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이 전투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가 두 번 있었다.

1 카르타고의 칸나이 전투

1.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BC 216년 8월 2일에 벌어진 카르타고군와 로마군의 결전.

포위 섬멸전의 교범
한니발 바르카는 이 전투로 전설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은 전력 열세를 완전히 뒤집고 로마의 주력군을 거의 전멸시켜 버렸다.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전투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칸나이는 로마인 이야기[1]를 통해 널리 퍼진 일본 발음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고, 한국 발음법으로는 '칸네'가 정확한 표현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사실 고전 라틴어 발음으로 읽으면 ae 이중모음은 ㅏㅣ가 되는 것이 맞다. 'Caesar'를 '체사르' 또는 '채사르'가 아니라 카이사르라고 읽는 것, 'Praetor'를 '프레토르' 또는 '프래토르'가 아니라 '프라이토르'라고 읽는 것을 생각해보자.[2] ae를 ㅔ 또는 ㅐ로 읽는 것은 교회 라틴어(그러니까 속라틴어)의 영향.[3]물론 고전 라틴어 발음은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에 고증으로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게 말 그대로 당대인의 발음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교회 라틴어 발음은 물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지만 이건 로마 말기의 속라틴어가 전해진 것이니 애초에 당대의 발음이 아니다. 어쨌든 어딘지만 알면 됐지 우리도 평양성 부를 때 피양성이라 안부르잖아

1.2 전투 전 경과

기원전 218년 한니발 바르카가 에스파니아의 친(親)로마파 도시 사군툼을 공격하면서 2차 포에니 전쟁이 개시된 이후, 한니발은 로마를 격파하려면 에스파냐아프리카에서 싸운다면 승산이 없고 로마의 본토를 직접 공격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1차 포에니 전쟁은 전역이 시칠리아북아프리카에 한정되었고, 상업국가인 카르타고는 오랜 전쟁에 경제적 타격을 입었으며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로마의 물량에 밀렸다.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뒤, 로마의 동맹시들을 카르타고 편으로 끌어들여 로마 연합을 해체해버린다면 카르타고의 승리라고 보았다.

한니발은 약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떠나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를 가로지른 뒤, 전설적인 알프스 등반 끝에 북이탈리아로 내려왔다. 이 때 한니발의 군대는 고작 보병 2만, 기병 6천에 불과했지만 갈리아족 용병을 설득하고 끌어들여 부족한 병력을 보강했다.

최초의 티키누스 전투에서 로마 기병을 격파한 한니발은 트레비아 전투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완파했다. 두 전투에서 전사한 로마군만 합쳐서 4~5만에 달했다. 이렇게 로마군을 섬멸한 한니발은 중부를 휩쓸긴 하였으나 로마로 진격하지 않았다. 로마를 포위하자니 공성무기가 부족한데에 로마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사군툼의 점령 때는 10만 이상을 동원했음에도 장기간의 격전 끝에 아슬아슬하게 점령한 것과, 또한 포위 중 아직 외부에 주둔중인 로마군이 동맹시들과 합류해 앞뒤로 공격당하면 격파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보급과 보조병력을 지원해야하는 갈리아인들이 성급하고 충동적이고 변덕스러워 완전히 믿을수 없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장기간 이어질 것이 분명한 공성전을 하기는 무리였다. 거기다 로마의 성벽과 방어태세는 대단히 견고했으며, 실제로 칸나이 전투 이후 곧바로 벌어진 놀라 공성전에서 놀라를 점령하는데 실패한 것을 보면 전술적, 병력상의 우위를 점할 수 없는 로마 공성전을 한니발이 시도하지 않은 것은 적절한 판단이었다.

한편 두 전투에서 대패한 로마군은 비상사태에 돌입, 파비우스독재관에 임명하고 전권을 부여했다. 파비우스는 지연전략으로 한니발의 군대를 천천히 소모시키려 했으나 그간 빛나는 군사적 영광을 누려온 성급한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은 이 전략이 겁쟁이 전략이라며 강력히 규탄하였다.

조기결전을 하게 된 배경을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한니발은 로마군을 회전으로 유도하기 위해 농토를 파괴하고 약탈을 반복하며(외부 보급이 가능할리가 없었기 때문에 약탈은 필수적이기도 했다) 진군했다. 이 와중에 한니발은 파비우스의 농지만은 일부러 전혀 건드리지 않고 지나쳤는데 이것이 원로원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한 요인이 되었다.

한니발이 실수로 캄파니아의 분지지형에 들어간 후에 카르타고는 보급이 끊겨 곤란을 겪었는데 이러는 와중에 결정적으로 파비우스가 뒤따라와 그들을 포위하였다. 안내를 맡은 현지인이 카르타고 발음을 못 알아들어 그들의 목적지의 이름과 비슷한 다른 도시로 안내한 것이었다. 카시눔으로 안내를 부탁했는데 엉뚱한 카실리눔이라는 곳으로 안내한 것. 이후 로마인들이 그 지역의 카르타고군을 포위하자 한니발은 그를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후에 파비우스는 한니발에게 전술적으로 농락당하는 일이 있었다. 어느날 한니발은 자신의 부하를 모아놓고 오늘 밤 이 포위망을 돌파하겠다고 호언하였다. 그 뒤 한밤중에 소떼의 뿔에 불을 붙이고 산 위에 풀어놓자 큰 소동이 일어났는데 파비우스는 이것을 한니발의 유인책이라고 판단, 자신의 군대에게 일절 대응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때 한니발 군은 소리를 죽인채 전원이 파비우스 부대가 지키는 산길 바로 아래쪽 길을 통과해 그 포위망을 빠져나와 버렸다. 파비우스는 자신의 부대 코 앞에서 한니발 군이 통과하는 것을 허용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파비우스의 전략이 마음에 안 들던 차에 전술적으로 농락당한 뒤 적이 도망치도록 허용한 일까지 벌어지자 로마 시민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또한 파비우스가 이끄는 병사들과 휘하 장교들도 그의 전략을 강하게 비판했는데, 한니발이 약탈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계속 앉아서 구경하는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비우스는 이를 해명하기 위해 부대를 떠나 로마로 소환되어 민회와 원로원의 집중 성토를 당하게 되고 독재관으로서 받은 유일한 임페리움을 보좌역의 기병장관과 나누어 가지라는 수모를 당했으며 뒤이어 이어진 선거에서 결전을 주장하는 민중들의 여론이 반영되어 주전파들이 선출된다.

파비우스는 그래도 독재관 임기는 마무리지었고 원로원은 독재관 임기를 연장하지 않으면서 다음해 뽑힐 집정관들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맡겼다. 새로 선출된 집정관들은 바로와 파울루스로 이들은 조기 결전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니발과 결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원로원은 로마 군단병으로 8개 군단을 뽑았고 같은 수의 동맹시 군단을 동원하였다. 각 군단은 5천명으로 총 병력은 보병 8만, 기병 6,400명이었다.

