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조의 아들 宜安大君
조선의 역대 왕세자 | ||||||
고려 세자 정성군/조선 건국 | ← | 의안대군 이방석 | → | 정종 이경 |
1382년 ~ 1398년 10월 6일, 음력 8월 26일
조선 태조의 8남. 이름은 이방석[1](李芳碩)으로,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다.
1.1 형제
동복 형제로 누나인 경순공주와 형인 무안대군(이방번)이 있으며, 이복 형제로 진안대군(이방우), 영안군(이방과, 후의 정종), 익안대군(이방의), 회안대군(이방간)[2], 정안군(이방원, 후의 태종) 이렇게 5명의 형이 있다. 이 외에도 여섯째 덕안대군(이방연)이 있었으나 이쪽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너무 일찍 죽어 별다른 기록이 없다.
1.2 세자 책봉, 하지만…
1392년 8월, 조선 개국 1달여만에 불과 11살의 나이로 신덕왕후의 욕심과 태조의 뜻에 따라, 장성하고 쟁쟁한 형들을 죄다 밀쳐내고 세자가 되어 훗날 1차 왕자의 난의 계기를 제공한다.
본디 개국공신들은 유학자들답게 적장자 계승과 공이 있는 사람을 세자로 올리길 원했으나 태조가 이방번을 밀었고, 결국 그의 형인 방번이 세자로 내정되었으나 공신들인 배극렴, 조준, 정도전 세 사람이 '방번은 성격이 더러워서(…) 안 된다고' 간하여 방석으로 교체되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여말선초의 복잡한 정치 상황을 살펴봐야 알 수 있는 뒷사정이 존재한다.
전 왕조의 왕족 몰살이라는 전례가 드문 일을 벌일 만큼 구 왕조와의 확실한 결별을 원했던 태조 입장에서는 방석 이외의 대안이 없었다. 태조는 고려에 귀순해 중앙정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들들을 고려 지배층의 딸들과 혼인시켰는데, 때문에 조선이 건국될 무렵에는 11살이었던 방석을 제외한 모든 아들들이 어떤 식으로든 고려 구 세력, 심하면 왕족과 혼맥으로 깊게 이어져 있었다. 이런 혼맥은 변방 무장 출신인 태조가 중앙정계에 순조롭게 편입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새 왕조를 세운 뒤에는 오히려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같은 신덕왕후 태생임에도 방번이 세자가 되지 못한 이유도 알 수 있다. 방번의 아내는 공양왕의 형의 딸이었기 때문.
게다가 신의왕후 한씨가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조선의 첫 왕비이자 국모가 된 건 방번과 방석 형제의 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였다. 고려 혜종은 왕건의 적장자로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외가가 비교적 힘이 약해 정치적 배경이 취약했고, 결국 왕건 사후 한동안 권력 쟁탈로 혼란이 일어났던 사례가 있다. 태조 역시 후계자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외가의 정치적 배경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작 아들 태종은 왕위에 올라 자신의 처가와 후계자인 세종의 처가 모두를 박살내 외척이 왕권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해 버린 걸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태조가 구체제(고려)의 가치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방석의 정통성에도 한계는 있었다. 조선 건국에 직간접적으로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의 장성한 형들과 달리 방석은 책봉당시 열한살짜리 어린 막내였던데다 고려 구 세력과 연관되지 않았다는 것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었다. 당장 아버지에게 토사구팽당한 거나 다름없는 처지인데다 방석이 왕이 되면 숙청까지 걱정해야 할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이 칼을 갈고 있었으며, 신덕왕후 강씨가 조선 건국 4년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방석을 지켜 줄 정치적 배경 역시 약해졌다. 이 와중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행되면서 이 과정에서 군권과 조정 대권이 일부 종친과 공신들에게 집중되었다. 이들 중 정도전의 급진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신의왕후 소생 아들들에게 대거 포섭되었고 이들이 1차 왕자의 난의 주역이 된다.
