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조선시대의 설립이념 중 하나.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한다는 의미이다. 타 사이트에서 검색할 때, "억불정책"으로 쳐야 나오기도 한다.
2 배경
2.1 불교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
삼국시대 때 불교가 들어온 이후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불교는 정치권력과 많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불교가 세속적인 권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후대 유학자들의 시선에서 볼때는) 고려 말에 이르면 불교가 문란해지고 부패하여서 오히려 사회를 좀먹는 존재라고 여겨졌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유학자들의 시선이라는걸 명심해야 한다. 물론 승려가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를 지니게 되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당시의 불교를 마치 나라를 좀먹는 사회악인마냥 여기기에는 여러 모로 무리가 있다. 어찌보면 계몽시대 유럽의 지식인들이 중세의 가톨릭 교회를 사회악이라고 까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2.2 기득권 쟁탈
외적의 침입[1]으로 기존의 지도층에 방식에 대한 불신이 점차 증대[2]되어 갔고, 그에 따라 새로운 사상 등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 결과로 향리 계급층을 위주로 성리학을 받아들인 신진사대부가 등장했다.[3]
그들의 시선으로는 고려의 멸망에는 불교가 한 몫을 거들었다. 등으로 보였다. 특히 큰 문제는, 불교가 고려의 기득권층과 연합했다는 점이다. 신진사대부들 중 급진파[4]는 "고려의 지도층이 망쳤으니 그들을 없애고 그들과 연합한 자들도 제거해야한다."라는 취지였고, 보수파[5]는 불교에 대해 시정(올바르도록 고침)을 요구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더불어, 원래 기존의 기득권층으로 부터 권력을 뺏으면 그에 대한 반발이 있기 마련인데, 반대층이 불교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킬 경우의 위협을 없애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3 방법
3.1 숭유
목적 : 유교적 정치의 구현
- 집현전 : 유능한 유학자 양성 및 학문적 연구, 추가적으로 이들이 은퇴하고나서 서당을 설립한 뒤에 아이들에게 유학을 가르친다는 이점.[6]
- 예조 : 6조 중의 하나로, 유교적 교육 및 외교를 담당하는 행정기관 [7]
- 유교적인 예식과 제도를 정립.[8]
- 유교 서적 보급.
- 유교식 제사 장려
3.2 억불
여러가지 사례를 언급한 것이며, 어느 것은 지속적으로 이뤄진 것이기도 하고, 한 임금의 시기에만 그런 것도 있다.
- 절을 산으로 내쫓는다.[9]
- 불교의 종파의 통폐합[10]
- 절(=사원)의 숫자와 승려(=사제)의 숫자를 강제로 감소시키기
- 절이 가진 모든 토지와 노비 등을 국유화
-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12]
- 여성의 절 출입 금지[13]
- 승려를 양인이 아닌 천민으로 대우함.
- 도첩제[14]
- 경국대전의 도승조(度僧條)폐지
- 국사(國師), 왕사(王師) 폐지
- 사찰에 조상제사 대행 금지[15]
- 불씨잡변 편찬 등 불교의 교리 비판
극단적으로는 회암사나 분황사처럼 직접 테러를 가한 정황이 보이기도 한다. 회암사는 아래 참조. 경주시 분황사는 근처 우물[16] 안에서 목이 잘린 불상 수십 기가 나왔다. 사실 불상의 구조상 넘어지면 목이 쉽게 부러지기 마련이지만, 목 잘린 불상이 우물에 가득 쳐박혀 있는 건 반불교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작정한 반달리즘일 가능성이 높다. 이 목 잘린 불상들은 건져서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관에 줄세워 놓았다. 남산(경주)에도 의도적으로 파불(破佛)됐던 불상과 조각의 안면과 목을 다시 붙여놓은 것을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단 이런 극단적인 사례들은 일부 유교 극단주의자들이 주도한 것으로 보이며 일단 조선 조정의 공식 입장은 이 정도로 강경하지는 않았다. 또한 사찰에 이 짓을 하려다가 오히려 조정에게 처벌받은 사례도 있다. 특히 아래에 나온 것처럼 왕실과 직접 연관된 사찰이나, 실록 보관 등 조정의 일을 맡은 사찰의 경우 억불의 문제가 아니라 조정과 왕실에게 도전한다는 의미가 되므로 엄히 처벌했다.