이에 대해 로마시대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원로원은 8개 군단을 새로 뽑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은 로마 역사에서 전례없던 일이었다. 각 군단은 5천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동맹군 역시 이와 비슷한 규모였다. 여태껏 대부분의 전쟁은 한명의 집정관이 2개의 군단과 그에 해당하는 동맹군을 지휘하였을 뿐이고 4개의 군단이 지휘받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있는 상황은 로마시민들로 하여금 상당히 위기감과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원로원은 4개 군단이 아닌 8개 군단을 한꺼번에 전장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한니발은 로마가 결전에 나서자 이탈리아 남부 아풀리아에서 로마군을 맞을 준비를 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 4만, 기병 1만으로 총 5만 명의 병력이었다.

1.3 로마군의 준비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로마군이 그냥 병력만 많이 뽑아 빨리 싸우려고만 한듯 보이며 로마인 이야기의 서술도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과연 로마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철저히 준비했다.

일단 제대로 싸우자는 결심을 한 이후 전투를 금지했다. 신임 집정관이 선출되고 칸나이 전투가 벌어진 7개월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전투가 없었는데 새로 징병한 신병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또한 이전의 전투도 철저히 연구해서 전술을 짰다. 배치 부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전 전투에서 모두 박살나긴 했어도 트레비아 전투의 경우 로마군이 포위당한 상황에서 카르타고군 중앙의 전열을 돌파하여 전멸을 면한 바 있었다. 이것이 로마가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해서 보병전으로 적진을 뚫는 것에 주력했다.

전장까지 철저히 준비했다. 칸나이는 로마군이 선택한 전장이었다. 양쪽으로 방해되는 지형이 있어서(한쪽에는 강, 한쪽에는 숲) 카르타고군이 우세한 기병을 운용하기 힘든 지형이었던 것.

한마디로 로마는 로마가 원하는 때에 로마가 원하는 방식으로 로마가 원하는 곳에서 전투하고자 했고, 그대로 실현했다. 도저히 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전투를 수행하고자 했고 더 이상 준비할 수도 없을 만큼 완벽하게 해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 모든 로마군의 전략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4 전투

1.4.1 양쪽 군대

7월 30일 양군은 칸나이 평원에서 마주쳤다.

역사가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전투 개시 전 온건파인 집정관 파울루스와 강경파인 바로가 대립했다. 파울루스는 평원에서 한니발과 싸우면 안된다고 만류했지만 '군대 경험 없는' 바로는 그것을 무시했고, 그 바로가 지휘권 잡은 날 결전이 벌어졌다고 하면서 로마의 전력을 말아먹은 바로를 신나게 깐다. 그러나 폴리비우스 자신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후견을 받는 지위였고, 파울루스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친할아버지였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를 격파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막내아들이었는데 훗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가 된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아버지는 한니발과 대결한 파울루스. 즉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이자 파울루스의 친손자인 셈이다. 폴리비우스는 이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후견을 받는 상태였으므로 파울루스를 어떻게 비판하겠는가!

실제로 우익의 기병대 지휘권을 맡는 사람이 전체 지휘권을 맡는 것이 로마군의 관례인데, 리비우스와 폴리비우스 모두 전투 당일 파울루스가 우익의 기병대 지휘권을 맡았다고 서술했다.

또한 패배 이후 바로에 대한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태도도 미심쩍다. 사상 최대의 패배를 초래하고 도망쳐 온 사령관이면 그 책임으로 정치생명이 끝나야하는 것이 맞는데[4] 바로는 칸나이 전투 이후 달아난 도시에서 버젓이 집정관,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부터 추가 병력의 제공까지 받으면서 아풀리아 지역에서 3년간 이탈리아 동부 지역의 수비를 담당하였고, 그 와중에 카푸아의 사절을 맞아 외교를 한다던가, 로마서 독재관을 선출해야하자(로마시대의 독재관 임명은 집정관이 지명하는 게 원칙이었다. 단 파비우스 막시무스만은 원로원이 지명한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로마로 잠시 귀환하여 독재관을 지명하고 떠나는 등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집정관직을 하자없이 수행하였다. 분명한건 여러 자료들을 분석해볼 때 테렌티우스 바로가 절대로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후에는 전직 법무관의 자격으로 에트루리아 지역을 담당하였으며,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카르타고와 교섭하는 사절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칸나이 전투에서 입은 패배의 규모와 로마에 준 타격을 감안할 때[5] 바로가 이같은 패배를 초래했다면 이렇게 잘 대우받는 것은 미심쩍은 일이다. 뿐만 아니라 파울루스는 당대 최고의 귀족가문의 한 명인데다 이미 집정관을 한 번 역임한 경력이 있으며 또한 2차 일리리아 전쟁을 총지휘하여 진압하고 개선식까지 거행해 군사적 경험, 원로원 내에서의 입지, 또한 로마 내에서의 평판 등에서 바로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었다. 때문에 바로가 동등한 집정관의 직위를 가지긴 하였으나 사실상 파울루스를 거역하기는 힘든 입장일 가능성이 높았으며 따라서 칸나이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휘한 인물은 아마도 파울루스였을 것이다.

실제로 파울루스는 당시 군사적인 커리어에서 로마인들 중 가장 화려하였는데 파울루스가 마무리지은 2차 일리리아 전쟁은 100여 척의 함대가 동원된 꽤 큰 전쟁이었으며 이것의 전권을 받아 단 1년만에 마무리지음으로써 로마인들에게 상당한 인상을 주었다. 칸나이 전투라는 대규모의 전투를 지휘할 집정관에 파울루스가 선출된 것은 아마 이러한 공적으로 로마 시민들이 파울루스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누가 지휘했건 8월 2일에 폴리비우스나 리비우스가 묘사하는 바와는 다르게 두 집정관이 전략적으로 결전을 벌이는데 합의를 봤던 것은 분명하다. 로마군의 전략 자체가 일관적으로 한니발을 서서히 압박해서 식량줄을 끊고 결전을 유도하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원로원이 결전을 원하지 않았다면 전례없는 대군을 편성한 의도와 맞지 않는다.

한니발의 군대는 정예 아프리카 보병대와 이베리아 보병, 갈리아족 용병으로 보병을 구성했고 기병은 이베리아의 기병과 켈트족 중기병, 누미디아 경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프리카 보병대의 무장은 그리스계와 유사한데, 한니발은 아프리카 보병대에게 트레비아 전투와 트라시메노 전투에서 살육한 로마군의 갑옷로리카을 노획해서 갖출 것을 명령했기 때문에,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들의 무장은 로마군과 거의 같았다고 한다. 단, 이들이 기존 아프리카 보병처럼 창을 들고 팔랑크스 형태로 싸웠는지, 아니면 로마식 보병처럼 검과 방패로 무장하고 싸웠는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둘 다일 수도 있지만 심증만 있지 확증은 아직까지 없다.

