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木
날실과 씨실을 무명실로 짠 무명천의 일종.
흡습성과 보온성이 있고 튼튼하여 가격이 저렴한 편이었지만 본 바탕이 누래지는 현상이 있고 광택이 없어서 구겨지기가 쉬운 단점이 있다.
생광목은 표백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누른빛을 띄고 있는데 옷감보다는 주로 돛, 무명부대, 장터 등에서 사용하였고 옷감의 경우 비누소다를 첨가한 액체로 표백하여 바탕을 하얗게 처리한 후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동아일보의 사주이자 경성방직의 지주로 있었던 인촌 김성수가 중앙학교(지금의 서울 중앙 중고등학교)에 있던 시절 중앙학교 학생들의 교복이 일본산 광목재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함양시키기 위해 일본산 광목 대신 조선산 무명으로 교복재질을 바꾸라는 권고를 내렸던 적이 있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인촌이 오히려 이상해진 것도 모자라 투박하기 짝이 없는 천쪼가리인 무명으로 만든 교복을 학생들에게 입혀서 뭐하겠냐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하기를 조선사람이 조선의 무명을 이용하지 않으면 누가 이용하겠는가. 왜놈들이 그 따위 조선놈이 만든 투박하고 보잘것도 없는 무명 따위를 이용할리가 있겠느냐. 나는 학생들에게 교복의 재질을 무명으로 바꾸면서 조선에 대한 애국심을 키울 것이다라고 얘기하였다[1].
1920년대에 들어서 인촌 김성수는 경성방직 지주명의로 일본산 광목과 경쟁하기 위해서 조선산 광목의 활성화를 모색하고 있었는데 이 때 조선산 광목에 들어갈 상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느끼면서 태극기를 본따 태극기의 4괘 대신 조선 8도를 상징한다는 검정별 8개에 태극을 'S' 자로 변형시켰다는 '태극성(太極星)' 이라는 상표를 만들어 일본 현지 특허국의 허가하에 조선산 태극성 광목 판매를 시작하였다. 물산장려운동에 대해 학교에서 배우게 되면 바로 떠오르게 되는 바로 그 자쓰가리우것든만가리 짤방광고가 이 태극성 광목의 신문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