여하튼 현빈 유씨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였으나, 어린 세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세자빈은 내시(!) 이만이란 자와 간통을 했다.[3] 이게 밝혀지자 이만은 참수되고 유씨는 폐출되었다.[4] 이후 1397년 심효생의 딸을 다시 세자빈을 맞아들여서 16세에 아들을 낳았다. 다만 이 아들은 후에 일찍 죽었는지 그의 대는 끊겼고, 세종대왕의 6남 금성대군이 그의 양자로 입적된다. 다만 금성대군 역시 세조때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처형된다(...).
1.3 1차 왕자의 난
신덕왕후가 일찍 세상을 뜨긴 했으나, 아버지인 태조가 정정했고 후견인인 정도전과 남은 역시 적은 쓸어넘칠 정도로 많았어도 조정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다. 요동정벌의 기치를 앞세워 국론을 규합하고 사병 또한 해체하여, 이방원을 위시로 한 반대세력이 가장 약화되던 무렵에 접어들었다.
정도전도 태조도 방심했는지 이방원에 대한 경계를 늦추게 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1차 왕자의 난 참조.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은 방석은 궁궐의 수비대를 지휘하여 반란군을 진압해 보려 했으나 태종이 실록을 통해 수십명의 막대기를 든 오합지졸이라 너스레 떤 것과는 달리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꽉 들어찰 정도의 군대가 동원된 것을 보고 전의를 상실했다. 실록에서 귀신이 도왔을 뿐이라고 한 구라는 괴력난신을 믿지 않는다고 유교부심 부리며 무속이나 불교 까대던 유학자들이 할 말인가여
1.4 폐세자가 되다
이후 정도전, 장지화, 심효생, 남은, 박위 등의 신하들이 살해되고 정국이 이방원에 의해 장악되자 17세 나이로 폐세자되었다. 태조는 폐세자된 방석을 살려준다는 약속을 믿고 그를 사저로 내보냈는데, 그래도 가시면 아니된다고 매달리는 세자빈에게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고 안심시키고 궐문을 나섰다가 이거이 등이 논의하여 보낸 자객에게 그의 형인 방번과 함께 살해당했다.
1.5 사후
왕자의 난 이후 권력을 잡은 정종, 그리고 태종의 정당화 작업에 의해 서자로 격하된다. 사실 방석도 엄연한 적자인데, 고려는 정실 부인을 여러 명 둘 수 있었고 신의왕후와 신덕왕후 둘 모두 이성계의 정실이기 때문. 신의왕후가 조선 건국 전 죽었기 때문에 신덕왕후가 유일한 정실이 되어 정통성 시비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태종은 '서자가 적장자를 제치고 세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일어났다' 는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덕왕후 역시 후궁으로 격하시켜 버린다.
1406년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모셔온 이후 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를 소도군(昭悼君)[5]으로 추봉시켰고, 이후 1680년 연산군, 광해군 빼고 웬만한 사람들 거의 다 추존한 숙종에 의해 의안대군으로 추봉되었다.[6]
여담으로 단종보다는 백성들의 동정이 현저히 덜하다.
사족으로 같이 죽은 무안군 이방번도 이때 공순군(恭順君)[7]으로 추봉시켰다. 본디 태종의 본의 아니게 죽게 되어서 그런지 세종은 이를 딱하게 여겨서 5남 광평대군을 그의 후사로 정했으나, 광평대군이 요절(...)함에 따라 그의 후사는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훗날 역시 숙종에 의해 무안대군으로 추봉된다.
1.6 매체에서
걸작 용의 눈물에선 양희석 씨가 분했다. 세자빈이 정을 통한 사건 이후 방황하다 정신을 차리지만 방원에 의해 죽고 만다. 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극중 이방원(유동근 분)은 살려달러 애원하는 방석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수하들에게 빨리 처리하라는 손짓을 보내고 결국 궁궐 밖으로 끌려가 참살 당한다.
드라마 정도전에선 박준목이 연기했다. 세자 이후부턴 발연기라고 까였다.(...)