이베리아 보병들은 대개 철로 만든 원판 흉갑을 갖추거나 혹은 간단한 튜닉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투창의 명수로 글라디우스 히스파니엔시스, 즉 스페인 검이라는 글라디우스의 원형이 되는 무기로 무장했다. 켈트족 보병은 대개 갑옷을 입지 않고 방패와 검으로 무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이렇게 되는 이유가, 초창기에는 엘리트 귀족 전사들 위주의 강력한 중보병이 편성 가능했지만 자기들끼리 싸우거나 혹은 로마군과의 교전으로 엘리트 귀족부대가 소모되면서 전투 효율을 높이기 위해 중보병 부대가 중기병 부대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보병은 칼을 '찌르는 방식'으로 사용했고 켈트족은 '베는 방식'으로 사용해서 한니발은 이들을 교대로 투입해서 로마군을 괴롭히기도 했다. 즉, 한쪽 전투방식이 눈에 익을 쯤 되니까 갑자기 패턴이 다른 부대가 들어온다는 뜻이다. 고대 전투에서는 1열이 죽어 무너진 뒤 2열이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1열이 지치면 이들이 후방으로 빠지고 2열이 앞으로 전진하였다. 즉 한니발은 패턴이 다른 부대들을 순서대로 열을 이루게 하여 1열과 2열이 교대될 때 다른 패턴으로 로마군을 괴롭혔던 것이었다. 참고로 이베리아 보병의 칼이나 갈리아 보병의 칼이나 모두 찌르고 베기가 가능하기는 했다. 다만 찌르기는 이베리아 진영이, 베기는 갈리아 진영의 칼이 조금 더 적합했던 것 뿐이다.

이외에 발레아레스 군도에서 활약하는 투석병들이 가담했다. 발레리아스 투석병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슬링을 사용해서 원거리, 중거리, 근거리에 모두 대응할 수 있는 명수들이었다.

이베리아 중무장 기병들의 무장은 보병과 유사한데, 철제 투구와 철제 원형 흉갑을 착용했다. 한 손으로 쥐는 창으로 적과 충돌한 뒤, 근거리에서는 코피스라는 굽은 역날검으로 적과 교전한다. 코피스는 이베리아에서는 팔카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외에 당시 항아리 회화를 보면 말 전체를 사슬갑옷으로 감싸고 기수도 스케일 아머와 사슬갑옷으로 무장한 무시무시한 중기병도 보이는데,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용과 유지관리상 다수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참고로 말이 사슬갑옷을 입은 스페인 중장갑 기병은 EB 모드에서도 등장한다). 스페인 부족 출신의 기병들은 갈리아 중무장 기병대와 같이 서유럽 정상급의 기병으로 확실히 로마군 기병보다 전체적인 전투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갈리아족 중무장 기병은 대개 귀족이나 유력자 출신인 전사들로 체인메일로 중무장했다. 투구는 로마군과 같은 몬테포르티노식 투구로 무장했고, 긴 창 한자루와 투창 두 자루, 검으로 훌륭하게 무장한다. 스페인 기병대처럼 갈리아 중무장 기병대도 로마 기병대를 능가하는 서유럽 정상급의 중무장 기병이었다.

누미디아 경기병은 시오노 나나미의 지중해 최고의 기병이라는 평가에 무색하게 경기병이다. 투창 하나만 믿고 싸우는 경기병들로 실제로 지중해 최고 기병이라기보다는 아프리카 최고 기병이라는 쪽이 잘 맞는다. 단 지중해 최고의 기병이라는 평가는 시오노 나나미가 만든게 아니라 역사가 리비우스의 평가로, 이들은 뛰어난 승마술과 투창 하나만 들고 싸운 게 아니라 투창 투척 후 작은 방패와 글래디우스 같은 단검으로 돌격전을 벌이는 게 장기였다. 창 한두자루는 남겨뒀다 격투전에 사용했다는 일부 기록도 있다. 다시 말해 투창이 주특기지만 백병전에서 창이나 칼을 전혀 안쓴건 아니라는 소리다. 투창 공격 이후에 적이 약화되거나 적군이 패주하면 그때를 노려 백병전으로 공격하곤 했다. 단 특정 상황에서는 경기병이라는 특성이 약점으로 작용해 유구르타 전쟁에서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갈리아 기병에게 제대로 격파되기도 했다. 단, 누미디아 경기병의 진정한 무서움은 투창을 이용해 치고 빠지는 전술에 능하다는 것에 있었다. 유구르타 전쟁 초기에는 이걸로 로마 보병대에게 큰 타격을 준 적이 있다. 즉 적을 향해 돌진해서 발리버리는 맹렬한 근접전 타입이 아니라 아주 능숙한 투창 경기병 타입으로, 한니발은 전투에서 이들의 특성을 고려해서 로마군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겼다. 바로가 지휘한 좌익 동맹군 기병대 4800명이 많은 피해를 입고 고전했던 이유도 누미디아 기병의 저런 투창 전술 때문이었다.

로마군의 군대 형태는 자마 전투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래도 트레비아와 트라시메노에서 정규군이 워낙 심각하게 털린 터라, 로마군 부대 중에는 신병이 많았다. 하지만 카르타고군의 2배에 달하는 수적 우위는 로마군의 강력한 이점이었다.

다만 이 수적 우위는 보병에 한정되며, 기병 전력은 카르타고군이 2배 가까운 수적 우위에 질적으로도 크게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1.4.2 배치

로마군은 1만 명을 후위에 남겨두어 본진을 지키도록 했다. 마크 힐리 같은 경우 부대 비율상 이들이 트리아리(정규 편제라면 8만명 중 9,600명)일 것으로 추정했는데, 실제로 트리아리가 남았는지 아니면 혼성부대로 1만 명이 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로마군은 로마 시민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동맹군 보병을 보병라인 양익에 배치했다. 로마군 보병 배치는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평소보다 훨씬 조밀하게 서 있었고 '정면보다 종심이 더 깊었다'라고 표현한다. 즉 로마군은 엄청난 숫자를 통해서 보병부대의 '질량'으로 카르타고 보병 대열을 '밀어서 뚫어버리는' 작전을 시도했다. 이 두 로마 사령관이 중앙을 돌파하고자 한 이유는 앞서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군이 로마군을 포위섬멸작전에 몰아넣은 적이 있었는데 이 때 포위된 로마군 보병이 사력을 다해 한니발 군의 중앙을 뚫고 달아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로마 지휘관들은 한니발의 약점이 중앙이라고 판단하였으며 그 때문에 이번엔 더 큰 스케일로 중앙을 돌파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것은 충분히 일리있는 생각이었고 이렇게 세세하게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상대의 약점을 파악한 뒤 전술을 짜서 실행하는 국가는 고대에 드물었다. 이러한 고대 로마인들의 장점은 이들이 약소국가에서 출발하여 전 지중해를 제패하는데 일조했다. 이들이 과거기록을 토대로 준비하는 예로서 과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제패하고 있었을 때 일리리아 지방의 알렉산드로스 사촌이 이탈리아에 쳐들어왔는데 삼니움족이 이들을 쳐발랐다. 로마인들은 100년 뒤 피로스와 전쟁을 하였을 때 이때 삼니움족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인들을 이길 수 있었는지 철저하게 연구하였고 이는 피로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듯이 그 당시 로마군이 무조건 힘으로만 밀어붙인게 아니며 할 수 있는 능력안에서 적군와 아군의 전투능력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로마 입장에서는 철저하게 작전을 세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허나 문제는 상대가 한니발 바르카라는 희대의 먼치킨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까지 기병대가 버티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는데, 로마군 우익에는 아우피디우스 강이 흐르는 것에 착안, 우익 부대에 1,600명의 기병을 배치하여 파울루스가 이들을 직접 지휘하고, 바로에게는 4,800명의 기병부대를 맡겨 좌익에서 한니발의 기병을 저지하게 했다. 강 때문에 공간이 제한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오래 버틸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8만명이나 모이다보니, 로마군은 종래의 체크무늬 방진을 펼 수가 없었다. 횡진으로 넓게 펴기엔 강이 있었고, 결국 체크무늬 방진을 포기하고 팔랑크스를 연상케 하는 초밀집 방진을 펼치게 된다. 따라서 유기적인 기동력으로 승부를 보는 로마 군단병(레기온)의 특징보다는 밀집 충격력에 의존하게 된다. 또한 로마군의 전략 자체가 중앙을 돌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고의로 더 바짝 밀집시켜 놓았다.

