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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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家
파일:Attachment/MRF.jpg

만주 황족의 전통 복식을 갖춰 입은 현대의 만주족.


청대에 만주족 근위병을 묘사한 초상화.
Manchu People
만주어: ᠮᠠᠨᠵᡠ (발음: manju)
간체: 满族 (Mǎnzú)
정체: 滿族 (Mǎnzú)

인구: 중국: 10,410,585명/대만: 12,000명(2012년 기준)[1]

1 개관

만주 일부와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퉁구스계 반농 반수렵 민족[2]말갈족-여진족의 후신. 만주(滿洲)족. 중국에서는 만주족 대신 만족(滿族)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는 만주족이라는 이름은 만주라는 영토를 한 소수민족의 몫으로 두는 느낌이기 때문. 더불어 만주라는 말도 지금의 중국에선 잘 쓰지 않고 중국 영토의 일부라는 뉘앙스가 강한 동3성, 현재는 동북 3성이라는 말을 주로 쓴다.

1.1 명칭과 기원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금나라의 부흥을 걸고 들고 일어나 여진을 통일한 후, 후금을 세우고 민족의 이름을 만주로 바꾼 후부터 만주라 불리기 시작한다. 누르하치의 아들인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청태종)가 나라 이름을 으로 개칭하면서 여진이라는 말을 완전히 금지시킨 후부터는 오직 만주라는 말만 쓰이게 된다.

이 당시 명나라 시기 명나라의 이민족 구분 기준으로 여진족은 건주, 해서, 야인 크게 3종족으로 나뉘는데 누르하치가 속한 '건주'여진(建洲女眞), 후에 정복한 '해서'여진은 거의 모두 만주 팔기군에 편입이 되었지만 여진 부족 가운데서도 연해주와 두만강 하류의 야인여진(野人女眞)은 단 두 부족 극히 일부만 만주 팔기군에 편입되었다. 청태종에게 조선이 항복할때도 청의 요구 사항중 하나가 청나라와 만주인에 적대적이었던 야인여진쪽의 우랑카이(瓦爾哈, 올량합, 오랑캐)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 할 정도 였으니 명나라 때 당시의 동북 관외 지방의 지역별 원주민 구분기준이지 그 당시 동북 지방 원주민 사이에서는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은 없다고 보아야한다. 애초에 해서여진과 건주여진도 극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건주여진 위주로 통합된다. 따라서 15세기 16세기 기준으로 현재의 만주 연해주 지방 원주민들을 모두 만주족이라 하는것은 무리가 있다.[3]

이때가 약 16세기 후반 쯤. (이 시기의 시조 신화는 만주 시조 신화 참조.) 후엔 위구르, 티베트, 몽골, 연해주 등을 정복하여 엄청난 판도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여진 혹은 만주족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잦았던 약탈의 경우는 여진족 시기에나 하던 일이고, 만주-중국을 포괄하는 강력한 중앙 정권인 청이 들어선 이후에는 없어졌다. 자세한 역사는 청나라 참조. 이러한 이유로 무협지나 영화에서는 종종 까인다.

1.2 명-청 교체기의 모습

워낙 역사가 오래되었고, 만주족만의 별도의 독립국가가 없는 바람에 묻혀서 그렇지, 인조 즉위 후 조선의 친명정책에 반발하여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일으켰고, 삼전도의 굴욕 이후에 조공 명목으로 조선으로부터 약탈해 간 것들, 그리고 명나라 정복 당시의 학살 행적이나[4] 입관 이후 벌인 문자의 옥 등 사상탄압을 보면 20세기 초반 제국주의 열강과 맞먹는 행각을 벌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나마 열강보다 잘 한 게 있다면 대놓고 한족을 식민지로 착취하거나 전 한족들을 몰살시키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별로 와닿지 않는 이야기지만 준가르 제국과 대립하면서 오늘날 준가르 분지 지역의 준가르인들의 씨를 말리기도 했다. 명-청교체기 삼번의 난 시기까지 만주족이 탄압한 한족의 수는 못해도 8자리를 찍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천 5백만~3~4천만 정도가 흔히 제시되는 수치고, 좀 불리면 5천만은 넘겼을 거라는 설도 있다. 참고로 당시 명나라의 인구는 1억~2억 정도로 추정된다. 이 정도 규모의 탄압은 전근대에는 몽골이나 스페인 등의 콘키스타도르 외에는 전례가 없다. 콘키스타도르의 침략엔 전염병 등 기타 부가적 요소가 들어갔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에 대적할만한건 몽골제국 시절 전세계적으로 몽골군이 잔학행위를 벌인 정도가 비견되는 수준.[5] 그러나 몽골 당시에는 중국에서 흑사병으로 많은 인구가 죽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단, 위의 수치는 만주족이 저만한 숫자를 모두 죽였다는 얘기는 아니다, 일단 양주에서만 만주족에 의해 한족 80만여명이 학살당하거나 변발을 거부한다고 한족들을 다량으로 죽인건 사실이지만 전근대 냉병기로 인한 학살에는 어느정도 한계가 있고 통계의 폭이 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정확하게 만주족이 어느 정도로 한족을 탄압했는지는 알 수 없다. 허나 만주족의 중국대륙 통치에 그만큼 한족의 저항이 컸고 만주족이 이를 잔학하게 탄압했다는 점만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1.3 청대의 만주족

청대의 만주족은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한족 인구를 정복하고 지배했다. 한족의 인구에 비해 만주족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제도를 통해 혈통을 유지해야 했고, 한족과의 결혼은 엄격히 제한을 두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통계자료 조사에서 1982년 430만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8년 뒤인 1990년에 985만 명, 8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했다는 비정상적으로 증가한 수치로 신빙성이 떨어져 구라일 확률이 높다[6]. 물론 반만주족 분위기 하에 성씨를 바꿔서 한족인 척 살다가 만주족으로 커밍아웃한 인구도 상당할 것이다. 애초에 만주족으로 인정받는 기준이 되는 것이 과거 팔기군에 속했는지 여부인데, 팔기군 자체에 한족도 상당히 있었으니 이것으로도 구분은 불가능하다.