한편 경연이나 국가 시책에 대한 회의에서 과거 역대 왕조에 대해 평가하면서 '이게 다 불교 때문이다'란 식으로 책임을 불교에게 돌리는 사례도 많았다. 특히 고려 왕조의 멸망에 대해선 '기승전불교' 수준.[17]
이러한 억불 정책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 불교가 친일 성향으로 빠지는 요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억불정책으로 인해 한국 불교의 조선 왕조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는 것을 파악한 일제가 이를 이용해서 불교계의 항일 운동을 탄압하는 동시에 회유 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한국 불교는 친일 성향이 강해지고 그 성격도 일본식 제도를 많이 받아들이기도 했다.
다만 정부차원에서 억불을 행하기는 했어도 지방에 있는 유생들보다는 좀 덜 심했다. 초반기엔 되려 왕실에서 불교를 옹호하는 이들이 많았고, 정부에서도 두부 제조라든가 공사라든가 하는 일에 승려들을 동원했고, 동서활인원에서 일하는 이들도 노비와 승려였고, 매골승이라고 해서 한양과 성저십리에서 버려진 시체를 매장하는것도 승려가 맡았다. 또한 유생들이 너무 승려들을 핍박하면 유생들을 처벌하기도 했고, 유생들이 절에 올라가서 행패를 부리는걸 알고는 상서금지령[18]을 내리긴 했다. 효과는 없었지만.
4 예외 사례
아래를 읽으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한가지 있는데,아래 사례를 가지고 조선시대에 불교를 탄압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는 사실이다. 첫째로는 아래 사례들이 일부 왕의 개인적이고 부분적인 조치였을 뿐 억불 기조는 조선시대 내내 정책의 기본으로서 유지되었고, 둘째는 설령 불교를 부분적으로는 우대했다고 보더라도 전조 신라나 고려 시대의 불교에 대한 대우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만치 처참하게 낮은 대우였다는 점은 어떻게 봐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한말에 가서야 억불정책이 완화되며 조계사 문서에서 당시 불교계의 입장을 찾아볼 수 있다.
4.1 태조 이성계
조선에서 불교를 매우 좋아한 임금 1
1. 유교는 정치, 불교는 종교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본래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
2. 무학대사 관련
3. 태종 관련
4.2 태종(이방원)
차남 효령대군은 불교에 심취했다. 다만 태종 본인은 불교를 싫어했다만 딱 한번 왕비 원경왕후가 위독하자 승려들을 불러 기도케 했는데 이때 "효험 없으면 불교를 깡그리 없앨 테다!!"해서 승려들이 이마와 팔뚝을 지져대며 기도했는데, 다행히 나아서 태종은 회암사에 땅과 곡식을 내려 치하했다.
4.3 세종(이도)
두 아들과 왕비 소헌왕후를 잃고서, 불교에 심취하여 호불[22]의 군주를 자칭. 궁 안에 내불당을 설치하였다. 중 신미를 총애했고 승과를 실시했다.
사실, 세종의 억불정책은 태종의 영향이 크다. 세종 즉위 후에도 군사부분은 태종이 휘어잡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유교의 핵심부인 왕실에서 최소한 자기 아버지 살아있을 때는 하라는 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23][24][25]
4.4 세조(이유)
조선에서 불교를 매우 좋아한 임금 2
계유정난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26]으로 시작된 경향은 아니다. 임금이 되기 전부터 이러한 경향을 보였으니까.
4.4.1 명언(?)
1. 어머니 소헌왕후 심 씨가 병상에 있을 때, "궁궐에 법당을 지어 심신을 달래야 한다"
2.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이니 나는 절대로 그딴 놈 취하지 않겠다!"
3. "공자보다 석가모니가 훨씬 낫다"
4.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
4.4.2 행각
1. 사헌부에서 도첩이 없는 승려를 잡아가자 멋대로 풀어주기.[27]
2. 원각사, 간경도감(불경을 간행하는 국가기관) 설립[28]
3. 친필로 부처에게 봉안할 문서 작성
4.5 예종(이황)
성종때 도첩제 폐지 안이 나왔을때 신하들이 "예종께서도 불교 좋아했지만 명이 짧았습니다."라고 했는걸로 보아 불교를 신봉한 듯
4.6 명종(이환)
중종의 중전이자,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29]의 불교 보호.
회암사를 유생들이 불태우려 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이를 금지했다.[30] 하지만 명종은 정말 불교가 좋아서 옹호하지는 않은 듯하다. 걍 자기 어머니 문정왕후가 불교를 좋아해서 입 다물고 있던 것일 뿐인 거 같다.- ↑ 홍건적, 왜구
- ↑ 사병을 보유한 사람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면, 일반인에게 무기에 대한 소유권과 그를 사용할 권한을 줄 필요가 없다.