하지만 한니발은 로마군의 전략을 완전히 읽고 있었다.

로마군이 질량으로 카르타고군을 완전히 밟아버리는 것을 완벽하게 예측한 한니발은 그 아주 유명했던 초승달 대열을 시도한다. 초승달이 앞쪽으로 볼록하게 튀어나와서 적의 공격에도 뒤로 물러날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는 한편, 초승달이 뒤쪽으로 튀어나올 때가 되면 로마군의 접전 면적이 넓어지는 한편, 밀어가는 쪽으로 질량이 과도하게 쏠려 제대로 무기도 휘두를 수 없는 '과다 밀집' 상태에 빠트리려는 시도였다.

즉 중앙에서 아무리 용감하게 싸워도 로마군의 엄청난 수의 질량에 의해 점점 뒤로 밀릴 것이 확실한데 그렇다면 일직선보다 초승달 형태로 튀어난 쪽이 더 오랫동안 뚫리지 않고 뒤로 물러날 수 있는 진형이었다. 뿐만 아니라 초승달 형태가 되면 로마군이 자연스레 공격을 튀어나온 앞부분에 집중하게 되고 따라서 로마군은 중앙을 향해 자연스레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1선 부대가 심각한 피해를 볼 것은 명백하였다. 또한 이 중앙 부대가 로마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패주한다면 포위고 뭐고 카르타고군은 끝장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니발은 갈리아 족들 사이사이에 자신과 함께 알프스를 넘어온 스페인 중보병을 배치한다. 한니발에겐 알프스를 같이 넘은 1만 6천여의 아프리카 중보병과 스페인 중보병이 있었는데 아프리카 중보병은 양익에 배치하고 남은 스페인 중보병은 중앙의 갈리아 병사들과 함께 배치하였다. 여기다 한니발은 자신이 직접 중앙의 보병을 지휘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로써 중앙의 카르타고군은 그들의 사령관과 함께 로마군과 싸우게 되었고 이는 그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때 한니발의 아프리카 정예부대가 이들 후방에 배치되어있다가 초승달 대열이 뚫리자 교전에 나섰고 그 틈에 1선 켈트족 보병이 되돌아와 로마군을 공격한 것으로 묘사하는데, 실제로 저렇게 되면 거의 못 되돌린다(...). 뭣보다 폴리비우스나 리비우스나 모두 한니발의 아프리카 정예부대는 켈트족의 양익에 배치된 것으로 묘사한다. 시오노 나나미도 창작할 수 없는 이상 누군가의 사료를 인용했을 텐데 저렇게 중앙의 갈리아 족이 패주한 뒤 2선의 정예와 싸웠다라는 내용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으니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가 그런 설명을 한 이유는 아마도 칸나이 전투자마 전투를 헷갈린 것 같은데, 고참병을 뒤로 포진한 다음 뚫은 로마보병을 고참병이 싸우고 패주한 보병이 양익으로 가서 고참병과 협공한 전술은 바로 자마 전투에서 쓴 것이다. 이때 스키피오가 전열을 늘림으로써 포위형태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런데 초승달 진형까지는 언급한 것으로 보아 아마 시오노 나나미가 자마 전투와 칸나이 전투를 혼동했을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다른 자료들의 참고 없이 리비우스 사료에서 전황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갈리아, 스페인 보병이 당황하여 물러났다, 로마인들은 진격하였고 이윽고 양익에 위치한 아프리칸 예비대에 당도하였다'라는 한 줄을 엉뚱하게 해석해 그 내용을 기반으로 이중진형을 짠 뒤 선두 진형이 뚫렸다는 서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리비우스의 서술에 저 문장 이후 곧바로 '아프리칸 예비대는 양익에 위치했고 중앙에 있는 갈리아, 스페인 보병은 뒤로 물러나 초승달 형태로 전환하였으며, 로마인들은 양익포위(outflank) 된 형태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런 서술을 놓치고 그렇게 전황을 묘사한 뒤 출판한 것은 꽤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가 군사 전문가가 아니라서 실수한 것일 수도 있으나, 전문가가 아니라도 그냥 읽고 이해하면 정확한 묘사가 가능함에도 완전히 틀리게 서술한 것은 시오노 나나미의 독해력과 이해력에 결함이 있어서 그런지도.

한니발은 로마군이 소수의 기병만 우익에 배치시키리라는 것을 간파하고 중기병들을 모조리 좌익, 즉 로마군 우익 기병의 상대로 몰아넣었다. 바로의 기병은 비슷한 숫자의 누미디아 경기병이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1.4.3 진행

전투가 개시되자 한니발은 마지막으로 전열을 재정비시켰다.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갈리아 귀족 중기병과 스페인 중기병대로 구성된 카르타고 좌익 기병대가 로마군을 향해 돌진했다. 이 때 특별히 세련된 전술을 짠 게 아니라 그냥 돌격했다. 로마군의 의도대로 기병의 화려한 기동은 불가능한 전장이었고 어차피 기병은 카르타고군이 우위였기에 철저히 힘으로 뚫어버리려고 한 것. 그런데 하필 이 때 파울루스가 투석병의 돌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었다. 로마 기병대는 파울루스를 호위하려고 애썼으나, 파울루스가 말을 탈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되자 이들도 말에서 내렸다. 누군가가 한니발에게 파울루스가 로마 기병에게 말에서 내리라는 지시를 했다고 전달하자 한니발이 말하길 "그럴바에야 차라리 그가 병사들을 사슬에 결박해 내게 인도하는게 더 낫겠군." 애초에 병력 자체도 카르타고 기병대 쪽이 우위였기에 굳이 말에서 내리지 않았어도 전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얼마 후 로마군 우익기병은 카르타고 기병대에게 순식간에 박살나버렸다.

