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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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딸 첫번째 시리즈의 등장인물들.[1]

1 설명

중국에서 방송되었던 드라마. 대만 CTV, 중국 후난TV 합작.

원래 이름은 '환주격격(還珠格格)' 이라고 하며 국내에 들어오면서 '황제의 딸' 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대만의 유명작가 경요의 원작소설 <환주격격>을 극화(劇化)하였으며, 원작자인 경요가 극본을 집필하였다. 중국에서는 50%라는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중국의 인구를 생각해보면 시청자 수가 엄청난 거다. 막말로 전 세계 인구의 10분의 1이 본방으로 봤다는 뜻이니까(...)

'격격(格格)' 은 원 발음인 만주어로 '거거(gege)' 라고 읽으며 미혼 여성에 대한 만주식 존칭이다. 후대로 가면서, 특히 청나라가 건국된 후 비교적 신분이 높은 미혼여성에게 붙이는 말이 되었다. 우리나라 말로는 아씨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청나라 이후에는 아예 일종의 작위 같은 형태로 사용되었으며, 황제의 딸로 오해받은 제비(조미)가 격격에 책봉되어 '환주' 라는 작호가 붙은 것. 우리나라에서는 역자가 이런 복잡한 구분을 하기에 곤란함을 느꼈는지 그냥 싸잡아서 공주라고 번역해놨다. 후에 진짜 황제의 딸로 밝혀진 자미(임심여)는 명주격격(명주공주)이 되며 황제의 며느리로 인정받은 제비는 환주'군주'로 책봉된다.

다만 이로 인해서 공주가 아닌 청아 역시 청아공주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청아는 극중에서 건륭제의 이복동생인 유친왕의 딸로 나오며 친왕의 딸인 청아는 공주가 아닌 군주라고 해야 맞다. 여기서 별다른 칭호가 없기에 격격이라고 불린 듯. 다만 이러한 구분은 군주제가 폐지된지 한참 된 현재는 많이 흐려진 상태로 대부분 거거라고 하면 공주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실이므로 크게 잘못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홍콩에서는 옆 방송국인 TVB에 시청률에서 하도 발리던 aTV가 구입, 1,2기가 방송되어 1기는 17%, 2기는 23%의 시청률을 얻어, 자사 제작 드라마 종횡사해(縱橫四海)와 함께 쌍으로 TVB를 완전히 물먹였다. 그러나 그 이후 aTV는 TVB의 대반격에 밀려 좆망테크를 걷고 있다. 황제의 딸과 종횡사해로 2연타를 먹인 이 후 aTV는 2000년에 나와 강시와의 데이트(我和殭屍有個約會II), 백만부옹(百萬富翁)[2] 등으로 반격의 기세를 2000년 초반까지 이어갔지만, 이후 aTV는 속절없이 다시 TVB에 열세로 밀려났다(...)

여담으로 TVB는 aTV가 1,2기로 물먹인 것에 열받았는지 2003년에 3기를 구입, 황금시간대에 방송해 복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3기는 막장이었던 터라 시청률은 오히려 저조, 얼마 못 가서 다른 시간대(월~금 오후 6시)로 옮겨버렸다. 그런데 원작자 경요가 이 사실을 듣고 빡쳐서 다시는 TVB에 자기 소설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절대로 안 팔겠다고 했다. 흠좀무. 그래도 최근엔 사이가 풀어진 모양인지 신 환주격격은 TVB에서 방송했다.

대한민국에는 경인방송을 통해 소개되었으며 지금도 일부 케이블TV에서 방송되고 있다. 방영시기인 1999년~2000년 무렵 팀의 체력을 책임지는 경인방송의 시청률을 책임지는 쓰리톱의 하나였다. 나머지 둘은 박찬호 선발등판경기와 ITV 스타리그.

주연은 조미. 캐릭터를 잘 살렸으며 본업이 배우인데도[3] 개그맨 해도 괜찮을 정도로 놀라운 몸개그와 개그연기를 선보였다. 본래 제비 역에는 조미가 아닌 이정의가 캐스팅이 되었는데 이정의가 다른 드라마 촬영 스케줄과 겹쳐 이 역을 포기하게 되고 쾌활하고 발랄한 이미지가 있는 조미에게 이 역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캐스팅이 변경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자미 역에 조미가 내정되어 있었고, 새아공주 역에는 임심여가 내정되어 있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충격과 공포... 나름 잘 소화해냈을 수도 있겠지만 자미=임심여라는 공식이 뇌리에 박힌 현재의 팬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외에도 임심여, 소유붕, 판빙빙(범빙빙) 등이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다.