중국 정부의 출신민족 구분 방법이 상당히 정치적이기때문에 내무부 소속 보오이[7]거나 한인팔기[8]속했거나 혈통상으로 만주인이 아니더라도 신고하는게 가능하다.[9] 2010년 조사에서는 10년 전보다 인구가 감소했다. 입관(1644년)당시 기준으로 팔기군내 만주인 비중은 40~45%정도였다.[10] 따라서 현재 호적상 만주인으로 신고 한 사람가운데 절반이상은 혈통상 만주인이랑 연결 되지 않는다. 이것도 청나라 시절 돈을 주고 한인 출신이 만주족 양자로 들어가거나 하는 호적 세탁을 감안하지 않은 숫자다(...)

만주족 황실이 본거지를 중국으로 옮긴 이후에도 청나라 팔기 제도에 편입되지 못한 만주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조선함경도평안도 지방의 사람들이나 중국인들과 거래를 하기도 했으며, 가끔 아예 조선으로 건너가서 눌러앉기도 했으나 이들은 본토에서도 적응하지 못해 이주한 하층민으로 조선에 가서도 여전히 주로 사당패 같은 일을 하는 하층민이 되었다. 앞서 서술한 바대로 두만강 쪽 '야인' 여진은 대부분이 만주족에 편입되지 못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서 근현대까지 남은 여진족은 재가승이란 별칭으로 소수집단으로 존재했다는 설이 있다..[11] 현재 이들은 북한체제 하에서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을 세운 후에는 점점 중국에 동화되기 시작해서 나름대로 민족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했다. 관학을 세워 만주어를 가르치고 관리등용 시험 때도 만주어를 장려했다. 특히 만주인이 문관이 되려면 반드시 만주어와 몽골어의 번역 시험을 보도록 했다. 한자와 만주문자가 함께 적혀 있는 현판을 자금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까닭이다. 이후 현실적으로 한인 문인들을 지배계층에 끌어들인 강희제 시대에 강희자전을 편찬하면서 청 황실에서도 중국어의 사용을 허가하게 되고, 그 후에는 서서히 중국화되기 시작했다. 집단 거주지인 만주를 떠나 베이징 등 각지로 옮겨 간 만주족은 적은 인구로 300년 가까이 한족을 지배했지만, 결국은 한족에게 점차 융합되었으며 문화적으로 만주어를 까먹고(...) 한족에 거의 동화되었다

다만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말은 인구특성상 동화되었지만 한인과 만인의 구별은 뚜렷하게 이어졌고 대체적으로 민족주의자들은 서로를 지배-피지배민족으로 여겼다. 특히 청은 망할 때까지 변발을 포기하지 않았다.그렇게 변발 헤어스타일로 후대 중국인들의 원성을 두고두고 듣게 된다

청나라 후반기까지 북경에서는 만주인 주거지와 한족 주거지는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그곳에서는 한인 풍속에 물들지 않으려 팔기군 소속 만주인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병영생활을 했고[12], 혼인도 마찬가지로 만주인 여자는 한족에게 시집 갈 수 없었다.[13] 물론 반대로 만주인이 한족 여인을 첩으로 삼는것은 가능(...) 애초에 만주인이 완전히 한족이랑 동화되었으면 백련교도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날리가 있나. 실제로 태평천국의 난 때 요충지마다 건설된 성에 거주하던 주방팔기(駐防八旗)' 소속 만주족은 태평천국의 난 시절 성이 함락될 때마다 예외없이 한족에게 분풀이로 몰살당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던 증국번도 한족이라서 만주족을 싫어한 한족 인민들의 분위기상 태평천국을 조져버리자는 격문에서 만주족의 청나라를 위해 싸울것을 빼버렸다.

1.4 청나라 말기

1912년에 청나라가 멸망한 후 만주족들의 행보에 대해 무엇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흔히 만주족들이 청이 무너진 이후에도 별 사건을 겪지 않고 독립의 의지도 없이 현 상태까지 흘러왔다는게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사실은 태평천국의 난신해혁명이 반청복명, 반만흥한적 성격을 띠며 혁명파 및 한족들이 만주족을 학살하는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14] 남의 나라를 정복해서 나라를 망친 주범이라는 구호와 분노가 더해져 아예 만족축출운동까지 전개되며 반만주족 폭동이 벌어졌었다[15].