이때 양측의 보병대는 상대를 향해 점점 전진하였다. 처음엔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카르타고군은 점점 중앙이 빠르게 전진함으로써 초승달 형태가 되었다. 이때 칸나이에선 강한 돌풍이 불었고 모래가 그들의 시야를 가렸으여 이로 인해 양측 군대는 상대가 잘 안보여 공포는 극대화되었다. 이런 심리적인 영향은 카르타고군보다 로마군이 더 많이 받았는데 그 이유는 한니발 군은 여러번 지옥을 넘나드는 경험을 한데다 심지어 갈리아 병사들까지 한니발에 의해 3박 4일간 수면 없이 늪지대를 돌파하는 강행군을 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에 이러한 심리적 변수에 대해 신병이 많은 로마인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니발은 전투 전날 로마군이 강에서 물을 긷는것을 방해하여 로마군은 물을 제대로 먹지못해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한니발은 자신의 부대를 동쪽에 배치해 놓았는데 이는 아침에 전투시 카르타고군은 태양을 등지고 로마군은 태양을 마주보고 싸워야 하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한니발은 회전 이전에 기후로 인한 심리적인 영향과 태양의 조건을 고려하였고, 물의 보급을 방해해 갈증을 나게 하여 상대방의 전투력을 저하시키는 등 최대한 카르타고군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셈이었다. 게다가 한니발의 군대는 칸나이에서 먼저 도착해 머문 삼주간의 기간동안 충분한 훈련과 기후에 익숙해질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군의 돌출된 중앙부대는 로마군의 집중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때 횡대를 이룬 로마군의 대열은 중앙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집중공격을 받아도 대형을 잘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고대 유럽의 중보병 전투 방식에 기인한다. 당시의 전투는 두 군대가 조우하면 서로 방패를 들고 접근한 뒤 찌른 뒤 다시 방패로 보호하고, 다시 찌르고 방패로 보호하고 이를 반복하는 패턴으로 초반에 우열이 바로 가려지지 않는다.

공격보다는 방어 위주의 전투를 지시한 한니발의 명령을 받은 중앙의 갈리아 중보병들은 집중공격받은 상황에서도 찌르기보다는 주로 방패를 사용하여 막는 데 집중함으로서 시간을 버는데 성공하였고, 따라서 긴 시간에 걸쳐 공방을 주고받았다. 여기다 거센 로마군의 공세를 더 효과적으로 버티기 위해 중앙에서 보병과 함께 있었던 한니발은 동생인 마고와 함께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전열 안으로 뛰어들어 돌아다니며 사기를 높였다.

이러는 동안 위쪽으로 볼록했던 초승달의 진형은 점차 뒤로 물러나게 되었는데, 한니발이 고의로 후퇴한 것인지 아니면 로마군의 공세에 밀려 뒤로 밀리게 된 것인지 학자들간의 견해가 엇갈린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중앙의 갈리아+스페인군은 싸우면서 뒤로 물러났으며 이 후퇴로 인해 로마군은 수십마일 정도 전진하였다. 이러한 전진으로 인해 위로 볼록한 초승달은 아래쪽으로 볼록한 초승달의 형태로 바뀌었고 이 초승달 대형 속에 진입한 로마군의 전체 대형은 초기의 조밀한 대열이 기동으로 인해 더 밀집되어 마니풀라 대형의 형태는 무너지고 이들은 한 덩어리의 무리로 바뀌게 된다.

보병 전투가 이런 상황에 놓인 동안 마하르발이 이끄는 (리비우스 출처.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한노라고 한다) 한니발의 우익 누미디아 기병은 성공적으로 바로의 기병을 견제하고 있었다. 이들은 말을 달려 투창을 던진 뒤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오면 즉시 빠졌다가, 적이 되돌아가면 다시 접근해 투창을 던졌다. 바로의 군대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들의 목적은 아군 보병이 적 보병 전열을 붕괴시키기 전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기에 피해를 입으면서도 버티고 있었다. 이 때 하스드루발이 이끈 한니발의 좌익 중기병 부대가 로마군 우익 로마 시민 기병대를 격파하고 되돌아와 바로의 동맹시 기병대를 덮쳤다. 바로의 기병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격파되어 패주했다. 한니발의 기병부대는 로마군 기병이 더이상 집결하지 못하도록 추격에 나섰다.

기병이 정리되는 동안 로마군 보병은 숫적으로 우세한 질량을 바탕으로 로드롤러처럼 한니발 보병 라인을 밀어붙였다. 한니발은 분대 단위의 적절한 치고 빠지기로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한니발의 의도는 중앙에서 시간을 버는 것이었으므로 중앙에 위치한 중보병은 로마군과 적극적으로 싸우기보다는 최대한 방어하면서 뒤로 조금씩 물러나기만 할 뿐이었고 이로 인해 카르타고군은 예상했던 것보다 의외로 전사자가 많이 발생하지 않았다. 한니발이 선택한 초승달 진영은 큰 피해를 보지 않고도 시간을 벌게 해주었고 그것은 충분히 효과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한니발이 숨겨놓은 카드가 발동했다. 로마군 대열이 지나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이때까지 쉬고 있던 한니발의 정예 아프리카 보병들을 지나쳐서 전진했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아프리카 보병대에게 측면과 후방을 노출했다. 한니발이 명령하자 아프리카 정예 보병들이 앞으로 전진하였다. 이들은 어느 정도 전진하자 로마군의 측면에 위치하게 되었고 곧 이들은 방향을 중앙 쪽으로 돌려 로마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점에서 전진에 열중하였던 로마군은 당황하여 전진을 멈추게 되었다.

측면에서 위치해 공격하는 아프리카 보병들은 한니발 부대에서 가장 정예 중의 정예에, 체력까지 비축하였으므로 로마군이 보이는대로 맹렬히 돌격하여 공격하였다. 이러한 아프리카 보병의 갑작스러운 돌격은 정면의 공격에 열중하던 로마군에게 큰 소동과 혼란을 안겨주기 시작하였으며, 측면의 로마군 중 일부는 살길을 찾아 로마의 중앙부로 파고들거나 공세에 뒤로 밀리면서 그렇잖아도 압축되어가던 로마군의 대형은 심하게 밀집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든 로마군은 무기도 휘두를 수 없을 정도로 밀집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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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로마군의 전진이 중단되고 운신이 불편할 정도로 압축되었을 때 타이밍을 맞추어 로마 기병을 추격하던 카르타고 기병이 추격을 중단하고 로마군의 후방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되자 로마군은 멋지게 에워싸이게 되었고 카르타고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후방에 위치한 기병은 벌판에서 방해받는 일 없이 돌격하거나 투창을 던지는 등 마치 양떼를 사냥하듯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사방이 둘러싸이자 로마군은 더 밀집되었고 로마군은 무기를 휘두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유롭게 무기를 휘두르는 카르타고군에 의해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한채 일방적으로 살해당하기 시작하였다. 결정적으로 두 집정관이 모두 기병을 지휘한 뒤 기병이 소멸되자 한명은 전사하고 한명은 진영을 이탈하게 되었으므로 포위된 보병에게 방진을 짜라던가, 아니면 후방의 기병대를 뚫고 퇴각하라거나, 아니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포위한 적 대형을 향해 전군으로 하여금 돌격 명령을 내리는 총사령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보면 파울루스는 기병이 무너질 가능성과 그 이후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라 여겨진다. 병력 수가 앞서는데다 역사상 로마가 동원한 보병 중 사상 최대임을 감안, 로마군이 중앙을 돌파하는데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대부분의 로마군은 포위당한 상태에서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폴리비우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바깥쪽에 서있던 로마군은 끊임없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군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커다란 소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결국 그들이 서있는 자리에서 모두 죽게 되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리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너무도 많은 로마군이 계속 살해당하고 있었다. 간신히 죽지 않은 부상자들은 산더미 처럼 쌓인 로마군의 시체를 목격하고 공포에 떨었다. 전사자 중 몇몇은 머리를 땅에 묻고 죽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땅을 파고 자신의 머리를 묻은 것처럼 보였다."

