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波賊
1 소개
후한 말기의 도적집단으로 황건적의 잔당인 곽태가 중심이 되었고, 백파적이란 이름은 병주 하서군의 백파곡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188년 2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 북으로는 병주 태원군, 남으로는 사예주 하동군까지 약탈을 일삼았다. 마침 고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중국에 머무르고 있던 남흉노의 선우 어부라가 이에 가세하여 상황이 심각해졌지만, 영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당시 서쪽에는 한수가 북쪽에서는 장거,장순이 제각기 10만이 넘는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나는 판이라 황건적 패잔병과 오랑캐 망명객의 반란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이듬해 한수의 난과 장거,장순이 난이 진압되자마자 영제가 사망했기 때문에 백파적은 계속 방치되었다.
한편 영제 사후 정권을 잡은 동탁은 189년 10월에 우보를 보내 백파적을 토벌하게 했으나 패했고, 3개월 뒤인 190년 정월에 반동탁연합군이 일어난데다, 동탁이 아예 사예지역을 버리고 장안으로 천도해버렸기에 이후 백파적은 사실상 무정부상태가 되어버린 사예지역에서 활개를 쳤다.
195년, 헌제가 장안에서 달아났을때 헌제는 이각,곽사에게 맞서기 위해 마침 인접해 있던 백파적을 대대적으로 회유해 원군으로 삼았다. 헌제는 이들의 조력으로 이각,곽사의 추격에게서 벗어나는데는 성공했으나 이후 헌제와 백파적이 대립하는 한편 백파적 두령들끼리도 제각기 대립하는 등, 내부 분열이 극심했으며 이 사이 조조가 난입하면서 백파적들은 조조와 싸운 끝에 패하고 흩어진다.
백파적들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내던 한섬,양봉 등은 조조에게 패한 뒤 원술에게 합류했고, 중원에서 활동하다 죽었다. 한편 백파적 일부는 사예지역에 남아있거나 혹은 조조와의 권력다툼에서 패한 뒤 사예지역으로 돌아갔으나 이후 조조의 권역이 확대되면서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규모나 활동반경, 영제의 대처방식[1] 등으로 봤을때 흑산적보다는 한참 아래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이나, 장안을 탈출한 헌제가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관직을 덤핑으로 뿌렸기에 백파적 두령들의 작위는 어마어마했고, 흑산적이 원소에게 패한 반면, 백파적은 조조에게 패했기 때문(...)인지 흑산적에 비하면 기록도 많이 남은 편. 이런 점에 더해 난세를 틈타 자생적으로 나타난 성향이 컸던 흑산적과 달리 백파적은 나름대로 장각을 시조로 두는 배경까지 더해졌기 때문인지 훗날 중국에서는 도적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2 관련 인물
- ↑ 정황상 백파적은 당장 치기가 어려워 진압을 유보했던 수준이지만, 흑산적은 답이 없음을 인정하고 벼슬로 회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