왠만해서는 한족이 반란을 일으켜도 금나라나 원나라 패망 후 북방으로 돌아간 경우와 같이 일부는 동화되어도 민족와 영토 자체는 남아있을 수 있었는데, 청나라 말기의 경우는 특수했다. 실제로 한족과 만주족 등의 구분은 청 말기부터 급속하게 약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만으로 동화된것은 아니고 타이밍도 좀 안습했다. 만주족은 기본 정책으로 한족에 동화되는 것을 경계해서 만주족과 한족의 구분은 철저히 했고 언젠가 돌아갈 만주를 봉금지역으로 해뒀지만 하필 청나라 말기는 예상치 못한 외세의 등장으로 이게 어려워졌다. 특히 북방의 러시아가 갑툭튀 나오는 바람에 이때부턴 유목제국의 패턴대로 만주로 돌아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던가 부족 상태로 존재하거나, 만주족 전통을 계승해서 한족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더구나 만주족은 중국 정복 후 성공[16]에 취해서 점차 정체 혹은 쇠퇴[17]하고 있었고 신식 무기의 등장과 함께 기병과 유목민족이 가지던 힘이 약화되었다. 무기의 변화로 불리함에 놓인 것은 확실히 농경민족보다는 기마민족이다. 기병은 소수 인구로 다수를 정복할 수 있던 거의 유일한 수단에 활이 주무기였기 때문에, 말타고 싸우는 법만 안다면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할 여지가 있었지만 신식 무기 앞에 소수정예 기마궁술은 유물행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만주족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에 청 말기에 국가적인 난관을 겪으면서 쓸만한 인재가 부족하고 근대화가 시급해지자 정책 변화가 있었는데 한족 견제정책을 거의 폐기하고 한족들에게 관직을 마구 퍼주었다. 그러니 한족들의 포풍 출세를 경계한 북방 지역 지도자들은 황실에 항의하고 한족들은 나라를 망쳤다고 반발하고...여기에 러시아를 막아보기 위해 한족들에게 만주를 개방시켜 만주를 한족 천지로 만드는 대병크를 거하게 저지르기까지 했다. 청나라가 봉금령을 풀어버리자 한족들이 만주에 몰려가 열심히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어 한족의 경제력이 어느샌가 만주 귀족들을 뛰어넘기 시작했고, 수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우위에 서게 된 한족들은 결국 만주 귀족들을 누르고 만주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실제로 증국번은 "그 백면 유생의 호령 한 마디에 무수한 사람이 일제히 호응하여 무한을 함락했습니다.[18]따라서 장래에 그가 꼭 나라의 복이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한족 측근들은 그를 부추겨 만주황조를 멸하고 다시 한족제국을 세우려 하기도 하였다. 또 서태후와 광서제의 대결에서 광서제의 통수를 친 원세개는 청나라가 충분히 무력해졌다는 판단이 들자 반란을 일으킨다. 그런데 멍청한 서태후는 한족의 힘을 빌려 권력을 차지할 생각이나 하고 있었으니 광서제는 훗날 큰어머니인 서태후를 죽였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요절하고 만다.

1.5 신해혁명 이후

그러다 별 대책 없이 신해혁명을 맞았고 이 때부터 만주족은 영토도 민족성도 제국도 급속히 말아먹어버린다.(...) [19] 청이 세워질 때는 천운과도 같이 여러 상황이 만주와 청의 부흥을 도왔지만 망할 때는 모든 상황이 더 이상 만주족의 존속을 돕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만주족들은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움직이는데 몽골인과 만주인이 합심한 만몽독립운동의 움직임도 있었다.[20] 이걸 지원한 일본인들은 1차 봉기가 실패하고 2차 봉기를 계획하던 중 자신들에게 이득이 없을 것 같자 가차없이 버린다. 그렇게 만몽독립운동은 무산되고 나중에야 그것을 빌미로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는데 물론 일본의 진짜 의도는 만주를 먹어치우고 괴뢰 국가 수립하는 것에 있었기에 요직은 전부 일본인과 친일 한족들 차지. 만주족들은 이용만 당했고, 일제 특유의 막장 통치로 인해 만주인들이 만주국을 적대하게 되기까지 한다. 게다가 몽강국과 러시아처럼 만주국은 유목을 금지시키는 정책을 폈다. 이러니 정체성이 더 더욱 약화될 수 밖에(...) 결국 이는 일제 패망 이전부터 만주족들이 스스로 만주국을 포기하는 결과로 작용하게 된다.[21]

이후 청나라를 멸망시킨 신해혁명의 후계인 중국 국민당이 원수라고 여겨서인지[22], 국공내전에 참여한 만주족들은 공산당의 편에서 싸웠다.[23] 공산당이 한족 민족주의가 아닌 평등을 구호로 내세운 탓도 있을 듯. 그래서 국민당이 통치할때와 달리 탄압을 받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족은 만주국의 공용어조차 만주어가 아니라 중국어(한어)였을 정도로 20세기 들어와 민족성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는 완전히 한화되어 만주족의 문화는 거의 자취가 없어질 정도로 사라졌다. 중공당국이 특정하게 강제적 동화책을 펴진 않았지만, 주류민족의 문화수준이 압도적인 다민족국가에서 소수민족 문화가 제대로 살아남기가 힘들기 때문에 만주족은 순식간에 동화되어 버렸다. [24]

1.6 현대의 만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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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만주족의 분포도. 2010년 기준으로 지급시요녕성 단둥(31.6%), 번시(28.4%), 후루다오(25.5%), 진저우(24.9%), 푸순(24.3%), 그리고 하북성 청더(承德; 38.2%) 시에서 만주족 비율이 20%를 넘긴다. 분명 고대에는 요녕에 한국계가, 길림에 퉁구스계가 많이 살았던 것 같은데 어째 반대가 되었다.

