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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 (神德王后) | |||
시호 | 순원현경신덕왕후 (順元顯敬神德王后) | ||
사망지 | 이득분(李得芬) 사저 | ||
본관 | 곡산(谷山) 또는 신천 | ||
배우자 | 태조(太祖) | ||
아버지 | 상산부원군 강윤성 | ||
어머니 | 진산부부인 강씨 | ||
생몰 기간 | 음력 | 1356년 6월 14일 ~ 1396년 8월 13일(향년 41세, 만 40세) | |
양력 | 1356년 7월 12일 ~ 1396년 9월 15일 | ||
재위 기간 | 1392년 ~ 1396년 |
1 소개
태조 이성계의 계비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 이방과, 이방원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개국 직전에 사망했다. 또한 신의왕후가 왕비로 추존된 시기는 정종이 즉위한 이후이다.
무안대군, 의안대군, 경순공주의 어머니이며, 본관은 신천.
2 일생
상산부원군 강윤성(象山府院君 康允成)과 진산부부인 강씨(晉山府夫人 姜氏)의 딸로, 부계는 고려 태조 왕건의 모계 쪽 선조였고, 모계는 강이식의 후손인 진주 강씨였다.
신덕왕후의 숙부 강윤충은 태조의 큰아버지이자 환조의 형 이자흥의 사위였는데, 이런 인연으로 이성계와 접촉할 수 있었고 강윤성의 딸이 이성계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성계와 무려 21살의 나이차가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현비(顯妃)에 봉해져서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태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본인의 소생인 의안대군을 세자로 만드는데 성공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병으로 죽었다. 사망 직후 존호는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고 능호(陵號)를 정릉(貞陵)이라고 했다. 그녀가 죽은 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의안대군은 제거되고 그녀도 죽은 뒤 후궁으로 지위가 깎였으나, 현종 때 복권되어서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라는 시호를 받는다. 대한제국 때는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추존.
사실 그녀의 위치는 좀 어정쩡한 부분이 있다. 고려 때는 여러 명의 정실 부인을 둘 수 있었고, 신덕왕후는 본래 이성계의 경처(京妻)였다. 그런데 조선은 고려와 달리 1명의 정실 부인만을 인정했다. 신의왕후 한씨가 조선 개국 전에 사망했기에 별 문제 없이 조선의 첫 왕비가 되었지만, 실제로 한씨가 조선 개국 때 살아있었다면 서열 싸움이라든가, 고려 때처럼 정실부인을 여러 명 두도록 할 것인가라든가, 강씨와 어느 쪽을 왕후로 세우느냐 같은 걸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원래 고려 때도 정실 부인을 여러 명 두는 사람은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 최우도 첩은 많았지만 정실부인은 한 명이었다(재혼을 하긴 했지만). 일부다처제 항목에도 있지만 정말 여러 명의 부인을 둬도 괜찮은 건 왕 정도였고, 그나마 정실 부인을 여러 명 둬도 대부분은 이성계처럼 고향에 둔 향처와 도성에 둔 경처의 두 명 정도.
태종이 정당성 등을 이유로 그녀를 후궁으로 격하했음에도 후대에 그녀가 태조의 계비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 개국 당시 신의왕후 한씨가 고인이었고, 태조의 치세 때 태조의 정비는 신덕왕후 1명 뿐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신덕왕후의 능은 오늘날의 중구 정동에 뒀지만, 태종 대에 지금의 위치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졌다. 당시 정릉동은 양주목 관할이었다. 여기가 영화 건축학 개론에 나오는 그 정릉이다.
무덤이 옮겨지기 전에 무덤으로부터 100보 밖에 있던 땅을 하륜 등 공신들에게 나누어줬는데, 그 자리에 공신들의 집들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태조는 그저 말없이 울었다고 한다.(...) 이 부분은, 고려 때만 해도 도성 안에 왕실의 묘를 쓸 수 없었는데 태조가 이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태종도 아버지인 태조가 죽기 전까지 이장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정릉이 이장된 것은 태조가 죽은 다음해의 일이다. <태종 17권, 9년(1409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2월 23일(병신) 1번째기사>. 능에 사용되었던 12지상들은 청계천을 치수한 김에 광교를 세워서 석재로 사용해 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버렸다. 태종은 그녀를 미워하여 나중엔 신덕왕후의 위패를 종묘에서 치우고 기일이 되어도 조회도 파하지 않고 진행했는데 태조의 체면을 생각해서 제사는 지내되 왕후가 아니라 후궁의 예로 제사를 지냈다.
