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공주

慶順公主

? ~ 1407년 9월 8일

조선 초기의 왕녀. 태조 이성계신덕왕후 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적녀로, 의안대군무안대군의 동복 누이이다. 태조의 딸들은 생몰년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 정확한 출생순서는 알 수 없으나, 적녀들 중에서는 신의왕후 소생인 경신공주와 경선공주에 이은 셋째딸이자 막내딸로 추정하고 있다.

아버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개국공신 흥안군 이제와 혼인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방원이 경순공주의 동복형제인 의안대군무안대군을 살해하고 의안대군을 세자로 옹립하거나 방원을 견제하려 했던 공신들도 처형하면서 남편 이제도 처형되었다. 공주는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남편에게 방원의 밑으로 들어가라고 설득하였으나, 강직한 성품이었던 그는 듣지 않고 처남들과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동복형제들과 남편을 잃은 경순공주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며, 조선 최초로 출가한 왕족이 되었다. 신덕왕후의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이자 의안대군, 무안대군의 누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녀마저 방원에게 화를 입을까 염려한 태조가 직접 그녀의 머리를 잘라 출가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로도 태조는 딸을 염려하고 그리워하여 자주 찾았다고 한다.

공주는 출가하고 정업원인 청룡사에서 몸을 의탁하였는데 이곳은 당시 갈 곳을 잃은 고려 왕족들의 처 등 왕실 여성들이 많이 지내고 있던 곳이었다. 공민왕의 후비인 혜비 등 왕실 여성들은 공주를 따뜻하게 맞아 위로해주었으며, 경순공주의 올케이자 의안대군의 부인인 심씨도 출가하여 청룡사에서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이후 공주가 죽기까지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적극적인 숭유억불정책을 펼쳐 사찰들을 폐쇄할 때도 정업원은 예외로 하고 신하들이 정업원의 예산이 사치스러운 것을 일컬어 폐쇄를 주장해도 유지시킨 것은, 정업원에 머물고 있는 누이 경순공주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세종대왕이 즉위하고 남편 이제가 신원되었으며, 경순공주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기에 조카인 이윤으로 대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