현재 중국에선 소수민족 중 하나이며, 만족(滿族)이라 부른다. 이는 만주(滿州)족이라 부르면 만주 대륙은 모두 만주족의 땅이라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고 중국의 종특인 줄여부르기 신공으로 만족으로 바꿔 부른다. 청나라 시대에 자기 언어와 문화를 잃어버리고 한족에 동화되었으나,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는 나름 자부심 있는 민족으로 좡족(약 천6백만명~2천만명)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소수민족이다.[25] 약 1068만명 정도가 중국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살고있다(2000년도 통계). 성(省)급 행정구역인 만주족자치구는 없으나, 자치현은 11개(하북성 4, 요녕성 6, 길림성 1), 자치향(鄕)도 요녕성을 중심으로 여러 군데 있다. 그러나 어차피 한족에 거의 다 동화된 상태라 한족이랑 별 차이는 없다. 차이점이라면 진(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청나라의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나온 성씨이다. 애신각라 신라 떡밥과는 절대 관련없으니 주의

동북 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구석탱이에 위치한 도시('치치하얼'이라든가)나 마을에서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만주인 마을이 아직도 아주 조금 남아 있다 (가령 헤이룽장성 싼자쯔 마을(三家子村)). 그나마 귀족이 아닌 하층민일 경우에는 결국 스스로 먹고 살아야 했고 역설적이지만 그 때문에 나름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셈.

관련된 다른 소수민족으로는 청나라 때 신장위구르자치구 쪽으로 강제 이주당한 시버족이 있다. 시버족은 남만주에 정착한 선비족의 한 갈래가 만주족과 섞이면서 탄생한 민족이다. 그들이 쓰는 시버어는 중세 만주어와 유사해서 여진어, 만주어 연구에 쓰이고 있다. 만주어와의 차이는 방언 차이 정도.[26]

여담으로 B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의 비중이 40%를 넘는다. 중앙아시아와 몽골 등의 다른 유목 민족에게서도 B형이 많이 나타난다.

청나라 때 고위직을 점유해서 그런지, 중국의 만족중에는 학계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1990년에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평균적인 한족보다도 교육 수준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27]사실 소수 민족이 받는 교육적, 경제적 특혜[28]와 인구를 고려하면 객관적인 조건에서 어느 민족이나 한족 평균보다 높게 올라가기 쉬운 편이다.[29]

1.7 문화

역사적 편견 때문인지 문명이고 뭐고 없는 야만족같이 느껴지지만 의외로 수준 높은 불교 문화와 고유의 문자까지 가졌던 준 문명 부족이었다.[30] 또한, 청말기를 거쳐 동북지역에 거주하던 만주족들이 한족에 동화되면서 그들이 쓰던 만주어에서 유래된 차용어가 중국어 방언인 북경방언[31] 과 동북방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쳣다. 예를들어 요녕성 심양 방언은 화자 상당수가 산동성에서 건너온 한족과 한족화된 만주족혈통이 섞인 사람들이 대부분이기에 만주어의 영향을 상당히 받아 만주어에서 유래된 차용단어가 많아 표준보통화와 어법이나 단어부분에서 많은차이를 보인다고 한다.청나라 시대 만주어로 쓰여진 각종 문헌은 그 수가 너무 많은데, 전문가 수의 부족으로 아직 다 해독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이랑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할라는 씨족(氏族) 혹은 큰 범위의 성씨전주 이씨를 의미하고 무쿤은 씨족 내의 씨(氏) 혹은 작은 범위의 성씨완원공파를 의미한다. 즉, 할라라는 씨족 내에 무쿤이라는 씨가 있다는 것이다.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예로 들어보면 기오로(覺羅)라는 씨족 내의 아이신(愛新)씨라는 의미이다. 아이신은 만주어로 쇠(金)라는 뜻인데,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옛 나라의 국호가 금(金)인 것을 생각하자. 절대 아이 러브 신라라는 뜻이 아니다. 청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중에 기오로를 사성 받았다면 그건 기오로라는 할라 내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만 무쿤 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황족의 경우에는 오직 아이신이라는 무쿤 이내의 사람에게만 해당되었다.

이 할라와 무쿤이라는 씨족 단위는 시간이 지나면서 크게 변화하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할라 단위는 유명무실해지고 무쿤이 실질적인 구속력을 가진 조직 단위로 기능하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체로 할라 간의 잦은 통혼으로 인한 할라 단위 구분의 무의미함, 잦은 인구 이동으로 인한 할라 조직의 해체 및 무쿤 조직의 독립성 강화 등이 꼽히지만, 무엇보다 명, 조선, 몽골, 야인 여진[32] 등 외부 세력과의 대립으로 인한 할라 조직의 붕괴와[33] 이로 인해 좀더 유기적이고 위기 대응에 용이한 무쿤 조직이 살아남게 된 것에서 비롯된다. 다만 이는 해서 및 건주 여진에 한정된 부분이고, 야인 여진의 경우 할라와 무쿤의 원형을 대부분 보존하고 있었다.

한족과 조선족이 를 식용으로 열심히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인들은 개를 먹지 않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청 태조 누르하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가 구해줬다는 전설 때문이다.

