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든 것 우리가 쓰자[1] [2]
민립대학설립운동과 함께 1920년대 민족주의자들의 대표적인 실력 양성 운동.
1 진행
3.1 운동을 겪은 1920년대, 일제는 기존의 강권 통치(무단 통치)[3]만으로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방향을 바꾸어 유화책과 회유책을 통해 식민지를 지배하기를 원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 불황을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를 본격적으로 활용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대에는 회사령의 규정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회사의 설립이 쉬워지자, 자본력이 우월했던 일본 기업들이 조선으로 진출하려 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조선 내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물산 장려 운동이 시작되었다. 1922년을 즈음해서 일본이 관세를 철폐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운동은 조선 물산 장려회를 중심으로 본격화되었고, 자작회나 부인회 등이 참여하였다.
운동 내용은 4글자로 요약하면 신토불이 되겠다. ‘조선 사람 조선 것’, ‘우리 것으로 살자’ 등의 슬로건을 내세웠으며, 조선 사람은 일본 등 타국의 물건 대신 조선 사람이 만든 물건을 쓰자는 운동이다. 평양에서 조만식 등의 조선 내 자본가들이 주도하여 시작되었으며, 서울에 지부가 설치된 뒤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한반도 내 언론사들도 공조해서 앞다투어 물산장려광고를 실었는데 이 자쓰가리우...가 바로 그런 광고들 중 하나로 오늘날 물산장려운동의 면모를 소개하는 예시로 쓰이면서 유명해졌다.
물산장려운동의 행동강령 3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 첫째, 의복은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
복장규제?[4] - 둘째, 우리 손으로 만든 토산품은 우리 것을 이용하여 쓴다.
-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상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을 써서 가급적 절약을 한다.
2 결과
물산 장려 운동의 사상적 도화수가 된 것이 누구인가? 저들의 사회적 지위로 보나 계급적 의식으로 보나 중산 계급임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적어도 중산 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대변인인 지식 계급, 또 솔선하여 물산 장려의 실행적 선봉이 된 것도 중산 계급이 아닌가.실상을 말하면 노동자에게는 이제 새삼스럽게 물산 장려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네는 벌써 오랜 옛날부터 훌륭한 물산 장려 계급이다. 그네는 자본가, 중산 계급이 양복이나 비단옷을 입는 반면 무명과 베옷을 입었고, 또 저들 자본가가 위스키나 브랜디나 정종을 마시는 반면 소주나 막걸리를 먹지 않았는가?
....(중략)....
이리하여 저들은 민족적, 애국적이라 하는 감상적 미사로서 눈물을 흘리며 저들과 이해가 전연 상반된 노동 계급의 후원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적으로 자각한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저들도 외래 자본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며, 따라서 저들의 전략에 빠져 계급 전선을 몽롱케는 못할 것이다.
ㅡ 이성태.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사회주의자가 본 물산장려운동>. 동아일보 1923.3.20
그러나 이 때 조선의 공업은 대부분 기계화되지 않은 수공업이었기 때문에 생산성과 공급력이 크게 떨어졌다. 그래서 물산장려운동 시작 이후에 수요만이 늘어나자 국산물품 자체가 가격이 폭등하였고, 결과적으로 국내 자본가와 상인만 이득을 보게 되었다. 때문에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은 "우리는 외국 사치품 같은 거 쓴 적 없는데 이 운동 때문에 오히려 국산품 값이 오른다??"라고 비판하였다. 이쪽 계열이 주장하기에는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 '우린 이미 물산장려파다' 정도인데. 전자의 경우에는 말 자체가 마르크스주의에서 나오던 말이다. 한마디로 일본인 자본이든 조선인 자본이든 농민 뜯어먹고 사는 부르주아라는 것. 그리고 후자는 그냥 국산 기업에 만든 고무신 신을 것 짚신 꼬아서 공짜로 신는 것과 같은 경우가 많았다는 거다. 이미 임노동의 재화는 소비되고 있다는 것.
당시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해 쌀값이 폭등해서 농민이 몰락하고 지주층이 흥하게 되는데, 이 지주층들 중 대다수가 일본인 아니면 친일파였다. 지주층이 산미증식계획으로 쌓아놓은 돈으로 회사를 세웠고, 관세가 철폐되고 경쟁이 심화되니까 조선인 기업이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운동을 벌인 것인데, 이 운동의 중추가 민족주의 계열이라지만 참가원중 대다수가 타협적 민족주의와 친일파[5]였고, 결국 1920년대 후반에는 민중의 외면을 받으면서 쇠퇴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민중들은 이미 국산품마저 살 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나마 이어진 명맥도 조선총독부의 간섭으로 인해 끊겨버렸다.
국가 혹은 민족의 부를 민중의 힘으로 살리자는 이 운동은 국채보상운동, 금모으기 운동이나 인도 제국의 스와데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파고 보면 지도층의 무능함으로 몰락한 뒤에 생긴 일이라는 점도 동일하다
부정적인 면이 많아 한계가 드러나는 독립운동이었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좌우합작운동의 영향으로, 조선물산장려회와 사회주의 청년단체 서울청년회와 결합하여 '조선민흥회'가 만들어졌고, 이 조선민흥회가 사회주의 단체장 모임인 '정우회'와 결합하여, 20년대 국내 독립운동 최대의 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된 뿌리가 되었다.
3 각종 패러디
항목 맨 위의 경방 광고 이미지는 근현대 국어 표현과 쓰여진 방향이 현대 한국어와는 반대로 쓰여져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인지 많이 패러디되었다. 물산장려운동의 배경은 몰라도 저 광고만은 아는 사람이 많다.
파일:Attachment/korea-k2.jpg
K2 자동소총. '우리가 쓰자'가 아니라 '우리가 쏘자'라는 차이점이 있다.깨알같은 게이둘
파일:Attachment/1839D9584E1E85D122EDB3.jpg
AVA로도 패러디되었다. 캐릭터는 목긴스나.
파일:Attachment/kor ani main.png
한애갤에서도 패러디 하였다. 캐릭터는 롤링스타즈의 수지.
마이 리틀 포니 투니버스 더빙 관련 패러디도 등장했다. 한국말
- ↑ 경성방직주식회사의 광고로,
한국 애국 마케팅의 시초격이자물산장려운동을 대표하는 광고. 이와 함께 ‘今日부터 實行’이 쓰인 신문 기사도 자주 보이는 사료 중 하나. - ↑ 당시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었다
- ↑ 그 예로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치안을 담당하던건 일본 헌병, 즉 군인이였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방침 변화로 헌병 대신 치안을 담당할 경찰 조직이 신설되었다.
인력을 3배나 증가했던 건 함정 - ↑ 다만 강화도 조약을 필두로 개항이 시작된 이후, 그동안 무명옷으로도 만족했던 사람들이 일본이나 청나라에서 온 수입품에 혹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사치를 부리긴 했다.
- ↑ 멀리 갈 것 없이 이 운동을 주도한 것이 김성수의 경성방직, 약칭 경방의 초대 사장이 대표적 친일파 박영효이다.