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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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1]
Hanover
하노버 시의 문장
국가독일
니더작센
시간대UTC+1 (서머타임 준수)
한국과의 시차-7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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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의 위치 독일의 심장[2]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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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북부의 도시. 라이네 강(die Leine) 중류에 위치한 니더작센의 주도이다.

1241년에 시로 승격된 하노버는 1815년부터 1866년까지 하노버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그 전까지 이 지역 중심이던 브라운슈바이크와는 그 이후로 라이벌이 되었다.[3] 이는 현대 영국의 왕가인 윈저 가문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들의 시조인 조지 1세가 바로 하노버의 선제후 출신이었기 때문.

하노버는 제조업의 중심지로 사무용품, 기계류, 자동차 등등을 생산하며 해마다 산업박람회도 개최한다. 또한 철도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며,[4] 미텔란트운하가 이 도시를 가로질러 흐른다.

14세기에 건설된 고딕양식의 마르크트 교회와 15세기에 건설된 옛 시청을 비롯해 역사 깊은 건물들이 많다. 17세기에 만들어진 헤렌하우젠 궁전의 정원이 매우 아름다우니 방문할 일이 있는 위키러들은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2 역사

중세 시기 한적한 어촌이었다가, 라인강의 수운을 이용하면서 브레멘, 함부르크한자동맹 소속 도시 국가들의 무역을 독일 남부 지방과 이어주는 거점으로 이용되면서 도시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됐다. 이후 니더작센 지역에서 나오는 풍부한 을 바탕으로 더더욱 번성하였고, 17세기 중반에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이 이 곳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절정기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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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렌하우젠 궁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이후 17세기 후반에 선제후로 지위가 상승되었고 그에 따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도 브라운슈바이크 선제후국으로 격상되었다. 브라운슈바이크 선제후국이 정식명칭이지만 보통은 하노버가 도읍이었기에 하노버 선제후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 그리고 1714년에는 조지 1세가 영국의 왕으로 추대되면서 영국과 동군연합을 이룬다. 이것이 오늘날 윈저 왕가로 이어지는 하노버 왕조의 시작.[5] 이후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하고 이 곳의 관리들은 하노버 선제후가 아니라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강요당하는 상황이었지만 의지의 하노버 선제후이자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끝까지 영국 군대를 파견해서 나폴레옹과 맞서싸웠다. 그리고 이러한 기여를 인정받아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열린 빈 회의를 통해 하노버는 선제후국에서 왕국으로 지위가 상승했으며, 영토 역시 라인강까지 확장됐다.

이후로도 영국과 동군연합을 계속했지만 1837년 윌리엄 4세의 사망으로 동군연합이 끝났다. 영국은 왕위계승률에 따라 윌리엄 4세의 조카인 빅토리아 여왕[6]이 계승했다. 하지만 하노버에서는 여성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이 있어서 조지 3세의 다섯째 아들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를 새 임금을 추대하면서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지속된 동군연합은 종료된다. 사실 영국 정치권이 하노버를 영국의 이익에 필수적인 지역으로 여겼다면 이렇게 동군연합이 끝나든 말든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정치권은 유럽 대륙에 깊숙이 발을 들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역대 국왕들의 소망과 달리 죽 하노버 문제에 큰 관심을 안 가졌다. 따라서 영국에 여왕이 즉위하면 동군연합이 해체되는 건 불가피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영국 정치권이 하노버를 중시했다면 하노버가 계속 영국의 영향권 안에 묶어 둘 수 있게 뭔가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정치권은 하노버에 큰 관심이 없어서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동군연합이 종료되고 말았다. 만약 영국이 하노버를 세력권 안에 묶어 두기 위해 노력했다면 유럽과 세계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동군연합이 해체된 뒤 하노버 왕국은 보오전쟁 당시 줄을 잘못섰다가 망했어요. 하노버 왕국은 멸망하고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지역으로 합병되어 독일 제2제국의 일부가 된다. 이후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공업화가 이루어져 19세기 후반 이후로는 독일 내 주요한 공업 중심도시 중의 하나가 됐다.