훗날의 파울리라는 역사학자에 따르면 일분당 600명의 로마 군이 죽었다고 하였다. 이는 초당 10명씩 죽은 것으로 이미 그 상황에선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도망치다 자기편끼리 압사당한 로마군 병사들도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바로는 달아났지만 파울루스는 기병전 초기에 일찌감치 슬링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여서 말을 탈 수가 없었고, 뒤이어 추적해온 카르타고 기병들의 투창 세례를 맞아 장렬히 전사한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군 보병 47,000명, 기병 3,000명이 전사했고 포로는 2만 명에 달했다. 또한 여기에 지휘관으로 참전한 80명의 원로원들도 전사했는데 이 중에는 로마 보병의 지휘를 맡은 바로 전해의 집정관 게미누스와 파비우스의 부관으로 지명된 기병장관 미누키우스도 포함되었다.

로마가 동원할 수 있는 전체 병력을 보통 30만으로 잡는데[6] 그 1/4이 한 번의 전투로 깨끗하게 소멸되었다. 한니발의 피해는 6,000~8,000명이었고 그나마 대부분 켈트족 병사들이었다.

이 전투에서 2개 군단만이 간신히 달아났고, 본진에 남겨져 있던 부대는 모두 포로가 되었다. 포로들은 진영에 남겨졌고 한니발의 병력들은 매우 지친 나머지 진영을 공격하지 않은 상태로 밤이 되었다. 이때 본진에 남아있던 병력은 2개 군단병에 달하는 1만여에 달했는데 병력들은 지휘관이 없는 상태에서 공포에 질려 진영에 그대로 남았다.

양 진영의 병사들은 각자 전령을 보내 서로에게 합류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두 부대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는 섣불리 움직이다 한니발의 공격을 받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일부는 탈주하였으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그대로 남아 밤을 보냈으며, 다음날 아침 한니발이 부대를 이끌고 오자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한니발은 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로마에 사절을 보내 몸값을 지불하라고 하였고 로마 원로원은 그들의 가족들이 간절히 요청하였으므로 토의에 붙였다.

이때 원로원은 자금이 바닥난 상태인데다 몸값의 지불이 곧 숙적 한니발에게 전비까지 제공하게 되는 것이므로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러다가 논의 중 결정적으로 한 원로원 의원이 포로들이 2개 군단이나 달하는데도 겁먹고 진영에 머물러 그대로 포로로 잡힌 용기없는 모습을 지적한 뒤 이런 겁쟁이들을 구하는데 돈 쓰는게 아깝다고 반대했다. 몇백년에 걸쳐 해마다 전쟁을 수행한 로마인들은 고위층, 민간인 할 것 없이 남자들이 프로 전사들에 가까웠고 따라서 전장에서 용기없는 모습은 매우 심각한 인간성 결여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몸값을 주고 포로들을 돌려 받으면 한니발이 그 돈으로 다시 용병을 사들여 전력을 강화할 것이니 그런 것도 반대하는 이유였으며 이런 의견들이 지지를 얻어 결국 원로원은 이들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한니발은 군비 부족과 포로 관리 능력의 부족 탓에 그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으며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로마와 협상이 잘되기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협상이 결렬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칸나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로마군들도 생각 외로 상당수 있었으나, 원로원은 이들이 제대로 못 싸웠다하여 패배의 책임을 물어 시칠리아 섬으로 보냈는데 이는 사실상의 추방이나 귀양이었다. 이들 중 나중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시칠리아 담당 집정관으로 파견될 때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스키피오가 모집하는 병역에 지원하고 싸워 명예회복을 하게 된다.

전투 이후 마하르발이 한니발에게 로마를 공격하자고 진언하였으나[7], 대승리에도 불구하고 공성전은 무리라고 본 한니발은 그 지역에서 이탈한 도시들을 받아들이는데 집중하였다. 이에 대해서 후대에는 공성무기의 부족이라던가, 직후에 벌어진 이탈리아 서부 해안가 지역들의 공성전에서 한니발이 로마군을 상대로 이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것을 감안하고, 동맹군인 갈리아인들도 성급하고 충동적이어서 장기전으로 가면 신뢰할 수 없었기에 한니발이 타당한 판단을 하였다고 평가한다. 다만 칸나이 직후 로마를 포위하는 것은 점령은 무리라도 로마 동맹세력에게 심리적 영향을 주어 더 많이 이탈시킬 수도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으며 [8] 로마시를 일단 포위해 놓으면 로마시민들이 심하게 패닉할 가능성과 칸나이 손실에서의 회복이 더뎌질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당대 로마인들은 전부 한결같이 한니발이 실수한 것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그리고 현대에서조차 한니발이 일단 포위를 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링크

이후 로마인들은 인신공양까지 하는 전대미문한 일을 벌이는 등 제대로 멘붕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 승리 이후 한니발은 이탈리아 제 2의 도시 카푸아와 마그나 그라이키아라 불리는 남부 이탈리아의 맹주 타렌툼, 시칠리아의 대도시 시라쿠사를 이탈시키는 등 로마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빨간색이 로마군, 파란색이 카르타고군. 한니발은 완벽한 전술로 로마군을 포위섬멸했다.

좀더 간단히 정리하면, 마니풀라 대형의 맹점을 제대로 짚은 것이 포인트.