대만 작가 경요의 작품이다보니 대만 출신 배우들이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중국 본토와 대만의 발음이 상당히 다르다 보니 대만 배우들의 목소리는 더빙되었다. 오왕자(소유붕)와 자미(임심여), 복이태(진지붕)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이 때문. 반면 조미는 상해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꽤 좋은 보통화(중국의 표준어) 발음을 보여준다.[4]

황제의 딸 2는 황제의 딸에서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 위구르와의 국경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위구르 왕 아리화탁이 자신의 딸 함향을 건륭제에게 바치고 함향은 향비에 책봉된다. 그러나 정인이 있던 향비는 황제의 손길을 거부하고 그 과정에서 황실에서 구박덩어리인 제비와 자미 일행과 향비가 가까워지며 일어나게 되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건륭제 시기 이민족으로서 황제에게 진상된 '향비', 문자옥으로 부모를 잃은 소검 등 다양한 인물의 등장으로 정치적, 시대적 상황도 잘 드러냈다. 스케일도 더 커졌다.

황제의 딸 3은 경인방송에서 방송되었지만 출연 배우들도 이강 역 주걸을 제외하고는 다른 배우들로 바뀌었다. 게다가 오왕자가 태후의 강요로 후궁을 들이고 그 후궁이 오왕자의 아들을 낳은 뒤 오왕자의 정비인 제비를 모함해 위기에 빠뜨리고 전쟁터에 나간 이강이 적국의 공주에게 붙잡혀 돌아가지 못하는 등 답답한 스토리 전개로 시청자들에게 외면당했다.

사실 황제의 딸 2에서 등장한 향비의 이야기가 황제의 딸 3에서 이어져 나갈 계획이었으나 향비와 몽단 일행이 떠난 2기 후반에는 각본에 문제가 있었던건지 도망자 신세가 된 주인공 일행의 고생 일대기가 주로 그려졌다. 시청률은 하늘로 치솟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지만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극단적으로 흘러가는 캐릭터 묘사로 인해 원성이 자자했으며(특히 제비와 오왕자) 작품성으로는 1편보다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으며 열악한 촬영 환경으로 배우들이 엄청나게 고생한데다가 이미지 고착을 우려한 조미, 임심여, 소유붕, 범빙빙이 3기의 출연을 고사하면서 3기 제작은 난항에 빠진다. 또한 스토리의 주축이 되는 향비의 이야기는 향비 역의 배우 유단이 2기 촬영 이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3기에는 아예 출연하지 않는다. 여기서 2기의 제작은 98년이며 방영은 99년에 했다. 유단이 사망한 건 2000년으로 2기가 국내에서 방영된 시기였는데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향비가 갑자기 사망해서 내용이 막장이 되었다는 오해가 있다.

더군다나 2기까지 촬영 후 이강 역의 주걸과 조미, 소유붕, 임심여 등이 사이가 나빠졌으며 금쇄 역의 범빙빙 역시도 그다지 후속작에 열의를 보이지 않아 3기는 막장으로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

사이가 나쁜 데에는 주걸의 성격이 완벽주의라 다른 멤버들을 지치게 했다는 의견이 많다. 일부에서는 음해성 루머인지 주걸이 본인의 비중을 늘려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는 소문도 있다. 이 소문에 일리가 있는 것이 2기에서 이강의 비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걸은 2010년에 음주운전을 하고 버로우를 탄 후 뜬금없이 자신의 블로그에 황제의 딸에서 같이 작업한 대만 배우들(소유붕, 진지붕)을 욕하는 글을 올렸다가 대륙 스케일의 평생까임권을 얻었기 때문에(...) 촬영 도중 이들과 보이지 않는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기에서는 주걸과 소유붕의 가벼운 몸싸움은 있었다고 한다. 나날이 연기가 발전하는 것이 뚜렷하게 보이는 주걸에 비해 비록 더빙되어서 가려지긴 했지만 어색한 표현력이 눈에 띄게 보이는 소유붕을 비교해봤을 때 소유붕의 연기가 완벽주의자 주걸에게는 영 성에 차지 않았을 법도 하다(...) 더군다나 주걸은 연기를 전공한 영화학도이기도 하다. 훗날 소유붕은 인터뷰에서 이때 촬영장에서 대만 출신 배우라는 이유로 무시도 많이 당하여 맘고생을 심하게 했는지 눈물도 보이기도 했는데 주걸의 행동은 당시 대륙인들의 대만 출신 배우에 대한 우월의식도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임심여 역시 마찬가지로 초반에는 북경에 왔더니 난방도 되지 않는 조그마한 방에서 지내며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다 옛날 이야기라 임심여는 넷이서 10년 만에 만나서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블로그를 통해서 알리기도 했다.

