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항

1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마지막 황제 유주(幼主) 고항(高恆)

북제의 역대 황제
5대 후주 고위6대 유주 고항북주 무제 우문옹
묘호-
시호유주(幼主)
연호승광(承光, 577년)
고(高)
항(恒)
재위기간577년
생몰기간570년 ~ 577년

570년 고위와 목씨(穆氏)[1]장남으로 업(鄴)에서 태어났으며 그 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577년 고위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즉위했으나, 나이가 어려 태상황 고위가 사실상 통치하고 있었고 더구나 이미 북주 무제 우문옹의 병력이 수도 업에 다가오고 있어서 나라는 거의 망한 상황이었다. 태황태후 호씨(胡氏)와 황태후 목씨가 먼저 제주(齊州)로 피신하고 이어서 고항은 제주로 도망가자 마지막으로 고위가 수도 업을 버리고 피신하였다. 임성왕 고개(高湝)에게 제위를 양위를 하려고 곡률효경(斛律孝卿)에게 양위 문서와 옥새를 가지고 영주(瀛州)에 보냈으나, 곡률효경은 북주에 항복하였다.

고항은 고위나 태후 목씨와 함께 청주로 피신할 때 신하들이 수십명만이 따를 뿐이었다. 청주의 남등촌(南鄧村)에서 결국 북주의 장군 울지근(尉遅勤)에게 사로잡혀서 업으로 호송된 후 북주의 수도 장안으로 끌려갔다. 578년 목제파(穆提婆)가 반란을 꾀했다는 일로 처형되자 이 일로 연좌되어 다른 고씨 일족들과 함께 멸족되었다. 580년 양휴지와 진득신이 북주의 권력자인 양견에게 고항의 장례를 치를 것을 조언을 하였고 받아들어져 장안 북쪽에 묻혔다.

2 高閌

1097 ~ 1153

남송 명주(明州) 은현(鄞縣) 사람으로 는 억숭(抑崇)이고 학자들은 식재선생(息齋先生)으로 불렀다. 시호는 헌민(憲敏)으로 고종(高宗) 소흥(紹興) 원년(1131) 진사(進士)가 되어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에 오르고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옮겼다. 당시 태학(太學)이 생기자 경술(經術)을 중심으로 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송의 학제(學制)는 대개 그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었다.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임명되었는데 진회(秦檜)가 그를 의심해 탄핵을 받아 균주지주(筠州知州)로 쫓겨났지만 나가지 않았다. 어려서 정이(程頤)의 학문을 종주로 했으며 뒤에 양시(楊時)에게 배웠다. 『춘추』를 정밀히 연구하여『춘추집주(春秋集注)』를 저술했다.
  1. 이름은 목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