당시 로마의 3열 대열은 치고 빠지기에 적합한 형태로 되어있었지, 마구 밀어붙이는 것과는 매우 동떨어진 구조로 되어있었다. 1열의 하스타티와 2열의 프린키페스는 서로 바톤 교체를 하는 개념이었고, 3열의 트리아리는 이곳 저곳 땜질을 해주거나 아니면 체크보드 배열 사이로 퇴각하는 아군을 흘려보내고 즉시 대열을 전개하여 최후 방어를 제공하는 식이었는데, 이것은 로마군이 퇴각의 여지를 크게 확보할 수 있게하여 전투 한번에 괴멸당하는 사태를 면하게 하는 쏠쏠한 효과를 제공하였지만[9] 한니발은 자신의 병력을 천천히 뒤로 물러나게 하면서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를 모두 끌어들인 것은 물론 후방을 지켜야하는 트리아리까지 진군시키게 만들어버렸다. 즉, 로마군의 기초적인 전술 자체가 증발해버리게 만들어서 로마 극초기의 팔랑크스 전술만도 못한 상황이 터지고 만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의 속담에서 트리아리까지 밀렸다는 말이 거꾸로 적용되어 트리아리까지 진군해버려 이도저도아닌 막장 대형이 탄생해버렸고, 그 결과는 떡진 병력이 사방에 둘러싸여 어디부터가 벨리테스고, 어디까지가 트리아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학살당하는 것이었다.

즉, 초중기 마니풀라 3열 대열의 맹점을 정확히 짚고, 로마군이 성급하게 나서도록 유도하여 로마군을 문명 군대다운 대형을 갖추지 못한 군대로 전락시켜버린 것이었다. 로마군의 부실한 기병전력은 불바다에 기름까지 처주는 결과를 내어버렸고...

이후 복수전(?)인 자마 전투에서는 마니풀라 대형에서 진격을 위한 변형의 시행착오적 내지 적절한 시도가 나오는데, 바로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까지 합쳐서 전부 1열 대열로 전환하여 길게 늘리는 것으로 역포위를 방지하는 것이다.

공교로운 점은, 억지로 한니발에 맞서러 나서자는 의견을 내세운 이들의 판단이 옳긴 했다는 것이다. 칸나이 전투라는 재앙을 내놓고 말았지만, 따지고 보면 일단 제대로 병력을 운영했을 경우 당연히 이길 수 있는 전투였음에도 말아먹은 것이었으니 참작이 필요하다. 그리고 뭣보다, 실제로 청야전술을 내세운 의원들이 땅을 죄다 꿀꺽해서 라티푼디움으로 로마군을 말아먹는 결과가 나왔다.

BBC의 드라마 한니발에서 재현된 칸나이 전투다. 로마군의 포진을 본 한니발은 "이번에는 로마군이 머리를 아주 많이 썼지만 나 한니발에게는 그 작전이 안통한다."며 비웃는다.

이 패배 직후, 로마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이 패배는 신벌이라며 여사제들을 생매장하고 아기들을 바다에 내 던지는등 인신공양을 벌이기도 했다. 본래 로마인들은 인신공양을 나쁜 것으로 여겨 금기시했기에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1.5 의의

칸나이 전투는 양익 포위 전술의 전형적인 형태이자 고전으로 취급받는다. 사실상 포위섬멸전의 이데아. 이후 수많은 포위 전술에 영감을 주었으며, 성공적인 포위 섬멸전은 보통 제2의 칸나이 전투로 불린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탄넨베르크 전투는 아예 동부전선의 칸나이 전투로 불렸으며, 슐리펜 계획은 기동공간의 부족으로 양익포위 대신 우익에 의한 단익포위를 꾀했으나 완벽한 양익포위를 통해 칸나이 전투를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독일군 총참모부를 시종일관 사로잡았으며 이는 우익의 약화를 불러오게 된다. 개전 초 좌익이 선전하자 독일군 지휘부는 실제 양익포위를 시도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장기로 삼았던 기동부대에 의한 양익 돌파-돌진-포위-격멸로 이어지는 포위섬멸전(Kesselschlacht) 역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칸나이 전투에 도달하게 된다. B집단군이 모루로 프랑스-영국 연합군을 끌어모으는 동안 A집단군이 아르덴을 돌파해 포위 섬멸전을 벌인 프랑스 전역 역시 칸나이 전투의 성공적인 재현으로 꼽히며,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동부전선에서는 스몰렌스크 포위전, 키예프 포위전 등 수없이 많은 포위전을 만들어냈다.[10]

하지만 완벽한 전투와는 별개로, 칸나이 전투는 한니발이 이루고자 했던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이후 로마가 강화협상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로마인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강화협상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는 말에 분노한 스키피오가 칼을 들고 회의실에 난입해 원로원 의원들에게 카르타고와 전쟁을 하기로 맹세를 강요하는 일도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논고에서 로마인들은 강요된 맹세를 어기는 것 역시 수치로 생각하여 평화협상을 포기했고, 스키피오의 용기로 로마가 제국이 될 수 있었다고 평했지만 사실 몇몇 정치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강화에 부정적이었다. 강화를 생각한 극소수의 정치가들조차도 워낙 피해가 막대했기에 한번 생각만 해본 정도였지 그들도 카르타고에게 항복할 생각은 처음부터 전혀 없었다. 어차피 한니발과의 강화는 체결될리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한니발의 사절이 카르타고 원로원에 전투의 승전을 보고한 뒤, 로마 원로원이 평화협상에 응하지 않고 로마와의 연합을 이탈하겠다는 라티움의 동맹시들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듣자 카르타고 원로원의 한노라는 유력한 카르타고 원로원 의원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전쟁의 승패는 아직 결정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 로마와 강화협상을 하는게 좋다." 어쩐지 원로원 의원들의 판단이 로마든 카르타고든 매우 적절하게 옳은 것이 포인트[11]

이후 칸나이 전투의 여파로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과 중부 이탈리아의 카푸아가 동맹에서 이탈해 한니발에게 항복하기는 하지만 로마 연합을 해체시킬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한니발은 재결전을 통해 로마 연합을 완전히 붕괴시키려 했지만 유례없는 패배를 겪은 로마는 전면결전을 포기하고 지구전과 게릴라전, 청야전술을 종합한 파비우스의 전략을 충실히 이행했다.

여기에 숙련된 장군인 마르켈루스가 한니발을 철저하게 견제하면서 결국 한니발이 원하는 "결전"은 이후 다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르켈루스는 나중에 한니발에게 패해서 전사하지만, 전사할 때까지 끈덕지게 한니발을 물고 늘어졌다. 한니발도 마르켈루스가 전사한 이후에 개인적으로 경의를 표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파비우스의 지구전을 통해 끝내 한니발에게 향하는 모든 보급을 끊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타고 본토를 습격하는데 성공하자 그렇게 파비우스를 깠던 많은 사람들이 파비우스의 집으로 몰려들면서 일제히 그를 축하해주기 이르렀다. 허나 파비우스는 운명의 장난인지 한니발이 카르타고로 쫓겨나듯 돌아온지 3개월만에 사망했다.