범빙빙이 후속작에 별 열의가 없었던 것도 그녀의 비중이 자미의 하녀 수준으로 너무 낮았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다. 방영당시 공주의 하녀를 맡은 범빙빙이 공주들보다 더 예쁜 것 같다 라는 평가가 있었는데 결국 범빙빙은 톱스타가 되었다. 톱스타가 된 범빙빙이 비중이 낮은 금쇄 역에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황제의 딸 3 촬영 전 임심여는 스케줄 문제로 출연을 거절했고 소유붕은 다음 작품이 현대극이므로 3편에 출연하게 될 시 머리를 밀어야 하기 때문에(...) 거절, 조미는 말괄량이 이미지가 고착되는 것을 우려해서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직도 국내에서도 최고의 중드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명작이기도 하며 대륙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한창 인기 끌 무렵에는 사회적 파장도 엄청나서 시즌 1에서 제비가 황제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목을 매는 척 연기를 하는 장면을 본 아이가 그것을 따라 목을 매면서(...) 학부모들의 원성이 빗발치기도 했다.

이번에 '신 황제의 딸' 이라 하여 새로운 시리즈가 준비되고 있다. 2011년 춘절(음력설)에 방영. 국내에서의 관심은 많이 없지만 그래도 이름값이 있는지 국내 포탈에서도 검색해보면 스틸사진이 간간히 뜬다.

이 드라마가 중국에서 전무후무한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이 드라마의 대본을 대만 최고의 연애소설 작가이자 대만의 김수현 작가라 불리는 경요가 제작했기 때문이다. 중국 본토에서도 경요의 소설은 엄청난 인기를 끌어 대만과 중국의 화해 모드 조성에 일조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이다.

당연하지만 내용은 허구다. 실존 인물들도 등장하긴 하지만 내용의 주축이 되는 환주공주 제비, 명주공주 자미, 복씨 형제는 허구 인물이다. 예전만 해도 포털 사이트에 건륭제의 딸 환주공주가 진짜로 집을 나갔냐는 질문이 올라오기도 했는데 이 글을 보고 있는 똑똑한 위키러들은 그러지 말자(...) 두 평민 공주는 경요가 어느 지방을 여행갔다가 그 지방에 전해내려오는 건륭제와 공주묘에 대한 전설을 듣고 창작한 것이다.

배경이 나라 시대라서 등장한 남성들은 변발로 분장했는데 머리를 삭발하고 뒤에 변발을 붙였다고 전해진다.[5] 얼마나 빡빡 밀었는지 머리에 광이 날 정도(...) 하지만 이건 주연급이나 일부 조연급 인물만 그렇고 엑스트라들을 보면 다들 변발을 하기는 했는데 머리에 항상 모자 같은 걸 쓰고 있다. 중국 남자 배우들은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찍을 때 각오를 해야 한다 다만 소유붕은 인터뷰에서 항상 이렇게 머리를 빡빡 밀었던 것 때문에 남자 배우들이 두피에 상처가 생기는 등 무진장 고생을 했다고 한다.

또한 촬영 기간에는 배우들이 하루에 2시간만 수면을 취했을 정도로 강행군이었고, 2기는 겨울에 걸쳐 제작되어서 배우들이 감기로 고생하기도 했다. 또한 패옥이나 귀걸이 같은 장신구는 제작비 문제로 인해 일부는 플라스틱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제비 역을 맡은 조미는 이 플라스틱 귀걸이를 꼈다가 알레르기가 생겨서 고생하기도 했다.

2014년 기사에 따르면 이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 북한에서 이 드라마를 본 사람을 매우 엄벌에 처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어지간히 찔리는 부분이 있었던 듯.

천조국에선 쇼맨십 넘치는, 붉은 머리의 키 큰 남자와 그 파트너에게 더빙을 맡기는 실수가 있었다.

2016년에는 애니화가 발표되었다. 중국의 알리바바픽쳐스가 제작하며, 조미가 감독으로 참여한다.

2 등장인물

  1. 첨부된 사진은 황제의 딸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포스터. 사실 이 포스터는 시즌 2때의 포스터이지만 시즌1과 등장인물이 동일하다.
  2. 영국 ITV의 인기 프로그램인 후 원트 투 비 어 밀리어네어(Who Wants to Be a Millionaire?)의 라이센스를 얻어와서 제작, 방송한 프로그램. 한국에도 tvN에서 2013년에 밀리어네어의 판권을 구입해 퀴즈쇼 밀리어네어라는 이름으로 제작, 방송했다.
  3. 당시 조미가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고 나중에 본인의 정식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지만 본업이 가수는 아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조미는 공식석상에서 이 주제가를 절대 부르지 않는다.
  4. 1기때 조미가 보여준 산동 사투리 연기는 발군. 만두가 있어요! 따끈한 만두가 있어요!
  5. 그런데 황제의 딸에서 보여준 변발은 음양두라고 해서 앞머리는 밀고 뒷머리를 땋은 것인데 건륭제 시대의 변발과는 맞지 않다. 실제 당대에는 금전서미라는 뒷꽁지 하나만 남긴 변발을 했다. 실제로 건륭제 시기 때 음양두를 하고 다녔다면 목이 벌써 뎅겅 날아갔을 것이다. 아무래도 비주얼 상의 문제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