언어에 관해서는 만주어 항목 참조. 청 왕조가 존속하던 시대에는 당연히 국어(國語)의 지위에 있었다. 그 당시 국어라고 하는 건 중국어가 아닌 만주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또한 의외로 오덕계에도 매우 큰 파문(...)을 남긴 민족이다. 바로 차이나 드레스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치파오춘리가 만주족의 복식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 그 외에도 강시영화의 강시복장, 변발, UFO 모자(...) 등 중국 전통으로 알려진 것들도 본디 만주족의 풍습이다. 그리고 물만두가 바로 이들의 주식이었다. 우리 오덕 생활 속에 알게 모르게 족적을 남긴 셈.

2 한국과의 관계

일단 계통은 퉁구스계 민족. 부자 유전인 Y염색체 하플로그룹과 모계 유전인 미토콘드리아 하플로그룹 모두 한민족과 유전적으로 가장 비슷한 종족이다.[34] 사실 고대부터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고 양 민족이 섞이는 일도 제법 있었으니까 당연한 것이긴 하다. 그래서인지 환단고기류의 위서 애호가 재야 사가들, 소위 환빠나 일부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민족주의자들은 만주족을 우리 민족과 거의 동류로 생각하고 굉장히 친근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메가데레 하지만 어차피 민족이란 유전적 근친성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35] 문화적 근친성을 따진다고 해도 이미 원삼국시대부터 언어가 다른 별종이라고 삼국지 위지와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만주족과 현대 한국인은 적어도 2000년도 넘는 오래 전에 갈라진 별개 민족이란 의미.[36]

한국인과 만주인은 고조선과 숙신이라는 역사상 최초의 부족 공동체가 형성될 때부터 이미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이후 고조선은 부여와 함께 고구려로 이어지고 숙신은 숙신이 잔존하는 상태에서 물길, 읍루, 말갈 등을 이루다가 여진이 되고 만주족이 된다. 고조선과 숙신의 구체적인 관계는 알기 어렵다.(어떤 사람들은 고조선과 숙신이 발음만 다를 뿐 같은 나라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 중국 사서들은 분명히 조선과 숙신을 구분하고 있다. ) 읍루는 정치적으로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고구려와 언어가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의 말갈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고구려-당 전쟁에서 말갈병만 골라서 따로 죽였을 만큼, 고구려와는 구분되는 모습을 보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등장한 발해는 예맥족과 말갈족이 연합된 국가라고 보면 된다. 다만 좀더 순수한 말갈족은 아무르 강 쪽에 있었던 흑수말갈에 몰려있었다.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이웃하며 살아서 그런지 은근히 옆동네 친척정도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우리가 만주를 상실한 발해 멸망 이후에도 여진족은 고려를 부모급으로 취급했고, 사실 여부는 제처두고서라도 여진족의 역사서인 금서에서는 아골타고려김함보의 후손이라고 했으며, 송막기문 등 다른 기록에서는 신라인을 시조라고 하고 있다. 조선도 여진족과 상당히 유착되어 있었다. 조선의 시조인 이성계가 여진족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이 여진족 추장이었음을 봐도 그렇다. 또한 조선 초기에 함경도에서 일어난 반란들 , 조사의이징옥의 난 등은 모두 여진족을 끌어들이려고 했다는 점도 근거가 될 수 있다.[37] 서양인이 조선에 대해서 쓴 기록에는 친척 민족에게 공격당했기 때문에(병자호란) 조선인들은 어떤 외국인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라는 구절도 있다. 이는 그러나 혈통적, 문화적인 실질적인 연결점보다 한때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모두 석권하고 지배했던 고구려발해라는 정치적 집단의 패권과 이데올로기적 접점을 공유한다는 면에서 접근하는게 맞다. 사실 아시아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부모의 나라니 형제의 나라니 하는 명칭들은 은근 아부를 하거나 비위를 맞추려고 할 때 많이 쓰였고 여진족을 보면 알겠지만 만주족 같은 북방 유목민족들도 발해인들을 고기방패로 쓰고 필요성이 없어지자 강제 이주를 시키는 둥 자기들이 차지했던 영토에서 한민족을 제거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중앙아시아의 몽골제국 후예인 킵차크 칸국티무르 제국이나나 터키오스만 제국튀르크계의 황제들이 몽골 제국과의 연결점을 주장하며 칭호 중에 을 사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목민들이 중심이 되는 변경사에서 이렇게 일전에 그 지방을 지배했던 정치체에 혈통과 상관 없이 그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물론 오스만 제국은 실제로 크림 칸국을 번국으로 거느리고, 현대 터키인의 혈통에는 이 크림 칸국의 후예인 타타르인들도 10% 이상을 차지하며 튀르크 또한 몽골 고원에서 출발한 종족이었음은 감안해야 한다. 지금도 투바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사하 공화국 등 원시 튀르크계는 전형적인 북방 황인종이고 관습도 몽골적이다.

물론 현재 만주족의 거의 대부분은 중국어에 능통하며,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갖고 있는 중국인이다. 오죽했으면 중국 정부에서 만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당연히 중국인이라는 점이 명백하기 때문에 가능한 사업이긴 하지만. 그러므로 금도 청도 다 우리나라! 대륙은 역시 우리 것이라는 환빠적인 말은 현재의 만주족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물론 개중에는 극소수의 반중이나 분리독립주의 그리고 범투란주의 만주족들도 있긴 하지만 이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만주족에 두고있지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는 건 아니다.