- ↑ 성리학은 애초에 불교에 대해 유교가 대대적인 반격을 하면서 정립된 학문이기에, 그 자체로 반불교적인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다.
- ↑ 조선 개국 공신 = 조선의 지도층
- ↑ 예시 : 정몽주
- ↑ 초기의 서원도 마찬가지
- ↑ 오늘의 교육부와 외교부
- ↑ 과거의 시험문제를 "유교적 관점으로 어떻게 국가를 이끌어가야하나?"로 내는 것 등
- ↑ 조선 이전에 절은 산기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성당이나 교회와 같이 도시의 길거리에 흔히 있던 시설이었다. 이를 산으로 보내면 접근성이 떨어져 신도가 줄어들 것이라는 관점에서 시행되었다.
- ↑ 태종 : 11종단 -> 7종단 & 세종 : 7종파 -> 2종파
- ↑ 링크가 귀찮은 사람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종교인이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 ↑ 이는 구한말에야 해제되었고 이런 오랜 억불정책 청산의 상징으로서 지금의 조계사가 지어진다.
- ↑ 유학을 공부하는 사대부 남성들에 비해서, 여성들은 이런 쪽에서는 사회적 평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때문에 여성의 사찰 출입을 막은 것.
- ↑ 이건 나중에 금승법으로 대체된다.
- ↑ 고려시대에는 조상의 위패를 사찰에 맡겨서 제사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조선이 망한 후 현대에 들어, 다시 절에 제사를 대행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5만원만 내면 제사를 대신 지내준다고.
500년 만의 전통 부활 - ↑ 참고로 분황사 문서에도 사진이 있는 경내에 있는 돌우물이 아니라 분황사 북쪽 담에서 약 33m 떨어진 곳에 있는 또다른 신라 우물이다.
- ↑ 참고로 이렇게 '우리는 옛날의 걔네들과는 다르다'며 전시대를 부정하고, 동시에 그 시대의 핵심 가치를 집중적으로 까는 것은, 비단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에서만 나타나는게 아니다. 20세기 말에만 하더라도, 한국의 조선 인식은 '이게 다 유교 때문이다'며 기승전유교로 설명되었다(...) 또한 계몽시대 유럽에서는 자신들을 중세와 선긋기를 시도하며 기승전기독으로 중세를 비판하였고.
- ↑ 절에 가는 걸 금하는 영
- ↑ 이 왕사는 고려시대때 있던 제도로 왕의 스승이라는 뜻의 제도이다. 무학대사를 끝으로 왕사는 없어지게 된다.
- ↑ 불교에서의 천국 정도로 이해하면 편하다.
- ↑ 출처는 《태종실록》태종 2년(1402) 1월 28일
- ↑ 好佛, 불교를 좋아함
- ↑ 태종이 불교를 싫어하니, 그에 대한 효(孝)랄까.
- ↑ 다만 어머니가 절에 드나드는 등 불교에 관심이 있었는걸 의식해서 어머니의 무덤 근처에 절을 세우려다가 태종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그만두었다.
- ↑ 문종도 효자 아들 아니랄까봐 아버지가 불교를 좋아한 걸 의식해서 아버지의 장례식에 수륙재를 행하였다. 뭐 이건 이전 국왕들도 다 행한 일이긴 하지만
- ↑ 장자계승제에 대한 위협과 육친(조카)를 간접적으로 죽였다는 점
- ↑ 당시에 임금이 아니었음에도.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권력에 대한 야심 표출이라는 해석이 있다. 다만 본인도 월권행위라는걸 인식해서인지 바로 다음날 해명서를 제출했다.
- ↑ 이때 원각사를 짓기 위해서 집이 200채나 철거되고 많은 재물이 쓰였는데 그런데도 신하들은 "원각사에서 상서러운 기운이 났습니다"라고 해야했다.
- ↑ 명종 즉위 당시에, 수렴청정을 함.
- ↑ 그런데 그걸 기록한 사관은 왜 밖에서 그런 소문이 왕한테까지 들어가서 일을 못하게 되었냐는 식으로 써 두었다. 한마디로 회암사를 불태웠어야 한다는 것. 이쯤 되면 무섭다. 회암사는 얼마 가지 않아 정말로 불탔다.
어차피 사관은 반불사상이 강한 유학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