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쟁

격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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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이 '합법적'으로 국왕에게 직접 민원을 재기하는 제도를 격쟁이라 했다.
일반 백성이 에 들어가거나, 임금의 외부행차시 이나 꽹가리를 쳐 직접적으로 왕에게 자신의 사연을 고하는것이다.
글을 올려 자신의 민원을 재기하는것을 상언(上言)이라 하였고, 행차시에 해당 상언을 수리하는 관리가 길가에서 민원을 걷어 이후 에게 올렸으며,
글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꽹과 징을 올려 자신의 민원을 재기하였고 대기하고 있던 관리가 이를 받아 적었는데 이를 격쟁이라 했다.

본디 신문고라는 제도가 있었으나 일반 백성들과의 거리감도 있었으며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였고, 영조때 되살아나기도 하였으나 상징적인 의미로만 남았다.[1] 반면에 이러한 격쟁과 상언제도는 그러한 백성과 왕과의 거리감을 줄여줄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정조때 이러한 격쟁이 매우 활발했으며, 약 4천 4백여 건의 민원을 격쟁을 통해 직접 처리하였다. 평균 횟수로 따지면 정조는 한번 행차시 50여건의 민원을 수리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주로 밖에서 백성들의 민원을 수리하였고, 영조는 홍화문 근처에서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하였다.[2][3]

일단 민원 수리가 확정되면, 평균 3일만에 백성들은 그 민원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격쟁은 합법이었으며, 격쟁과 상언 재기의 계급 비율을 보면 평민천민이 과반 이상이었다. 이후 격쟁이 난잡해지고 사사로운 개인의 송사까지 궁에 들어와 격쟁을 거는 일이 빈발하자 철종때는 왕이 행차시에만 격정을 수리하도록 규정을 변경했다.
  1. 이게 무슨뜻 인가 하면.. 분명 신문고 를 울려서 억울한 사정을 설명을 하면 그 억울함을 풀어주겠다. 해놓고 정작 신문고 는 궁궐 안에 설치를 해 놨다. 그런데.. 왕족들과 궁인.궁녀. (왕의 소집을 받은)대소신료들. 을 제외하면 일반평민 은 궁궐에 들어갈수 없었다.
  2. 50년정도 를 재위한 영조 보다 20년정도 재위한 정조 의 상언.격쟁 의 숫자가 갑절가까이 많았다고 한다.
  3. 일설 에 따르면 천민들 의 경우는(평민들도 그랬다는 말도 있고) 정말로 이걸 임금께 보일것이냐? 확인을 받으며 정말로 그렇다는걸 증명하기 위해서 곤장을 맞고 접수를 했다는 말도 있다. ... 진실로 억울하니 그렇게 라도 풀어야하겠다는 일종의 다짐 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