게다가 만약 만주족이 중국에 속하지 않고 독립국가를 세웠다고 해도 한국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만주족과의 사이가 원활하지 않았으며, 그때부터 끊임없이 싸워왔다. 아마 후금이 명 정복에 실패했다면 임진왜란으로 막장이 된 한반도로 치고 내려 왔을지도 모른다.[38] 그럼 아마 조선왕조 대신 만주 왕조가 한반도의 새 지배자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북원을 점령해서 칭기즈칸 후계자라고 선전한 것처럼 고구려나 발해 아니면 신라의 후예라고 선전할 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한반도 침략에도 실패했다면 결국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어 멸망하면서 러시아 소수민족으로 전락했을지도 또한 한반도랑 별개로 만주족이 현재까지 독자국가를 세워서 존속했다면 원교근공의 법칙에 의해서 영토[39], 역사적 면[40]에서 한반도의 한민족 국가랑 강력히 대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위치에 나라가 있었다면 그 나라는 공산화가 안 됐을까?[41]

3 동북공정

중국에서는 중화민족이라는 일종의 민족의 상위개념을 만들어 소수민족 문화를 모조리 중화민족의 것으로 귀속시키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장백산 문화론. 백두산(창바이산)에 가보면 이 산은 중화민족의 하나인 만주족의 영산이므로 우리 산이다 라는 내용의 설명문(...)을 볼 수 있는데,이 공정의 일환으로 백두산 부근의 공무원은 만주족의 복장을 입고 있기까지 하다(...) 한국인이 봐서는 아스트랄하게 볼수도 있겠지만 한민족 뿐만 아니라 만주족도 백두산을 자기네 영산으로 여겼는데, 만주족들이 모조리 중국인이 되어버렸으므로 할 말이 없다(...).

사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엄청난 왜곡이지만, 딱히 한국을 겨냥한 대외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대내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 즉 한족의 영역에 포함된지 얼마 안되는 만주를 중국 고유의 것으로 확정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4 유명한 만주족 인물

청나라 역대 황제들과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서태후 등등 황족들은 당연히 모두 만주족이다.

현대사에서 유명한 만주족은 카와시마 요시코와 아이신기오로 울히춘이 있다. 둘 다 여자이다. 카와시마 요시코의 본명은 아이신기오로 셴위로 청나라의 황족이었으나 일본인의 양녀로 입양되었다. 커서는 청 왕조 부흥을 위해 일본에 협력하여 스파이 노릇을 하였고 이 때의 행적 때문에 동양의 전설적인 스파이 중 하나로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8년에 이적행위로 처형당했다.[42]

아이신기오로 울히춘 교수는 건륭제의 후손으로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만주어 전문가로 매우 유명하다. 이 외에도 여진어, 거란어 등을 전공하였다. 후에 중국사를 전공한 일본인 학자 요시모토 미치마사(吉本道雅)와 결혼하여 성이 요시모토가 되면서 이름을 요시모토 치에코(吉本智慧子)로 바꾸었다. 울히춘(Ulhicun)은 만주어로 지혜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일본식 이름에 지혜를 뜻하는 치에(智慧)를 포함시켜서 지은 것은 원래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현재(2010)는 리츠메이칸 대학 아시아태평양학부의 교수이다.

또한 미군에서 육군 소장까지 복무했던 존 푸(John Fugh)[43]가 있다. 이외에도 소설가 라오서(老舍, 1899-1966)나 피아니스트 랑랑(郎朗, 1982-)[44]도 만주족이다.

중국 연예계에도 있다! 더군다나 아이신기오로 푸이의 사촌이라고 한다.
아이신기오로 치싱

옛날 홍콩 스타였던 관즈린(관지림)도 만주족 출신. 정확히는 만주족 아버지와 한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며 만주족 중에서도 꽤나 명문가라고 한다.

드라마 주원장(2006년 작품)의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건원풍운의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 역할로 유명한 중국의 영화배우 후쥔(호군) 또한 만주족이다. [45]

한국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만주족 계통으로는 슈퍼주니어의 전 멤버 한경이 있다. 한경은 말갈족 계통의 나나이족 출신이다.

