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영국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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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1세의 대관식 초상화, 고드프리 넬러 경, 1714년 | ||
왕호 |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왕 (King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 |
이름 | 영어 | 조지 루이스(George Louis) |
독일어 | 게오르크 루드비히(Georg Ludwig) | |
생몰년도 | 1660년 5월 28일 ~1727년 6월 11일(67년 14일) | |
출생지 | 독일 하노버 | |
사망지 | 영국 런던 버킹엄 궁전 | |
재위기간 (영국의 왕) | 1714년 8월 1일 ~ 1727년 6월 11일(12년 10개월 21일) | |
재위기간 (하노버의 제후) | 1698년 1월 23일 ~ 1727년 6월 11일(29년 4개월 19일) | |
대관식 | 1714년 10월 20일 | |
장례식 | 1727년 8월 4일 |
1 개요
하노버 왕국의 군주(게오르크 1세)이자 영국의 국왕(조지 1세). 영국 하노버 왕조의 시조. 모계혈통을 통해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와 이어지며, 이에 따라 왕위 계승법이 만들어진 이후 영국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원래 앤 여왕 사후 후사가 없으면 제임스 1세의 외손녀 소피아 내지는 그녀의 상속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있었으나 소피아가 앤 여왕이 죽기 불과 2개월 전에 죽는 바람에 그녀의 아들인 조지 1세가 영국 왕위를 계승한다.
2 생애
2.1 하노버 왕국 군주
하노버의 군주, 선제후. 하노버는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여러 영방국가 중 하나였다. 독일의 여러 영방국가들의 군주는 기본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이기 때문에 제후라 불리웠지만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독립국가의 군주로 인정받았고 외교적으로도 각국의 국왕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선제후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여러 전쟁에 직접 참여했다. 대 투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빈 전투에서 싸우기도 했다. 선제후 즉위 후에는 군을 이끌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영국군과 동맹하여 참전했다. 이때 오스트리아의 장군 프린츠 오이겐(사부아 공자 외젠), 영국의 말보로 공작 존 처칠과 안면이 있었다. 존 처칠이 전쟁에서 져서 위태롭게 되자 여러차례 신뢰의 편지를 보내 존 처칠의 지위를 지키려 했으며, 결국 존 처칠이 실각하고 영국이 전쟁에서 손을 떼자 심히 분개하였다.
2.2 영국 왕
1714년 6월 8일 앤 여왕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법에 따라 영국 왕으로 추대되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다.[1]
영국왕임에도 조지 1세는 영어에는 서툴렀지만 모국어인 독일어 이외에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다. 조지 1세는 주로 프랑스어를 이용해서 장관들과 소통했으나, 영국의 국내정치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보수당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휘그당과 로버트 월폴 등의 정치가에게 영국의 정치를 맡겼다. 애초에 영국에 머물렀던 시기가 별로 길지 않았고, 영국보다 고향인 하노버에 머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조지 1세는 유럽 대륙의 이권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대북방전쟁에서 반 스웨덴 측에 참가하여 스웨덴으로부터 브레멘 등을 할양받아 하노버 선제후국은 북해로의 출구를 확보하게 된다.
3 평가
결론적으로는 영국 국왕은 자리만 맡아줬을 뿐, 영국의 왕이라기보단 하노버의 군주였다. 조지 1세 본인에게는 자기 나라가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연합이 아니라 하노버와 영국의 동군연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국사 관점에서 조지 1세를 순 허당으로 묘사하는 역사 만화도 있으며, 국내 역덕후들에게도 '영어도 못하는 영국왕' 정도로 취급돼서 순 허당 취급 받는 편이다.