한편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연합이 깨진 뒤에도 두 나라 간의 유대 관계는 어느 정도 이어졌었다. 하노버 국왕은 영국 내에서 공작을 겸했고, 하노버 왕국이 멸망하자 국왕을 비롯한 하노버의 왕족들은 친척들이 사는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동군연합이 깨지고 하노버 왕국이 멸망한 뒤에도 영국은 한참 동안 하노버 왕가가 군림했다(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는 1901년까지). 그런데 마지막 하노버 왕 게오르크(조지) 5세의 아들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독일 황제에게 빌붙어 독일제국 아래에서 하노버의 지배권을 회복하려고 시도하였고, 결국 1913년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으로서 복위하였다. (이 사람은 빌헬름 2세의 사위이기도 했다.) 독일 제후가 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당연히 독일 편을 들었다가 영국 내 컴벌랜드 공작 작위를 박탈당했다.[7] 그리고 독일이 패전국이 되자 망했어요. 어째 계속 줄을 잘못 서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다

하노버는 공업 도시라는 특징상 2차 대전 기간 동안에 석기 매니아도살자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100회에 가까운 공습을 받게 된다. 종전 후에는 영국군의 점령 지역이 되었고 영국군은 하노버를 중심으로 하는 '하노버 주'를 이 일대에 신설하려고 했지만, 본래 하노버 왕국의 소속이 아니었던 지역(올덴부르크, 브라운슈바이크)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친 듯. 이를 둘러싼 토론 끝에 니더작센으로 주 이름이 결정되었고 하노버는 이 주의 새로운 주도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여담

  • 2000년 하노버 엑스포를 개최하기도 했다. 나름 인상적이긴 했는데 경제적으로 성공한편은 아니다. 그래도 스콜피온스가 부른 주제곡인 Moment of glory는 꽤 유명하다. 주차장을 포함하면 1,000,000 제곱미터. 전시 가능한 총면적 496,000 제곱미터라는 우월한 박람회장 크기로 인해 박람회로도 상당히 유명한 동네인데 이 중 가장 유명한건 단연 컴퓨터 박람회인 세빗이 있다.
  • 스콜피온스가 처음으로 밴드 활동을 시작한 동네이다. 사실 중심 멤버인 루돌프 쉥커부터 하노버 근처에 있는 중소도시인 힐데스하임 출신이다. 리드보컬인 클라우스 마이네는 아예 하노버 출신이다.
  • 독일어라는 언어의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는 도시인데, 하노버 방언은 적어도 음운면에서는 표준 독일어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8]
  1. 현지 발음으로는 하노퍼에 가깝다. 독일어 v는 /f/로 발음하기 때문.
  2. 알다시피, 2차대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작센 일대가 독일의 심장이었지만 전쟁에서 져서 다 날려먹은 바람에
  3. 멀쩡한 자기들 이름 놔두고 지금도 서로 동부파이네니 서부파이네니 깎아내리는 호칭으로 부른다. 참고로 파이네는 두 도시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름.
  4.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를 잇는 남북선과 루어지방과 베를린을 잇는 동서 선이 교차하는 지점. 하노버를 기차 타고 가본사람을 알꺼다. 하노버 시내는 사람이 별로 안붐벼도 하노버 중앙역 내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환승객이 엄청 많다.
  5. 특히나 독일 태생이었던 조지 1세와 조지 2세는 영국의 통치보다 독일 내 정치 상황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서 영국민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독일에서 나고 자라 성인이 되서야 영국으로 갔으니 본인들의 정체성이 독일인에 가깝기도 했고.
  6. 윌리엄 4세는 조지 3세의 셋째 아들인데 사생아밖에 없어서 조카한테 왕위가 넘어갔다. 빅토리아의 아버지는 조지 3세의 넷째 아들인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인데, 그는 윌리엄 4세보다 먼저 세상을 떠서 즉위하지 못하고 어린 빅토리아가 즉위하게 되었다.
  7. 당시 영국과 독일 양국에 발을 걸친 귀족이 여럿 있었는데 전쟁이 터지자 양자택일을 강요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한 쪽의 작위를 박탈당하는 귀족들이 여럿 있었다.
  8. 단 하노버가 위치한 니더작센주 자체는 저지독일어권(Platt)에 속한다. 물론 저지독일어 자체가 거의 사어에 가깝다 보니 들을 일이 별로 없긴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