사실상 평민의 무덤으로 전락해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한지 172년이 지난 1581년, 선조의 가마 앞에서 강순일이 '자신은 국묘를 돌보고 있으니 군역에서 면제해달라'고 격쟁한다. 당시 함흥에 있는 조선의 추존 4대조 왕릉을 관리하는 사람을 국묘봉사자라 해 군역을 면제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강순일의 주장은 신덕왕후를 왕비로 복위시켜달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선조도 신의왕후의 후손이라서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백년 가까운 논쟁 끝에 1669년 송시열이 신덕왕후의 복위를 상소해 현종이 이를 가납함으로써 신덕왕후의 위패가 다시 종묘에 모셔지고 무덤도 왕릉으로 수복되었다. 1669년 음력 8월 5일 신덕왕후가 복위되던 날 폭우가 쏟아졌는데, 백성들은 왕비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여겼다고 한다.
3 평가
동북면 변방 출신의 장수였던 태조 이성계를 중앙에 연결해서 결국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소생인 의안대군을 세자로 밀어주면서 그녀가 죽은 뒤에 조선왕조 초기 피바람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40세에 승하했다. 만일 폐세자 의안대군 방석이 장성할 때까지 살았다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태종 이방원의 무인정사도 그녀의 승하 2년 후에나 일어났다는점. 태조가 그녀의 죽음 이후 정치의 뜻을 잃었다는 점. 그리고 그녀의 든든한 집안배경에서 볼 때 터무니없는 가정은 아니다.
역시나 가장 큰 결점은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지나친 욕심. 사실 이방원은 훗날 숙청할 떄도 완전히 박살을 내놓은 처가를 제외하면 삭탈관직 및 귀양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고, 그냥 신의왕후의 소생들을 세자로 삼자고 했으면 이방원도 이를 고려해 신덕왕후의 아들들을 죽이지 않고 왕은 못 되더라도 나름 종친으로써 대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4 사극에서
용의 눈물에서는 김영란,[1] 5백여년 후 환생하여 다시 군인의 아내에서 국모가 되는 일생을 산다고 하더라 대풍수에서는 윤주희가 정도전(드라마)에서는 이일화가 배역을 맡았고,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김희정이 맡았다.
용의 눈물에선 태조의 총애가 극진한 인물로 나오며 이성계의 안주인 노릇을 톡톡히 하는 인물로서 그려진다. 이방원과는 원래 사이가 괜찮았다. 이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일로 면전에서 이성계가 방원을 죽이려 들자 이지란과 같이 말리고, 이성계가 그 이후에 군령으로써 방원의 목을 베어오라고 이지란에게 지시하자 "비록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다섯째도 자신의 자식이다"라고 울먹이며 이성계에게 선처를 호소한다. 중전이 된 이후의 강씨의 태도를 보자면 진짜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의 차이이다. 이방원 측에서도 부인 민씨 등이 신덕왕후 경계를 한다. 물론 정적으로서 경계라기 보다는 '저 사람 너무 믿으면 곤란' 이 정도였고 이방원은 그런 아내를 점잖게 타이르곤 했다.
이방원도 조선 개국 전까지는 어머니로서 극진히 모셨다. 그런데 개국 이후 세자를 정하는 대전에서의 논의 도중에 대전 밖에서 울부짖으며 인간백정 방원이는 안됩니다!!! 같은 어그로를 끄는 기염을 토했다(...). 결과적으로 이성계가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면서 신덕왕후는 한씨 소생들, 그중에서도 이방원을 홀대하게 된다. 신덕왕후 입장에서는 이성계와 전처 사이에 나온 자식들이 다들 장성했고 사병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가 죽고 나면 자신과 어린 두 아들의 처지가 무사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예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닌 것이, 기본적으로 한 가족이라지만 한씨 소생 자식들의 입장에서는 사랑도 못 받고 죽은 어머니 한씨를 대신하여 나라의 중전이 된 강씨에게 기본적으로 어그로가 끌릴 수밖에 없다(...). 때문에 방석을 세자로 봉하고 정도전 같은 고명대신들을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방석을 세자로 무리하게 밀어붙인 까닭에 한씨 소생 자식들이 결정적으로 분개하게 된다.