하지만 영국의 국내 정치에 비교적 무관심 했던 것 뿐이며, 하노버 공국의 군주로서 게오르크 1세는 명민함과 군사적 용맹함을 아울러 갖춘 뛰어난 군주였다. 게오르크 1세는 여러 전쟁에 참여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특히 숙원이었던 브레멘의 합병과 북해로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독일 내의 영방국가 중 하나였던 하노버 왕국의 역사보다야 영국의 역사가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잘 알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상 '영어를 못한다'는 점이 인물 평가를 낮추는데 매우 크게 작용하는 셈인데, 영국 왕이면서 영어를 못하는게 좀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군주로서의 업적은 그렇게 낮게 평가할 만한 인물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영어제일주의의 희생자.(...) 실제로 당시 상류층의 기본 소양이 프랑스어였기 때문에 신하들과 프랑스어로 대화하면서 의사소통에 별 지장이 없었다....
영국에서는 의회에 나는 것을 싫어하여 위임한 것이었다. 사실 의회에 나가봤자 영어로 진행되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든 노릇이다. 궁정에 신하들이 출근해서 딸랑이질을 하는 독일 왕정식 통치 방법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직접 의회로 행차해서 신하들을 만나러 가는 이상한 제도(?)를 가진 나라에 왕이 되어 50평생 안 하던 짓을 하려니 그랬던 것이다. 하노버에서는 절대군주로서 국가 중대사를 모두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영국 국왕은 항상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했기 때문에 이런 이상한 제도(?)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영국 통치에 흥미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영국이 바다로 둘어싸여 있어 외침의 우려가 거의 없었던 반면에 내륙국인 하노버 공국은 유럽 대륙 복판에서 여러 나라에 둘러싸여 있어서 수시로 영토 전쟁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당시 군사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호전적인 프로이센 왕국과 동쪽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하노버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상황이었다. 프로이센은 경제적으로 발달한 서북 독일로 진출을 노리고 있었으며 때문에 이에 하노버 공국을 끊임없이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게오르크 1세의 군사적 진출은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지속된 하노버 왕국 영토의 근간을 확립했다.
4 가족 관계
가족관계가 엉망이었다. 왕비가 신분이 쳐지는 터라 계속 미워하다가 하노버의 어떤 성에 유폐했고, 조지 1세 본인이 영국왕이 된 뒤에도 왕비는 영국 구경도 못했다. 어머니를 박대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하는 황태자(후의 조지 2세)와도 사이가 나빴고, 애인들에게 보석을 선물하느라 왕실의 보물을 탕진하여 정작 조지2세의 대관식에서는 조지 2세의 왕비는 보석이 없어서 빌려다 써야 했다고 한다. 이 사람의 딸중에 조피 도로테아가 있는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결혼했고 자식중에 프리드리히 대왕이 있다. 딸도 어머니처럼 남편탓에 결혼생활이 매우 안좋았다.
5 트리비아
- 영국 영사상 최악의 주식사태인 남해거품사건이 이시기에 일어났다. 로버트 월폴이 어찌어찌 사태를 무마 시켰고, 세계 최초의 공인회계사와 회계감사의 개념이 영국에서 탄생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 조지 프레드릭 헨델과의 묘한 인연이 있다. 헨델은 본래 하노버 왕실의 악장 직을 하고 있었다. 조지 1세의 허락을 받아서 영국에 간 뒤 크게 성공한 뒤 하노버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영국에 귀화해 버렸다. 그런데 조지 1세가 영국 국왕에 즉위하게 된 것.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헨델은 궁리 끝에 유명한 '수상음악'을 작곡해서 조지 1세가 뱃놀이를 할 때 수상음악을 연주했다. 헨델에겐 다행히 음악에 만족한 조지 1세는 헨델에게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헨델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 선대부터 하노버 공가를 섬겨 온 라이프니츠에겐 조지 1세의 영국 왕 즉위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재앙이었다. 영국의 우상 뉴턴과 싸운 라이프니츠를 영국 왕이 고용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라이프니츠는 하노버 왕가에서 해고된 후 마침 나이도 많았는지라 불우하게 인생을 마감했다.
- ↑ 앤 여왕은 자녀가 있었으나 거의 모두 사산되거나 유산되었다. 살아남은 아들 윌리엄도 1700년 11세의 나이에 죽었다. 유산아나 사산아까지 합치면 무려 17명. 앤 여왕과 조지 1세는 6촌 지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