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동/씨름

씨름계의 악동.
한때 이만기를 눌려버렸던 슈퍼루키.

1 1989년

마산상고(現 용마고)를 졸업하고 부산조흥금고에 입단했다. 데뷔전은 89년 3월 대전 천하장사대회 8강전이었다. 데뷔전때부터 괴성을 지르며 등장했지만 경기도중 양선수 모두 상대방의 샅바를 놓치고 되었고 아직 심판의 중단 신호가 없었음에도 경기가 중단되었다고 판단한 강호동이 방심한 사이 상대방 선수에게 바로 밀려 넘어지면서 데뷔전에서 첫 패를 기록한다.[1]
이때는 고3때 당했던 큰 부상 후유증때문에 초반에는 활약을 못했지만 점차 부상 후유증에서 회복하고 기량을 찾았다. 그러다가 1989년 5월 일양약품으로 트레이드되면서 일양약품의 간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일양약품 소속 당시 자사 제품인 아진탈포르테 광고에도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데뷔 후 44회 장사씨름대회에서 백두장사로 처음으로 타이틀을 거머쥔다. 이 때 준결승전에서 이만기와의 첫 공식전을 치러서 승리를 거두는 파란을 일으켰다

2 1990년

강호동 본좌 등극

일양약품에 입단하여 100% 몸상태로 맞은 1990년은 이미 일양약품의 감독이 올 시즌을 이만기 vs 강호동으로 정의할만큼 씨름판에서 강호동이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시즌이다.

1990년 3월 성남에서 열린 18회 천하장사대회에서 씨름판의 슈퍼스타이자 마산상고 대선배 이만기와 처음으로 천하장사 대회에서 맞붙었고, 그 전날 백두장사 결승에서 승리하고 준결승에서 또다시 승리하면서 대선배 이만기에게 모래를 뿌렸던 전설의 세레모니로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2] 그리고 90년 씨름판은 3번의 천하장사대회를 싹쓸이하면서 본좌로 등극했다. 백두장사는 2회 등극.

3 1991년

1991년에는 황대웅 장사와 김칠규 장사와 함께 민속 씨름을 3분했었고 천하장사는 황대웅이 많이 차지했지만, 강호동은 23회 천하장사에 등극했고, 백두장사는 54~57회 4연패를 달성했다. 그래서 91년 종합 승률에서도 당당히 1위였다.

4 1992년

1992년 3월 24회 박광덕[3]과 결승에서 만나서 3:2로 이기면서 천하장사 타이틀을 5회 획득하였고 천하장사에 등극하여 역대 2위인 5차례 천하장사등극의 기록을 달성하지만 이 다음 대회인 63회 체급별장사씨름이 끝난뒤 소속팀 일양약품을 무단이탈한뒤 잠적해버려서 큰 논란이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92년 5월 "신인들의 체격과 힘을 감당하기 힘들다. 부상문제로 선수생활을 끝낸다."란 여러모로 이해하기 어려운 발표를 한 후 은퇴했다.[4][5]

단 이때 반항아라고만 부르기에는 지나친 행동도 있었는데, 내가 이만기보다 못한게 뭐냐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만기의 연봉 6천만보다 무조건 더 받겠다는 선언과 함께 팀을 이탈해 연봉협상을 벌이던 도중 도중에 갑자기 마산으로 내려가는 뗑깡을 부린 적이 있다.

5 강호동의 시대

90년 3월 천하장사로 등극하면서 당시 최연소 천하장사(훗날 백승일에 의해 경신), 최단기간 5회 천하장사(이만기선수가 10년에 걸쳐 10회의 천하장사 타이틀을 보유했는데, 강호동은 불과 3년에 5회 천하장사), 당시 현역 승률 1위 기록을 보유했다.

강호동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당시 백두급 주력 선수들은 이만기 시대와 달리 신장 180cm 체중 100kg 전후급에서 점차 올라가 신장 180cm중반, 몸무게 120kg 내외였는데 강호동의 전성기 체급은 182cm 체중 120kg였다. 강호동은 당시 백두급에서도 체중과 힘이 상위권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스피드와 경기운영능력이 극강이었다. 그야말로 완전체. 강호동이 완벽한 기술 씨름꾼이었던 이만기와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당대 최고의 스피드와 힘을 조합한 기술 씨름을 해냈던 유일한 백두급 선수였고 2년뒤 등장한 백승일[6]과 더불어 마지막 백두급 테크니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91년 160kg의 박광덕(당시 럭키증권)이 입단하여 22회 천하장사 결승전까지 올라가는 임팩트를 남기고, 그 다음해 슈퍼두꺼비 김정필이 입단하면서 백두급 장사들의 평균체중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때 최전성기였던 강호동은 변화하는 백두급 장사들의 사이즈에 고전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자신보다 40kg나 무거웠던 박광덕을 결승에서 이기고 천하장사에 오른적도 있다.

