에 이어지는 일부 단어의 평음을 격음화하므로(e.g. 암컷/수컷, 암탉/수탉), 말음 'ㅎ'를 달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표기에 드러나지 않을 뿐 사실상 '아ᇡ-, 숳-'인 셈.
  19. 한글 맞춤법 제31항에서 '암-, 수-'가 붙었을 때의 격음화된다고 규정한 단어는 '암캐/수캐, 암컷/수컷, 암탉/수탉'이 있으며, 이외에도 '암캉아지/수캉아지, 암키와/수키와, 암탕나귀/수탕나귀, 암톨쩌귀/수톨쩌귀, 암퇘지/수퇘지, 암평아리/수평아리' 등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확인된다.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ᇡ-, 숳-'로 적용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암-, 수-'만을 붙인다.
  20. 자신과 친오빠 둘의 이름은 본 항목에서 따온 것이라고 방송에서 밝혔다. 해당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