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 07. 01. ~ 1716. 11. 14.


합리적인 영혼과 마음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다.
그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성 중 한명이었지만 그의 사람됨됨이는 존경할 만한 수준이 못되었다. - 버트런드 러셀
그는 자신의 위대한 수학적 재능을 하찮은 분야에 쓸모없이 탕진해 버렸다. - 가우스
우리의 재능을 라이프니츠와 비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저서들을 집어 던지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죽을 수 밖에 없다. - 드니 디드로

1 개요

독일 출신의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법률가, 정치가, 언어학자, 역사가, 종교학자, 연금술사, 수학하는 놈, 미적분을 발명한 희대의 악마[1] 단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순수한 학문과 실용적인 학문 모두에 능통했던 전무후무한 엄친아 철학자. 이 능력들은 라이프니츠 안에 탁월한 방식으로 존재했다.

가장 유명한 업적은 아이작 뉴턴과 동시대에 미적분 이론을 발명한 것. 이것으로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2] 뭔가 디스글만 적혀있는데 미분 논쟁에선 사실 라이프니츠도 할 말이 많다.[3][4] 또 한가지 중요한 업적으로 이진법을 발명하였고, 이를 토대로 최초의 기계식 사칙연산 계산기를 발명했다.[5] 현대 컴퓨터 이론의 시초인 셈.

종교학자와 철학자로써 중요한 업적은 단자론이다. 단자론의 주요 내용은 먼저 근본이 되는 실체인 단자가 무엇이며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를 설명하고, 이 단자들 중에 이성을 가진 단자인 정신이 가지고 있는 진리와 인식의 원리를 규명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신 존재 증명를 증명하는것이다. 이거와 비슷하게 스스로 물리학 이론도 하나 만든다. 라이프니츠는 힘을 근원력과 파생력으로 나누었는데, 근원력은 단자의 목적이고, 파생력은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6] 이 파생력이 우리가 흔히 느끼는 힘이며, 코나투스라고 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변신론인데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완벽하지 않는다라는 주장과 신이 왜 인간을 이따구로 만들었냐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결국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선택하고 욕망대로 선택하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인간의 선택에 악은 부가적으로 따라오게 되는것이며 악이 단순히 나쁜것만이 아니라 뒤에 따라오는 행복과 선을 조금더 극대화 시켜주는 역할까지 한다는것이다. 유한한 존재에게는 아무리 선을 행하려 한다 해도 그 선 때문에 누군가 피해 보거나 고통받는 악이 뒤따르게 된다는것이다 결과적으로 악도 하나의 선을 실행할수 있는 방편이며 결국 선이 존재하기에 악이 존재할수 있으며 그렇기에 악은 결국 신의 의지에 반하는것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이것때문에 볼테르가 싫어했다라고 한다.(더 자세히 아시거나 추가하실 내용있으시면 추가해주세요.) 이 사람의 낙관주의를 디스하기위해서 작성한 소설이 다름아닌 캉디드.

2 일생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으며, 1661년에 라이프치히 법과 대학에 입학했으며, 1663년에 예나대학에서 수학 강의를 들었다.

1666년에 법과 대학을 졸업하고 학위를 신청했으나 나이가 어려 거절당하고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대학 측에서 그를 위해 마련한 교수직을 사퇴하고, 뉘른베르크의 연금술 사회의 비서직으로 일했다. 이것이 첫 직업이었다.

그리고 그 해에 마인츠의 정치인 보이네부르크를 만나 법률고문이 되었다. 이후 항소법원의 배석판사로 승진하여 외교활동을 하였다.

1676년, 브라운슈바이크 공 요한 프리드리히에게 초청되어, 하노버의 궁중고문, 도서관장이 되어 이 곳에서 활동했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가 곧 하노버 공가를 죽 섬겼다. 족보 연구를 통해 하노버 공이 선제후가 될 수 있게 해주었고 그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하노버 공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영국 왕 조지 1세가 되면서 라이프니츠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영락했다. 뉴턴과 싸운 라이프니츠를 조지 1세가 영국에 데려갈 수가 없었던 것. 지못미.
  1. 근데 이건 오히려 학생들에게 도움..을 준것이다. 적분이란게 그래프의 넓이나 부피등을 구하는데 사용하는 개념인데, 적분을 사용한다면 공식만 알고있다면 쉽게 풀리지만, 적분이 없다면 극한으로 구간을 무한대로 나누어 시그마로 직사각형들의 넓이의 합을 구하는.. 대 장정을 거쳐야 한다.
  2. 원래는 뉴턴이 먼저 만들었고 나중에 라이프니츠가 만들었지만 뉴턴은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라 책상에 넣어두며 학회에 발표도 안 했고 처음 라이프니츠의 미적분 발표에도 관심이 없었다. 반면 활발한 성격의 라이프니츠는 미적분발명을 하자마자 바로 독일 학회에 발표하였다. 하지만 뉴턴 밑에서 공부하던 제자들이 영국학회에 이의를 제기했고, 당시 세계의 과학을 주름잡는다고 생각했던 영국학회는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이론을 배꼈다라고 독일학회에 항의하였다. 결국 나중에 국제 소송에선 영국과 독일의 과학자들의 힘겨루기처럼 커졌는데, 이것은 곧 단순히 누가 이론을 발명했는지 진실을 가리는것이 아닌 각 국가의 과학의 선두주자가 누구냐에 목매달만한 사건이였다.
  3. 미적분을 먼저 발명한건 뉴턴이지만, 현재 전 세계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미적분의 기호나 이론은 모두 라이프니츠가 만든 체계를 쓰고있다. 결국 미적분의 실용화에 가장 기여한자가 바로 라이프니츠이다.
  4. '그럼 뉴턴은 왜 미적분 실용화에 기여 못했나' 라고하면 당시 뉴턴이 만든 미적분의 기호는 배우기에 너무 까다롭고 오직 뉴턴만 알수있는 복잡한 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뉴턴 성격자체가 너무 내성적이라 일일이 학자들이 미적분에 궁금해하는 편지에 아무런 답장이나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5. 이전 버전에서는 "주역의 괘를 보고 이진법을 창안해 내었"다고 적었으나, 라이프니츠가 이진법을 고안한 것은 1696년으로 추정되며, 이진법을 소개하는 라이프니츠의 글은 1697년 신년맞이 연하장에서부터 나타난다. 라이프니츠가 주역에 대해 알게된 것은 강희제의 개인비서였던 선교사 부베가 1700년 11월 말에 작성한 편지를 통해서이다. 즉, 당시의 우편절차를 생각하면 1701년이 넘어서야 주역의 존재를 알게된 셈.
  6. 홍성욱 외 17인,'과학철학',창비,2011,1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