하지만, 가난했던 소속팀 일양약품과의 연봉협상 갈등이 폭발하면서 강호동은 사실상 씨름을 그만두고 연예계 전업을 선언했다.

6 성적

6.1 백두장사

  • 1989년 7월 44회 부산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임용제)
  • 1990년 3월 47회 성남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이만기)
  • 1990년 5월 49회 원주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황대웅)
  • 1991년 3월 54회 부산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한병식)
  • 1991년 4월 55회 태백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임용제)
  • 1991년 5월 56회 마산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황대웅)
  • 1991년 6월 57회 이리 백두장사대회 우승 (vs 황대웅)

6.2 천하장사

  • 16회 천하 및 40회 백두장사대회 (1989-03-09~89-03-12 대전충무체육관)
순위: 이만기(우승) 고경철 이종식 심인섭 이승삼 손상주 장지영 강호동
  • 17회 천하 및 45회 백두장사대회 (1989-09-09~89-09-12 잠실학생체육관)
순위: 김칠규(우승) 이봉걸 강호동 곽연근 임용제 황대웅 이만기 이민우
  • 18회 천하 및 47회 백두장사대회 (1990-03-09~90-03-12 성남실내체육관)
순위: 강호동(우승) 유영대 이만기 김칠규 이승삼 문위경 이종식 문성식
  • 19회 천하 및 50회 백두장사대회 (1990-07-14~90-07-17 춘천실내체육관)
순위: 강호동(우승) 남동하 김칠규 임종구 심인섭 황대웅 임용제 임광섭
  • 20회 천하 및 52회 백두장사대회 (1990-10-26~90-10-29 인천실내체육관)
순위: 강호동(우승) 황대웅 남동하 임종구 박태일 이민우 임광섭 김칠규
  • 21회 천하 및 54회 백두장사대회 (1991-03-22~91-03-25 부산구덕체육관)
순위: 황대웅(우승) 임종구 강호동 박태일 김성우 강순태 고경철 이기수
  • 23회 천하 및 59회 백두장사대회 (1991-09-21~91-09-24 대구실내체육관)
순위: 강호동(우승) 남동하 김칠규 황대웅 지현무 임광섭 임종구 서찬호
  • 24회 천하 및 62회 백두장사대회 (1992-03-20~92-03-23 장충체육관)
순위: 강호동(우승) 박광덕 임용제 황대웅 김칠규 이기수 강기승 지현무

7 여담

유명한 얘기지만, 현역시절 온갖 괴상한 표정과 포즈와 함께 괴성을 지르고 윙크를 하고 시합 전에 덤블링을 하는 등 쇼맨쉽으로 유명했다. 지금의 무지막지한 리액션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훗날 1박 2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는 기라성같은 선배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한 퍼포먼스였다고 한다.

"시합은 똑같은 위치 아닙니까? 선수대 선수로서... 선배 대 후배로 시합하는게 아니고 선수대 선수로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후배를 잘 안 따집니다. 시합 때는." - 인터뷰 중에서

그러나 이런 성격이 같은 마산 출신의 대선배이자 씨름황제 이만기를 상대로도 드러났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박 2일에서 이만기가 밝힌 바에 따르면, 강호동이 어릴 때 한동안 이만기의 집에서 얹혀살 정도로 두 사람의 연이 깊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면도 있다.

결국, 이만기가 강호동의 지나친 쇼맨쉽에 짜증을 내는 일까지 생겼다.

[1]
(6분 44초부터)

당시 강호동은 기습공격으로 이만기를 이기고 난 뒤였는데, 이만기가 슬슬 짜증이 났던지 다음 판 시작 직전에 "깝죽거리지 마라, 쉐키야"라고 일갈, 벙찐 강호동이 "...예?"라고 대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강호동이 그 다음판도 이기고 난 뒤 평소처럼 환호하려다가 문득 팔을 바로 내리고 이만기에게 공손하게 악수를 청했는데 이걸 뿌리쳐버린다.