관련 영어 신문 기사

만주족 씨족 리스트

5 관련항목

  1. 대만의 만주족의 경우 대부분 외성인과 동화되었다.
  2. '만주'라는 부족명을 걸고 활동했을 16세기 당시엔 유목 생활은 반 정도 접은 상태였다. 유목민족은 초원에서 소, 말, 양, 염소, 낙타 등을 키우며 사는데, 만주족의 영역은 삼림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목보다는 농업과 수렵에 집중했다.
  3. 우데게족, 나나이족, 어룬춘족, 어원키족 등으로 나누어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같은 퉁구스계에 속할 뿐, 만주족이라는 민족으로는 볼 수는 없는 셈.
  4. 양주 대학살, 변발령 등
  5. 그나마 중국에선 원의 남송 정복 때도 강남 송나라인들을 심하게 차별한것 정도고, 중국문명 자체를 억지로 바꾸려고 하지도 않았다. 칭기즈칸의 화북 정벌 때에나 나올 뻔하다가 장춘진인의 만류로 안 나타났다.
  6.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많은 한족들이 세제혜택이나 두 자녀 혜택 등을 노리고 소수민족으로 등록하곤 한다.
  7. 흔히 한역 음차로 '포의노'(包衣奴)로 알려져 노비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노비는 아니다. 음차할때 당시 한인들도 생소한 개념이라 노비를 뜻하는 이름으로 음차했는데 최근 연구론 정복 당한 한인이 대부분라고 알려진 기존 통설도 틀렸고 만주인이 오히려 숫적으로 다수로 알려져있다. 명나라 정복이전 만주 사회에서 생산계층을 담당한것으로 평민에 해당한다. 다른 만주인들 소속인 팔기군은 기적에 포함되면 남녀노소 가릴것없이 군인 호적이다. 물론 보오이를 소유하는건 만주 귀족만 허용된다. 내무부 소속 보오이는 황제휘하 상삼기에 속하고 나머지는 팔기군 하오기 산하 만주 귀족 보오이로 속한다.
  8. 팔기군 내에서 한족출신.
  9. -마크 C.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
  10. 나머지는 보오이를 제외하면 몽고팔기가 20~22% 35~40%는 한인팔기
  11. 1936년 1월 1일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부녀자가 지나가는 군인에게 젖을 주는 등 일제시대 조선인들 기준으로는 음란한 성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2. 물론 말이 병영이지 성내에 만주인 성을 하나 더 지은것이다. 한인은 출입할수 없게 했다. 노비나 유모만 빼고. 특히 한족 남자는 해지기 전에 모두 내쫓았다고 한다.
  13. 예외는 있는데 잘 알려진데로 강희제의 여동생 건녕공주가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에게 시집간 예가 있다. 평서왕 오삼계 일족과 다른 항복한 명나라 출신 군사집단들은 일반 한족으로 대우하지 않고 팔기군에 포함된 한군기인(漢軍旗人)이며 일반 한족과 다른 취급이었다. 거기다 건녕공주는 김용의 소설과 달리 황후소생도 아니고 이름없고 신분이 낮은 한인출신 후궁의 딸이다.
  14. 사실 이는 만주족뿐만 아니라 몽골족의 원나라가 망했을때도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15. 실제로 루쉰의 전기를 보면, 폐허가 된 구 팔기군 군영터에 2명의 만주족 노파가 살고 있는데 주변 동네의 한족 어린아이들이 몰려와서 돌을 던지며 노파들을 괴롭힌다거나 건장한 남성이 근처에 올 때마다 두 노인이 겁에 질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우' 라는 이야기만 반복하더라는 일화가 소개된 바 있다. 해당 일화 자체는 구 군영터 곁을 지나가면서 그 모습을 본 루쉰과 친구의 입장에서 소개된 거라 '예전에 청나라가 득세하던 시절에는 한족이 말을 타고 이 주변을 지나가면 만주족들이 한족 주제에 말을 타고 다닌다고 비웃고 괴롭혔다'는 루쉰의 한탄으로 끝나지만, 청나라의 붕괴에서 중화민국 건국 사이에 만주족에 대한 학살이나 약탈이 있었다는 증거 중 하나, 애초에 그 이전의 한족 반란들에서 예외 없는 상당수의 만주족들에 대한 분풀이 겸 학살이 벌어졌는데 만주족 자체를 침략자 취급하던 신해혁명 때 평화롭게 넘어갔을리가 없다.
  16. 백련교도의 난 때도 만주팔기의 상태가 심히 막장이라, 만주인 총독 늑보(勒保)는 만주팔기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했다. "만주족 군대는 규율을 우습게 여기고, 교만하고 나태하며 또한 고생에 익숙지 않으니, 한족 군대인 녹영(綠營)에게 경시당할 뿐입니다." 사실상 그나마 이와 같은 상태로 만주족이 중국 대륙에서 오래 버틴 것은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낸 강희제 같은 황제들 덕분일 것이다.
  17. 청은 키메라 제국이라는 말도 듣는만큼 역사를 보면 처음부터 만주족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상당히 잘 이용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한족들 때문에 그 체제가 붕괴되어서 막장화가 가속화된 면이 있다.
  18. 이것은 태평천국의 난 시점의 일로 당시 청나라의 기존 군사세력이었던 팔기군과 녹영은 무력하기 그지없었고 이에 청 황제는 지방곳곳에 교지를 내려 민병을 창설하여 대적(對敵)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때 증국번은 조정의 한족 관리(2품)였는데 모친상으로 상을 치르러 고향에 있던중 황제의 교지를 받고 의병을 조직했다. 그가 만든 의병 '상군'은 특유의 시스템과 무수한 전공으로 절대적인 명성을 떨쳤고 그 밖에도 조직된 다른 의병은 많았으나 그의 상군만이 끝까지 태평천국과 대적하여 난을 진압시킨 주역이 되었고 청나라의 실질적인 정규군 노릇을 했다고 한다.
  19. 만주족만큼 한족에 동화되지는 않은 몽골인들도 청의 갑작스런 몰락에 당황해 했고 이는 만몽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 이후 만주족과 관계가 깊었던 내몽골은 만몽독립운동이 일본의 통수로 망하자, 그냥 중화민국에 남게되고 외몽골은 러시아 후견의 독립국가를 선택해 갈라져서 서로 사이 안좋은 상태로 현재에 이른다.
  20. 이건 신해혁명 이전부터 청의 망조를 감지한 만주와 몽골 귀족들에 의해 계획되었다.
  21. 이때 당시 일본에 협력한 대표적인 인물로 진비후이(카와시마 요시코)가 있는데 일본의 힘을 빌려 만주족의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생각을 가진 만주사변의 배후였다.