처음엔 '에이 그래도 설마 어머니께서 나한테 그리하셨겠나...' 모드였던 이방원 역시 갈수록 신덕왕후와 대립이 깊어지게 된다. 심지어는 추운 겨울에 잡은 노루를 신덕왕후 면전에 내던지면서 "아바마마께서는 여색에 빠지시어 몸이 쇠하셨소, 아바마마께 고기 한점 떼먹지 말고 고아 드리옵소서"라고 할 정도였다.
이 장면은 배우 김영란씨에게 사전에 알리지 않고 찍어서 김영란씨가 촬영 당시에 실제로 기겁했다고 한다. 노루도 그럴듯한 인형이나 박제가 아니라 실제 살아있는 노루를 마취로 기절시키고 찍은거라니 더욱 실감났을듯(...).
여기에 세자빈의 간통 사건과 더불어 세자 방석의 흑화까지 겹치면서 홧병으로 처절하게 병사한다. 이때 신덕왕후가 죽어가면서 "방원이가 살아있는 한, 우리 세자는 산 목숨이 아닙니다. 방원이가 죽어야 합니다! 방원이가 죽어야! 방원이가!!!!!!",[2]라고 절규하는데 이 장면은 무인정사 이후 두고두고 태조가 회한에 잠길 때마다 등장하게 된다. 이와 함께 나오는 장면은 방번, 방석 형제의 참살장면. 이성계의 깊은 한과 아들과의 애증을 상징하는 장면들이다.
사후 내레이션에서는 '미모와 지략을 갖춘 걸출한 여인이었다'로 설명된다.
하지만 정작 작중 행보는 지략을 확실하게 발휘하기보다는 정도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며 왕자들(특히 이방원)에게 치인다. 권력에 욕심이 없는 방의, 방과는 방석의 세자책봉 이후에도 별다른 마찰이 없었고 괄괄한 방간도 공적인 자리에선 예를 지키는데 반해 방원은 이성계나 신덕왕후 면전에서 직언을 서슴치 않는다. 또 세자 방석의 개초딩 짓거리에 속만 썩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모습이 많다.
여기에 종종 중대한 일을 처리할때 무당을 불러 점을 치고 푸닥거리를 하는 꽤나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는 탓에 작품 속 이미지가 별로 좋지는 않다. 굿을 하는게 꼭 한심한 행동일 필요는 없으나, 주변 인물들의 이를 보는 시각과(무당이 홀대받던 시기였으니...) 굿 특유의 광적인 연출이 겹쳐 한심스러움이 배가된다. 여기에 현대에도 무당의 이미지는 좋은 편이 아니니... 그런데 이 때 부르는 무당이 꽤나 용해서, 작중 일어날 일의 대부분을 예견해서 맞추는 신기를 보여준다.작중 병 하나 제대로 고치는 모습이 없는 어의따위보다 훨씬 낫다
그러나 그 담대하고 총명하던 원경왕후조차 말년에 남편과 소원해지고 동생들이 죽고 양녕대군은 엇나가고 성녕대군이 몸져눕는 악재속에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다 무당을 찾으니 무당을 찾는 것만으로 신덕왕후를 섣불리 폄하할 수는 없다. 작중 신덕왕후의 실착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끝간 데 없이 한씨 소실 왕자들의 어그로를 수집했다는 점, 가장 무서운 적수인 이방원을 드러내놓고 핍박하고 몰아붙여서 원한 마일리지를 무더기로 적립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작중의 불안한 상황 때문에 세자 방석을 죽도록 공부만 하라고 몰아붙이고 사사건건 간섭하는데, 어찌 보면 세자빈의 간통 사건에 지나친 교육열로 빌미를 제공했다 할 수 있다. 원경왕후도 소식을 전해듣고 '중전의 욕심이 자식을 망쳐놓는다.' 고 평할 정도.
정도전(드라마)에서의 신덕왕후는 해당 항목에서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