한니발은 동부의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었지만 애초에 마케도니아 자체가 대규모 외부 원정을 기획할 상황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12] 한니발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카르타고 본국은 한니발을 직접 지원하고 싶어하긴 하였으나 스페인의 카르타고군이 끊임없이 손실을 입어 이들을 보충하느라 전력을 쏟은 데다 이탈리아 본토를 상륙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했던 시칠리아 섬에서도 계속 격파당함으로써[13]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을 지원하는 병력을 파견하는데 실패했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이후로 브루티움의 대부분, 아풀리아의 일부, 캄파니아의 상당지역을 손에 넣었고 이후 이들로부터 원조와 병력을 제공받으면서 로마와 호각으로 버텼으나 한니발이 있었던 이탈리아 반도에서조차 한니발 이외의 장군들이 로마 장군들에게 연이어 패배를 당하였다. 때문에 무적인 한니발 직속부대만이 이리저리 적을 격파하면서 돌아다녔지만 그래도 서서히 소모되어갔고, 결국 아프리카로 되돌아와 그를 끈질기게 연구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맞아 자마에서 싸웠지만 패배했다.

한편 한니발이라는 상대에 단련된 로마군은 과거 한니발이 '아마추어'라고 평가한 수준을 뛰어넘었다. 로마인들은 패배의 교훈으로 기존의 팔랑크스와 유사한 조직을 분대별로 쪼갠 결과 로마군의 특징이 되는 뛰어난 사기, 탁월한 부대 조직과 유연한 기동이 가능해졌다. 특히 한니발이 보여준 장기인 중앙에 조공을, 양익에 주공을 두어 적군을 포위시키는 전술은 로마 장군이면 대대장 정도도 구사할 줄 아는 상식처럼 되었으며, 이를 위한 강력한 보조병, 특히 기병대 운용의 중요성을 크게 일깨워준 것은 한니발이 로마 장군들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 결과 로마는 강력한 팔랑크스를 가진 동방의 그리스 세력을 격파한 뒤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이는 한니발의 폭풍이 로마에게 가져다 준 결과물이었다.

1.6 대중매체

왕좌의 게임 - 시즌6 9화 서자들의 전쟁에서 벌어진 존 스노우램지 볼튼 간의 윈터펠 전투는 이 칸나이 전투를 모티브로 삼았다.

2 동로마 제국의 칸나이 전투

1018년 동로마 제국 군대와 롬바르드-노르만인 사이에서 펼쳐진 전투.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전투로, 이번에는 로마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동로마 제국은 당시 최고로 잘 나가던 때였고 바랑인 친위대를 주축으로 한 로마군에게 노르만이고 롬바르드인이고 별거없이 떡실신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탈리아 남부에 대한 롬바르드-노르만인의 공세가 좌절되었고, 이어진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의 연합군도 막아내면서 이탈리아 남부에서 동로마 제국의 지위가 굳건해졌다.

이후 바실리우스 2세가 시칠리아 원정까지 실시했다면 이탈리아 남부에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이 더욱 굳건해졌겠지만, 바실리우스 2세가 원정 직전 사망함으로써 2차 칸나이 전투의 의의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비록 패배했지만 이 전투는 노르만인이 남부 이탈리아에 본격적으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한 사건으로, 이후 남이탈리아에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권은 차츰 노르만인에게 넘어가게 된다.
  1. 오히려 일본어 표기는 'AE'를 철자 그대로 읽는 경향이 있다. 카이사르, 칸나이도 'カエサル', 'カンナエ'라고 쓴다. 못믿겠으면 로마인 이야기 속표지 뒤에 있는 원제를 보자.
  2. '시저' 혹은 '프리터'는 그냥 영어식 라틴어 발음일 뿐이므로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
  3. 일부에서는 초기 라틴어를 생각하자면 칸나이도 아니고 '칸나에'로 읽어야 (그리고 프라이토르도 프라토르이며 카이사르도 카사르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소수의견이고 ae 이중모음은 예수 탄생 전에 이미 ㅏㅣ로 발음이 바뀌었다는 것이 주류의견이다. 하지만 연도를 보면 어차피 저때는 프로토 라틴어가 쓰이고 있을 무렵이므로 ㅏㅔ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4. 로마가 패배한 장군에게 관대하다는 평을 받는데 이는 카르타고와 달리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지 정치생명은 사실상 끝나게 되어있었다.
  5. 패배의 여파로 남부 이탈리아 전역과 중부 이탈리아의 상당수, 시칠리아 섬의 상당수가 떨어져 나갔다.
  6. 시오노 나나미가 언급한 75만은 "농사고 경제활동이고 뭐고 모든 걸 포기하고 성인남성을 모조리 동원했을 때" 가능한 정도로 그냥 전투 가능 성인 남성이 75만 정도다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즉 저 인원이 모두 군인으로 갈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시오노 나나미도 75만 모두 동원될 수 없다고 적어놨다.
  7. 다만 이 에피소드가 칸나이 전투가 아니라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 직후에 벌어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때 마하르발은 4일만에 로마시내의 카피톨 언덕에서 저녁식사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칸나이와 로마시의 거리는 기병만으로도 4일만에 당도하는 게 불가능하다. 때문에 4일만의 거리에 해당되는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 이후 나온 발언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해당 발언 자체가 부정되기에는 매우 오래되고 널리 알려졌는데, 가령 한니발과 동시대의 인물인 대카토가 이 일화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8. 가령 카이사르는 이런 정치적, 심리적 이유로서 디라키움에서 회전이 아닌 포위로는 이길 수 없음에도 불구, 폼페이우스 군을 장기간에 걸쳐 포위한 적이 있었다. 물론 결과는 실패했지만 카이사르가 멍청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9. 실제로 냉병기 전투에서는 포메이션만 안 깨지면 사상자는 매우 적게 나온다. 특히 고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10. 이런 대규모 포위전을 연속적으로 성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성공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한니발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11. 한니발과 싸우면 망한다는 판단도 옳았고, 안 싸우면 땅 투기로 로마 망한다는 의견도 옳긴 옳았고 (라티푼디움...), 카르타고 의원 한노의 판단은 더더욱 옳았으니...
  12. 알렉산드로스 3세 이후 인구가 대부분 동부, 즉 셀레우코스 왕조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리아, 이집트 등지로 빠져나가버렸다. 안습. 오히려 마케도니아의 의도는 한니발이 시간을 끄는 동안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던 그리스 남부의 도시들을 공격하고 일리리아를 손에 넣는 것이었으며, 실제 2차 포에니 전쟁 직후 마케도니아는 로마와의 협상을 통해 일리리아에서 우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전체적인 국력차는 너무 커서, 곧 마케도니아는 피해를 회복한 로마에게 처절한 응징을 당하고 몰락의 길을 걷는다.
  13. 시칠리아 섬에서 가장 큰 도시었던 시라쿠사의 경우 칸나이 전투 이후 생전 끝까지 로마를 지지하던 히에론 2세가 죽자 친 한니발 파벌이 반란을 일으켜 한니발에게 붙어버렸다. 하지만 로마에서 파견나온 마르켈루스가 곧바로 시라쿠사를 겹겹이 에워싼 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카르타고 본국에서 상륙한 카르타고군을 연이어 격파함으로써 결국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섬에 이탈리아 본토상륙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