두 선수 모두 불같은 승부욕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고, 은퇴 이후 두 사람 모두 성격이 유해지면서 지금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 [7] 표하는 상태다. 물론, 무릎팍 도사에서 이만기가 강호동에게 당한 첫 패배에 대해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 강호동은 은근히 이 점을 강조하는 등 장난스런 신경전은 벌인 적이 있다. 다만, 무릎팍도사는 대사가 있는 것이라...

특히, 1박 2일에서 두 선수가 20년만에 벌인 리매치의 경우 현역선수를 연상케 할만큼 혈투였던데다, 막상 승부가 시작되자 그 강호동이 장난스런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게 임했다.

강호동이 이만기를 잘 잡아서 한창 명성을 날렸다면 역으로 약한 대표적인 상대는 이봉걸이었다. 2m가 넘는 거구에 힘과 기술이 갖춰진 이봉걸은 이만기를 대처하는데 주력했던 강호동에게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난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봉걸은 강호동이 데뷔하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연이은 부상으로 은퇴했기 때문에 씨름계가 정말로 기대했을 '이만기 > 이봉걸> 강호동 > 이만기'라는 형태의 물고 물리는 형태의 구도는 얼마 지속되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명백히 테크니션이었던 강호동은 박광덕, 김정필등 150kg 이상 중량급 선수들이 등장하는 그 시기에 씨름 외적인 이유로 조기은퇴한다. 이 때문에 강호동이 은퇴하지 않고 박광덕, 김정필, 이후 백승일, 신봉민, 이태현, 김경수등 140kg을 넘는 장사들이 줄줄이 등장했던 92년 이후에 얼마나 롱런할 수 있었을지도 떡밥거리중 하나다. 결과적으로 강호동 이후 강호동을 이을 씨름스타의 명맥은 끊어졌고, 점점 사양세와 내분으로 멸망해버린 씨름계에 강호동의 빈자리가 얼마나 컸는지는 씨름계를 지켜왔던 이만기를 포함해서 수많은 씨름인들이 안타까워 하는 일이다.

1박2일 외연도 편에서는 김C와 술자리 콩트를 하다가 선수 시절의 경험담을 말했는데, 샅바를 안 차고 경기장에 들어간 적도 있었고, 천하장사가 걸린 마지막 한 판에서 갑자기 배탈이 나는 바람에 경기를 포기한 적도 있다고 한다.7분 24초부터.
  1. 재밌게도 이만기와 붙었을 당시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는데(밑에 나오는 이만기가 짜증내는 동영상에 나온다), 이번에는 이만기가 이 규정을 몰랐던건지 허점을 보이다가 강호동이 달려들자 뿌리쳤으나 이후 강호동이 이종격투기식으로 테이크다운을 성공시킨다. 이렇게 이기고 난 뒤 인터뷰에서 본인도 데뷔 전 당시 패배에 대해 언급한다. 당시 자신도 억울했지만 이 패배가 약이 되었다고...
  2. 이 경기에서 89년 강호동의 첫 데뷔전때 있었던 일이 재현되는데 이번에는 샅바를 놓친사이 방심해있던 이만기를 강호동이 기습해서 쓰러뜨리면서 1차전을 가져갔었다.
  3. 씨름계에서도 알아주던 실력파 선수였고 큰키에 나름 있는 덩치를 잘 활용한 덕에 천하장사 대회 결승에만 5번이나 오르며 위엄을 뽐내었으... 5번 모두 준우승에만 그쳐 만년 우승후보라는 비운의 꼬리표를 가진 선수였다. 별명은 모래판의 람바다 또는 람바다 였고 이렇게 부르게 된 이유는 항상 세레모니로 람바다 춤을 춰서 나온 것 이라고 한다.
  4. 하지만, 후에 방영된 모 방송사의 씨름 다큐멘터리에서는 씨름에 대한 부담감으로 인한 회피가 크게 부각 되어나타난 것으로 알려졌고 선수로 보낼 당시에도 나서기 싫다는 식의 반응까지 선보여서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5. 참고로 이 사실은 대회에서 활약하였던 전통 음악 단원 출신 여성분이 직접 말한 것으로 활동 당시, 강호동과도 매우 친분이 있었다고 하였다.
  6. 등장과 함께 강호동의 최연소 천하장사 기록을 경신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140kg의 체중으로 강호동 스타일의 씨름을 하다가 무릎이 망가지면서 선수생활을 일찍 마감했다. 그리고 은퇴이후엔 트로트 가수로 활동
  7. 특히 강호동은 가장 존경하는 선배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