실제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정도 되는 청소년이었고 죽기 전 자식까지 봤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드라마에서는 이상하게 상당히 어리고 어리숙한 모습으로 나온다. 드라마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게 10세때인데 16세에 죽은 인물이라 중간에 배우를 교체하기도 애매하고 장성한 형들을 밀어낸 어린동생 이미지가 강해 처음부터 청소년 배우를 넣기도 애매하기 때문.
2 이성계의 이복동생 義安大君
조선의 역대 영의정 | ||||
성석린 | ← | 이화 | → | 하륜 |
1340 - 1408
이름은 이화(李和). 이자춘의 서자이자 조선 태조의 이복동생.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하는데 협력했다고 하며 조선 개창 이후 개국공신이 되었다. 본래는 의안백(義安伯)[8]에 봉해졌지만, 태종 때 작위 체계가 정비되고 오등작이 폐지되면서 의안대군이 되었다.
어머니는 정빈 김씨(定嬪 金氏)로 본래는 이자춘의 여종이었다. 이자춘이 죽자 이성계는 그녀를 개경으로 데려와 극진히 모셨으며 심지어는 그녀의 노비문서를 불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조선 개국후 정안옹주(定安翁主)로 봉해졌고 태종 4년(1404년)에 죽은 뒤 정빈 김씨로 추봉되었다.
1차 왕자의 난, 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을 도와서 정사공신, 좌명공신이 되기도 했다. 자신을 돌봐준 이복형의 뒤통수를 친 셈.[9]
원래 조선 왕조에서 왕의 동생은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으나, 태종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의 직계가 아닌 왕족은 왕위 계승에서 제외시키는 대신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서[10] 영의정부사에 오르기도 했다. 영의정에 오르고 나서는 외척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 대한 탄핵을 주도하여 그들을 귀양보내기도 했다.
죽은 후에는 이복형 태조의 배향공신으로 종묘에 모셔졌다. 그의 무덤은 실전되었다가 순조 대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찾아냈다고 한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 평내동에 있으며, 평내동에 있는 '의안로'라는 도로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
1의 의안대군의 숙부가 되는데,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기 때문에 종종 혼동되기도 한다. 심지어 1의 의안대군묘에 세워진 안내판에 묘의 위치가 실전되었다가 순조 대에 후손들이 다시 찾아냈다고 써져있기도 했다. 지금은 고쳐진 상태.
자식 중에는 이백온이 있는데, 아버지에 비해서 막장이었다. 종친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주색이 문란해서 탄핵을 여러 차례 받았다. 심지어는 태종의 공신인 하륜이 죽자 그 첩을 억지로 취하려다 들킨 일도 있다.- ↑ 이 이름으로 검색해도 여기로 넘어온다.
- ↑ 뒷날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망했어요.
- ↑ 가끔식 성기능이 죽지 않은 내시가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경우인 듯.
- ↑ 실록에는 갑자기 '내시 이만을 죽이고 현빈 유씨를 내쳤다.'고만 써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자세한 사정을 밝혀달라고 한 대간들을 감옥에 가두고, 이 일에 대해서 논의한 관리들도 가둬버리고 이 일에 관련된 사람을 모조리 귀양보내버린다. 실록에 기록조차 남기지 않게 할 정도로 꺼림직한 사건이었다는 것인데… 따라서 대개 이렇게 추측된다.
- ↑ 소도공(昭悼公)으로 적히기도 한다.
- ↑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그를 의안군에 봉했다고 나왔었는데 고증 오류이다. 왜냐면 이성계가 즉위한지 얼마 안 돼서 바로 세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따로 군(君)이나 기타 존호를 받지 않았다. 정도전(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항목을 참고할 것.
- ↑ 또는 공순공(恭順公).
- ↑ 의안군(義安君)으로 기록돼 있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태조실록에서 혼재돼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작위 체제가 확실하게 정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 ↑ 이화뿐만 아니라 이성계의 장손인 이복근을 위시로 상당수의 종친들이 이성계의 이해할 수 없는 세자 책봉과 종친 견제에 불만을 품고 이방원의 편을 들었다.
- ↑ 이성계의 방계 왕족들이 죄다 이방원 편을 들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다. 어차피 태조가 아들이 많아서 왕위계승권이 멀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