  22. 실제로 국민당도 만주족에 적대적이었고 일관되게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23. 물론 만주족 중에서도 중국 국민당과 결탁했던 일파도 있었다. 이들은 국공내전 때 중국 국민당과 함께 타이완 섬으로 이주하였으며 오늘날 중화민국 내 만주족의 대부분이 이들의 후손이다. 그 이전에 이주한 만주족들은 거의 다 한족과 동화되었다.
  24. 이는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 및 웬만한 민족국가의 소수민족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20세기 중반까지 남아있던 루이지애나의 프랑스계나 펜실베니아의 독일계, 네덜란드계 주민들이 현재 완전히 동화된 것과도 비슷한 측면.
  25. 인구 수로 만주족 바로 뒤를 잇는 소수민족은 후이족(회족)이다.
  26. 허나 시버족은 만주어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있다.
  27. [1]
  28. [2]
  29. 2003년 자료 [3]
  30. 단, 동북쪽의 야인 여진은 문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인구 밀도 또한 낮은 관계로 나머지 두 부족에 비해 후진적이었다.
  31. 북경방언과 북경표준어(보통화)는 엄연히 다르다.
  32. 여진 사회에서 야인 여진은 같은 민족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외부 야만족 정도의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만주 통합 이후에도 야인 여진은 만주족이라는 공동체 안에 완벽히 편입되지 못했다. 사실 해서와 건주도 서로 같은 민족으로 여긴 경우는 거의 없지만...
  33. 여진족은 외부의 공격을 받을 시 복수라는 명분에 의해 오히려 더욱 똘똘 뭉치고 강해지는 경향이 있었기에 조선 및 명의 토벌대는 여진족을 공격할 때 아예 싸그리 멸족시키는 것을 주 목적으로 했다.
  34. 일본인이 두번째이고 세번째가 북방 중국인. 의외로 몽골이랑은 유전적 관계가 꽤 먼 편이다.
  35. 일례로 이스라엘과 중동의 아랍 국가들은 유전적-언어적으로 모두 구별이 없는데다 인종적으로 셈족 계통의 백인종이지만, 믿는 종교가 유대교, 이슬람으로 갈려 있고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일관성 없는 중동 식민지 정책과 함께 시오니즘 분위기도 가세해 현재 개와 고양이 지간이다. 세르비아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 옛 유고슬라비아 출신 국가들도 민족적, 언어적으로 슬라브족이지만 정교회, 가톨릭, 이슬람 등으로 종교적으로 달라 서로 개와 고양이 지간이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역시 민족,언어,종교적으로는 같은 동슬라브족에 정교권이지만 제정러시아, 소련 시대의 강압적인 지배와 소련 해체 과정에서 러시아로부터 독립 후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현재 견원지간이며 폴란드와 체코 또한 민족적으로 서슬라브족인데다 종교적으로 카톨릭을 믿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전 테신 지방을 놓고 국경 분쟁을 벌이며 대립한 이력도 있었으며,불가리아와 세르비아 역시 민족상 같은 남슬라브족에 종교도 정교회를 믿지만 19세기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 후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 발칸 전쟁, 제1차 세계대전등 서로 싸운 적이 있어 그리 감정이 안 좋다.
  36. 19C초반까지는 함경도 주민과 만주족 주민이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했다는 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외국어로서 만주어/중국어/한국어를 배우지 않는 이상 세 언어 사이에서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구한말~일제시대의 한국의 문학 작품을 보면 그때까지도 함경도에 만주족이 거주했거나, 함경도가 만주족의 거주지라는 인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때만 해도 재가승이라는 여진족들이 함경도에 널리 살고 있었다. 금, 청을 세운 여진족의 발상지가 두만강 유역이다보니 그럴만도 하다. 사실 유물을 통해 보면 의외로 한국인이 두만강 유역에 지배권을 행사하던 고구려시대에도 만주족이 두만강에서 함경도에 걸쳐 넓게 살았다는 흔적이 발견된다. 이게 당연한 게, 만주족들도 사람이니 만큼 동장군을 피해 계속 남하해서 그렇다. 그리고 통일왕조 시대 이후에 가장 늦게 편입된 지역이 함경도이기도 하다. (평안도는 고려 초중기에, 함경도는 조선 초기에 한국 왕조에 흡수되었다.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는 통일신라에게서 계승.)
  37. 물론 이 부분은 정치적 제스처에 기반하여 고찰해 보아야 한다.
  38. 어차피 명은 이미 망해가는 나라라 왕조는 머지 않아 바뀔 상황이고 내부 분위기도 최악이었다. 참고로 조선은 비록 19세기 이후 국가 막장 테크를 충실히 밟긴 했지만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조차 말기의 명나라처럼 내부 꼴이 막장은 아니었다. 당장 조선을 멸망시킨 게 조선 백성들이 아닌 일제라는 걸 생각해 보자.
  39. 평안도, 함경도 등
  40.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41. 물론 현대의 몽골이 중국과의 적대관계로 인해 사실상 미국의 우방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만주에 만주족의 나라가 있었다면 냉전이 끝난 이후로는 중국 및 북한과의 대립으로 인해 한국과 친해졌을 수는 있다.
  42. 하지만 그 후에도 30년을 더 살았다는 음모론이 있다.
  43. 1934–2010, 중국명 푸루런(傅履仁).
  44.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에 나왔던 그 피아니스트 맞다.
  45. 만주족 배우가 한족 왕조의 국부와 몽골 왕조의 국부를 연기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