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황후 우라나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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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양황기 사람인 좌령 나이포의 딸로, 건륭제의 2번째 황후. 건륭 30년에 총애를 잃고 북방으로 보내져 쓸쓸히 죽고 시호도 없이 황귀비의 예로 치뤄진 것으로 유명한 그 황후이다. 계황후의 계도 칭호가 아닌 계후라는 뜻의 계이다.

건륭제의 생모인 효성헌황후 니오후루씨(숭경황태후 뉴호록씨)의 추천을 받아 궁에 들어왔다. 건륭제보다 7살 어린 나이에 측복진으로 들어와 즉위 후 한비가 되었고, 한귀비에 올랐으며, 건륭제의 첫번째 황후인 효현순황후 푸차씨가 승하하자 한황귀비가 되어 육궁을 총괄했고 곧 후궁에서 계후로 승격되었다.

우라나라씨는 만주 팔대 성씨[1] 중 하나로 이미 효열무황후와 효경헌황후를 배출한 집안이지만, 그녀의 친정 자체는 다른 만주족 유력 가문들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 대단치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뒤이어 황후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건륭제의 생모 숭경황태후가 그녀를 황후로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765년 봄, 건륭제와 함께 항주를 여행하던 중 그녀는 건륭제와 크게 다투게 되었다. 이 다툼의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 건륭제의 지나친 여성 편력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고, 건륭제는 "아 그냥 걔는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그리고 걔가 우리 엄마한테 불경스럽게 해서 싸운 거야." 라고 혼자 꿋꿋이 주장했다.

아무튼 문제는 이 다툼 직후 그녀가 기분 전환 삼아 단발을 시도해 보기 위해 건륭제에게 항의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는 것인데,[2] 황후의 이러한 행동은 궁중의 예법을 크게 위반한 것인 동시에 건륭제에 대한 심각한 불경이었다.

건륭제는 그녀가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격노하여 곧바로 그녀를 베이징으로 돌려보냈고, 그녀를 거처에 구금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즉 1766년 가을, 구금된 상태로 홀로 쓸쓸히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결국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가 죽은 뒤 건륭제는 예법을 가볍게 무시하고 황귀비의 급으로 장례식을 치렀고, 무덤도 본래 있어야 할 능역이 아닌 다른 외딴 곳에 조성했다. 이러한 파격에 대해 황실의 종친들은 물론, 중앙의 고위관료들부터 지방의 하급관원들까지 "폐하의 명령은 지나치고 예법에도 크게 어긋납니다!!"라며 용감히 상소를 올렸으나 빡친 건륭제는 이를 모두 씹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관료들이 맞아 죽거나 극도로 춥고 먼 곳으로 유배당했고, "네놈이 드디어 관심병에 걸렸나 보구나!"는 등의 격한 비난을 받았으며, 체포당해서 혹독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3번째 황후를 책봉하자고 상소를 올린 사람들도 모두 처형당했다.

슬하에 2남 1녀가 있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그나마 12황자 영기가 가장 오래 살았으나 24세에 사망.

총애를 잃고 쫓겨나 황귀비의 예로 치루어진 황후라 그런 건지 황제의 딸 등 건륭제 시대를 그린 작품에서는 악역으로 나오기도 한다.

미디어 믹스

  1. 사서마다 다르다. 니오후루씨와 구왈기야씨는 모든 사서에 해당되며 우라나라씨의 경우 <소정잡록>과 <심고>에만 만주팔성으로 기록되어있다.
  2. 야사 중에는 순행 중인 건륭제가 아름다운 비구니를 보고는 침소에 끌어들여 동침했고, 황제의 침소를 방문했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된 황후가 빡이 칠대로 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비구니처럼 잘라버렸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져 온다.
  3.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극중에서는 옹정제의 황후 효경헌황후의 조카로 설정되었다. 또 앞서 언급했듯 실제로는 효성헌황후의 추천으로 입궁했으나, 극중에서는 오라나랍 의수의 뜻에 따라 입궁한 것으로 나왔다. 또 극중에서는 대단한 명문가 출신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엄청난 집안 출신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디까지나 다른 권세가들과 비교할 때 그렇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